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9일 밤12시가 넘은 시각, 서초동에 있는 한 허름한 포장마차 안에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과 "이시대 최고의 소리꾼"이 나란히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기묘한 장면이 벌어졌다.
"이야기꾼"과 "소리꾼"은 새벽 3시가 가까워지도록 끝도 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용필은 최인호를 "인호형"이라고 불렀고, 최인호는 조용필을 "용필아" "너"로 불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가까워진 것은 지난 84년 7월. 아사히(朝日)TV 주최로 열린 "한일 현해탄 선상(船上)토론"에 동행했을 때였다. 부산에서 페리호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의기투합( ? ), 꼬박 3일 동안 함께 신주꾸, 하라주꾸, 아까사까, 긴자 거리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단 "그저 일본, 일본인들이 어떠한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오히려 서울에서 자주 만나질 못했다. 작가 최인호도, 가수 조용필도 그동안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최인호는 최근 그의 50번째 작품인 장편소설 "地球人"을 냈다. "地球人"은 지금까지의 "최인호 스타일"과 "특이"하리 만큼 다른 역작(力作)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작가 자신도 "소설의 미(美)를 의식한 소설"이라며 자부심과 독자의 반응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조용필은 최인호를 만나자마자 "地球人"얘기부터 꺼냈다.
조용필 ―형. 지구인 잘 나간다면서요? 읽어 보니까 참 재밌더라.
최인호 ―어?! 용필이같이 바쁜 사람이 그걸 읽었어? 뜻밖인 걸….
조 ―왜요. 내가 형 팬인데. 저는 차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제 차 속에 지구인 상권이 있는데 현대 한 3분의 2쯤 읽었어요. 근데 그 책 속에 나오는 살인마 이종대의 동생이 요새 TV에도 가끔 나오는 이XX씨라면서요?
최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히야! 큰일났는데…. 물론 이 세상에서 나만 아는 사실은 아니지만, 비밀로 해야 하는 문제니까 그얘긴 퍼뜨리면 안돼.
조 ―알았어요…. 근데 지구인 주인공 스토리가 꼭 형 얘기 쓴 것 같더라.
최 ―하하하하하, 나한테 무시무시한 살인마적 요소가 보인다는 얘긴가?
조 ―아뇨. 전쟁의 일선에서 일어난 비극보다, 이 전쟁을 소년으로서 겪은 사람들의 고생이 어떤가를 너무나 잘 쓰신 것 같다는 얘기죠 뭐. 마치 본인 얘기처럼.
최 ―비슷한 연배니까….
조 ―사실 저도 형하고 한 5년 차이지만 동경에서 만났을 때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느꼈어요.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누구한테 지기 싫어 하고, 힘으로 못당하겠으면 몰래 뒤통수 까고 도망가고. 형이 그런 나의 형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형과 함께있으면 그냥그냥 좋은 거지 뭐. 난 형을 만나기 전 책으로만 알았을 땐 굉장히 이상적이고 서정적인 사람일 줄 짐작했는데, 딱 만나 보니까 그야말로 보통 사람이더라구요.
최 ―그랬어? 하하. 난 용필이 그때 술집에서 막 노래 부르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 피곤했을 텐데도 그 비싼 노래를 공짜로 한 스무곡 메들리로 부르더라구. 이 친구 노래 부르는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구.
조 ―우리 어디 노래 부를 수 있는 데로 갈래요? 내가 밤새도록 노래 부를께요.
최 ―아냐아냐. 그런데 선배로서 얘긴데 용필이에게 가정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전에도 얘기 했었지. 험악한 세상에서 믿을 건 색시밖에 없고 믿을 건 네집밖에 없다고. 와이프 예쁘더라, 야. 너보다 낫더라. 들리는 소문으론 네가 나보다 와이프 관리 더 잘한다고 그러더라. 대단히 잘해 준다며?
조 ―나는요, 부부란 서로 이해 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최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마흔이 넘으면 그게 아니야.
조 ―글쎄…마흔이 안넘어서 잘 모르겠지만 서로 이해해 주고 살 수 있어야 진정 부부일 것 같아요. 난 결혼전에 일단은 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결혼 후에 내가 유명해져서 스케줄이 바빠졌다면 별별 생각이 다 들지 않겠어요. 아무튼 날 이해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와이프한테 감사해요.
