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03년 7월 25일(금) 저녁 7시 ∼ 9시
장 소 : 북구문화의집 (tel_510-1424, 북구청소년수련관 1층)
주 최·주관: 북구 문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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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영역에서 만든 영상언어를 영화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까. 북구 문화의집에서 마련한 영화상영회는 미술작가 송현숙씨(재독동포)가 만든 영화 「집은 어디에」(16㎜, 79분)를 매개로 미술과 영화라는 두 쟝르의 관점을 이해하고, 우리 지역문화 현실을 냉엄하게 비교 검토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오는 7월 25일(금) 저녁 7시 북구 문화의 집에서 진행될「집은 어디에」영화상영회는 영화감상뿐만 아니라 영화감상 후 영화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의 발제와 미술작가, 영화인,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토론회가 함께 병행된다. 미술적 관점으로 읽게 될 윤정현(광주비엔날레 전시부)씨는 '지역문화의 창작적 자산과 이해'로 풀어가며, 영화의 창작적 관점으로 해석할 위경혜(영화평론)씨는 제2발제를 통해 '<집은 어디에>의 영화적 의미는 무엇인가'로 해석하게 된다.
이번 북구 문화의집에서 준비하는「집은 어디에」의 상영목적은 농경을 바탕으로 한 우리 지역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올바르게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영화상영회는 미술인, 영화인과 넓은 범위 문화예술인을 참여 주대상으로 삼고 있다.
영화「집은 어디에」는 재독작가 송현숙씨가 1999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해 4년의 작업과정을 거쳐 2003년인 올 초에 완성한 작품이다. 영화는 작가의 작업보고서 또는 삶의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송현숙씨는 1952년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삶의 흔적, 특히 샤마니즘적 뿌리가 이어지던 담양군 대덕면 무월리에서 태어났다. 자라서는 대도시인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간호사로 독일에 가 운주사 연구로 잘 알려진 요한힐트만 결혼해 작가생활을 하고있다. 영화는 이러한 작가의 삶의 여정과 그의 예술적 작업이 함께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송씨는 한국 국적을 고수하다가 작년에야 독일 국적을 취득하게 된 자신의 삶의 여정과 엄숙함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영화는 매 장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되며,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물들은 작가가 농경사회 무월리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그 무월리가 어떻게 근대화되고,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괴되어 가고 해체되어 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 작가는 한국에서의 삶과 독일에서의 삶을 비교하며, 한국(광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를 자신의 작업의 중심에 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집은 어디에」는 예술창작물과 관련해 다양한 문화적 쟁점들을 추출할 수 있다. 특히 '지역성과 국제성'의 문제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해 영상작업의 형식에 대한 이슈 및 '영화 산업' 의 출발점과 광주에서의 생산의 문제를 점검해보고자 하며, 우신의 문화적 자산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작가 송현숙씨는 1972년 파독간호원으로 4년 동안 독일 병원에서 근무하였고, 81년 함부르크미술대학 회화과 졸업했다. 1984∼1985년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와 한국미술사 연구하였다. 91년 한국과 독일에서 자전적 기록영화 「내 마음은 조롱박」을 제작하여이 영화로 독일 헤센주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1995에는 영화「회귀」를 제작하여 함부르크영화제에서 초연하였고, 이 영화로 1996년 함부르크 시 에드빈 샤르프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한국과 독일에서 영화 [집은 어디에] 제작하기 시작해 2003년 [집은 어디에] 완성하였으며, 현재 독일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다.
