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은 식견을 세상을 위해 쓰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삿갓 같은 시인의 존재는 내게 지식인을 고작 말장난이나 하면서 경계인으로 떠돌다 죽게 만든 병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일깨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 긴 밤을 한숨쉬며 애태웠을까? 분노를 삭이고, 재기를 꿈꾸면서, 안타까운 후회와 허망한 희망으로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지만, 막상 먼동이 하얗게 터오고 나면 남는 것은 불면의 피로와 부질없는 생각의 형해(形骸)뿐이다. 노긍(盧兢, 1737~1790)은 우리에겐 아직 낯선 이름이다. 자를 신중(慎仲)이라 하였다가 뒤에 여임(如臨)으로 고쳤다. 살얼음을 밟듯 물가에 임한 듯 조심조심 살려 했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자 한원(漢源)은 문장의 근원이 마치 한강물의 도도한 흐름과 같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문체가 꽃구슬을 흩은 언덕과 같다 해서 산주파(散珠坡), 그 살던 집이 복사꽃이 흐드러진 골짝에 있다 해서 도협(桃峡)이란 호를 쓰기도 했다.
1976년 문중에서 전해오던 글을 수습하여 영인한《한원문집(漢源文集)》때문에, 그의 글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노긍의 아버지 노명흠(盧命欽, 1713~1775)은 야담집 《동패낙송(東稗洛誦)》을 엮은 사람이다. 부자가 모두 과시(科詩)에 있어서는 당대에 겨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영정시대 시파(時派)와 벽파(辟派)가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와중에, 시파의 홍봉한(洪鳳漢) 집안 문객으로 수십 년 간 얹혀 살았다.
정조 즉위 후 정권의 향방이 달라짐에 따라, 노긍은 즉각 벽파의 미움을 사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팔아 선비의 기풍을 무너뜨렸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위원(渭原) 땅에서 6년 간 귀양살이를 했다. 말하자면 그는 과거시험 답안 대필업자였던 것이다. 애써 갈고 닦은 문필의 실력을 그는 고작 남을 위해 답안지를 대신 써주는데 써먹었다.
그런데 이런 한심한 인간이 세상을 뜨자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이렇게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수천 리 둘레에서 하루에 태어나는 자가 몇이며 죽는 자가 몇이던가. 태어나도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고, 죽는대도 사람 수가 더 줄어들지 않는 그런 자야 어찌 헤일 수 있겠는가? 영조 14년(1738) 12월 18일, 광주부(広州府) 쌍령촌(双嶺村)에 산이 운 것이 세 번이요, 시내가 운 것이 세 번이었다. 그리고 노긍이 태어났다. 정조 14년(1790) 5월 3일에 자최로 연복(練服)을 입고 예법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그 이튿날 문간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정침에 돌아와 갑작스레 눈을 감더니, 노긍이 죽었다.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가환의 <노한원묘지명(盧漢源墓誌銘)>의 서두다. 태어나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목숨이야 어찌 일일이 손꼽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가환은 그가 태어나 조선은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한 사람을 잃었다고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해 고작해야 잘 나가는 논술학원 족집게 강사였고, 그나마 남의 답안지를 대필해주다가 걸려서 귀양 갔던 기구한 운명이 이 사내에게 그는 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내렸던 걸까?
이어지는 글에서 이가환은 노긍이 증광회시(増広会試)에 응시했을 때 동향의 늙고 곤궁한 선비가 빈 답안지를 안고 비척대는 것을 보고는 선뜻 제 원고를 그에게 주어버린 일을 적고 있다. 덕분에 그 선비는 높은 등수로 합격했다. 노긍은 아쉬워하기는커녕 일소에 부치며 즐거워했다. 이가환이 묘지명에 이런 내용을 적은 것은, 그가 과거 시험장에서 돈을 받고 답안지를 팔았다는 죄가 사실은 이런 종류의 것이었음을 변명해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노긍은 과거시험을 보기만 하면 급제를 했다. 하지만 급제를 하면 뭐하나? 급제는 명예를 더할 뿐 그와 같은 몰락한 잔반(残班)에게 정작 벼슬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급제를 여러 번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권세가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가 먹고살 도리를 닦는 것이 더 나았다. 제 답안지를 남에게 건네주는 그의 행동에는 시대를 향한 싸늘한 냉소의 기미마저 느껴진다.
