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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
제110회 산행일지 : 삶과 죽음의 놀이마당, 산
(강원도 평창군 계방산)
일시 : 2011년 10월 15(토)
날씨 : 흐림, 늦게 비
산 속에서 많은 이들을 만납니다
모두가 선한 사람들입니다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산행의 백미는 고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산 속에서 나무를 만납니다
예쁜 꽃을 만납니다
까불거리며 소리치는 계곡을 만납니다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만납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를 만납니다
숨을 헐떡이는 나를 만납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아무 말 없는
산을 만납니다
자연을 만납니다
나를 만납니다
당신을 만납니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당신을
언제나 내 마음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당신을
고독할수록 분명한 당신을
등고선의 영원한 총무, 교매가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산행이란 연작시 셋을 남겼는데 그 중 위는 산행3의 전문이다.
늘 유쾌함 속에서도 한동안 고독해 보이더니 산에서 당신을 만났나 보다.
그 ‘사무치도록 그리운 당신’이 어떤 대상인지는 글에선 분명치 않으나 아뭏튼 다른 곳이 아닌 ‘산’에서 만난다는 것이 주제어인 것 같다.
그렇다.
교매의 말처럼 우리는 산에서 많은 살아있는 것들과 죽어있는 것들을 만난다.
죽은 것들을 배지로 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수많은 생명들,
그 생명들을 살찌우고 키워나갈 또 다른 생명과 환경들을 만난다.
그 속에서 정연한 질서를 만나고, 우주를 만나고, 무엇보다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아무 말 없는 산’이다.
깊어가는 가을 산을 더 오래 만나고 싶어 1박 산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매송의 갑작스런 일로 당일산행으로 바뀌었다.
갈 길이 멀어 6시 30분 약속을 하였는데 나는 두 번 째 지하철을 타야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다들 시간이 칼 같다.
치악산 휴게소에 내려 김치볶음밥과 순두부를 각각 1인분씩 사서 나누어 먹고 자판기 커피까지 마셨다.
영동고속도로의 횡성휴게소에 들렀는데 화장실이 줄을 설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중앙고속도로의 치악휴게소는 한산했는데 영동고속도로는 이렇듯 붐빈다.
역시 서울, 경기에 사람이 많은가 보다.
속사IC를 나와서 31번 국도, 인제, 홍천 방향으로 10여분 가면 계방산 주차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아랫삼거리이다.
계방산 등산은 단체의 경우 대부분 운두령에서 시작하여 전망대-계방산 정상-주목군락지-이승복 생가터로 하산하는 종주형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운두령 방향에서의 산행은 내가 없던 2005년 1월, 셋이서 kj산악회를 따라 다녀온 바 있기도 하거니와 이왕이면 산 아래에서부터 오르고자 하였다.
입간판으로 된 산행 지도에 의하면 여기에서 시작할 경우 하산 후 생가터에서 여기까지 약 3km 정도를 걸어야 하므로 다시 차에 올라 캠핑장을 지나 이승복 생가터 옆 공터에 주차하였다.
신발을 묶고 배낭을 든다. 11:00.
계방산은 산 뿌리까지 이미 가을의 절정에 와 있다.
오늘은 이승복 생가터-주목군락지-계방산 정상-1276봉-생가터로 원점회기 하는 약 9km 산행을 예정한다.
사실은 위의 역방향으로 오르려하였으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276봉을 향하는 등산로의 시작점은 우리가 주차한 곳 보다 아래 지점에 있어 찾지 못하였기에 주목군락지 방향으로 가게 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썩 잘된 산행이었다.
우측의 계곡을 따라 난 임도처럼 너른 길을 따라 ‘평창의 명산 계방산’으로 든다.
역시 단풍은 계곡에서 가장 화려하다.