·주최 : 북구 문화의 집
·일시 : 2003. 7. 25(금) 저녁 7시∼ 9시 30분
19:00 - 20:20 영화관람
20:20 - 20:30 휴식
20:30 - 21:00 제1발제 : 지역문화의 창작적 자산과 이해
윤정현(광주비엔날레 전시부)
제2발제 : <집은 어디에>의 영화적 의미는 무엇인가
위경혜(영화평론)
21:00 - 21:30 토론회
·장소 : 북구 문화의집 관람실 (상영실 100석)
※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사전에 진행자(510-1424 정민룡)에게 전화를 해 참여자 숫자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며, 사전연락이 없을 경우 당일 좌석부족으로 상영회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52년 담양 대덕면 무월리 출생
69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72년 파독간호원으로 4년 동안 독일 병원에서 근무
81년 함부르크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82년 함부르크시 조형예술인을 위한 장학금 수여
83년 독일연방산업협회가 수여하는 회화미술 장려상 수상
84-5년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와 한국미술사 연구
91년 본 시 예술기금협회 장학금 수여
91년 한국과 독일에서 자전적 기록영화 [내 마음은 조롱박] 제작
95-7년 위 영화 독일 헤센주 영화상 수상, 영화 [회귀] 제작해 함부르크영화제에서 초연
96년 함부르크 시 에드빈 샤르프 예술상 수상
99년 한국과 독일에서 영화 [집은 어디에] 제작 시작
03년 [집은 어디에] 완성, 현재 독일 함부르크에서 작업하며 살고있음
16밀리 79분짜리 이 영화는 작가가 99년에 제작을 시작해 올 초 완성했다. 영화의 형식은 치밀한 시나리오나 구성을 갖고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 한결 느슨한 기록물 형식의 일종의 작업보고서이자 삶의 보고서이다. 52년 담양 대덕면 무월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통적인 삶의 흔적, 특히 샤마니즘적 신앙까지가 남아있던 농경사회에서 자라 광주라는 인근 대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간호사로 독일에 가, 결혼해 작가생활을 하고있는 바, 영화에는 이러한 삶의 과정이 그의 예술적 작업과 함께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일에 살며, 여태까지 한국국적을 고수하다가 작년 독일국적을 취득하게 된 삶의 고비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 내용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매 장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로 시작되는 작가의 말과 시각물들은 작가가 농경사회 무월리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그 무월리가 어떻게 근대화되고,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파괴되어 가고 해체되어 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 작가는 한국에서의 삶과 독일에서의 삶을 비교하며, 한국(광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를 자신의 작업의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통해 여러 문화적 쟁점들을 추출할 수 있는 바, 이번 상영에서는 '지역성과 국제성'의 문제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자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최근 중요시되는 영상작업의 형식에 대한 이슈 및 '영화 산업' 논의가 분분한 광주에 생산적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며, 자신의 문화적 자산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보고자 한다.
다음은 그날 발표한 어줍잖은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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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디에], 송현숙 작, 79분, 16mm, 영상물을 보고
'나'는 어디에
[집은 어디에] 개관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면서 꿈에 그리던 조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기다리던 '고향'은 내가 떠나온, 내 기억 속의 전근대적인 한국이 아니라, 고도로 산업화된 '낯선' 한국이었다. 때 늦게 귀향한 나는 고향에서도 '떠돌이'였다. 결국 나는 내 조국을 두 번 떠났고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은 한국의 산골 마을에서 자란 나는 스믈 한 살 '큰애기'로 독일에 건너와 몇 년 동안 밤에는 병동에서 간호보조사로 일했고, 낮에는 그림을 그렸다. 독일의 지하철 역에서 쥐로 변해버린 비둘기와 애완동물로 변한 쥐의 모습에 당혹한 나는 혼란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기 위해, 그런 탈바꿈이 일어나는 현장을 답사해 보고자 했다. 내가 지각하는 세상의 토막 그림들을 짜맞추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너무 늦게 귀향한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는 나를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산업 기술과 세계화의 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카메라 앞에서 나의 그림 그리는 방식을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릴 수는 없었다.' (작품 '집은 어디에'에 덧붙인 '개관')
