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 -아그네사 팰트스코크(Agnetha Ase Faltskog) : 보컬, 1950년 4월 5일 생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Synni Lyngstad, 애칭 : 프리다) : 보컬, 1945년 11월 25일 생 -베니 앤더슨(Benny Bror Goran Andersson) : 키보드 & 보컬, 1945년 12월 6일 생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Christian Ulvaeus) : 기타 & 보컬, 1946년 4월 15일 생
*경력 1973년 : 데뷔 앨범 [Ring Ring] 발표 1973년 :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스웨덴 지역예선 3위 "Ring Ring" (본선진출 실패) 1974년 :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대상 "Waterloo" 1977년 : 4월 9일 빌보드 싱글차트 1위(1주), "Dancing Queen" 1974년 ~ 1980년 : 영국 UK 싱글차트에서 총 9곡 1위 1993년 : 히트곡 모음집 앨범 [Gold Greatest Hits] 2천 2백만장 이상 판매기록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팝뮤직을 자주 들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팝 아티스트들을 꼽는다면?"
이라고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국내 팝 팬들은 "아바"라는 4인조 혼성 그룹을 빼지 않을것 같다. 그만큼 "아바"라는 그룹은 국내 음악팬들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다. 물론, 국내뿐만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들의 인기는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여담이지만 본인이 중학교 2-3학년때, 스웨덴의 여학생과 펜팔을 했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팝 아티스트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을때 그 여학생은 주저없이 "아바"를 꼽았으며
레코드(LP) 판과 "아바"를 소개한 잡지, 대형 브로마이드등을 소포로 보내준 기억이 있어서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바"가 스웨덴의 국보급 그룹이라서 당연한 답이었겠지만, 같이 동봉된 편지에 루즈로 자신의 입술자국을 찍어 보낸건
그 어린시절에 상당히 쇼킹했다)
"She"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엘비스 코스텔로"나 "러쉬"같은 모던락 밴드들은 "아바"를 흠모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아일랜드의 슈퍼밴드 "유투(U2)"는 1993년 공연에서 "아바"의 히트곡인 "Dancing Queen"을 주요 모티브로 삼기도 했다. (서구의 게이 공동체가 "아바"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정보는 좀 아이러니 하다) "아바"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영화도 있었고, 이들의 노래를 묶어서 만든 [맘마미아]라는 뮤지컬은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치며
아직도 공연중이다. 이런 부분에 관해서 음악 평론가들은 "아바 컬트"라고 표현을 한다.
*음악적 성향 외형적인 면에서 이들의 음악은 전형적인 유로 팝, 혹은 댄스음악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한 장르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팬층도 특정 연령층에 머물지 않았다. 이미 60년대 말부터 스웨덴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인기를 얻고있던 이들은 영국의 경쾌한 비트음악과
스웨덴의 민속음악, 카바레 음악 등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바탕위에서 이들이 이루어낸 세련된 팝뮤직은 이후의 "신스 팝(synth pop)"과 "뉴 로맨틱스(new romantics)" 등
"뉴 웨이브"의 하위 장르들, 그리고 현대의 테크노에 이르는 여러 장르들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뛰어난 작곡, 편곡 실력은 많은 락 밴드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바"가 처음 데뷔했을 당시, 현대적 사운드로 평가받던 많은 락 밴드들의 음악이 지금 들으면 퇴색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여전히 빛나는 세련미를 자랑한다. 사실, "아바"의 모국인 스웨덴은 영, 미권 팝시장에서 볼때 변방국가에 불과한 지역이었지만 섬세한 감성과
아름다운 화음으로 무장한 "아바"의 음악은 세계 시장, 특히 영국을 필두로 유럽의 전 지역에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고
확고한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이 해산하던 시점에 이미 "아바"의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바"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 1973년 이들이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 스웨덴 예선에 들고 나온 노래 "Ring Ring"은 3위 입상에 그치면서
1위에게만 주어지는 본선 티켓을 얻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유럽 차트들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를 "아바"라는 이름이 아니고 "bjorn, benny, agnetha and anni frid"라고 알고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나 라디오 DJ들이 멤버들의 이름에서 앞 글자만 따서 비공식적으로 "아바"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들이 발표한 앨범에는 "bjorn, benny, agnetha and anni frid"라는 긴 이름이 쓰여지고 있었다. (초창기 "아바"는 "비요른"과 "베니" 두명이었고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그룹의 정식 멤버가 아닌 객원싱어 정도의
"아바"의 메니저인 전설적인 인물 "스티그 앤더슨"은 이 당시에 대해, "두 여성을 정식 멤버에 포함시키려고 고려중이었으며,
그룹의 이름을 몇몇 방송국 DJ들이 불렀던 "아바"로 정할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고 밝혔었다. 그러던 중, 스웨덴의 "Gogenhag Mail" 이라는 신문이 이들의 그룹 이름을 정해주자면서 신문의 독자들에게서 그룹명 공모를 실시했다.
그 공모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스웨덴의 젊고 유망한 음악인과 싱어의 그룹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도 유망한 그룹으로 스웨덴의 음악계에 새로운 판도를 만드는 것은 물론 세계를 향해서도
스웨덴 음악을 대표하는 그룹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름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 신문사에세 이 그룹에 협력의 손을 뻗기위해 독자 여러분들로 부터 훌륭한 그룹명을 널리 공모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응모를 기대합니다."
이 기사 내용은 "아바"가 스웨덴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할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다.(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에 많은 응모가 쏟아 졌는데, "Flower Power", "Black Devil", "Golden Diamonds", "BABA(이 표현은 재미있다)"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전체 응모자의 80%가 "ABBA" 라는 이름이 좋다고 답했다. 결국, 이들이 "아바"라는 이름을 정식 그룹명으로 쓸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바"라는 이름을 등록하는 부분에 큰 난관이 있었다. 스웨덴에는 "ABBA"라는 정어리 훈제통조림을 만드는 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회사가 법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아바"에게 호의적이었고 상표 등록에 있어서 오히려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당시 "ABBA" 식품회사의 사장인 "Anders Akstrom"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저 4인조가 아바의 이름으로 나왔을때, 나의 회사가 혹시 저 그룹에 돈이라도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여러 사람들로 부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부정했지만 우리쪽도 이런 멋진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어서 오히려 영광입니다." 후일담 이지만 이 회사는 "아바"의 덕을 톡톡히 봤다.
물론, 그룹 "아바"의 상표 등록은 그 회사와 동일하게 "ABBA"로 하지는 않았다. "아바"가 상표등록을 한 것은 "ABBA"가 아니라 두 번째 B가 거꾸로 된 로고를 등록했다.
