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카페에 들러보니~ '모택동'에 대한 글이 있더군요ㅎㅎ
'모택동'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대약진 운동' 기간의 중국인 아사자 수천만...
아놔~ 아무리 나라가 크다지만, 이렇게 많이???!!! 역시 중국은 경이롭고 놀라운 나라죠^^;
중국 역사서를 읽다보면~ 꼭 나오는 기사가 " 00 년, 천하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주려 죽었다.
자식이 부모를 형이 이우를 잡아먹고, 자식이 있는 집은 아이를 서로 바꾸어 먹었다(易子食之)..."ㅡㅡ;
중국 최후의 대제국인 청나라의 광서光緖 33년(1907년), 이해에 발생한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2000만...
중국이 이렇게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던 것은~ 중국의 지리적 조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중국의 농업생산 주요지역은 역대로 '황하', '회수', '장강' 유역의 대평원이었는데, 이 지역은 산조차 매우 드문지역이죠ㅎㅎ
평상시처럼 때맞추어 비가 내려주거나 자연재해가 적은 '풍조우순(風調雨順)'의 상황이라면~ 넓은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지만, '홍수'나 '가뭄'이라도 닥치는 날엔... 어휴...
워낙 넓은 평원이다보니 '홍수' 피해는 광범위해지는 것이 당연했고, 특히 '가뭄'이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산이 없다보니 나무가 없어 토양의 수분은 물론, 마실 물도 얻기 힘들었고, '가뭄'이 장기화 되면~ '초근(草根)'도 말라
없어지는 그야말로 '사막'과도 다름없는 '지옥'이 되기 일쑤였기 때문이죠ㅜㅜ
우리나라라면~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산의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는 건질 수 있었겠지만...
중국의 '왕조교체'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이런 자연재해가 나타나고, 뒤이어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모습이
반복되는데~ 이것도 고질적인 '기근(식량문제)'과도 관련이 깊다고 합니다^^;; 땅은 넓지만 농업지역은 그다지
넓지않았고, 이런 조건에서 오랜 평화가 지속되어 '인구증가'가 한계에 도달한 상황일 때 이런 '기근'이 닥치면,
이것이 '왕조교체'의 신호탄이 되었던 겁니다!!! 뒤이은 '혼란기'에는 어김없이 인구가 격감하고,
새왕조가 들어설 무렵이면~ 인구가 다시 '한계치'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전란기에 황폐화된 토지를
다시 개간하기 시작하면서 '식량생산'도 점점 늘어나게 되고... 이렇게 오래 평화가 계속되면~ 다시 이전처럼
'기근'으로 '왕조교체'가 반복되는... 이런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어왔죠ㅡㅡ;;
흔히 중국의 문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음식문화'인데요~ 중국은 예로부터 '식도락'을 즐기는 경향이
상당했고, 음식의 재료도 매우 다양해서 못먹는 것이 거의 없으며~ '조리법'도 가지가지죠ㅎㅎ
중국의 '식문화'가 이렇게 발전한 것에는 '기근'의 역할도 상당했습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먹을 것을
찾으면서 여러 음식재료를 이용한 것이 '다양성'의 발전으로~ 어떻게든 '먹을 방법'을 모색하면서 '조리법'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런 '기근'에 고통받던 농민들과는 달리~ '식량독점'으로 등따숩고 배부르던 지배층들의 경우는
중국인 특유의 '과시욕'과 맞물려 '미식'의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날의 '중화요리'가 되었다는군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대참극'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1996년부터
