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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소수의 답변 불가능한 오류가 있어도 성경은 무오하다.
(3) 성경저자들에게 임한 영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저는 싱클레어 퍼거슨이 한 다음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요한복음은 신약의 관행대로 구약을 인용할 때에 '기록된 바'라는 문구를 사용한다(6:31, 8:17, 12:14 등). 이는 신약에서 모든 항변을 잠재우는 문구이다."
성경은 최종 권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권위는 곧 하나님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은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성경이 이르시되"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되"가 동일시될 수 있을 정도입니다(롬9:17, 갈3:8).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들이대면 모든 논쟁이 끝나야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 이와 같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일까요? 피터 데이비즈는 그 이유를 잘 말해줍니다.
"성경에 권위라는 성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신적 영감이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는 그 영감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또는 '성령이 ... 말씀하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신약과 구약 전체에 두루 암묵적으로 언급되어 있다(고후6:16, 행1:16)."
옳은 지적입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의 근거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가 그 '영감'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것은 맞습니다(딤후3:16). 그러나 교회는 영감을 너무 초자연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지나친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영감'은 '특별계시'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라는 말이 교계에 정설처럼 떠도는 것처럼, 교회는 계시를 너무 높게 생각합니다. 또 '계시'라는 말 때문에 완전히 초자연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더구나 일반 계시도 아니고 성경저자들에게만 주어진 특별계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어떤 종류의 오류든 일체 오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저자들에게 임한 계시가 정말로 이런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웨인 그루뎀은 『조직신학』 상권에서 성경저자들이 받았던 계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주의를 요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인간 저자들에게 받아쓰도록 일일이 불러주셨다고 생각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이 받아쓰도록 부르신 경우가 산발적으로 성경에 몇 번 언급되었다. 요한이 이상 중에 밧모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계2: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계2:8),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계2:12). 이것들은 단순하고 순전한 받아쓰기의 좋은 예들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요한에게 쓸 것을 말씀해주셨고, 요한은 예수님께 듣는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 ...
그러나 성경의 다른 많은 부분들의 경우, 그러한 직접적인 방법이 성경의 말씀을 기록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다(히1:1). 직접 받아쓴 것과 전혀 반대되는 수단으로 누가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한 일반적인 역사적 연구를 들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진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 '(눅1:1-3)
이는 분명히 직접 받아쓰는 과정이 아니다. 누가는 목격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해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는 많은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증거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봄으로써 철저하게 연구를 했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는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강조하며 자신의 고유의 문체를 반영하고 있다."
이제 특별계시가 꼭 여러분이 생각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셨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신약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한 사도 바울을 통해 성경저자들에게 임했던 특별계시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바울이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계시 즉 영감을 받았을까요?
베드로후서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여러분이 상상하거나 기대한 것과 많이 다르지요! 베드로는 "바울도"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도 성경을 그런 방식으로 즉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썼다는 의미가 됩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기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썼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쓴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바울이 받은 지혜는 예수님이 다음 구절에서 약속하신 지혜와 같은 유형입니다.
누가복음 21:14-15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물론 이런 지혜가 주어진 모든 자들에게 특별계시가 임한 것은 아닙니다. 박해 때의 답변이나 설교를 위해 주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달라도 적어도 지혜라는 유형은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경저자들을 생각할 때 초월적이고 우리와 다르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솔직히 저는 "바울이 받은 지혜로 이같이 썼다"라는 부분을 읽을 때 저 자신이 생각났습니다. '나도 그런데? 아! 바울도 그렇게 성경을 썼구나!' 무슨 의미입니까? 저도 설교 원고를 쓸 때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씁니다. 물론 바울에게는 성경을 쓸 수 있는 특별계시가 지혜로 임했고, 저에게는 특별계시가 아니라 성경을 잘 이해하고 성경대로 설교할 수 있는 일반적인 지혜가 임한 것이라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저에게 임한 것은 바울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모두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리는 같다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 지혜로 진리를 설명할 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건이나 정보를 사용하겠지요. 그때 여러분이 그 사건이나 정보의 한 부분을 잘못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혜가 그것을 교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것이 제가 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설사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도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정보가 저절로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것이 지혜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수, 인명, 지명,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지식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어도 이런 종류의 사소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저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과 진리는 무오하지만, 세부적인 사소한 정보에 있어선 그들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소한 오류들마저 없게 하려면 지혜가 아니라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에게 임한 것은 계시가 아니라 지혜였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하는지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 중에 '계시의 은사'로 분류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 말씀의 은사 곧 조명적 계시(내적 계시)로 지혜와 지식을 통한 말씀의 은사로 견해가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영분별의 은사" 또한 언어적 은사 곧 예언, 방언, 통변에 속하는 은사로 견해가 수정되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이 세 가지를 계시의 은사로 분류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캐더린 쿨만, 오랄 로버츠, 케네스 해긴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성운동가들이 지혜의 말씀을 '미래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식의 말씀을 '과거나 현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주는 것'으로, 영분별은 '영의 세계를 실제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해석에 동의하든 않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경우, 이 견해가 그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견해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 대해 함부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참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분의 영적 체험은 신뢰할 만합니다.