아바를 모델로 만들어진 인형들
*음악적 평가 고운 하이 소프라노의 주인공 "아그네사 팰트스코크(Agnetha Ase Faltskog)"와 보통 "프리드"로 불리우는 차분한 메조 소프라노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Synni Lyngstad)"가 만들어 내는 깊고 풍부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천상의 화음이라고도 불리움) 뒤에는 키보드 연주자 "베니 앤더슨(Benny Bror Goran Andersson)"과
기타리스트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Christian Ulvaeus)"라는 그룹의 실질적인 두뇌들이 자리하고 있다. "베니"와 "비요른" 콤비의 작곡 실력은 스웨덴내에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이 빚어낸 많은 히트곡들은 다양한 악기들과 첨단 사운드로 무장되어 있고, 프로듀서로서의 뛰어난 재능은 사운드를 풍성하게
변모시켜 "아바"의 정체성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베니"와 "비요른"은 "아바" 결성 이전에 이미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여러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은 이후 "아바"의 음악에 반영이 되어, 신서사이저와 오케스트레이션등이
포함된 다채롭고 복합적인, 동시에 정교하고 깔끔한 사운드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무대에서 재현되기에 까다로운 단점을 지니고 있어서 "아바는 공연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지니는 팀"이라는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런 취약점을 극복하고 여러 차례의 세계 투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2000년 스웨덴에서 제작된 아바 우표
지금 들어도 세련미가 돋보일 정도로 시공을 초월하는 탁월한 사운드는 "아바" 음악의 핵심이며 여기에 두 여주인공
"아그네사"와 "프리다"의 멋진 목소리와 화음, 그리고 키보드 연주가 곁들여진 것이다. 또한, 풍성한 감성 표출을 위해 이들은 락밴드가 사용하는 기본 악기외에 여러 악기들을 도입했다. 부드러운 현악기나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물론 "무그 신디사이저"나 "색소폰", "트럼펫", "플룻", "클라리넷" 등의 관악기,
그리고 "마림바", "아코디언", "콩가", "차임" 등에 이르는 다양한 악기들이 포함되었다. "아바"의 음악이 꽉 찬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1983년 스웨덴에서 제작된 아바 우표
"아바"의 음악은 팝과 락, 전자음악과 댄스, 레게, 민속음악과 포크, 그리고 뮤지컬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데,
이런 다양한 형식들을 자신들의 멜로디로 소화해내어 재 창조해낸 능력은 "아바"가 높은 점수를 받고 인정 받는데 중요한 요소다. 결국, 밝고 수려한 멜로디 라인과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 풍부한 사운드, 그리고 세계적인 공감을 얻어낸 편곡실력이, 지금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참고) "무그 신디사이저"는 초창기의 엉성한 "신디사이저"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지금의 "신디사이저"처럼 풍부한 효과를 낼 수 있게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무그(당시 코넬대학 박사과정)"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1964년, "헤르프 더이치(현재 "호프스트라" 대학 명예교수)"라는 작곡가와 함께 첫 전기 기반의 신디사이저 모듈을 개발하여 그해 말 "R.A. 무그"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신디사이저"를 출시했다.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스티비 원더", "롤링 스톤즈"등을 비롯한 위대한 아티스트들이 이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음반을 만들었으며 "무그 신디사이저"는 전자음악(Electric Music) 분야의 새 지평을 열었다. 코넬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로버트 무그(Robert Moog)" 박사는 2005년 8월 21일 71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로버트 무그(Robert Moog)" 박사
*그룹 결성 "아바"의 역사는 1966년 "비요른"과 "베니"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후트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라는 포크 그룹에서 활동하던 "비요른"과 스웨덴에서 인기 그룹이었던 "헵 스타스(Hep Stars)"의 피아노 연주자 "베니"는 한 파티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음악적으로 마음이 통했던 두사람은 서로를 작곡 파트너로 하여
"유니언 송스(Union Songs)"라는 이름의 음악 출판 회사를 설립했다.
1966년 말 두 사람은 첫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후 1960년대 말까지는 각자의 팀에서 활동하면서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후 이들은 "아바"의 매니저가 되는 "스틱 앤더슨(Stig Anderson)"의 레이블 [폴라 뮤직(Polar Music)]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1969년 봄 "비요른"은 한 TV 쇼에서,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데뷔하여 인기를 얻고 있던 "아그네사"를 만났다. '아그네사"는 1968년 "I Was So In Love"라는 노래로 스웨덴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1971년에는
"막달라 마리아" 역을 맡아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베니"는 역시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던 노르웨이 태생의 "프리다(Frida, 애칭)"를 만났다. "프리다"는 10대 시절 "애니프리드 포(Anni-Frid Four)"라는 댄스 그룹을 결성하여 1967년 TV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팀을 이루게 된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1970년, "베니"와 "비요른"의 앨범[Happiness]에
수록된 싱글 "Hej Gamle Man(Hey Old Man)"에 보컬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1년 7월 , "비요른"과 "아그네사"는 결혼 했으며 "베니"와 "프리다"는 1978년 10월까지 약혼관계 유지하다 결혼)
1972년 6월, "비요른, 베니, 아그네사, 프리다"라는 긴 이름으로 발표된 싱글 "People Need Love"는 빅 히트를 기록했고,
이 즈음부터 라디오 DJ들은 이들의 긴 이름대신 멤버들의 이니셜을 결합한 "ABBA"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신문보도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결국, 매니저 "스틱 앤더슨"은 그룹을 "아바"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성공과 해체 "아바"라는 4인조 혼성 그룹(2쌍의 커플)이 정식으로 출발한 것은 1972년이며 1973년 데뷔곡 "Better To Have Loved"를 발표했다. 1972년 발표된 "People Need Love"에서 두 여성 멤버는 객원싱어 자격이었고 그룹의 이름도 "아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이들은 "아바"로 불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아바"의 상표등록이 된 시기가 정식 데뷔인
1973년 부터인지 아니면 1974년 부터인지는 정확히 파악이 안된다. (1974년부터라는 기록도 있는데, 확실히 증명할 자료가 없다)
1973년 "아바"는 "Ring Ring" 이라는 곡을 들고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의 스웨덴 대표를 뽑는 자리에 참석을 하게 되는데,
3위 입상에 그치면서 1위에게만 주어지는 본선 대회 진출에는 실패 했다.(하지만 이 노래는 스웨덴 차트 1위에 올랐고,
유럽에서 히트를 쳤다) 1년을 더 기다린 "아바"는 1974년 "Waterloo(영국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외국어권 노래)" 라는 곡으로 다시 참가하여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유럽 32개국 TV를 통해 "아바"는 유럽의 스타가수가 되었다
1974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수상 당시 모습
이후 "아바"는 "Honey Honey", "S.O.S", "Dancing Queen", "Take A Chance On Me", "Mamma Mia", "Gimme Gimme Gimme"
등의 무수한 노래들을 연이어 히트 시키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참고) "마돈나"는 "아바"의 "Gimme Gimme Gimme"를 샘플링하여 만든 노래 "Hung Up"을 2005년 말에 발표한 앨범
[Confessions On A Dance Floor]의 첫번째로 싱글로 발표했으며,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1975년 "S.O.S"를 발표하여 빌보드 싱글차트에 다시 진입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했고, 이후 "Mamma Mia", "Fernando"를
발표하여 히트시켰다.