송현숙 약력
52년 담양 대덕면 무월리 출생
69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72년 파독간호원으로 4년 동안 독일 병원에서 근무
81년 함부르크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82년 함부르크시 조형예술인을 위한 장학금 수여
83년 독일연방산업협회가 수여하는 회화미술 장려상 수상
84-5년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와 한국미술사 연구
91년 본 시 예술기금협회 장학금 수여
91년 한국과 독일에서 자전적 기록영화 [내 마음은 조롱박] 제작
95-7년 위 영화 독일 헤센주 영화상 수상, 영화 [회귀] 제작해 함부르크영화제에서 초연
96년 함부르크 시 에드빈 샤르프 예술상 수상
99년 한국과 독일에서 영화 [집은 어디에] 제작 시작
03년 [집은 어디에] 완성, 현재 독일 함부르크에서 작업하며 살고 있음
(2003 4월, 서울 학고재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도록 중, 이력 부분 요약 발췌)
인연
필자가 송현숙을 처음 만난 것은 1991년이다. 당시 광주에서 발행되던 월간문화종합지 [사람사는이야기] 취재기자였던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 특이한 이력의 한 여성작가의 삶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기억에 의하면, 당시 그는 오빠의 상을 당해 오랜만에 귀국했었고, 그때, 그러니까 작가가 49제를 포함한 오빠의 상을 치루고 난 다음 나는 그 장면과 자신의 예술적 지향을 기록한 그의 최초의 영상작업 '내 마음은 조롱박'을 보았다. 궁벽한 시골에서의 유년의 기억, 오빠의 죽음과 씻김굿 장면... 이후 나는 그의 남편 요한 힐트만이 쓴 [운주사]를 본 적이 있으며, 1996년 다시 귀국해 서울 금호미술관과 광주 인재미술관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을 본 적이 있고, 올 봄 서울 학고재화랑에서 열린 전시의 한참 뒤에 그가 전시를 위해 다시 한번 한국에 다녀간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도록을 구해 보고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가 '내 마음은 조롱박' 이후, '회귀'라는 또다른 영상 작업을 했고, 올해 봄 그는 4년에 걸쳐 만든 세 번째 영상물 '집은 어디에'를 최근 완성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곧바로 작가에게 연락해 복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작품을 고향마을을 벗어나 도회인 광주 백운동에 시집 가 살고 있는 여동생 집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그 작품은 다시 그의 고향마을 담양 대덕면 무월리 그의 남동생 송일근(도예작가, 50마지기의 농사를 짓고 있음)씨에게 전해졌고, 이 작품을 가져오기 위해 필자는 무월리를 찾아갔다.(작가가 굳이 작품을 동생들 집으로 보낸 것은 작년, 그가 독일 국적을 취득하면서 동생들에게 일종의 '변명'처럼 하고 싶었던 말들을 자신의 작업기록과 함께 엮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영화는 옵니버스 형식을 취하면서 통상 각 장의 도입부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란 맨트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의 동생들은 아직 작품을 보지 않는 듯 했다.) 작품을 가지러 가면서 내가 본 무월리 광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곳은 광주에 가까운 곳에 있지만, 외지와 완벽하리만치 분리된 곳이다. 그릇모양처럼 생겼다고나 할까? 분지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그곳에는 딱 두 개의 마을 밖에 없는데, 그런 지리적 상황은 작가 송현숙의 촌스런 어린 시절(50-60년대)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케 했다. '깡촌'이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대덕면 소재지에서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지만 정말 좁고, 소나무가 무성한 숲을 지나야 했으므로 10년 전 필자도 감동적으로 느꼈고, 독일인 남편 힐트만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독일인 아들 역시 한국에 있는 외갓집 기억을 떠올릴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하곤 했다는 그 소나무 울창한 숲길, 진입로는 길을 넓히느라 하늘을 가릴 만큼 무성했던 나무들을 베어내고 곳곳을 포크레인으로 파헤치고 있었다. 한편 작품에 나오는 당집의 뒤편 산언덕은 골재 채취를 위해 험상궂게 산을 깍아내 그 거대한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었으며, 아직도 큰 포크레인은 작업중이었다.