98년까지 '홍수'와 뒤이은 '기근'으로 100만, 혹은 350만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경신 대기근'이나
'을병 대기근' 때도 각각 100만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던 전례가 있으니~ 결코 안심할 수는 없겠어요ㅡㅡ;;;
첫댓글 연도에 좀 오기가 있는듯 한데. 광서제 제위 당시 대기근이라면 1870년대로 기억합니다. 이거 막장입니다-_-;; 73년에 산동,즈리(베이징 부근),호남,산서,섬서 일대에 가뭄이 들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3년 연속으로 가뭄,흉작이 겹치고. 여기에 의례히 그렇듯 기근으로 저항력이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역병이 돌았지요-_-;; 특히 산시의 경우에는 원래 농업에 불리하고 외부와 연결이 어려운 험한 지형인데다 메뚜기때 까지 겹쳤고. 77년에는 혹한까지 몰아닥쳤습죠. 결국 산서지방에서만 550만이 께꼬닥. 제가 가진 책에는 1876~79년의 북중국 기근희생자를 1300만 정도로 잡더군요. 이런 통계는 기록자에따라 고무줄이니 참고만 하십쇼.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1877년은 전세계적으로 가뭄이 들었던 해입니다 세계 대부분의 곡창이 기근이 든 무시무시한 사태가 발생했죠 ㄷㄷㄷ;;(조선의 전라도 지방도 피해지역이라고 하더라능...) 그 당시 인도와 중국의 아사자만 6천만 명에 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원인은 엘니뇨였다고 하던 것 같네요...(책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어쨌든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임) 근데 인도와 중국이 사망자가 너무나 많은 건 엘니뇨로 인한 기근과 제국주의 열강들의 수탈이 겹쳐서 나타났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니 강대국들이 힘으로 빼앗아간 셈;;
무장공비// 1878년 '화북 대기근'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ㅎㅎ 1907년의 '대기근' 기록도 제가 읽은 책에서 발췌한 것인데... 어찌 보아야할지...ㅡㅡ;
해동천자 / 1870년대의 화북 대기근 당시 광서제는 갖 즉위한 꼬마였습니다. 1907년이 광서 33년이면 광서제는 약 마흔줄의 중 늙은이-_- 확실히 다른 기근에 대한 기록이군요. 그나저나 그러다면-_-;; 광서제 제위기간중에 족히 2천만명 가까이 밥숫갈 놓는 극악의 대기근이 중국에 두번이나 일어났단 말입니까;;;;;;;
ps. 화북 대기근의 경우 7~8년 거의 10년정도 북중국을 휩쓸더군요. 78년 기근이 가장 극성을 부릴때 섬서 지역의 경우는 식인이 기승을 부려서 [혼자 돌아 다기니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기록이 나올정도로 말입니다-_-;;
프리드리히 / 예. 특히 인도의 경우는-_- 영국님하께서 전통 수공업 다 박살내고 상품성있는 작물만 골라 심게 함으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셨습죠. ㅅㅂ.
무장공비// 말씀을 들으니까~ 1907년의 '대기근'도 이 무렵의 몇 년치를 합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년에 그많은 사람이 죽는건 좀 무리인듯... 그리고 '산서성'의 경우, '진남(晉南)', 즉 '산서남부'는 상당한 곡창지대였다는데~ 이 일대를 '메뚜기'가 휩쓴 것일까요???ㅡㅡ; 이 동네(산서)도 살기가 만만찮았군요ㅎㅎ 명나라의 '가정 대지진' 때도 진앙지와 꽤 가까워 수만명이 죽어나갔고... ㅉㅉ 그래도 '원말 동란기'에는 고립된 지형조건때문에~ 북방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군요^^;
해동천자 / 섬서의 경우 77년에 가뭄으로 봄 밀 농사 말아먹고 메뚜기 크리에 여기에 먹을게 떨어진 사람들이 우마나 노새같은 가축을 도살하기 시작. 문제는 섬사가 대단히 폐쇄적인 내륙 지형이라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오는데 이런 가축들의 힘을 크게 의존 하고 있었다지요. 여기에 치안의 부재로 도둑마저 기승을 부리니 산더미 같은 곡식을 쌓아 놓은들 운송 수단이 없으니 구호활동은 안드로메다로;;;; 광서제도 참 불쌍하군요. 이게 다 서태후 때문입니다.