("아바" 전성기 시절, 스웨덴의 주요 외화 수입원을 보면, 스웨덴을 상징하는 자동차 "볼보(Volvo)"가 1위였고 2위가 "아바"였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엄청난 외화를 벌여 들였다)
발표된 곡들이 거의 히트를 기록하자 "아바"는 외국에 알려진지 2년만에 히트곡 모음집(Greatest Hits) 앨범을 발표하는
진기록을 만들어 낸다.
1970년대 후반들어 "Knowing Me Knowing You", "The Name Of The Game", "Take A Chance On Me"를 히트시킨 "아바"는
자신들의 다큐멘터리 영화 [ABBA - The Movie]를 전세계에 개봉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참고) "Dancing Queen"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팝뮤직이며, 2005년 1년동안 라디오, TV등의 방송 매체에서 635회 이상
방송을 타면서 2005년 1년동안 한국 방송매체에서 가장 많이 들려진 팝뮤직이다(차트코리아 공식 집계)
또한, 2005년 1년동안 "아바"의 음악은 800회 이상 방송되면서 가장 많이 방송된 팝 가수 3위에 올랐다.
(1위는 1,000회 이상 방송된 "Sweetbox")
1979년 "비요른"과 "아그네사"가 이혼하면서 해체설이 나돌기는 했지만, 1979년 유니세프 자선공연에서 "Chiquitita"를 불러
찬사를 받으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1980년 3월 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다.(아바의 마지막 해외 투어)
1979년 앨범 [Voulez-Vous]와 1980년 앨범 [Super Trouper]를 발표한 "아바"는, 1981년 2월에 "베니"와 "프리다"가 이혼을 발표하면서 불안한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혼과는 상관없이 1981년 앨범 [The Visitor]가 이상없이 발표되었고, 1
982년 [The Singles]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이혼이 그룹활동과는 무관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The Visitor] 앨범부터 멤버들의 솔로 활동과 개인 프로젝트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결국 1982년 말 "아바"는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사실 이부분은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아바"는 기자회견에서 해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단지 "Break(휴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중에라도 모든 멤버가
다시 원하게 되면 다시 재결합하여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활동중단이 결국은 해체가 되었다. (1985년 "아그네사"는 방송에 출연해서 "아바"가 다시 재결합 한다면 참여해서 활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바"는 영국 UK 싱글차트 1위곡 9개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 1개, 1억장이라는 경이로운 음반 판매고,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열기를 뒤로한채 전설이 되었다. "아바"는 전성기 시절 웸블리구장에서 48,000여 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공연을 했었는데, 이즈음 발매된 기네스북에는
"아바"가 ‘음악사상 가장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린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참고)기네스북의 기록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기가 없으면 오해를 많이 불러 일으키는데, ‘음악사상 가장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린
그룹’이라는 기록은 정확한 표기가 없기 때문에 애매한 구석이 있다. "비틀즈"나 "엘비스"가 지금까지 전세계 음반 판매량에서 "아바"를 훨씬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은 "아바"가 정식으로 활동했던 1973년부터 1982년 사이의 음반 판매량 1위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빌보드차트 기록 (20위안의 기록만 발췌)
(United States Singles (Hot 100 / Bubbling Under) 1974년 06월 01일 : Waterloo / 6위 1975년 09월 08일 : S. O. S. / 15위 1976년 02월 14일 : I Do, I Do, I Do, / 15위 1976년 09월 04일 : Fernando / 13위 1977년 04월 09일 : Dancing Queen / 1위(1주간) 1977년 05월 14일 : Knowing Me, Knowing You / 14위 1977년 12월 24일 : The Name Of The Game / 12위 1978년 04월 22일 : Take A Chance On Me / 3위 1979년 05월 19일 : Does Your Mother Know / 19위 1080년 11월 22일 : The Winner Takes It All / 8위
(United States Albums) 1977년 01월 22일 : [Arrival] / 20위 1978년 02월 18일 : [Abba - The Album] / 14위 1979년 07월 07일 : [Voulez-Vous] / 19위 1980년 12월 13일 : [Super Trouper] / 17위
*영국 UK차트 기록 (10위안의 기록만 발췌)
(UK Single Chart)
1위 Abba Waterloo / Apr 1974 6위 Abba S.O.S. / Sep 1975 1위 Abba Mamma Mia / Dec 1975 1위 Abba Fernando / Mar 1976 1위 Abba Dancing Queen / Aug 1976 3위 Abba Money Money Money / Nov 1976 1위 Abba Knowing Me Knowing You / Feb 1977 1위 Abba The Name Of The Game / Oct 1977 1위 Abba Take A Chance On Me / Feb 1978 5위 Abba Summer Night City / Sep 1978 2위 Abba Chiquitita / Feb 1979 4위 Abba Does Your Mother Know / May 1979 3위 Abba Angel Eyes / Voulez Vous / Jul 1979 3위 Abba Gimme Gimme Gimme (A Man After Midnight) / Oct 1979 2위 Abba I Have A Dream / Dec 1979 1위 Abba The Winner Takes It All / Aug 1980 1위 Abba Super Trouper / Nov 1980 7위 Abba Lay All Your Love On Me / Jul 1981 3위 Abba One Of Us / Dec 1981
(UK Alum Chart) 1위 Abba Greatest Hits / Apr 1976 1위 Abba Arrival / Nov 1976 1위 Abba The Album / Feb 1978 1위 Abba Voulez-Vous / May 1979 1위 Abba Greatest Hits Volume 2 / Nov 1979 1위 Abba Super Trouper / Nov 1980 1위 Abba The Visitors / Dec 1981 1위 Abba The Singles - The First Ten Years / Nov 1982 1위 Abba Gold - Greatest Hits / Oct 1992 1위 Abba Gold - Greatest Hits (re-entry, 차트 재진입) / Jan 1999 4위 Abba Gold - Greatest Hits (re-entry, 차트 재진입) / Apr 2004
*해체 이후
해체 이후에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각자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프리다"는 "아바" 해체 직전인 1982년에 첫 솔로 영어 앨범 작업에 착수하여 "필 콜린스"가 프로듀싱한
"Something's Going On"을 발표했다. 1984년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환경운동에 몰두 하다가 1996년 스웨덴어 앨범을 다시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환경운동과 관련된 자선행사에 몰두하면서 다른 가수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한다.