최 ―부부라는 게 내가 보기에는 그 이해라는 게 아닌데…. 난 결혼을 일찍, 24살 때 했어. 그땐 그냥 남자 여자같이 살고 뽀뽀하고 돈벌어다 주고 그러면 되는 줄 알았어. 근데 그것만이 아니야. 수신제가(修身齊家)가 그렇게 어렵더라구. 나 성기(영화배우 안성기) 결혼식 때 가서 울었어. 가톨릭 의식으로 진행됐는데 주례가 신랑신부에게 무섭게 물어봐. "이 결혼이 자의에 의한 것이냐 타의에 의한 것이냐?"고 보통은 그냥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네"하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거기선 세 가지를 끝까지 읽어야 돼. "나는 타의가 아니고 분명히 자의입니다" "나는 영원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남편을 사랑하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고. 옆에 증인까지 세워 놓고.
조 ―그걸 보고 어떤 결론을 내렸어요?
최 ―결혼 생활, 참 무서운 거로구나 느꼈어. 차아암 무서워.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고. 내 요즘 느끼지, 아 결혼이란 무서운 계약이로구나 하고, 한평생 한 부부가 80을 살았다 하더라도 밥먹고, 섹스하고, 애낳고 같이 살 수는 있어. 하지만 과연 행복했느냐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야.
조 ―난 결혼이란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인생이 60이라면 60이 되기 까지 혼자 살기는 참 힘들다는 것. 그러니까 하나 데리고 가는 거예요. 말동무를요. 난 지금은 편안해요. 집에 가면 따뜻한 이부자리가 있고 따근한 밥상이 있어요.
옛날엔 술 취하면 침대 바닥에서도 자고, 문지방에 걸쳐서도 자고, 아무데나 오줌 누고, 찬 방에서 담요 하나 덮고 자고… 그 이튿날은 주먹이 떠오르더군요. 난 정말 외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절실할 때, 세상의 고민, 세상의 고독, 세상의 사랑을 갈구하고 싶을 때 그것을 글로 옮긴다든가 오선지로 옮기면 굉장히 진실한 작품이 나오곤 했어요.
지금은 행복해요. 역시 동반자가 있으면 일을 하나 맡겨 버리거든요.
그러나 일에 대한 집념이나 자기의 결심 내지 욕망은 한풀 꺾어지는 것은 사실예요. 일을 바로 그냥 직선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바로 여자예요. 하지만 와이프란 이 세상에 없어선 또 안되는 존재예요. 결국 나를 도와주는 건 와이프더라구요.
최 ―그래. 와이프한테 잘해 줘라. 이해해 주길 바라지 말고. 난 진짜 그렇더라. 집에서 밤에 글쓰다가 여편네 잠자는 얼굴 들여다보는 것이 굉장히 좋아. 저게 나 하나 믿고 자는 구나. 저게 어떻게 나하나 믿고 코까지 골고자나 하는 샹각을 하면 참 기분 좋아. 별일도 아닌데 그건 참 경이야. 미러클이야, 기적이라구. 용필이도 애 하나 빨리 낳아. 와이프 예쁘더라. 임신은 안했어?
조 ―헤헤. 내가 재주가 없어서….
최 ―사랑이란 달콤한 것이 아니야. 빛과 그림자야.
조 ―그래요. 참, 8월15, 16, 17일 3일 동안 3부작으로 방송국에서 제 프로그램 하는데 형도 그때 오세요.
최 ―무슨 프로인데?
조 ―결국 이번 프로그램은 우리가요의 대명사를 붙이는 작업이죠. 외국 나갔을 때 "우리는 칸쪼네가 있다" "우리는 샹송이 있다. 당신네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하느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이미자씨를 뽕짝가수라고 하더니 애매하게 엘레지의 여왕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억지로 붙인 명칭 아니에요? 이제 우리의 가요에도 대명사가 붙을 때가 됐단 말예요.
최 ―그럼 향가(鄕歌)라고 하지 그래. 향가가 일본에 가서 결국 엥까(演歌)가 됐다구.