무장공비// 그렇네요!!! 생각해보니... '섬서'에서 비교적 교통이 원활한 지역은 '황하'와 '위수'가 흐르는 동남쪽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그냥 안습인 동네였죠ㅎㅎ 역시 '서태후' 할망이 지은 죄가 엄청나다는 생각밖엔...ㅡㅡ; 하기야 '환갑잔치'에 드는 비용을 '해군예산'으로 까는 양반이니...^^;
대약진 당시 사망한 사람은 2500만명.. 시골 집단 농장에서는 계속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농사방식을 바꾸자는 사람들을 계속 잡아가고 투옥하고 거꾸로 매달아서 잡아패죽이는등 비합리 적으로 운용하다가 계속 사망자가 늘자 도시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까지 이 소식이 전해졌고 그중에 한 여자 공장 근로자가 북경의 어느 담벼락에 집단농장에 대한 실상을 쭉 써놓고 공안에게 스스로 잡혀갑니다.그리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소문이 유소기에게 들어가서 진장조사에 들어가고 중국 전역의 대약진 운동의 실상이 낱낱이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한번은 지방 명소에서 모택동이 간부들과 식사를 하는데 야채에 기름을 많이 쓴 음식만
나오고 이 일로 모택동 스스로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표면적인 제스쳐가 언론에 포착되기 시작한것 같습니다(그걸 이제 인정하냐 병시나) 그래도 매번 신문에 올해는 힘들것이다 그러나 다음년도는 보다 상황이 나아질 것이고 매년 그렇게 되고 있다 라고 애매한 대약진 운동의 성과를 보도하게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높은분이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경악한 적이 있었다는.
유소기나 팽덕희가 아니었으면 중국인들이 겪었던 기근은 더 늘어났겠죠. 개인적으로는 모택동보다 훨씬 훌륭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쉽게도 모택동이 일으킨 홍위병들의 난동으로 숙청당했죠.
그쵸.. 유소기,팽덕회 주은래.. 참 보면 기라성 같은 사람들 같습니다. 팽덕회 팔만언자 편지는 좀 안타까웠던 것 같네요.
유소기는 누구인지 모르겠고, 팽덕회는 한국전쟁때 총사령관 아닌가요? 주은래는 저우언라이와 비슷한 문관이라고 알고있는데 자세히좀;;;
타메를랑// '홍위병의 난동'으로 많은 중국의 '문화유산'들도 파괴당했죠ㅡㅜ "저것들은 인민을 피를 빨아 세운 것들..." 운운하면서... 특히 '만력제'의 '정릉'이 그무렵에 발굴되었는데~ 수십겹의 비단이불과 채단으로 염해진 '만력제'와 '효정황후', '효단황후'의 시신을 수습하여 '유골'을 겨우 맞추어 놓았더니~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관련자들을 구타하여 제압하고, '만력제'와 두 황후의 '유골'을 끌어내어 불태워버렸다는...ㅡㅡ;;
nack// '주은래(周恩來)'를 중국어로 읽으면~ '저우언라이'가 됩니다요^^; 같은 사람임...ㅎㅎ
촛중딩 꼬꼼하 홍위병들이 저런 난동을 부리구 연장자들을 능욕할 수 있었던 건 그넘들이 콩사탕 고위간부 아색희들이기 때문이었지욥 -.- 그리고 한쿡 좌빨에두 PD니 NL이니 여러 갈래가 있는 것처럼 당시 홍위병 중에 저런 꼬꼼하 아색희들 같은 병맛도 있었던 것이지, 모든 홍위병이 다 저런 것은 아닙네다. 뱀발로 저때 홍위병 소꿉놀이한 꼬꼼하 아색희들이 지금 중꿔러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넘들 ㅡ.ㅡ
해동천자 / 좀 쇼킹하지만 만력제가 국고를 털어서 자기 쌈지돈 꼬불치던 생각을 하면 인과응보라는 생각이-_-;;
이런 걸 볼때마다 무개념이랑 좆초딩뇌소유자랑 환빠들 다 족쳐야한다는 생각만
nack//팽덕회는 적군이기는 하지만 중국입장에서 보면 대약진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모택동에게 직언을 한 용감한 사람입니다.현실감각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지원없이 중국이 자력 약진으로 어떻게 할 상황이 아니라는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고.. 전쟁도 잘했고.. 여튼 뛰어난 사람중에 하나인데..문혁으로 아쉽게 죽은 사람이죠.
여튼 식량 자급자족 안되는 한국은 fta 이거 중요하다능.
FTA 아니더라도 식량수입 가능합니다만...