"프리다"는 "리얼 그룹"이 리메이크한 "Dancing Queen"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리얼 그룹"은 이 노래로
1995년 "CASA(미국 현대 아카펠라 협회) 어워드"에서으로 최우수 컨템포러리 커버상과
"Flight Of The Foo-Birds"로 최우수 재즈곡 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아카펠라 그룹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 런던 프린스 에드워드 시어터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에 대해 소개하는 "프리다"(2004년 4월)
2005년 스웨덴 스톡홀름,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에 나타난 "프리다"
"아그네사"는 1983년 "마크 채프먼"이 프로듀싱한 "Wrap Your Arms Around Me"를 발표했고 1985년과 1987년 음반을 발표했지만, 역시 '아바"의 명성을 잇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이후 음악활동을 중지 했다. 1996년 자서전 "As I Am" 발표하며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2004년 봄, 17년만에 신보를 발표하며 컴백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에 나타난 "아그네사"(우측)
"비요른"과 "베니"는 영국의 작사가 "팀 라이스(Tim Rice)"와 함께 뮤지컬 [체스(Chess)]를 완성해 1985년 공개했다. "아바"의 명성에 비할수는 없었지만 이 작품은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이 두사람은 1999년 런던에서 "아바"의 노래를 묶은 뮤지컬 "Mamma Mia"를 제작하여 초연에 올렸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2년후 이 뮤지컬은 미국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2004년 4월 기준으로 1천 7백만명이 이 공연을 봤으며 아직도
세계 각국에서 공연중에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 1월 첫 무대에 올랐다.
참고) "Mamma Mia"는 1975년 호주에서 첫 싱글로 발표되어 호주차트 1위에까지 오른 히트곡으로 "아바"는
호주에서 6번 1위를 기록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무대 인사(좌측부터 2번째 "비요른", 4번째 "베니")
두 사람은 2002년 5월에 "영국 작곡, 작사가 협회"에서 수여하는 "Ivor Novello Award"에서 "아바"의 음악이
팝뮤직계에 공헌을 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특별 국제상"을 수상했다. (2001년 "베니"는 12년만에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 무대에서 인사하는 "비요른"(우측)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에서 "베니"(좌측)
그룹의 해체 이후에도 "아바"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고, 다양한 형태의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계속 발매되며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1993년에 발매된 히트곡 모음집 [Gold: Greatest Hits]다. 영국 UK 앨범 차트에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1천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이 앨범은 지금까지 2천 2백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아바"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 앨범은 팝뮤직계에서 아바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피제이 호건(P.J. Hogan)"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뮤리엘의 웨딩(Muriel's Wedding)]에 "아바"의 노래들이 사용되면서 신세대들에게 "아바"는 새로운 열풍을 일으켰는데,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아바"를 재평가하는데 공헌했다. "아바"는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던 팝시장에서 변방국인 스웨덴 출신이었다는 점과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영국 음악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 들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히트한 스웨덴 출신의 "아바"가 미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단 하나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이 다소 초라해 보이지만 "사실상 기적과도 같은 1위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 변방국 출신의 "아바"의 빌보드 1위는 대단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아바"는 미국에서 재평가 되었는데, 1990년대에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뒤늦은 아바열풍이 일기도 했었다. 그리고 현재 "아바"는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위대한 그룹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바"는 "비틀즈"만큼이나 중요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하면서 여전히 문화,
산업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04년 4월, "아바"가 소속되어 활동했던 [폴라 뮤직]은 "Waterloo(1974년 발표)"의 3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시장 데뷔작인
이 곡을 재 발매했다. 보너스 트랙들과 기념 부클릿, 그리고 1974년 유러비전 송콘테스트 공연 모습이 담긴 DVD 등을 포함한 이 호화로운 패키지는
많은 "아바"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전설로 남고싶은 "아바"
"아바"의 히트곡 모음집은 아직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이 말은 해체된지 20년이 넘은 "아바"의 음악이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으며, 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같다.
매년 열리는 "아바"의 기념 행사장에는 수천명의 열혈 팬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아바"의 음악은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국내의 경우, TV 드라마 [세친구]는 "아바"의 "Honey Hony"를 에피소드 사이에 시용했고 "예지원"이 출연했던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아바"의 음악들로 드라마 배경음악을 사용했고 사용된 음악들로 "아바 편집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아바"는 시대를 초월한 문화 아이콘이 된 셈이다.
"마돈나"가 샘플링한 "Gimme Gimme Gimme" 같은 노래들은 지금 들어봐도 세련미가 철철 넘쳐 "이 노래가 과연 그 당시 노래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중에서 "아바"를 모르거나 "아바"의 음악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였던 "아바"는 그 세대 사람들에게는 진향 향수가 묻어 있는 추억과도 같은 존재이며,
요즘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경이로움에 존경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아바"는 전설이 되어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을 것이다.
끝으로, 2003년에 접한 "아바"의 외신보도 내용 하나를 소개한다. 이들과 같이 동거동락하며 오랜기간 활동했던 메니저 "스틱 앤더슨"의 생일파티에 "아바"의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한 레코드 회사의 대표가 "다시 그룹을 결성해서 앨범을 내준다면 몇백억이라도 아낌없이 주겠다"라고 제안을 했다. 이때, 이들의 답은 간단했다. "우리를 기억하는 팬들은 지금처럼 늙어버린 아바보다는 예전의 아바로 기억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해도 그들을 실망 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
*멤버 -아그네사 팰트스코크(Agnetha Ase Faltskog) : 보컬, 1950년 4월 5일 생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Synni Lyngstad, 애칭 : 프리다) : 보컬, 1945년 11월 25일 생 -베니 앤더슨(Benny Bror Goran Andersson) : 키보드 & 보컬, 1945년 12월 6일 생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Christian Ulvaeus) : 기타 & 보컬, 1946년 4월 15일 생
*경력 1973년 : 데뷔 앨범 [Ring Ring] 발표 1973년 :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스웨덴 지역예선 3위 "Ring Ring" (본선진출 실패) 1974년 :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대상 "Waterloo" 1977년 : 4월 9일 빌보드 싱글차트 1위(1주), "Dancing Queen" 1974년 ~ 1980년 : 영국 UK 싱글차트에서 총 9곡 1위 1993년 : 히트곡 모음집 앨범 [Gold Greatest Hits] 2천 2백만장 이상 판매기록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팝뮤직을 자주 들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팝 아티스트들을 꼽는다면?"