귀양갈 당시 노긍은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채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더하여 아내의 상까지 만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 그의 큰아들은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제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다 강원도 간성 땅으로 귀양을 갔다. 집에는 어린 자식들이 어미도 없이 귀양간 아비와 제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러봐도 살길은 참으로 막막하기만 했다.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팔아먹었다는 죄를 입어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 찬 방에 새우등을 하고 누웠을 때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스쳐갔을까? 한밤중에 떠오른 갖가지 생각에 대해 쓴 그의 작품 <생각에 대하여[想解]>는 이러한 기막힌 상황에서 쓰여진 글이다.
내가 변방에서 죄를 입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밤에 간혹 구부려 누웠다가 망녕되이 정이 일어나면, 인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리저리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용서를 받아 풀려나면 어찌할까? 고향을 찾아 돌아가서는 어쩐다지? 길에 있을 때는 어찌하고, 문에 들어설 때는 어찌하나? 부모님과 죽은 아내의 산소를 둘러볼 때는 어찌하며, 친척 및 벗들과 둘러모여 말하고 웃을 때는 어찌하나? 채소의 씨는 어찌 뿌리며, 농사일은 어떻게 할까? 하다 못해 어린애들 서캐와 이를 손수 빗질하고, 서책에 곰팡이 피고 젖은 것을 마당에 내다 볕 쬐는 데 이르기까지 온갖 세상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일이란 일은 전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뒤척이다 보면 창은 훤히 밝아왔다. 막상 이루어진 일은 하나도 없고, 변함 없이 위원군(渭原郡)의 벌받아 귀양 온 밥 빌어먹는 사내일 뿐인지라, 생각을 어느 곳으로 돌려야 할지, 문득 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하여 마침내 혼자 실소하고 말았다.
하룻밤에도 수없이 떠오르는 갖은 상념들을 주체할 길 없어 쓴 글이다. 낯설고 물선 귀양지에서 밤새 잠 못 이루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생각은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혹시 내일 아침 석방을 알리는 통지서가 날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상 고향집 문앞에 서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들어선다지? 집에 간댔자 이미 반가운 얼굴로 맞아줄 아내도 죽고 없다. ‘여보! 당신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고 붙들려 간 남편이 돌아왔소. 미안하구려! 평생 고생만 시키다가 마지막 떠나는 자리조차 내 손으로 가늠하지 못하고 말았소.’ 아내의 무덤 앞에 서서 고작 이런 말밖엔 할 수가 없을 테지. 반갑다고 몰려든 친척과 벗들 앞에서 좋다고 웃어야 하나? 아니면 기가 막혀 울어야 하나?
이 세상에 잠 못 드는 많은 영혼들의 안타까운 바람과 한숨만으로도 세계는 가득 차 넘칠 것이다. 허황한 망상이 아침해와 함께 말짱한 꿈으로 흩어지고 나면, 귀양지의 낯선 방에서 웅크려 누운 초라한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오늘밤 오경 중만 하더라도, 부서진 오두막집 속에서 다시금 몇 천만 명의 사람이 천만 가지 생각을 일으켜 세계에 가득 차고 넘침이 있으리라. 뒤로 이득을 취하려는 생각도 있겠고, 내놓고 이름을 얻으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귀하게 되어 한 몸에 장상(将相)을 아우르고픈 생각도 있을 테고, 부자가 되어 재물이 왕공(王公)처럼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겠지. 그런가 하면 처첩이 방에 가득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겠고, 또한 자손이 집에 넘쳤으면 하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저를 뽐내고 이기고 싶은 생각도 있겠고, 남을 해코지하고 틈새를 이용하려는 생각도 있을 터이다.