FTA 목표가 식량수입이 목표가 아닐텐데요..? ㄲㄲ
낚낚ㅇ ㅣㅇ
역시 세상만사 결론은 배부른게 최고
'홍수'나 '가뭄'이라도 닥치는 날엔... 어휴... --->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상조가 생각나네요;;;
어휴~~~~~~정말 (ㅋㅋㅋ)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모택동 이 병시니가 6.25전쟁때도 뻘짓크리를 연발했다고하더군요. 팽덕회가 중공군 개입전부터 많은 우려를 했음에도 저 평시니가 계속 띵깡부리기...
정말 처참한 사실이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중국의 인구 해서 궁금한것이 있는데, 현대에도 그렇지만 중국이 세계에서 최고 문화 강대국(중국 찬양은 아닙니다.)일때에도 유독 이상하게 당시 중국에 있었던 국가 즉 왕조들은 인구가 아주 많았습니다. 명청왕조은 말할것도 없고 이니 한대 이후 근 5천에서 1억명 선을 유지했던 것으로 압니다. 근데, 이게 다른 주변
나라들에 비해 너무 인구가 많아 보이게 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중국인들은 인구수가 많을까에 대해 뭐 혹자는 비하하기 위해 종족론 어쩌구 하지만 대게는 가족, 후사등을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으로 하는데... 설마 한족많이 유독 다른 민족들에 비해 번식능력이 뛰어나.......난것은 아니쟎아요..... 그리고 위글을 보면 중국에서는 대기근이 일어날때마다 많은 인구 감소등이 있었는데.... 큰 전란시에도요...
근데도 인구가 많았다는 점은 다소 이해가 어려운데요.... 아무리 땅떵이가 넓다고 해도.... 중국에서 인구가 많은 지역은 신강이나 티벳등 지역이 아니라 안쪽인 여러 성들에 많고...
서양과 달리 기초 작물이 쌀이라서 그렇습니다. 쌀 자체의 인구 부양력이 워낙 크고, 또 적극적인 농법 계량과 수리시설 확충등의 인위적 노력으로 특히 강남의 인구부양력이 당, 송 이래 급증했죠.
나도...// 인구를 많아보이게 했다뇨??? 일찍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성립시킨 중국은~ '인구통계'를 상당히 상세하게 산출했습니다!!! 물론 실제인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최소한 통계에 잡힌 인구는 '부역'과 '조세'를 징수당하는 사람의 수였다는 겁니다!!! 결코 부풀리거나 하지는 않았어요ㅎㅎ 그리고 '혼란기'의 인구급감은 일체로 '사망자'가 많았던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많은 '사망자'도 나왔지만, 정부의 통제력이 무너지면서~ 정부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도 큰 요인 중의 하나죠^^;
중국사서를 보면, 새왕조가 들어선 후 인구가 늘고 '태평성대'가 이어진 것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위의 '통계착오'를 수정하고, 황폐화된 토지를 백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안정적인 식량공급이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인구를 이동시켜 지역의 인구비율을 조정함으로써 특정지역의 인구수와 토지면적의 불균형을 해소시키는 '사민정책'도 실시했구요^^; 예를 들어 '북위'의 '균전제'는 '5호16국'의 혼란으로 황폐화된 '화북(華北)'의 개간을 크게 늘리기 위한 조치였고, '명태조'는 '원말 동란기'에 대부분의 인구가 소멸한 '화북'의 각지에 '산서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죠^^;;
이런 안정적인 기반확보를 통해 인구를 크게 늘릴 수가 있었던 겁니다!!! 또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그 인구가 무려 4000만을 넘었는데~ 이런 '거대국가'에서 인구의 절반이 사라진다고 해도 원상태를 회복하는 시간은~ 1/10인 400만의 국가가 절반인 200만의 인구로 원상태를 회복하는 시간보다 훨씬 빠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쿠로트님의 말씀처럼 '쌀'의 영향력이나 동시대 타국가들과의 '농업기술 격차'만 살펴봐도 중국의 '인구 회복력???'은 엄청날 수 밖에 없어요ㅎㅎ
인구가 많음은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부유함의 척도 같은 것은 아닌지.... 혹자는 중국 처럼 전란이 많고 북방민족등의 침입을 받은 나라도 없다 하면서도 혹자는 중국은 근대 100여년만 제외하고 먼 옛날부터(신화시대나 하은주등은 제외하더라도) 한나라부터 청조까지 엄청난 문명을 지닌 혹 문화파급력을 지닌 지역으로도...... 보더라구요... 그리고 그중에 인구는 엄청난 경제력의 상징 같은것...이고 물론 현대에는 너무 많은 인구가 문제일수도 있겠지만(인구 부족도 문제이구요...) 그래서 중국 인구사등을 보니 막말로 중국이 엄청 잘나갈때에도 주변 민족보다(유목민족들보단 당연히 중원의 인구와 차이가 엄청 나죠...)