세상에는 혼자서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을 계방산이 이리도 고운 것은 간간이 핏빛보다 더 붉은 단풍나무가 있고 연두색, 노랑색, 갈색, 주홍색 그리고 늘 푸른 나무의 녹색까지 함께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갖은 색채가 더불어 어우러진 10월 중순, 지금의 내나라 깊은 산은 빛의 향연이다.
산길은 마치 이 향연을 충분히 즐기라는 듯 경사도 없이 편안하여 전후좌우를 살펴볼 여유도 있다.
이미 떨어진 단풍 낙엽들이 천연색 카페트를 만들어 놓은 산길은 쿠션까지 있어 더욱 발걸음이 가볍다.
물길을 따라 낙엽이 흐르다 잔잔한 소를 이룬 곳에서는 잘 위장된 부비트랩처럼 형형색색으로 물을 덮었고, 물길 주변의 바위와 모든 대지를 덮었다.
정말이지 죽도록 아름답다.
천지 사방 어느 곳을 돌아봐도 작 찍은 사진 같다.
‘내 생애 최고의 산’이라 함에 주저 없었던 점봉산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등고선 회원들의 행복한 얼굴에 붉은 물이 들어 더욱 환하다.
물소리, 새소리, 친구들, 나무, 돌, 낙엽들 모두를 행복한 마음으로 만난다.
한 시간여 오르다 맛없다고 걱정하던 청죽의 사과를 반쪽씩 나누어 먹다.
약 3km 지점에서 그동안 함께 하던 물길과 헤어지고 500여 미터 더 오르면 옹달샘을 만난다.
깊은 곳으로 흐르는데 어떻게 알고 물길을 찾았는지, 깊이만큼 물맛이 시원하다.
집에서 가져온 정수기 물을 버리고 자연의 정수를 물병에, 온몸의 세포에 받아들인다.
이 지역부터는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인데 그 주요 대상 수목은 주목이다.
가슴에 명찰을 단 주목이 하나 둘씩 보이더니 좀 더 올라서면 분비나무와 함께 무리를 짓는다.
작은 나무, 굵고 키 큰 나무, 그리고 세월의 무게에 힘이 들었던지 누워서 안식하는 나무, 거친 섬유소를 분해하여 나무속이 마치 부드러운 황토를 채운 듯 녹아내린 나무, 그리고 이를 자양분으로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어린 주목도 있다.
마치 주목의 5대가 함께 공존하는 평화와 질서가 있다.
메뚜기를 닮은 풀벌레가 포개져 함께 발 앞에서 뛰는데 아무래도 어미 등에 업힌 것이라기보다는 새생명 창조를 위한 몸짓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그야말로 ‘자연’이 한 시공에서 펼쳐진다.
원래부터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진리가 이곳에 있다.
죽음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삶,
주검 그대로의 또 다른 아름다움,
삶과 죽음의 화려한 공존,
그 놀이마당이 길게 펼쳐진다.
태백산 등 몇 곳에도 주목이 보호되고 있지만 아마도 진짜 주목을 보려면 이곳을 보아야 할 것이다.
몇 아름이나 되는 것도 있고 교매의 몸이 다 들어가도록 속을 비웠지만 생명이 싱싱한 주목도 있다.
습기찬 주목의 굵고 붉은 몸통을 안아도 보고 사진에도 담아 본다.
천년의 숨결, 생명의 기운이 몸으로 퍼진다.
미치도록 좋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혼자서 뒤쳐져 오른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만난 한사람이 내려서고 있다.
오후 1시 30분, 두 시간 반이 걸려서 능선에 닿아 테두리를 친 보호수 가까운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서는 2시 10분, 600 미터 거리의 정상을 향한다.
매송은 장갑을 꼈다.
겨울, 계방산의 정상 능선은 이미 겨울이다.
칼바람에 가까운 바람은 가득하지만 단풍도, 나뭇잎도 없는 회색의 산을 닮아가도 있다.
관목들을 지나 20여분이 걸리지 않아 정상에 닿는다.
새로이 설치한 정상석이 하얀 화강석 그대로의 몸통에 검은 먹으로 ‘계방산’과 '해발 1,577.4m'를 새겨 넣고 있다.