이라고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국내 팝 팬들은 "아바"라는 4인조 혼성 그룹을 빼지 않을것 같다. 그만큼 "아바"라는 그룹은 국내 음악팬들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다. 물론, 국내뿐만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들의 인기는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여담이지만 본인이 중학교 2-3학년때, 스웨덴의 여학생과 펜팔을 했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팝 아티스트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을때 그 여학생은 주저없이 "아바"를 꼽았으며
레코드(LP) 판과 "아바"를 소개한 잡지, 대형 브로마이드등을 소포로 보내준 기억이 있어서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바"가 스웨덴의 국보급 그룹이라서 당연한 답이었겠지만, 같이 동봉된 편지에 루즈로 자신의 입술자국을 찍어 보낸건
그 어린시절에 상당히 쇼킹했다)
"She"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엘비스 코스텔로"나 "러쉬"같은 모던락 밴드들은 "아바"를 흠모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아일랜드의 슈퍼밴드 "유투(U2)"는 1993년 공연에서 "아바"의 히트곡인 "Dancing Queen"을 주요 모티브로 삼기도 했다. (서구의 게이 공동체가 "아바"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정보는 좀 아이러니 하다) "아바"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영화도 있었고, 이들의 노래를 묶어서 만든 [맘마미아]라는 뮤지컬은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치며
아직도 공연중이다. 이런 부분에 관해서 음악 평론가들은 "아바 컬트"라고 표현을 한다.
*음악적 성향 외형적인 면에서 이들의 음악은 전형적인 유로 팝, 혹은 댄스음악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한 장르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팬층도 특정 연령층에 머물지 않았다. 이미 60년대 말부터 스웨덴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인기를 얻고있던 이들은 영국의 경쾌한 비트음악과
스웨덴의 민속음악, 카바레 음악 등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바탕위에서 이들이 이루어낸 세련된 팝뮤직은 이후의 "신스 팝(synth pop)"과 "뉴 로맨틱스(new romantics)" 등
"뉴 웨이브"의 하위 장르들, 그리고 현대의 테크노에 이르는 여러 장르들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뛰어난 작곡, 편곡 실력은 많은 락 밴드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바"가 처음 데뷔했을 당시, 현대적 사운드로 평가받던 많은 락 밴드들의 음악이 지금 들으면 퇴색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여전히 빛나는 세련미를 자랑한다. 사실, "아바"의 모국인 스웨덴은 영, 미권 팝시장에서 볼때 변방국가에 불과한 지역이었지만 섬세한 감성과
아름다운 화음으로 무장한 "아바"의 음악은 세계 시장, 특히 영국을 필두로 유럽의 전 지역에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고
확고한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이 해산하던 시점에 이미 "아바"의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바"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 1973년 이들이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 스웨덴 예선에 들고 나온 노래 "Ring Ring"은 3위 입상에 그치면서
1위에게만 주어지는 본선 티켓을 얻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유럽 차트들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를 "아바"라는 이름이 아니고 "bjorn, benny, agnetha and anni frid"라고 알고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나 라디오 DJ들이 멤버들의 이름에서 앞 글자만 따서 비공식적으로 "아바"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들이 발표한 앨범에는 "bjorn, benny, agnetha and anni frid"라는 긴 이름이 쓰여지고 있었다. (초창기 "아바"는 "비요른"과 "베니" 두명이었고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그룹의 정식 멤버가 아닌 객원싱어 정도의
"아바"의 메니저인 전설적인 인물 "스티그 앤더슨"은 이 당시에 대해, "두 여성을 정식 멤버에 포함시키려고 고려중이었으며,
그룹의 이름을 몇몇 방송국 DJ들이 불렀던 "아바"로 정할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고 밝혔었다. 그러던 중, 스웨덴의 "Gogenhag Mail" 이라는 신문이 이들의 그룹 이름을 정해주자면서 신문의 독자들에게서 그룹명 공모를 실시했다.
그 공모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스웨덴의 젊고 유망한 음악인과 싱어의 그룹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도 유망한 그룹으로 스웨덴의 음악계에 새로운 판도를 만드는 것은 물론 세계를 향해서도
스웨덴 음악을 대표하는 그룹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름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 신문사에세 이 그룹에 협력의 손을 뻗기위해 독자 여러분들로 부터 훌륭한 그룹명을 널리 공모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응모를 기대합니다."
이 기사 내용은 "아바"가 스웨덴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할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다.(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에 많은 응모가 쏟아 졌는데, "Flower Power", "Black Devil", "Golden Diamonds", "BABA(이 표현은 재미있다)"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전체 응모자의 80%가 "ABBA" 라는 이름이 좋다고 답했다. 결국, 이들이 "아바"라는 이름을 정식 그룹명으로 쓸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바"라는 이름을 등록하는 부분에 큰 난관이 있었다. 스웨덴에는 "ABBA"라는 정어리 훈제통조림을 만드는 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회사가 법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아바"에게 호의적이었고 상표 등록에 있어서 오히려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당시 "ABBA" 식품회사의 사장인 "Anders Akstrom"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저 4인조가 아바의 이름으로 나왔을때, 나의 회사가 혹시 저 그룹에 돈이라도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여러 사람들로 부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부정했지만 우리쪽도 이런 멋진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어서 오히려 영광입니다." 후일담 이지만 이 회사는 "아바"의 덕을 톡톡히 봤다.
물론, 그룹 "아바"의 상표 등록은 그 회사와 동일하게 "ABBA"로 하지는 않았다. "아바"가 상표등록을 한 것은 "ABBA"가 아니라 두 번째 B가 거꾸로 된 로고를 등록했다.