작품은 이런 작가의 탄생, 어린 시절, 독일로의 이주, 작가생활, 작년 독일 영주권의 획득, 현재의 심경들을 접합시킨 일종의 종합적인 개인의 삶의 보고서이자, 작가의 예술관이 엿보이도록 구성한 다큐멘타리 성격의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보기의 주요 틀을 '정체성'의 측면에 두고자 하는 바, 그 이유는 이렇다.
정체성
오늘날과 같이 발달된 교통과 정보통신 매체 등은 국가 내 지역 간은 물론 지구촌 각지의 '거리'를 무척 좁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의 소비문화의 확산과 인터넷 사용이 국제적으로 보편화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라고 보여지는데, 이것은 오늘날 예술작업은 물론 문화적 상황의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모더니즘 신화의 붕괴 이래 지구촌 중심을 자처하던 뉴욕과 파리, 런던, 베를린 등지의 주도권은 이제 지구촌 곳곳으로 분산되고 있다. 광주와 상파울루, 이스탄불, 요하네스버그, 요꼬하마, 상하이 등지에서 경쟁적으로 치루는 비엔날레들은 언뜻 보기에 국제성이나 보편성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보다 자세히 저변에 흐르는 기류를 들여다보면 자문화 중심주의가 강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지향은 대단히 부정적인 것이며,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타자에 대한 상호 존중과 호혜 평등한 문화교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그러나 평등한 문화적 관계 혹은 교류라는 것은 이제까지 국제적 형식의 문화교류의 현장에서 소외되어 왔던 우리문화의 자존, 자긍심을 타문화와 차등 없는 균등의 위치에 놓은 다음에라야만 참다운 의미의 수평적 교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오랜 전통과 자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늘상 뒷켠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지금 정부에서는 '지역분권'을 주요한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바, 거꾸로 보면 이는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엄청난 중앙(서울) 중심의 문화를 가져왔는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다. 새삼스럽지만, 해방 후 우리의 근대사는 농사꾼의 아들딸인 우리의 형, 누나들이 전남방직, 일신방직, 구로공단, 청계천 등 도시의 공업지구로 몰려들어('서울로 가') 산업사회를 일구어 낸 결과다. 하지만 그 성과는 각 계층에 고루 분배되지 못하고 극히 일부 계층에 편중,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며, 그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수정되지 않고 심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한 '도시'는 90년대를 거치며 급격하게 소비문화화 되면서 획일화, 서구화, 중앙집권화의 길을 걷고 있는 듯 해 보인다. 지금 '서울'로 통칭되는 수도권에는 좁은 땅에 전 국민의 2/3가 살고 있으며, 정치, 경제 등 사회 모든 부분의 권한과 역fir이 집중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집중은 국가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국제경쟁력을 잃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문화적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필자는 서울과 광주의 사회 구성이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바, 제반 정보의 소통에서 이런 차이는 흔히 간과되기 일쑤다. 농촌사회에 둘러 쌓인 광주의 환경을 깊이 고려한 지적 체계 및 문화활동의 모델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광주의 많은 지식인들은 서울에서 발행되는 지적 정보들에 근거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압구정동과 전남대 후문, 망월동과 419묘지, 섬진강과 한강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흔히 부차적으로 간주된다.
국내 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발달된 교통수단과 인터넷, 텔레비전 등 정보매체들은 물리적인 실제의 지리적 '거리'를 단축시킨다. 컴퓨터 압축파일처럼 거리도 압축된다. 이 압축을 필자가 어렸을 때는 산신령 같은 사람이 '축지법을 쓴다'고 했는데, 이제 아무나 축지법을 쓰게 되었다. 우리는 코카콜라와 멕도날드 햄버거를 우리집 텃밭에서 길러낸 배추나 무 같은 것들과 차이 없이 접할 수 있으며, 메이저리그에서 활동중인 박찬호와 김병현, 유럽에서 활약중인 차두리, 이천수, 이을용 등 스포츠 스타들의 아주 근접한 동향, 그날의 전적을 안방에 놓인 TV 스포츠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상적 생활용품 역시 지역 간 국가 간 장벽은 거의 무의미 할 정도다. 경계가 불확실 하다. 이러한 거리의 해소는 무비판적인 긍정적인 요인들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나 , 기실 그러한 거리 단축과 소통 활성화의 이면에는 정보화사회 이전에, 그동안 지속적으로 물질적 상품생산 위주의 자본시장에서 우위를 점해왔던 자본의 지배적 속성이 모습을 달리 해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될 것 같다.
