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젤론에서의 양군의 대치는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페잔 방면에서의 제국군 침공에 당황한 국방위원회가 얀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함에 따라 얀이 철수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막상 철수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얀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바로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문제였다. 이들을 피해 없이 철수시키려면 제국군을 격파해서 후퇴시키거나, 민간인임을 밝히고 공격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얀 함대의 참모들은 고전이 되리라 예상하고 단단히 각오를 했다.
하지만 얀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수단을 사용했다. 그는 키르히아이스에게 직접 통신을 넣어서는 '요새를 그냥 넘겨줄 테니 명예로운 철수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가 요구한 것은 그것 외에도 한 가지 더 있었다. 철수하는 동맹군에 대한 추격을 24시간만 늦춰 달라고 했던 것이다.
뜻밖에도 키르히아이스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원활한 인수인계’를 위해서 베르겐그륜 중장이 지휘하는 500명의 인수단을 보내서 요새 내의 각종 시설 및 물품에 관한 현황을 확인하도록 했다. 이들은 요새 내부의 각종 물품 재고현황 및 시설물 관리상태를 확인하고, 심지어 토르의 해머가 잘 작동하는지 실제 발포하기까지 했다. 물론 제국함대가 있는 반대편 방향으로 발포했다.
셴코프와 카젤느를 비롯한 얀 함대 참모진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잊었다. 제국군에게 요새를 넘겨주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각종 시설 및 물품에 대한 확인점검까지 시켜주는 얀의 행위는 충분히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얀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차피 요새를 넘기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넘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쪽에서 성의를 보여주어야 제국군 측에서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코멘트를 덧붙이자 참모들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1주일간의 인수인계가 끝난 799년 1월 17일, 동맹군 이젤론 주둔함대 및 민간인들을 태운 수송선단이 천천히 닻을 올렸다. 제국군은 약속대로 그 뒤를 추격하지 않았으며, 동맹군이 바라트 성계 방면으로 철퇴하는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젤론 탈환. 오딘에 보고하라!”
큰 피해 없이 이젤론을 함락시킨 키르히아이스는 통신사관에게 간단하게 지시했다. 잠시 후 그의 기함 바르바로사가 이젤론 우주항에 입항하자, 먼저 입항해 있던 루츠가 다가와 그를 맞았다. 루츠는 이제 이젤론 요새의 사령관으로서 1만 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잔류할 예정이었으므로 먼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키르히아이스를 따라 동맹령으로 출격할 와렌은 함대를 거느리고 요새 바깥의 주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령관 각하, 이젤론 탈환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간단하게 답례한 키르히아이스는 천천히 요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예전 초급장교 시절 라인하르트와 함께 지냈던 추억의 장소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안네로제를 비웃던 사관들과 싸움을 벌였던 장교식당, 베네뮨데 후작부인의 밀명을 받은 크룸바하 소령과 사투를 벌였던 R-9 블록 등. 잠시 추억을 되새기던 그는 이젤론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얀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24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으니까.
이젤론의 고급장교숙사(사령관실은 루츠의 것이므로)에서 하루를 묵은 키르히아이스는 루츠를 남겨놓고 3만 척의 병력을 인솔하여 집요하게 얀 웬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양군이 전투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하루거리라는 거리의 차이가 있었고, 300만의 민간인을 거느린 얀이 전투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키르히아이스의 병력은 3만 척, 얀의 함대에 비해서 세 배에 가깝다. 세 배나 되는 적과 정면으로 격돌한다는 것은 절대 지지 않을 전투만 골라서 한다는 얀 함대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적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 상급대장, 라인하르트와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명장이다. 그런 상대를 향해 절반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도전할 얀이 아니었다. 그런 경험은 암리츠어에서 한 번 겪은 것으로 족한 것이다.
결국 키르히아이스는 계속 도주하는 얀의 주력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더군다나 얀만 뒤쫓다 보니 이젤론을 출발한 수송선단도 놓쳐버렸다. 이젠 라인하르트와 합류할지, 계속 단독으로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것만이 남았다.
“공작 각하와 합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없어요.”
와렌의 건의에 대해 키르히아이스는 딱 잘라 거절했다.
“로엔그람 공작 각하의 병력은 우리가 합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15만 척에 달합니다. 그만한 전력이면 자유행성동맹군의 전병력이 몰려든다고 해도 절대 지지 않아요.우리는 우리대로 행동합시다.”
“각하, 그렇다면 어찌…?”
키르히아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젤론 방면군은 이제부터 우주해적이 되는 겁니다.”
“예?!”
“전 함대를 투입, 동맹령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작정입니다. 현재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동맹의 전 전력은 로엔그람 공작 각하를 저지하기 위해 집결된 상태로 후방의 치안을 유지할 단 하나의 함대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 함대가 분산하여 통상파괴전을 펼친다면 동맹령 전역이 혼란에 빠지겠죠.”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작전 단위는 300척입니다. 그만한 규모면 소규모 순찰함대 정도는 넉넉히 압도할 수 있으니까요. 그 이하로 부대를 잘게 쪼개는 것은 각 지휘관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최우선 목표는 항성간 항로를 항행중인 동맹의 민간선박입니다. 나포할지 격침할지의 여부도 각 제대 지휘관에게 결정권을 부여하며, 작전중에 만일 동맹군 대규모 병력과 조우하게 되면 즉시 회피하라고 하십시오. 2순위 목표는 통신 및 수송 중계시설입니다. 3순위 목표는 각 항성계에 존재하는 자원채취 및 가공시설이고, 마지막 공격목표는 항성계 내 행성간 수송선입니다. 동맹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은 비전투 시설에 한해 승인하며, 요새에 대한 공격은 절대 금지합니다. 적 함대전력과 조우하는 경우는 가급적 전투를 회피할 것이며 불가피하게 전투에 돌입할 시에는 확실한 승리의 전망이 없으면 오래 끌지 말고 가능한 빨리 철퇴하십시오.
베르겐그륜 중장! 함대 재편성안을 빨리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100개 전대의 사령관도 임명해야 하니 서두르세요.”
와렌은 떨리는 다리를 끌며 기함으로 돌아갔다. 키르히아이스의 명령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명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적의 병력과의 조우는 가능한 회피하며, 방호력이 없는 민간시설 및 민간선박을 주공격대상으로 삼아라…잘못 들었다고 믿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휘하 장군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난 와렌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유행동을 허락받은 부하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골덴바움 왕조 시대의 제국군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얼마나 포학을 휘둘러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라인하르트의 엄정한 규율에 눌려 있지만 그들이 과거의 포학성을 되찾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수백만 동맹 민간인들의 피가 흐르리라.
그 부드럽던 키르히아이스가 어떻게 저렇게 냉혹해졌는지 와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절대영도의 면도날 오벨슈타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말이다.
그날 이후,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에게는 새 별명이 생겼다. ‘절대영도의 장미꽃’이라는 별명이.
첫댓글 별명이 멋집니다..ㅋ 근데 키르히아이스의 저런 모습은 진정 '변화'입니까, 아니면 '연기'입니까? 여튼 흥미진진~
궁금한 건 제국과 동맹의 란테마리오 전투는 어떻게 된건지?
고구마//뒤에 보시면 나옵니다^^ OVR//란테마리오 전투는 원전과 같이 진행됐습니다. 뷰코크가 패배했죠.
아우..ㅡㅡ!! 얼른 올려주세요1!
아앗~~~ >_< 뒤에 올려 주세요~~~ 안네로제랑도 어찌 될지 궁금하고~~~ 올려주세요~~~
올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