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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문 그리고 차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cheongam
韓․中․日 삼국 茶文化의 특징 지구가 태양계라는 환경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듯 그 민족이 살고있는 환경의 조건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게 되어있다. 춥다든가 덥다든가, 습하거나 메마른가에 따라 그 문화는 서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진다. 산악지대냐 평야냐 사막이냐에 따라 그 문화가 달라질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차나무는 중국의 서남쪽 운귀고원이 자생지로 되어 있다. 자생지의 그 차나무가 그렇게 그렇게 옮겨져와 그 기후와 토질에 맞는 차나무로 자리를 잡고 이를 따 마시는 환경의 조건에 따라 그 환경에 맞는 자기들만의 차문화를 일구어 내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차문화, 우리의 차문화, 그리고 일본의 차문화가 서로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 되레 이상하다. 중국이 실용적이라면 우리는 조상을 섬기는 제례나 접대문화 의식에 치중되어 왔고, 일본은 엄격한 형식주의 곧 차도(茶道)라는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
네 것이 제일이니, 내 것이 최고니,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할 것이 없다. 한 수 위라고 목에 힘 줄 것도 없고, 한 수 아래라고 기죽을 것도 없다. 문화라는 것은 그 민족이 그 민족의 특질에 맞게 일구어낸 그 민족만의 삶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중국은 차의 시작을 염제 신농씨때부터라고 하니 벌써 4500년이나 됐다. 다사연구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헌으로 서한(西漢)의 선제(宣帝) 3년(서기전 59년)에 왕포(王褒)가 쓴 '동약(僮約)'이라는 기록에는 2000년 전에 이미 사천성의 성도에는 차를 팔고 사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육우(陸羽․733~804)가 780년에 쓴 '다경(茶經)' 「육지음(六之飮)」에 ‘마시는 차에는 추차(觕茶․ 거친차) 산차(散茶․ 잎차) 말차(末茶․ 가루차) 병차(餠茶․ 덩이차)가 있다’고 했다. 광활한 대륙 전체가 모두 꼭같이 산차나 말차만 마시라는 법이 없다. 산간지역에서는 산간지역에 맞은 차를, 물이 나쁜 곳에서는 차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땅이 넓은 만큼 차의 종류도 헤일 수 없다.
육우는 ‘차에다 파 생강 대추 귤껍질 수유 박하 등을 넣고 오래 끓이기도 하고 혹은 떠 있는 찌꺼기를 걷어내거나 혹은 끓어 오른 거품을 버리기도 한다. 이런 차는 하수구에 버려진 물과 다름없는데도 모두 이런 습관들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며 차 한가지만으로 정성들여 만들어 마셔야 한다고 애태워했지만 환경이라는 것은 육우의 소망대로 그렇게 되어 주지 않게 되어있다.
차는 찻잎 한가지로 만들어 져야지 차에 이물질이 첨가되면 차가 아니라고 했지만 지금도 티베트 등 북쪽 산악지대나 신강 감숙성 몽골 등 사막 초원에 가면 차에다 땅콩과 쌀과 보릿가루등 별에 별 것을 다 첨가해 마신다. 고상하게 차만 마셔서는 안되는 환경 때문이다.
차 한가지만 물에 우려 마시자고 외쳤던 육우가 세상을 떠났고, 그가 활개쳤던 당나라는 폐망하지만 송나라때에 들어서면서 육우때의 말차는 더욱 화려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황제인 휘종(徽宗․1101~1125)이 직접 '대관다론(大觀茶論)'이라는 차책을 쓸 정도였다. 차도 찻그릇도 말차에 맞게 전성기를 맞는다.
세월이 흘러 송나라도 역사의 장에서 밀려나고 명나라가 개국을 하면 차의 모습은 또 한번 변신을 하게 된다. 황실 위주로 귀족화된 말차는 가렴주구를 불러오게 됐다. 서민에게는 원성의 대상이 됐을 뿐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말차를 없애고 만들기도 쉽고 누구나 손 쉽게 마실 수 있는 산차(입차)를 마시라고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소위 녹차와 발효차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산차만 발달한 것이 아니라 산차에 따른 찻그릇 자사호(紫砂壺)가 자연스레 등장하면서 차인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산차가 대종을 이룬것만 아니다. 여전히 북쪽 사막지대나 산악지대 그리고 초원에서는 병차(덩이차․ 떡차)를 마실 수 밖에 없다. 예전에는 교통 때문에 수송이 어려워 병차밖에 구할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교통에 지장을 받지 않는 지금도 병차를 선호하는 것은 이 지역의 환경이 산차를 수용할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집권을 하면 또 어떻게 됐는가.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족이라면 유목민이다. 유목민이 산차를 좋아할 턱이 없다. 그들의 주식이 육류이고 보면 병차(떡차)나 강발효차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북쪽 유목민에게만 공급되던 이름조차 없었던 보이차가 청나라에 와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물론 차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남쪽지방에서는 여전히 산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황하나 양자강 등 두 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중국이라는 대륙은 예나 지금이나 인체에 가장 중요한 마실 물이 적당치 못한 환경이다. 마시기 부적합한 물을 인체에 알맞게 중화를 시키는 것이 차임은 지금에는 상식화 되어 있다. 인체가 필요한 물을 위해서 차가 필요한 것이지 의례나 다도를 위한 차가 아니었다. 때문에 철저하게 실용성 위주의 차문화가 정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우리나라보다는 한참이나 늦었지만 일본의 차는 나라시대(奈良時代․710~794)에 당나라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는 설과, 남송(南宋)때인 1191년 묘안 에이사이선사(明菴 榮西禪師․1141~1215)가 남송에서 공부를 마치고 큐슈 히라토(平戶)로 귀국하면서 차씨를 가지고 와 세부리산(背振山)에 파종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차의 전래설이 있다. 이 또한 일본의 차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지만 아무튼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일본의 차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일본에 전파된 차는 무로마찌 시대(室町時代․1338~1573) 중기인 6대 장군 아시까가 요시노리(足利義敎)때 노우아미(能阿彌․1397~1471)라는 다도사범이 나타나 다구감별법, 점다법, 차달여 내는 법, 장식법을 만들어 내고 있다. 8대 장군 아시까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6~1490)때 오면 게이아미(藝阿彌․1431~1485)와 소우아미(相阿彌․?~1525)가 나타나 서원의 장식법과 점다법을 일본특유의 다도를 형성한다.