기억의 원형질
송현숙의 작업에서 우리는 이러한 농본주의 전통과 토속적 자 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동경과 자긍심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작가가 한 숲에서 큰 망치로 땅에 말뚝을 박고 있는 장면과 소리를 들려준다. 소리와 장면은 동시에 발생되지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비동시적인 모습을 띈다. 그리고 시간을 넘기면서 그 '말뚝박기'는 작가가 어렸을 때, 고향 무월리에서 밭을 메거나 벼를 베는 엄마 등에 업혀간 젖먹이 어린 그가 밭가에 메어둔 염소처럼, 엄마가 메어둔 끈에 묶여져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토끼가 지나가며 "언제 사람(어른)이 될 거냐"고 물었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무척 동화적이다. 작가에게 그 말뚝 박는 소리는, 엄마가 어느 한 곳에 묶어두려는, 그래서 외부로부터 다가올지도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어린 그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는데, '말뚝'과 '끈'에 대한 그 기억의 '원형질'은 작업의 줄기를 꿰는 중요한 골간을 이룬다. 끈에 묶인 아기는 끈 길이 이상의 거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영상작업 이전에 작가는 '-점 -획', '-획 위에-획'과 같은 제목의 평면작업을 해왔다. 유화캔버스에 바탕색을 칠하고, 간결한 수묵화와 같이 점과 획으로 형상을 만들고, 작가는 이에 특정한 '이름'(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점과 획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라는 사실만을 밝혀 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업의 형태에서 말뚝이나 빨레줄과 같은 형상들과 거기에 걸린 흰 무명베와 같은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영상작업에서 필자는 그러한 차용의 일단을 밝힌다. 그가 처녀가 되었을 때, 엄마는 그에게 생리대로 쓰일 무명베 세 장을 건네주며, "너도 이젠 어른이 되었으니까 몸단속을 잘 하라"고 일렀던 것이 그것이다. 그 진술을 생각한다면, 이런 추측은 너무 비약일지 몰라도, 작가의 화면에 나타난 빨레줄의 흰 천은 피에 젖은 무명베 생리대를 하얗게 빨아 말리는 장면이나, 어린 아이의 기저기를 말려놓은 것, 빨레 한 옷가지를 펼쳐놓은 모습이다. 기실 이러한 풍경은 우리의 전통적 농본주의 공동체문화 속에서 전형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마을, 집, 마당과 같은 시각이미지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한, 혹은 유학을 간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자문화의 원형을 그리 중시하지 않는 듯 해 보인다. 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한 작가의 작업 '토우'들은 필자에게 한국적이기보다는 중국 진시황릉에서 출토해낸 병마들을 떠올리게 했다. 97년에 역시 그곳에 출품된, 뉴욕에 활동근거를 갖고 있는 한 작가의 손바닥 크기의 '이미지 연작들'은 한국적 의미의 이미지연결과는 조금 이질적인 듯 해 보였다. 여러 전시나 조형작업, 영상물에서 느끼는 필자의 생각 역시 지나치게 우리 것을 버려두고, 서구의 것을 추종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이다. 때문에 나는 송현숙이 여건이 좋아,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독일에 유학을 갔다면, 이런 형식의 작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운주사
안타까운 것은 또 있다. 몇 년 전 작가 송현숙의 남편 요하임 힐트만은 [운주사]에 관한 저작을 내놓은 바 있거니와, 필자가 관심 갖는 그 공간구성과 조형적 의미에 깃든 우리문화의 저변에 대해, 필자는 물론 우리가 그리 관심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운주사의 현실은 그것을 말해준다. 80년 광주항쟁 이래 화순 운주사는 미륵불교 신앙과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민중의 기원을 비롯한 사회적 의미에 곁들여져 많이 논의가 이뤄지고 관심을 집중시켰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유행'처럼 순간에 머물렀고, 지금 운주사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힐트만은 운주사와는 인연의 끈이 멀지만, 자신의 어렸을 적 조형적, 구성적 상상력과 운주사의 지향이 일치함에 주목해 먼 동양, 이국의 궁벽한 산골 절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해냈다. 하지만 지금의 운주사는 당시 힐트만이 가보았던 운주사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토속미, 소박미, 자연미를 대신해 너무 이질적인 인공적 요소들이 곳곳에 파고 들어 있는 것이다. 일주문이 세워지고, 웅장한 규모의 대웅전이 건축되고, 누런 벼들이 익어가던 논들은 이제 잔디밭으로 변했다. '성과 속'이 일체화된 모습을 구현해낸 공간구성이 잔디밭을 만든 사람들에겐 안보였을까?