아무튼 성경저자들이 글을 쓸 때 그들이 착각하거나 혼동하고 있던 세부적인 정보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은 계시뿐입니다. 지혜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런데 과연 성경저자들이 하나님 주신 지혜로 쓸 때 세 가지 계시의 은사들이 작동했을까요? 물론 때로는 작동했습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서를 기록할 때 그랬습니다. 그러나 성경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항상 이 세 가지가 작동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역시 선지자들이 구약 성경의 역사서를 썼는데, 예언서를 쓸 때와 달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이런 역사서를 쓸 때는 세 가지 계시의 은사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또,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자신이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고 썼다고 했는데, 그가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을 쓸 때 이 세 가지 은사가 작동했겠습니까? 누가에게 이런 은사가 있기나 했을까요? 이 은사들은 선지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누가는 선지자가 아니므로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받은 지혜대로 이같이 썼다'고 했는데, 여기서 '지혜'는 지혜의 말씀이 아닙니다. 또 지식의 말씀도 아니고, 영분별의 은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서신들을 쓰고 있을 때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영분별의 은사'가 항상 작동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곧 고린도전서 10장 8절이 보여주듯이, 바울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을 경우 그것을 바로잡아주는 신적인 개입(계시)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소한 오류들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쯤에서, 어떤 분은 제게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성경을 쓸 때 받은 것은 단순한 지혜이고 계시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신학자들은 성경저자들이 받은 계시를 특별계시라고 부릅니다. 모순이 아닌가요?"
앞에서 말했듯이 케네스 해긴과 많은 영성운동 지도자들은 '계시'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 세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주신 지혜로 말씀을 깊이 깨닫는 것도 일종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여기서 '눈을 열다'의 '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라'(galah)는 '베일을 걷는다' 혹은 '덮개를 벗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의미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경을 50번 읽었다. 100번 읽었다. 1,000번 읽었다.'라고 자랑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한 전도사가 성경을 100번 읽었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성경 구절들을 줄줄 외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뜻을 제대로 모르는 자였습니다(자기는 안다고 착각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50번, 100번, 1,000번 읽는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본다'는 것이지요? 눈으로, 머리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론 안 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종류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가 임한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읽는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봅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곧 '말씀의 은사'입니다.
저는 지금 매우 실제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사'가 무엇인지 그 실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볼 때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냥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지혜로 눈을 열어주셔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과 설교는 다릅니다. 가르침은 성경에 나오는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참 설교는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눈을 열어주실 때 시작됩니다. 눈을 밝히는 지혜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것은 은사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어느 날 샤워하는데 말씀이 임했다'와 같은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홀연히 눈을 열어주십니다. 지혜를 통해서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평소에 궁금해했던 것, 한계에 부딪히고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이 깨달아지고 평소에는 분별이 되지 않던 것이 분별이 되고, 평소에는 잘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은사'입니다.
말씀의 은사는 단지 성경 많이 보고, 책 많이 읽는다고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 강해설교자들 중에 말씀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유명한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은 말씀의 은사가 있는 줄 알지만, 그냥 사람이 똑똑한 것입니다. 말 잘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책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능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사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는 진짜 영적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지혜자는 눈이 밝다"(전2:14)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통해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기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지혜, 즉 말씀의 은사가 누구에게 임하느냐? 똑똑한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똑똑한 사람은 이 은사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다음 구절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경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랍비학교 가서 열심히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나는 안 된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한계를 깨닫고 낮아지는 사람,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철두철미하게 낮아져서 하나님만 바로보는 사람,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 마음으로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옵소서!'라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말씀의 은사가 임합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먼저, 자기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인간의 지혜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때 하늘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지혜가 내려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도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가지고, 설교하고 목회하고 있는 목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목회하면 교회는 성장할지 몰라도 성도들의 영혼은 죽어갑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제대로 된 영의 양식 즉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마4:4)을 제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신자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잠언 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마음이 교만했습니다. '아, 우리는 선생이야! 율법사야.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아.'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수들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말씀의 은사'가 임하지 않습니다. 목사라고 말씀의 은사가 임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대학 교수라고 말씀의 은사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백날 기도해도 지혜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하늘을 닫기 때문입니다.
잠언 11:2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겸손이 하늘을 여는 키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늘이 열립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고 마음이 무너질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곧 제가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비결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받은 것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뭔가 잘난 것이 있어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주제를 알았습니다. 자기 자신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녹아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눈을 열어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성령님을 통해 가르쳐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1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제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와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한계를 깨닫고 마음이 낮아지지 않은 자에게 지혜를 주면 타락합니다. 마귀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나타나는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이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자기를 높이거나 자랑하지 말고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영으로, 중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높여주셔도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들 가운데 명문대 나온 목회자들이 더 문제입니다. 하늘이 안 열린 경우가 많습니다. 설교를 들어보면 압니다. 하늘에게 받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받은 것 없이 머리만 굴리고 있습니다. 지식 놀이, 지혜 놀이, 정보 놀이, 원어 놀이만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받은 것이 없으니 설교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빛이 없고, 계시가 없고, 생명이 없고, 기름부음이 없고, 들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혜가 지혜를 부르지 않습니다. 지혜(사람의 지혜)는 지혜(하나님의 지혜)를 몰아냅니다. 겸손이 지혜를 부릅니다. 낮아짐이 지혜를 부릅니다. 깨어짐이 지혜를 부릅니다. 울부짖음이 지혜를 부릅니다. 탄식이 지혜를 부릅니다. 신음하는 것이 지혜를 부릅니다. 애원하고 복걸하는 것이 지혜를 부릅니다. 물처럼 녹아진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지혜를 부릅니다. 그것이 제가 지혜를 받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