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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8-22 하늘에 오르사 2006. 5. 3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일상의 삶에서 무엇에 웃고 울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과 손에 잡혀지는 나의 몸의 상태에 따라 웃고 우는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과 어쩔 수 없는 포기, 그러다 다시 희망을 가지면서 자기를 닦달하기도 하고 위안하기도 하고 합리화하기도 하면서 분주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분주하게 사는 것은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살아서도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의 행위를 저울질 해 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가 무엇을 잘못 해서 이런 일이 왔는가를 생각하면서 무슨 선한 행위를 보태어서라고 그 어려운 순간을 빨리 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이 축적이 되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착한데 나에게 복을 주지 않고 누구에게 복을 주겠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보았던 17절 말씀에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방금까지 말씀드린 자기중심적인 계산을 가지고 고난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그 기준점이 이미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계산은 선악을 저울질 하면서 선을 축적한다고 하여도 악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가지의 기준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만 고난이냐 아니냐가 판가름 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선한 일을 하다고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에 그 고난이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내가 이렇게 의로운데 왜 고난이 오는가 하면서 자기를 항변하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도되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았습니까? 거의 그런 경우가 없지만 혹 그런 일이 있는 분이라면 ‘그리스도께서도’ 라는 말씀 앞에서 입을 닫을 뿐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유의 주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까?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신 것은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고난인 것입니다. 한 번이라고 한 것은 한 번으로 완성이며 영원한 것이기에 한번입니다. 이 한번 고난을 받으신 것은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반드시 고난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며 그 고난에 참예시키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7-12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동안 유익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의가 무너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오는 것인데 그 믿음조차 하나님께로 온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 받아 그 고난에 참예함으로 그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조차 그리스도에게 잡혔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이란 단지 자기 개인이 무슨 의로운 일을 한 결과로 고난이 오고 그 고난을 이기고 견디면 나중에 그 개인에게 큰 상이 돌아가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구원관이란 역시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참예시키시고 부활에도 참예 시키는 것이 이 역사 속에서는 성도의 고난으로 연결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을 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입을 갑옷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갑옷인 것입니다. 이 고난의 옷을 입음으로 죄가 그쳐지고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까? 감사할 일입니까?
베드로후서 3:19-2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난해 구절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제가 보기로는 두 가지의 의미로 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도 영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죽은 자가 갇혀있는 옥에까지 선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시대에 어떻게 전파 된 것인지 베드로전서 1:9-11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 부활의 영광이 옥의 영들에게까지 다 선포가 된 것입니다. 즉 노아 방주시대 때에 불순종하여 물로 인하여 멸망당한 그들이 갇혀있는 곳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증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지금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일들도 바쁜데 언제 죽음이나 종말을 생각할 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홍수가 노아 600세 되던 해 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약 천년 가까이 살았기에 사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수가 10분의 1로 줄었지만 모든 것이 빠른 시대이기에 그 때에 천년을 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 백년 미만을 살지만 노아시대보다 더 바쁜 시대가 오늘 이 시대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에 잠시 한숨 돌리면 이미 뒤쳐져 버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자고 하는 사람들이나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노아가 따돌림을 당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시대에 구원 얻는 자가 겨우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가정 수로는 한 가정입니다. 왜 그렇게 구원 얻는 자들이 적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든 것은 그 당시의 기술로도 걸려야 하는 시간이지만 그러나 그 기간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에게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노아의 가족만 그 일에 묵묵히 감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 가족이 먹고사는 일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정말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하고 나머지는 전력으로 방주를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새집을 사고 유행하는 옷을 사고 그러기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노아의 가족은 그런 일에 시간을 빼앗길 틈이 없었습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기 위하여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준비를 할 수가 있었습니까?
창세기 6:9절에 보시면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노아의 방주의 준비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멀쩡한 날에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하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며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1:29절에 보시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왜 주신 것입니까? 나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이 방주를 만들던 시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노아 홍수 때의 그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로 인하여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은혜를 입어 방주를 예비한 것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심판과 구원을 미리 증거 한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이 임한 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것은 율법에서 더러운 몸을 씻는 것처럼 씻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집행하시는 자리입니다.
그 하늘에 오르심의 소식이 이제 지옥에 까지 다 선포가 된 것입니다. 노아시대에 노아를 우습게 보며 불순종 하던 자들과 모든 시대에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도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가 선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하늘과 땅과 지옥에까지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노아처럼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오르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나마 나와 세상이 간곳이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