조 ―네. 향가도 있었고, 단가도 있었고, 청가도 있었고, 나중엔 창가도 나왔어요. 제가 몇 십가지를 놓고 그 유래를 알아 보았는데 "애" 자(字)밖에 없었어요. 사랑 애(愛)자와 슬플 애(哀)자를 합친 거죠. 그러면 "애가"라고밖에 할 수 없잖아요? "애"라는 말은, "아이"의 합친 말인데 "아이"에 대해 국문학자를 찾아가 물어 봤더니 원래 "인간"이라는 뜻이었대요. "인간"이란 표현의 "아이"라 했었대요. 그런데 점차 변화되어 "어린이"로 됐다고 하더군요. 여러 모로 따져 봐도 "애가"가 좋은 것 같아요.
다가오는 86 아시안 게임, 88올림픽에서 외국인들에게 발음도 어설프게 들리지 않겠고. 미국놈은 "애카" 일본놈은 "애까"뭐 그런 식으로 비슷하게 부를 수 있지 않겠어요? 처음엔 "한가"(恨歌)라고 하고도 싶었어요, 근데 너무 퇴색적인 것 같아…….
최 ―그래. 우리나라 문화의 특색이 한이라잖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엔 귀신이 많아. 외국 귀신은 재미있다구. 어린애 하고도 놀아요. 꼭 E.T.같애. 고스트 바스터 같다구. 그런데 우리나라 귀신은 꼭 흰옷 입고 칼 물고 원한을 풀어야 해. 한 때문이야. 창(唱)을 보아도 "여보게 내 말좀 들어 보소"로 시작을 하지. 시어머니 한이 "내 말좀 들어 보소"로 나오는거야. 그건 문제가 많아. 객관화 시선이 아닌것이야.
어떻게 우리나라 문화가 한이야! 한은 굉장히 미숙아인데 어떻게 우리나라 문화를 미숙아로 보느냔 말야. 한은 안좋은 거야. 남편 죽은 젊은 과부가 머슴이 좋으면 머슴하고 사는게 진실이지 왜 은장도로 자기 살을 찢으면서 수절을 해. 그러니까 유령이 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하고 뽀뽀하면 어떻게 한이 맺히니, 어떻게?
조 ―제 생각에도 한은 버렸으면 좋겠어요.
최 ―미 투(Me too)! 참 근데 일본가서 보니까 용필이 너 아주 당당하더라.
조 ―걔들은 모래민족 아니에요, 우린 바위 민족이구. 일본 애들이 깜짝 놀라도록 바다에다 우리 바위를 풍덩 한번 던져 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우리 세대엔 힘들 것 같아요.
최 ―우리 아들 시대엔 되겠지 뭐. 근데 난 용필이한테 부탁할 건 딱 하나뿐이 없어. 술 먹지 마.
조 ―예 알았습니다.
최 ―안성기한테 얘기 들었는데 너 참 어려운 시절 보냈더구나. 여기까지 용케 살아온 게 신통할 정도로, 하하.
조 ―하하하. 애들은 몰라요(취재 기자를 가리키며), 애들은 모른다구요.
최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게있어. 내가 만난 PD나 기자들이 전부 너 칭찬만 하는게 그게 이상한 거야. 넌 톱이야. 남한테 욕 좀 먹어도 돼. 열명 중 두명쯤은 "그 새끼 건방지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이야. 너 너무 KBS란 미명 하의 자선파티에 자주 나가지 마라. 건방지게 좀 굴어. 무슨 얘기냐 하면 널 좀 아끼라는 얘기야. 알갔어?
조―글쎄요….
최―지금 가장 무서운 게 뭐니? 아니면 원하는 게 뭐니?
조―무서운 건 없어요. 원하는게 있다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다시 가요계에 돌아오지 않는 은퇴식을 꼭 갖고 싶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 때가 꼭 있을 거예요. 날 위해서, 내 와이프를 위해서…. 지금까진 진정 날 위해서 살진 않았어요. 나중에 꼭 날 위해서 살 거예요.
최―난 용필이 네 노래 중에서 "단발머리"가 제일 좋더라. 그게 피크야.
조―저도 그래요.
최―노래에 너무 무게 주려고 하지마. 마치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려고 힘을 주면 더 안맞는 거야. "단발머리"할 때 참 싱싱했어.
조―형! 형수님은 주무실 테니까 저희집에 가서 한잔 더 마셔요.
취기가 한껏 오른 두 사람의 얼굴을 새벽 3시의 맑은 밤 바람이 휘감고 지나갔다. "이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은 만년필을 꺼내 "이 시대의 최고의 소리꾼" 에게 백지에 "初心"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건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