원래 한 사람도 없었고 애초에 한 생각도 없었기에, 이 또한 창이 훤히 밝아오면 한 가지 이뤄진 일이 없고, 변함 없이 가난한 자는 도로 가난해지고 천한 자는 다시 천하게 되며, 이씨는 다른 이씨로 돌아오고 장씨는 다른 장씨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대개 전생의 바탕을 지금 세상에서 받아쓰는 것이니, 조화옹은 목이 뻣뻣하여 이러한 사람의 정리는 돌아보지 않고, 한 차례 기록함이 결정되고 나면 다시는 두 번째로 표시를 고쳐주는 법이 없다. 설사 멋대로 이리저리 헤아려 이렇듯이 교활하고 어지러이 정신을 벗어나게 하여 십만 팔 천리에 통하게 하더라도, 근두운(筋斗雲)을 탄 손오공의 재주로도 뛰어봤자 울타리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가봤자 경계의 밖을 지나가지 못할 터이니 어찌한단 말인가?
오늘 또 먹던 대로 밥 먹고 입던 대로 옷 입고 있는데 염라대왕의 검은 옷 입은 저승사자가 신속하게 비첩(批帖)을 가지고 이르게 되면, 올라갈 때 길을 나섬은 감히 머뭇대지 못할 터이다. 지금까지의 천만 가지 생각들은 뒤에다 죄 내던져버리고, 단지 머리를 푹 숙이고 따라가면서 마침내 내가 많고 많은 숙원이 있고 생각의 실마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일정을 늦추어달라고 빌어보지도 못할 것이다. 쯧쯧! 이렇게 가는 길이 바로 종국에 떨어져 내려가는 곳일 터이고, 이처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바야흐로 첩첩이 쌓인 것을 타파하고 일을 더는 방법이 될 것이다.
답답하기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전생의 업보를 지금 생에서 받아 쓸 뿐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싶었던 거겠지. 오죽 답답했으면 손오공의 근두운 생각을 다 했을까? 그래봤자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듯, 아무리 발버둥쳐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숨막히는 현실을 그는 비관했다. 많고 많은 숙원을 이룰 수 없을진대 밤마다 쓸데없는 몽상으로 헛된 꿈을 계속 꾸던가, 아니면 저승사자가 염라대왕 앞으로 하루 속히 데려가 이 천만 가지 헛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말은 장황하게 했지만,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생각 저 생각 할 것 없이 모든 것 훌훌 털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라는 뜻이었을 게다.
글 중에 손오공의 근두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서유기(西遊記)》를 즐겨 읽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당시에 함부로 쓸 수 있는 표현이 아니었다. 심지어 과거 시험 답안지에 고동서화(古董書画)란 표현을 썼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되기까지 하던, 문체 검열이 심각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표현들은 요즘 식으로 말해 자본주의의 물을 먹은 중국의 도회지 것들이 즐겨 쓰던 것이었다.
성현(聖賢)의 바른 학문을 익혀 세상을 건지는데 앞장을 서야 할 젊은이들이 이런 경박하고 감각적인 표현에 매료되어 흉내내는 것을 임금 정조는 나라가 망할 징조로 보았다. 사상 유례가 없는 문체반정(文体反正)이라는 검열 장치는 새로운 문체 속에 잠재된 불온한 변화의 조짐을 읽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고동서화와 같은 평범한 표현도 검열에 걸리는 판에 그는 아예 금서(禁書)로 지목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타던 근두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노긍은 참 답답한 사람이다. 왜 그는 그 높은 식견과 포부를 품고서도 고작 남의 집 사랑채의 식객 노릇으로 절대 궁핍 속에 일생을 마치고 말았을까? 과거에 급제하고도 남을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왜 늘 남 좋은 일만 하고 다녔을까? 그럼에도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과거 답안이나 대필해주는 글쟁이일 뿐이라고 욕하지 않고, 그 문장과 식견을 그렇듯 높이고 아꼈을까?
노긍이 지은 <죽은 종 막돌이의 제문[祭亡奴莫石文]>을 보자. 노긍이 채막석, 아마도 채막돌이라고 불리었을 죽은 노비를 위해 지어준 제문이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주인은 글로써 죽은 종 막돌이의 장례에 고하노라. 아아! 너의 성은 채씨이고, 네 아비는 관동의 양인이었다. 너의 어미는 내 외가의 여종이었다. 네 아비가 내 말고삐를 잡은 지 20년에 마침내 길에서 죽어 내가 남원 만복사에 이를 장사 지냈다. 네 어미가 내 몸을 봉양한 것이 30년인데 마침내 집에서 죽으니, 내가 공수곡의 서산 아래에다 장사 지냈다. 네 형이 나를 수십 년 동안 부지런히 섬기다가 또 집에서 죽으니, 내가 또 이를 장사지냈다. 이제 네가 또 자식 없이 죽으니, 너희 채씨는 마침내 씨가 없게 되었구나.