함부르크와 무월리
작가는 작품에 덧붙인 글에서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면서 꿈에 그리던 조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기다리던 '고향'은 내가 떠나온, 내 기억 속의 전근대적인 한국이 아니라, 고도로 산업화된 '낯선' 한국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던 같다다. 전세계적으로 농촌사회의 붕괴와 산업화가 시작된 것은 지난 200여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던 바, 제3세계는 2차대전 이후의 일이고, 한국은 지난 70년대 '새마을운동' 이래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기' 위해 우리가 가져왔던 생활방식과 전통은 가차 없이 폐기 처분되었다. 오직 경제부흥과 이윤창출, 경제중심주의적인 합리성, 효율성의 가치만 강조했지, 부의 분배, 공존, 환경, 공동체, 생태적 문제 등등의 근원적 가치들은 무시되기 일쑤였다.('돈 벌어, 돈 벌어,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면 되지'란 노랫가락이 떠오른다) 그러니깐 제3세계에 속해 있던 한국은 급속한 생활환경의 변화를 겪었고, 그 지역에서 다시 지역에 해당하는 무월리는 광주라는 대도시에 가까운 곳에는 엄청난 개발의 회오리가 휘몰아쳐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52년에 무월리에서 태어나 72년 독일에 간호원으로 갔으며, 작가로서 돌아온 고향은 유행가 가사처럼 '내가 떠나온 기억 속의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된 마을 사람들은 농삿일을 하찮게 여기고 도시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는 자식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도회지에 사는 자식들은 자가용을 타고 시골집에 와 피서 같은 '구경'을 하고 돌아간다. 지난 97년 필자는 독일을 여행한 적이 있거니와 한국에 비해 그리 큰 사회적 변화가 없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무척 인상 깊게 느꼈다. 그들의 공동체는 그리 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듯 했다.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아버지가 살고, 또 그 집에서 손자가 살고 있었다. 지리적 이동이 적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300명이던 동년배 친구들 중 200명이 광주 고등학교로 옮겨와 오늘날 대부분이 그대로 도시에 눌러 앉아 사는 형편이며, 맨몸으로 옮겨온 도시인 만큼 필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월급의 큰 부분을 할애해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열중한다. 뿐만 아니다. 자가용의 사용, 여가문화, 소비문화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우리는 독일에 비해 너무 변화가 크다. 때문에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저들은 변화 없음이 지겹겠지만, 나는 너무 자주 있는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
이러한 것들과 연관되는 정체성의 문제는 영화의 전편에 깊이 깔려있는 듯 해 보인다. 영화 속에는 함부르크의 어린이들 호주머니에 있는 애완용이 된 쥐와 철로 위에서 쥐처럼 모이를 주워먹는 비둘기가 나온다. 작가가 익히 알고 있는, 무월리에서의 쥐와 비둘기의 이미지를 크게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 속에서도 그 쥐와 비둘기는 환경에 적응해 '살아 간다'. 한편 영화에서 작가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관계기관에서 받은 인터뷰와 자신의 심경을 담담하게 펼쳐놓는다. 이국에서 온 한 여자에게 갖는 관심, 현대화된 도시 곳곳에 설치된 컴퓨터로 된 얼굴 판독 장치들... 독일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작가는 창을 열고 무한히 열린 시베리아의 자연과 대지에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만, '승무원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영화를 보기 위해 창문을 닫아줄 것을 요구'한다. 한사람의 승객이자 개체적 주체인 작가의 기억은 공적 주체인 다수 승객들의 영화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 작가는 한국에 오기 전 동생에게 줄 선물, 올림푸스 카메라를 사면서, 새로 지은 함부르크의 공장에 붙인 사진이미지와 광고문구를 떠올린다. '도시가 새 얼굴을 얻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새 얼굴.