아바를 모델로 만들어진 인형들
*음악적 평가 고운 하이 소프라노의 주인공 "아그네사 팰트스코크(Agnetha Ase Faltskog)"와 보통 "프리드"로 불리우는 차분한 메조 소프라노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Synni Lyngstad)"가 만들어 내는 깊고 풍부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천상의 화음이라고도 불리움) 뒤에는 키보드 연주자 "베니 앤더슨(Benny Bror Goran Andersson)"과
기타리스트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Christian Ulvaeus)"라는 그룹의 실질적인 두뇌들이 자리하고 있다. "베니"와 "비요른" 콤비의 작곡 실력은 스웨덴내에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이 빚어낸 많은 히트곡들은 다양한 악기들과 첨단 사운드로 무장되어 있고, 프로듀서로서의 뛰어난 재능은 사운드를 풍성하게
변모시켜 "아바"의 정체성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베니"와 "비요른"은 "아바" 결성 이전에 이미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여러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은 이후 "아바"의 음악에 반영이 되어, 신서사이저와 오케스트레이션등이
포함된 다채롭고 복합적인, 동시에 정교하고 깔끔한 사운드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무대에서 재현되기에 까다로운 단점을 지니고 있어서 "아바는 공연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지니는 팀"이라는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런 취약점을 극복하고 여러 차례의 세계 투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2000년 스웨덴에서 제작된 아바 우표
지금 들어도 세련미가 돋보일 정도로 시공을 초월하는 탁월한 사운드는 "아바" 음악의 핵심이며 여기에 두 여주인공
"아그네사"와 "프리다"의 멋진 목소리와 화음, 그리고 키보드 연주가 곁들여진 것이다. 또한, 풍성한 감성 표출을 위해 이들은 락밴드가 사용하는 기본 악기외에 여러 악기들을 도입했다. 부드러운 현악기나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물론 "무그 신디사이저"나 "색소폰", "트럼펫", "플룻", "클라리넷" 등의 관악기,
그리고 "마림바", "아코디언", "콩가", "차임" 등에 이르는 다양한 악기들이 포함되었다. "아바"의 음악이 꽉 찬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1983년 스웨덴에서 제작된 아바 우표
"아바"의 음악은 팝과 락, 전자음악과 댄스, 레게, 민속음악과 포크, 그리고 뮤지컬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데,
이런 다양한 형식들을 자신들의 멜로디로 소화해내어 재 창조해낸 능력은 "아바"가 높은 점수를 받고 인정 받는데 중요한 요소다. 결국, 밝고 수려한 멜로디 라인과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 풍부한 사운드, 그리고 세계적인 공감을 얻어낸 편곡실력이, 지금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참고) "무그 신디사이저"는 초창기의 엉성한 "신디사이저"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지금의 "신디사이저"처럼 풍부한 효과를 낼 수 있게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무그(당시 코넬대학 박사과정)"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1964년, "헤르프 더이치(현재 "호프스트라" 대학 명예교수)"라는 작곡가와 함께 첫 전기 기반의 신디사이저 모듈을 개발하여 그해 말 "R.A. 무그"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신디사이저"를 출시했다.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스티비 원더", "롤링 스톤즈"등을 비롯한 위대한 아티스트들이 이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음반을 만들었으며 "무그 신디사이저"는 전자음악(Electric Music) 분야의 새 지평을 열었다. 코넬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로버트 무그(Robert Moog)" 박사는 2005년 8월 21일 71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로버트 무그(Robert Moog)" 박사
*그룹 결성 "아바"의 역사는 1966년 "비요른"과 "베니"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후트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라는 포크 그룹에서 활동하던 "비요른"과 스웨덴에서 인기 그룹이었던 "헵 스타스(Hep Stars)"의 피아노 연주자 "베니"는 한 파티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음악적으로 마음이 통했던 두사람은 서로를 작곡 파트너로 하여
"유니언 송스(Union Songs)"라는 이름의 음악 출판 회사를 설립했다.
1966년 말 두 사람은 첫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후 1960년대 말까지는 각자의 팀에서 활동하면서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후 이들은 "아바"의 매니저가 되는 "스틱 앤더슨(Stig Anderson)"의 레이블 [폴라 뮤직(Polar Music)]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1969년 봄 "비요른"은 한 TV 쇼에서,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데뷔하여 인기를 얻고 있던 "아그네사"를 만났다. '아그네사"는 1968년 "I Was So In Love"라는 노래로 스웨덴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1971년에는
"막달라 마리아" 역을 맡아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베니"는 역시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던 노르웨이 태생의 "프리다(Frida, 애칭)"를 만났다. "프리다"는 10대 시절 "애니프리드 포(Anni-Frid Four)"라는 댄스 그룹을 결성하여 1967년 TV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팀을 이루게 된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1970년, "베니"와 "비요른"의 앨범[Happiness]에
수록된 싱글 "Hej Gamle Man(Hey Old Man)"에 보컬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1년 7월 , "비요른"과 "아그네사"는 결혼 했으며 "베니"와 "프리다"는 1978년 10월까지 약혼관계 유지하다 결혼)
1972년 6월, "비요른, 베니, 아그네사, 프리다"라는 긴 이름으로 발표된 싱글 "People Need Love"는 빅 히트를 기록했고,
이 즈음부터 라디오 DJ들은 이들의 긴 이름대신 멤버들의 이니셜을 결합한 "ABBA"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신문보도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결국, 매니저 "스틱 앤더슨"은 그룹을 "아바"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성공과 해체 "아바"라는 4인조 혼성 그룹(2쌍의 커플)이 정식으로 출발한 것은 1972년이며 1973년 데뷔곡 "Better To Have Loved"를 발표했다. 1972년 발표된 "People Need Love"에서 두 여성 멤버는 객원싱어 자격이었고 그룹의 이름도 "아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이들은 "아바"로 불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아바"의 상표등록이 된 시기가 정식 데뷔인
1973년 부터인지 아니면 1974년 부터인지는 정확히 파악이 안된다. (1974년부터라는 기록도 있는데, 확실히 증명할 자료가 없다)
1973년 "아바"는 "Ring Ring" 이라는 곡을 들고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의 스웨덴 대표를 뽑는 자리에 참석을 하게 되는데,
3위 입상에 그치면서 1위에게만 주어지는 본선 대회 진출에는 실패 했다.(하지만 이 노래는 스웨덴 차트 1위에 올랐고,
유럽에서 히트를 쳤다) 1년을 더 기다린 "아바"는 1974년 "Waterloo(영국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외국어권 노래)" 라는 곡으로 다시 참가하여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유럽 32개국 TV를 통해 "아바"는 유럽의 스타가수가 되었다
1974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수상 당시 모습
이후 "아바"는 "Honey Honey", "S.O.S", "Dancing Queen", "Take A Chance On Me", "Mamma Mia", "Gimme Gimme Gimme"
등의 무수한 노래들을 연이어 히트 시키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참고) "마돈나"는 "아바"의 "Gimme Gimme Gimme"를 샘플링하여 만든 노래 "Hung Up"을 2005년 말에 발표한 앨범
[Confessions On A Dance Floor]의 첫번째로 싱글로 발표했으며,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1975년 "S.O.S"를 발표하여 빌보드 싱글차트에 다시 진입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했고, 이후 "Mamma Mia", "Fernando"를
발표하여 히트시켰다.