네가 태어나 세 살 때 네 아비가 죽었고, 여섯 살에는 네 어미가 죽었다. 너의 안주인이 거두어 길렀으나, 주리고 춥고 병들어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하였었다. 네 안주인의 상을 당했을 때 너는 고작 오척의 어린애였으나, 머리털은 헝크러져 괴이하였고 다만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파리하였다. 내가 또 재앙을 만나 부자가 흩어져 있을 때, 너는 동해 바닷가까지 만리길을 울부짖었고(아들이 간성 땅에 귀양가 있었다), 또한 서쪽 변방 밖(아비는 위원 땅에 귀양가 있었다)까지 눈과 서리, 더위와 비를 맞으며 발바닥이 갈라지고 이마가 벗겨지도록 왕래하면서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또 가난한 집에 종살이 하면서 두 눈이 늘 피곤하여, 일찍이 단 하루도 일찍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등 긁고 머리를 흔들면서 맑게 노래하며 환하게 즐거워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배를 가른다면 반드시 붉은 것이 있어 마치 불처럼 땅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니, 평생 주인을 향한 마음이 담긴 피인 줄을 알 것이다.
네가 이제 땅 속에 들어가면 네 아비와 어미, 네 형과 너의 안 주인과 작은 주인이 마땅히 네가 온 것을 보고 놀라 다투어 내가 어찌 지내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근년 이래로 온 몸이 좋지 않아 이빨과 터럭은 시어져서 몹시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말하여 다오. 그러면 장차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낯빛이 변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사대부가 죽은 노비를 위해 제문을 지어준 것 자체가 파격인데, 그 내용 또한 너무도 절절하다. 그 속내를 노긍의 입장으로 옮겨 보면 이쯤 될 듯 하다.
‘막돌이의 아비는 지난 20년간 언제나 내 말고삐를 잡고 따라 나섰던 하인이었다. 길에서 죽은 그의 아비를 남원 만복사에 묻고, 그의 어미와 형이 다시 나를 섬기다 세상을 뜬 뒤 막돌이마저 자식 없이 죽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채씨의 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여섯 살에 고아가 된 너를 내 아내가 거두어 길렀고,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너는 그 은공을 잊지 못해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끽끽 울며 괴로워했다. 또 우리 부자가 재앙을 만나 평안북도 위원 땅과 강원도 간성 땅에 각기 귀양가 있을 때에도 그 먼 길, 그 고통을 마다 않고 발바닥이 갈라지고 이마가 벗겨지도록 왕래하며 심부름을 해 주었었다. 내 집에서 지낸 그 어느 하루도 너에겐 편안한 날이 없었다. 언제 실컷 잠 한 번 자본 적이 있으며, 언제 콧노래 한 번 불러본 적이 있었더냐. 명색 주인된 자로서 나는 이것을 깊이 부끄러워한다.
아아! 막돌아. 이제 편히 눈을 감으려므나. 이제 지하에 들어가 평생에 지친 몸을 누이면, 먼저 간 네 부모와 네 형, 내 아내와 내 동생이 널 보러 달려올 테지. 그리하여 다투어 나는 어찌 지내고 있더냐고, 그 사이에 다른 변고는 없었느냐고 물어볼테지. 그러면 너는 이렇게 대답해다오. “네. 주인님은 요즘 온 몸 어데고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이빨은 흔들리고, 터럭 위엔 흰 눈이 내렸습지요. 이런 저런 세상 시름에 찌들어 벌써 늙은이가 다 되어 버린걸요.” 그러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얼굴빛이 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막돌아. 이제 나 혼자만 이렇게 남았구나.‘
말이 좋아 막돌이의 제문이지 결국은 자기 신세 타령이다. 중년 이후 영락에 영락을 거듭했던 집안과 스스로의 기막힌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을 표백했다. 한데 그 정황이 참으로 눈물겹고 슬프다. 요컨대 그는 한 세상 건너가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 이쯤 해서 삶을 끝내고만 싶었던 것이다.