그래서 전한시대 인구나 그 후대의 인구 기록등에 나오는 5천만에서 1억 사이 왔다갔다 함등이 의외여서요...
나도...// 중국의 인구가 1억을 훌쩍 넘어선 것은 아마도 청나라에 들어서였을 겁니다!!! 중국의 제한된 토지면적을 최대로 개간하여 식량을 확보한 상태에서 부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인구가 아마 7000만~ 1억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명나라 때까지는 이 정도의 인구수준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되구요ㅎㅎ 청나라 때 인구가 급증한데에는~ '강희제' 이후 세수 총액을 영구히 고정하는 '영불가부'의 조치와 '감자', '고구마' 등의 영향력있는 구황작물이 본격적으로 재배된 탓에~
그동안의 '쌀', '밀'로만 부양되던 인구에다 '고구마', '감자'같은 그에 준하는 식량작물로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더해지면서~ '인구폭발'로 이어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청나라의 '영불가부'의 조치는 그동안 세금을 징수하던 인구수준에서만 세수를 거두어 들이고, 이후 증가한 인구에는 영구히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조치였죠...^^;;
학자에 따라서는 명대에 이미 실질 인구가 1억 5천만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솔직히 공식적 인구기록인 6500만에서 불과 2세기가 지난 청조 중엽 3억인구에 도달하는데 명대의 인구기록에서 많은 수가 누락되었다 봅니다. 명대 후반에는 1억 이상도 무리가 아니었을 듯 합니다.
그리고 기록에서 인구수가 크게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은 실제 인구의 증감도 있겠지만 그보단 국가의 대민장악력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왕조가 안정되었을때는 그만큼 인구의 파악도 쉽겠지만, 내전, 전란의 상황에서 국가 체계가 붕괴되었을때는 아무래도 힘들겠죠
오쿠로트// 적어도 왕조말의 '기근'과 '병란'으로 중국인구의 상당수가 소멸하고, 이를 회복한 후 다시 '혼란기'가 찾아온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실질인구로 따지면~ 이미 남송, 금나라 시절에도 1억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아요ㅎㅎ 남송의 인구만 무려 6000만에 달했으니까요!!! 그런데 후대 왕조인 명대에 추정치 1억5천만 밖에 안되는 것은~ 중간에 많은 인구가 소멸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ㅡㅡ; 물론 행정상의 누락도 있지만, '사망자' 또한 엄청났어요ㅎㅎ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5대10국'을 수습한 송초까지 '식인'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당시의 비참한 상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ㅡㅜ 또 위에도 말했지만, 청나라의 '인구급증'은~ 명말에 유입된 '감자', '고구마'의 재배확대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어요^^; 중국 역대의 인구수 증감 상황은~ 정부의 장악력 붕괴로 '누락인구'가 증가한 것도 원인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피해가 있었음이 명백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구가 늘어서 식량생산량이 감당이 안 되어 위태위태하다가 대기근 들어 인구가 팍팍 줄고 왕조 교체, 그 다음엔 개간으로 인한 인구 증가 및 일시적 태평기 구가하다가 인구압 때문에 또 자멸..........이런 식으로 사이클이 도는군요. 근데 변화는 있긴 하나, 한정된 범위에서 맴도니 '정체'되었단 느낌을 지울 수 없군요.
그래서 중국사는 반복된 순환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을 받죠.
바로 왕조의 교체 사이클도 이런 인구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나, 그 사이클의 사이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변화를 놓쳐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