변화 하는 것, 지역문화
그렇다. 옛 것은 이유 없이 폐기되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것이 들어서고 있고, 그것은 가공할 속도를 수반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필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63년 강진 도암에서 태어나 초롱불 아래 밤을 세우며 뗄나무를 하러 다니던 필자는 열 아홉살에 휘황찬란한 광주라는 대도시로 '유학' 와 아직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붙박혀 살고 있다. 그 동안 겪은 문화적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시골 출신의 사람들은 공감의 폭이 클 것이다. 항상 나는 '공사중'(웹사이트 광주미술 gwangjuart.com 윤정현의 이미지산책 '공사중' 참조)이고, 아직도 그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변화하는 상황과 환경, 일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의 경험과 내 안에 있던 오래된 것들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리모델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지? 소문에 의하면 텔레비전 화면은 사람들이 코카콜라와 같은 음료수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여러 화면중 한 화면씩을 사막으로 채워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하도록 한다는데, 그게 정말 사실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다. 최근 작고한 명창 박동진의 광고 멘트가 떠오른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나는 이 언술이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우물안 개구리식의 자문화 우월주의를 배면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극단에서 지나친 보편성, 일반성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문화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필자에게 상징적 자기암시의 언어로 읽힌다. 독일인들은 늙은 죽음에 대해 그리 감정적이지 않게 대하는 경우가 있음을 상기한다. 그들은 부모의 임종을 맞아 '곡'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연고 시신들은 간단한 절차에 따라 화장 처리되어 숫자로 된 일련번호로 땅에 묻힐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는 최근 죽음을 앞둔 사람의 간호를 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은 화장장 소각로에 죽은 삶의 관이 들어가고, 붉은 불빛이 안에 든 육신을 빠른 속도로 태우는(소멸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은 어디에 있을까?
지역분권이 논의되는 지금, 많은 지역 사람들이 지나치게 정치적, 경제적 방향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 해 보인다. 중앙정부가 갖고 있는 권한, 이를테면 예산편성권 및 정책결정권 등을 지방이 가져오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방분권이라는 문제와 결부되어서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서의 지역문화다. 그것은 지금 저 깊은 해저에 잠겨 있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 '삶의 총체적인 국면'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국민소득 1만불시대를 넘어 2만불을 예고하는 지금은 해방 전후에 비해 기하급수적인 소득의 향상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득 수준의 변화 비례 만큼이나 삶의 질은 향상되지 못한 것 같다. 도시산업화의 폐해, 생활환경의 악화, 범죄, 정신질환 등 사회의 부정적 지표들은 소득의 향상과 비례해 성장해간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삶의 국면을 너무 한 켠에 치우쳐 바라볼 것이 아니라 '문화'라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으로서의, 전통과 관습, 사회의 구성과 유지, 이데올로기 작동과 예술활동, 환경 등등 외부적 요인들과의 지속 가능한 공존의 틀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 가장 중심에 자리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윤정현, 시인)
첫댓글 윤정현님 감사합니다.... 그날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