("아바" 전성기 시절, 스웨덴의 주요 외화 수입원을 보면, 스웨덴을 상징하는 자동차 "볼보(Volvo)"가 1위였고 2위가 "아바"였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엄청난 외화를 벌여 들였다)
발표된 곡들이 거의 히트를 기록하자 "아바"는 외국에 알려진지 2년만에 히트곡 모음집(Greatest Hits) 앨범을 발표하는
진기록을 만들어 낸다.
1970년대 후반들어 "Knowing Me Knowing You", "The Name Of The Game", "Take A Chance On Me"를 히트시킨 "아바"는
자신들의 다큐멘터리 영화 [ABBA - The Movie]를 전세계에 개봉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참고) "Dancing Queen"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팝뮤직이며, 2005년 1년동안 라디오, TV등의 방송 매체에서 635회 이상
방송을 타면서 2005년 1년동안 한국 방송매체에서 가장 많이 들려진 팝뮤직이다(차트코리아 공식 집계)
또한, 2005년 1년동안 "아바"의 음악은 800회 이상 방송되면서 가장 많이 방송된 팝 가수 3위에 올랐다.
(1위는 1,000회 이상 방송된 "Sweetbox")
1979년 "비요른"과 "아그네사"가 이혼하면서 해체설이 나돌기는 했지만, 1979년 유니세프 자선공연에서 "Chiquitita"를 불러
찬사를 받으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1980년 3월 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다.(아바의 마지막 해외 투어)
1979년 앨범 [Voulez-Vous]와 1980년 앨범 [Super Trouper]를 발표한 "아바"는, 1981년 2월에 "베니"와 "프리다"가 이혼을 발표하면서 불안한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혼과는 상관없이 1981년 앨범 [The Visitor]가 이상없이 발표되었고, 1
982년 [The Singles]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이혼이 그룹활동과는 무관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The Visitor] 앨범부터 멤버들의 솔로 활동과 개인 프로젝트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결국 1982년 말 "아바"는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사실 이부분은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아바"는 기자회견에서 해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단지 "Break(휴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중에라도 모든 멤버가
다시 원하게 되면 다시 재결합하여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활동중단이 결국은 해체가 되었다. (1985년 "아그네사"는 방송에 출연해서 "아바"가 다시 재결합 한다면 참여해서 활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바"는 영국 UK 싱글차트 1위곡 9개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 1개, 1억장이라는 경이로운 음반 판매고,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열기를 뒤로한채 전설이 되었다. "아바"는 전성기 시절 웸블리구장에서 48,000여 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공연을 했었는데, 이즈음 발매된 기네스북에는
"아바"가 ‘음악사상 가장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린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참고)기네스북의 기록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기가 없으면 오해를 많이 불러 일으키는데, ‘음악사상 가장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린
그룹’이라는 기록은 정확한 표기가 없기 때문에 애매한 구석이 있다. "비틀즈"나 "엘비스"가 지금까지 전세계 음반 판매량에서 "아바"를 훨씬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은 "아바"가 정식으로 활동했던 1973년부터 1982년 사이의 음반 판매량 1위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빌보드차트 기록 (20위안의 기록만 발췌)
(United States Singles (Hot 100 / Bubbling Under) 1974년 06월 01일 : Waterloo / 6위 1975년 09월 08일 : S. O. S. / 15위 1976년 02월 14일 : I Do, I Do, I Do, / 15위 1976년 09월 04일 : Fernando / 13위 1977년 04월 09일 : Dancing Queen / 1위(1주간) 1977년 05월 14일 : Knowing Me, Knowing You / 14위 1977년 12월 24일 : The Name Of The Game / 12위 1978년 04월 22일 : Take A Chance On Me / 3위 1979년 05월 19일 : Does Your Mother Know / 19위 1080년 11월 22일 : The Winner Takes It All / 8위
(United States Albums) 1977년 01월 22일 : [Arrival] / 20위 1978년 02월 18일 : [Abba - The Album] / 14위 1979년 07월 07일 : [Voulez-Vous] / 19위 1980년 12월 13일 : [Super Trouper] / 17위
*영국 UK차트 기록 (10위안의 기록만 발췌)
(UK Single Chart)
1위 Abba Waterloo / Apr 1974 6위 Abba S.O.S. / Sep 1975 1위 Abba Mamma Mia / Dec 1975 1위 Abba Fernando / Mar 1976 1위 Abba Dancing Queen / Aug 1976 3위 Abba Money Money Money / Nov 1976 1위 Abba Knowing Me Knowing You / Feb 1977 1위 Abba The Name Of The Game / Oct 1977 1위 Abba Take A Chance On Me / Feb 1978 5위 Abba Summer Night City / Sep 1978 2위 Abba Chiquitita / Feb 1979 4위 Abba Does Your Mother Know / May 1979 3위 Abba Angel Eyes / Voulez Vous / Jul 1979 3위 Abba Gimme Gimme Gimme (A Man After Midnight) / Oct 1979 2위 Abba I Have A Dream / Dec 1979 1위 Abba The Winner Takes It All / Aug 1980 1위 Abba Super Trouper / Nov 1980 7위 Abba Lay All Your Love On Me / Jul 1981 3위 Abba One Of Us / Dec 1981
(UK Alum Chart) 1위 Abba Greatest Hits / Apr 1976 1위 Abba Arrival / Nov 1976 1위 Abba The Album / Feb 1978 1위 Abba Voulez-Vous / May 1979 1위 Abba Greatest Hits Volume 2 / Nov 1979 1위 Abba Super Trouper / Nov 1980 1위 Abba The Visitors / Dec 1981 1위 Abba The Singles - The First Ten Years / Nov 1982 1위 Abba Gold - Greatest Hits / Oct 1992 1위 Abba Gold - Greatest Hits (re-entry, 차트 재진입) / Jan 1999 4위 Abba Gold - Greatest Hits (re-entry, 차트 재진입) / Apr 2004
*해체 이후
해체 이후에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각자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프리다"는 "아바" 해체 직전인 1982년에 첫 솔로 영어 앨범 작업에 착수하여 "필 콜린스"가 프로듀싱한
"Something's Going On"을 발표했다. 1984년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환경운동에 몰두 하다가 1996년 스웨덴어 앨범을 다시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환경운동과 관련된 자선행사에 몰두하면서 다른 가수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한다.