이가환은 <노한원묘지명>에서 다시 이렇게 노긍을 회고한다.
노긍은 기억력이 뛰어나 고금의 서적을 한 번 보기만 하면 대략 외울 수가 있었다. 특히 시무에 밝아 당대 인재의 높고 낮음과 어느 자리에 누가 마땅한지 하는 판단과 국가 계획의 좋고 나쁜 까닭을 하나하나 분석하매 모두 핵심을 찔렀다. 만약 그를 써서 일을 맡겼다면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근근히 문인으로 행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총명하고 명민함은 상민열(桑民悦) 같았고, 널리 경사(経史)에 해박하기는 진명경(陳明卿) 같았다. 기특한 재주와 높은 의리를 지녀, 오만하고 도도하며, 몸은 곤액을 당하였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서문장(徐文長)과 흡사하였다. 예전 원중랑(袁中郎)이 서문장을 평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가슴 속에는 마멸시킬 수 없는 한 가닥 기상이 있었으되, 영웅이 길을 잃어 발붙일 문조차 없는 슬픔을 지녔다. 그래서 그 시는 성난 듯 비웃는 듯 하였다. 물이 계곡에서 울부짖는 것 같고, 쇠북이 땅 속에서 나온 듯 하였다. 과부가 한 밤중에 곡을 하는 것 같았고, 떠도는 나그네가 추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식자들은 원중랑이야 말로 서문장을 알아준 환담(桓譚)이라고 말했다. 애석하도다. 노긍을 알아줄 환담은 어디에도 없구나.
시무를 논하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었고, 총명하고 해박함은 어떤 인물에도 뒤질 것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능력을 인정했고, 그 스스로도 자부했다. 높고 큰 뜻을 품었으되, 그에게 주어진 일은 나라를 위해 경륜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부잣집 과외선생에다 과거시험 답안지 대필의 소임뿐이었다. 그나마 입에 풀칠하자고 권문(権門)에 수십 년 식객 노릇을 하다가 돈 받고 시험 답안지 팔아먹은 놈이란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귀양살이를 했다.
한나라 때 양웅(揚雄)은 실의의 낙담 속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태현경(太玄経)》을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환담(桓譚)만은 그의 대단한 학문을 알아주고 인정했다. 불우하게 죽은 천재 문인 서문장(徐文長)은 또 사후이긴 해도 그를 알아준 원중랑(袁中郎)을 만나 후세에 썩지 않을 이름을 남겼다. 이가환은 글 끝에서 노긍이 죽은 뒤에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자신이 환담의 역할을 맡겠노라고 했다. 사실 이가환의 이 글이 아니었다면 노긍은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동생을 죽은 뒤 묻을 땅뙈기조차 없어 제 집 귀퉁이에 묻었다가, 그나마 이웃의 송사로 파낼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심정을 적은 <금장설(禁葬説)> 같은 글을 보면, 선비의 글 하는 구실과 보람에 대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시 한 수를 보며 글을 맺는다.
어린 손자 이제 겨우 걸음 떼는데 날 끌고 참외밭에 들어가누나. 참외를 가리키곤 입 가리키니 먹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걸세. 穉孫纔解歩 引我入瓜田 指瓜引指口 食意已油然
<어린 손자[穉孫]>란 제목의 시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손주 녀석이 뒤뚱대는 걸음으로 자꾸 할애비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잰다. 가자는 대로 따라나서니, 참외밭으로 끌고 간다. 어버어버 아직 말도 못하는 녀석이 노란 참외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모른 체 가만 있자, 이번엔 참외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킨다. “할아부지. 저거 맛있겠다. 따줘라. 응!” 맹랑한 녀석, 아직 이빨도 나지 않은 녀석이 참외를 따 달랜다. 할아버지는 손주와 노는 것이 영 꿈만 같다.
젊은 날의 꿈과 좌절과 절망을 다 접고 늙으막에 손주의 재롱을 받아주면서, 어쩌면 그는 하얗게 식은 재 속에서 자신은 이루지 못한 희망의 불씨를 새롭게 지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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