그렇지만 그 옆의 돌탑과 작은 정상석에 마음이 더욱 끌린다.
계방산은 오대산 국립공원 구역에 속하며 높이로 남한에서 5위에 해당하는 산이다.
정상에서는 설악산, 오대산 비로봉 등이 보인다는 경관 사진이 있으나 구름 있는 날씨로 인해 4.8km 지점의 운두령도 분간이 어렵고 사람도 아무도 없다.
선채로 사진만 찍고는 곧바로 계방산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을 서둔다.
드세던 바람은 100여 미터만 내려선 관목지대에서는 크게 줄어든다.
2.3km의 삼거리인 1276봉까지는 300미터의 높이를 2.3km에 걸쳐 내려서므로 그야말로 편안한 길이 길게 이어진다.
경사도 물론이지만 계방산이 오대산처럼 육산이고 또 낙엽이 두텁게 쌓여 걷기엔 그만인 구간이다.
참나무 지대에 들어서면 가을 분위기가 제법 되살아난다.
쉼터에서 얼린 배과즙을 먹고는 곧바로 1276봉, 삼거리에 이른다.
계방산 주차장 방면은 직진을 해야 하고 우리가 차를 둔 이승복 생가터를 가려면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그런데 생가터 방향은 쌓인 낙엽과 통행이 적은 듯 길도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아찔한 급경사가 이어져 위험하기까지 하다.
앞서던 매송은 ‘이 길은 폐쇄하여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한참동안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내려서니 이제 치마가 땅에 끌리는 부분인 듯 경사가 완만해지며 물길이 나타난다.
아마 우리가 예정대로 이쪽으로 올랐다면 불평 꽤나 했을 터이다.
앞서 가던 매송과 청죽이 인기척에 작업 중 금방 도망간 다람쥐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한 그 잣송이로부터 몇 알을 빼낸다.
하산을 마치니 이승복 생가터보다 아래쪽이다.
물길을 따라 다시 50여 미터 오르면 다리를 건너고 이제 생가터를 만난다.
아침에 이 길을 찾지 못한 것은 생가터 위쪽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잘된 셈이었다.
산에서는 유일하게 한 사람만 만났지만 오토캠핑장과 생가터 주변에는 구경 온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승복 생가터 돌담에서 잣을 까는 둘의 모습이 귀여운데 고소하다며 어렵게 깐 한 알을 입에까지 넣어준다.
오후 4시 40분, 하산완료.
식사에 앞서 운두령을 보기로 한 것은 나를 위한 배려이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 고개인 해발 1,089m 운두령은 평창군과 홍천군의 경계이다.
계방산 등산로의 입구쪽엔 ‘등산로 전면개방 사전입산예약제 철회’를 환영하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저녁은 2003년 여름, 오대산 1박 산행을 할 당시 진부에서 맛있게 식사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진부로 방향을 잡았다.
다행이도 진부는 다음 IC이고 거리도 가깝다.
진부읍에서 식당이름을 ’진부식당‘으로 알고 몇 군데 물었으나 모두 제각각이어서 애를 먹다가 어렵게 찾았더니 ’부일식당‘이다.
입구의 분위기나 구조, 안내되어 앉았던 자리까지 똑같이 그대로이다.
주문도 않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차려진 상은 산채백반인데 8년 전과 거의 다름이 없는 나물을 중심으로 한 20여 가지 반찬과 어두운 색의 된장, 두부찜, 그리고 숭늉 한 그릇이다.
다만 가격만 8,000원으로 천원이 올라 있었다.
우리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추가된 나물접시를 몇 개를 포함한 상에 놓인 모든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식당은 단체 손님을 포함하여 여지없이 복잡하다.
비가 많이 내리는 6시 10분 경, 행복한 일정을 마치고 차에 올라 쉬지 않고 3시간 이상을 달려 내려오다.
등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