예로부터 한민족의 민족성은 고성방가, 음주가무를 큰 특징으로 한다. 일본에는 이런 문화가 거의 없고, 중국 남방에도 별로 없는데 중국 북방, 만주, 몽골 등지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이 발견된다. 이를 일컬어 우뇌 우세 지역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감정이 지나쳐 세밀함이 떨어진다.
이러한 성격이 언어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이 잘 들어 있지 못하다. 그래서 열 명이 죽으면 열 명이나 죽었다, 혹은 열 명 밖에 죽지 않다고 말한다. 말에 감정을 섞어넣는 것이다. 일상 언어에서 이런 말이 오가는 건 봐줄 수 있는데, 기자들까지 이런다.
- 구제역으로 스무 마리가 넘는 소가 죽었다....
- 2백 명이 넘는 신종플루 감염환자가 발행했다....
죽은 소는 정확한 마릿 수가 나와야 하는데 이런 식이다. 열아홉 마리가 죽으면 열아홉 마리고, 스물한 마리가 죽으면 스물한 마리다. '스무 마리가 넘는'이라는 수사는 보도에 쓸 수 없다. 오늘 밤 뉴스만 봐도 수효를 거론하는 데서 분명 '넘는'이 붙을 것이다. 10억이 넘는, 1초가 넘는... 그러지 말고 정확하게 보도해야 한다. 이러니 뉴스가 아니고 선전선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마다 지나치게 감정을 넣다보니 "그의 자서전은 초판이 석 달만에 다 팔려나갔다. 초판 발행부수는 2천 부나 된다"는 기사도 나온다. 초판이든 재판이든 찍는 부수는 출판사 사장 마음이기 때문에 이 말로는 부수를 계량화할 수 없다. 5백 부도 한 판이고, 10만 부도 한 판이고, 100만부도 한 판일 수 있다. 심지어 100부 한 판 짜리도 있다. 그리고 일반 출판에서 초판 부수를 '2천 부나'라고 하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들리지만 대개 소설류는 3천부나 5천부가 초판 기준이고, 시집은 5백 부나 1천 부 정도가 기준이기 때문에 이 역시 독자들이 알아듣기 어렵다. 실제 이와 비슷한 뉴스가 연예 분야에서 올라올 때가 있다.
말이 정확하지 않으면 폭력사회가 된다.
국회에서 늘 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말을 정확히 할 줄 모르고, 정확하게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말을 바르게 쓰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 감정을 전달하려고 애써봐야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전혀 엉뚱한 말로 들리게 된다. 또 남의 말을 많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오해가 끊이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계모임, 회식자리, 동창회, 명절 모임 같은 데서 툭하면 싸움이 일어나 난장판이 된다. 대화로 하자니 말하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떠들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 의도와 전혀 달리 멋대로 듣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 안통하면 침팬지처럼 엉겨붙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폭력을 막기 위해 언어를 발명했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주요 언어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게다가 폭력을 실력이라고 그럴 듯하게 바꿔쓰는 국회의원들이 있으니, 거꾸로 진화는 없다고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던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지가 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국어교육에서 말하기, 듣기를 더 강화해야 한다. 저 유신 시절에 이념 교육하기 바빠, 주입식 교육하기 바빠 이런 교육이 사라진 뒤 우리 사회는 말의 질서를 잃어버렸다.
한편 좌뇌 성향이 강한 일본 같은 경우 너무 정확하게 써서 피곤할 정도다. 요즘 재미있게 놀고나서 "재미있었던 것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게 일본식이다. 뭔드지 말꼬리를 붙여 달리 해석할 여지를 주는 것이다. 주로 신문 사설에서 이 버릇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는데,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와 같은 말같지 않은 말꼬리가 길게 나붙는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싸우다가 "너 죽여버릴 거야." 하면 진짜 죽이는 줄 알고 기겁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선생께서 저희 집을 한번 방문해주신다면 집안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면 이 사람들은 기겁을 한다. 인삿말에 불과한 걸 우리는 수시 초청장쯤 받은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뇌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말로는 하루에 대여섯 명씩 죽이는 사람쯤 아주 흔하다. 신문 기사 댓글을 보면 침팬지들이 써놓은 것처럼 원시적이고 본능적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그 중간은 지켜 언어 생활에서 교류와 소통이 원활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