"프리다"는 "리얼 그룹"이 리메이크한 "Dancing Queen"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리얼 그룹"은 이 노래로
1995년 "CASA(미국 현대 아카펠라 협회) 어워드"에서으로 최우수 컨템포러리 커버상과
"Flight Of The Foo-Birds"로 최우수 재즈곡 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아카펠라 그룹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 런던 프린스 에드워드 시어터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에 대해 소개하는 "프리다"(2004년 4월)
2005년 스웨덴 스톡홀름,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에 나타난 "프리다"
"아그네사"는 1983년 "마크 채프먼"이 프로듀싱한 "Wrap Your Arms Around Me"를 발표했고 1985년과 1987년 음반을 발표했지만, 역시 '아바"의 명성을 잇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이후 음악활동을 중지 했다. 1996년 자서전 "As I Am" 발표하며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2004년 봄, 17년만에 신보를 발표하며 컴백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에 나타난 "아그네사"(우측)
"비요른"과 "베니"는 영국의 작사가 "팀 라이스(Tim Rice)"와 함께 뮤지컬 [체스(Chess)]를 완성해 1985년 공개했다. "아바"의 명성에 비할수는 없었지만 이 작품은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이 두사람은 1999년 런던에서 "아바"의 노래를 묶은 뮤지컬 "Mamma Mia"를 제작하여 초연에 올렸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2년후 이 뮤지컬은 미국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2004년 4월 기준으로 1천 7백만명이 이 공연을 봤으며 아직도
세계 각국에서 공연중에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 1월 첫 무대에 올랐다.
참고) "Mamma Mia"는 1975년 호주에서 첫 싱글로 발표되어 호주차트 1위에까지 오른 히트곡으로 "아바"는
호주에서 6번 1위를 기록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무대 인사(좌측부터 2번째 "비요른", 4번째 "베니")
두 사람은 2002년 5월에 "영국 작곡, 작사가 협회"에서 수여하는 "Ivor Novello Award"에서 "아바"의 음악이
팝뮤직계에 공헌을 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특별 국제상"을 수상했다. (2001년 "베니"는 12년만에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 무대에서 인사하는 "비요른"(우측)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에서 "베니"(좌측)
그룹의 해체 이후에도 "아바"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고, 다양한 형태의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계속 발매되며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1993년에 발매된 히트곡 모음집 [Gold: Greatest Hits]다. 영국 UK 앨범 차트에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1천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이 앨범은 지금까지 2천 2백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아바"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 앨범은 팝뮤직계에서 아바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피제이 호건(P.J. Hogan)"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뮤리엘의 웨딩(Muriel's Wedding)]에 "아바"의 노래들이 사용되면서 신세대들에게 "아바"는 새로운 열풍을 일으켰는데,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아바"를 재평가하는데 공헌했다. "아바"는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던 팝시장에서 변방국인 스웨덴 출신이었다는 점과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영국 음악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 들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히트한 스웨덴 출신의 "아바"가 미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단 하나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이 다소 초라해 보이지만 "사실상 기적과도 같은 1위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 변방국 출신의 "아바"의 빌보드 1위는 대단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아바"는 미국에서 재평가 되었는데, 1990년대에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뒤늦은 아바열풍이 일기도 했었다. 그리고 현재 "아바"는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위대한 그룹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바"는 "비틀즈"만큼이나 중요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하면서 여전히 문화,
산업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04년 4월, "아바"가 소속되어 활동했던 [폴라 뮤직]은 "Waterloo(1974년 발표)"의 3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시장 데뷔작인
이 곡을 재 발매했다. 보너스 트랙들과 기념 부클릿, 그리고 1974년 유러비전 송콘테스트 공연 모습이 담긴 DVD 등을 포함한 이 호화로운 패키지는
많은 "아바"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전설로 남고싶은 "아바"
"아바"의 히트곡 모음집은 아직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이 말은 해체된지 20년이 넘은 "아바"의 음악이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으며, 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같다.
매년 열리는 "아바"의 기념 행사장에는 수천명의 열혈 팬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아바"의 음악은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국내의 경우, TV 드라마 [세친구]는 "아바"의 "Honey Hony"를 에피소드 사이에 시용했고 "예지원"이 출연했던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아바"의 음악들로 드라마 배경음악을 사용했고 사용된 음악들로 "아바 편집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아바"는 시대를 초월한 문화 아이콘이 된 셈이다.
"마돈나"가 샘플링한 "Gimme Gimme Gimme" 같은 노래들은 지금 들어봐도 세련미가 철철 넘쳐 "이 노래가 과연 그 당시 노래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중에서 "아바"를 모르거나 "아바"의 음악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였던 "아바"는 그 세대 사람들에게는 진향 향수가 묻어 있는 추억과도 같은 존재이며,
요즘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경이로움에 존경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아바"는 전설이 되어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을 것이다.
끝으로, 2003년에 접한 "아바"의 외신보도 내용 하나를 소개한다. 이들과 같이 동거동락하며 오랜기간 활동했던 메니저 "스틱 앤더슨"의 생일파티에 "아바"의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한 레코드 회사의 대표가 "다시 그룹을 결성해서 앨범을 내준다면 몇백억이라도 아낌없이 주겠다"라고 제안을 했다. 이때, 이들의 답은 간단했다. "우리를 기억하는 팬들은 지금처럼 늙어버린 아바보다는 예전의 아바로 기억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해도 그들을 실망 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
첫댓글와~우!아바 팬들에겐 넘 소중한 정보네요!언제 이런 정보들을 ..아주 꼼꼼하기도 하시지...새삼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를 보면서 아바 노래가 영화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니까 더 가슴에 팍팍 와닿았던 기억이 나요.아바 노래가 특히 그 영화에서 듣기 좋았지요!기분이 다운될땐 맘마미아를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덕분에 즐감했어요~~
첫댓글 와~우!아바 팬들에겐 넘 소중한 정보네요!언제 이런 정보들을 ..아주 꼼꼼하기도 하시지...새삼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를 보면서 아바 노래가 영화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니까 더 가슴에 팍팍 와닿았던 기억이 나요.아바 노래가 특히 그 영화에서 듣기 좋았지요!기분이 다운될땐 맘마미아를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덕분에 즐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