이들의 뒤를 이어 아시까가 요시마사의 다도사범이 ‘모자람에 만족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일본 다도의 정신인 소위 ‘와비차’의 개조(開祖)인 무라다 쥬꼬우(村田珠光․1422~1502)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다께노 죠우오오(武野紹鷗․1502~1555)가 나타나 와비의 초암식 다도를 완성시킨다.
오늘의 일본다도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센리큐(千利休․1522~1592)를 길러낸 스승이 바로 다께노 죠우오오인 것이다. 스승인 다께노가 죽자 센리큐는 1578년 당시의 권력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도사범을 지내기도 했고, 1582년 노부나가가 죽자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다도사범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도요또미 히데요시로부터 활복할 것을 명령받고 나이 70에 생을 마감한다. 센리큐는 죽지만 그의 다도는 지금까지 더욱 발전해 지금은 센리큐의 자손들이 일구어 놓은 산센케(三千家) 즉 오모테센케(表千家) 우라센케(裏千家) 무샤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로 대물림 되면서 일본 다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센리큐의 15대 종손 센켄시츠(千玄室․ 82)가 우라센케 15대 종장으로 생존하고 있다.
12세기 에이사이선사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차는 철저하게 권력자와 그 주위의 실세, 귀족과 무사계급에서 꽃을 피워 일본 고유의 다도로 극도의 형식주의 차문화를 만들어 냈다.
임진왜란 전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일본을 보고 온 기록에는 시장에서 차를 팔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일본은 500여년전 이미 시장에서 차를 팔고 돈을 주고 사마실 정도로 생활속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엿볼수 있다. 서민들의 차, 그 차는 센리큐 등 귀족층의 다도와는 사뭇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해양성 기후의 땅이다. 해양성 기후풍토이다보니 마시는 물부터 우리와 같지 않다. 마시는 물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영양분 중에서 칼슘이 부족하고 치아에 필요한 불소가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그냥 물을 마시는 것 보다는 차와 같이 우려 마심으로써 물에서 부족한 영양분을 차를 통해 보충받고 있다. 국민보건 위생상 차를 마시게 해야 하는 환경이다.
양질의 차나무 생성조건은 화강암이 오랜 세월이 지나 풍화된 점질로 된 카오리나이트(Kaolinite․ 고령토), 즉 중․고생대 지질층의 토양지대여야 한다. 일본의 경우 카오리나이트 지질과는 거리가 멀다. 백제인이 건너가 자리를 잡은 큐슈지방이나 교토지역이 카오리나이트 사촌쯤 되는 지질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양질의 도기나 자기가 태어나지 못하게 되어있다. 우리의 그릇에 눈독을 들이게 되어있다.
여기다 해양성 기후로 강우량이 많고 습기가 많은 일본은 찻잎에 수분이 많아 뜨거운 솥에서 덖기보다는 뜨거운 물에 찌거나 데칠 수 밖에 없다. 찻잎을 데치거나 쪄낼 수 밖에 없다보니 완성된 찻잎에 뜨거운 물은 금물이다. 찻잎을 뜨거운 물에 우릴 경우 찻잎이 삶겨져 쓰고 떫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뜨거운 솥에서 덖어 만들어진 중국이나 우리의 차와는 그 맛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본이 1000년 전 당나라나 송나라때 말차를 지금까지 그대로 고집하고 있는 것도 일본의 차나무가 안고있는 생태적인 환경을 간과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지금 일본에서 만들고 있는 말차용 차나무를 보면 과연 이것이 차나무가 맞는가고 의심이 들것이다. 말차에 맞는 차나무로 끊임없이 육종을 개량해 냈다. 서민들이 우려 마시는 전차(煎茶) 또한 야부키다(北藪) 등 일본의 기후 풍토에 맞는 차나무를 끊임없이 개량을 해 냈다. 중국종 자생종이나 우리의 야생종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차나무가 될 수 밖에 없다. <한국> 우리나라 차의 시원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200년 전 27대 선덕여왕(632~647)때부터 있었으나 이때부터 성행했다고 했다. 또 허왕후가 시집올때 가지고 와 김해 백월산에 심었는데 이를 죽로차라 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우리의 차는 2000년 역사를 가졌다. 확실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이다. ‘신라 30대 법민왕이 서기 661년에, 수로왕은 내 15대외조가 되므로 비록 나라는 망했다 해도 사당은 남았으니 제전을 받들도록 하라고 명해 수로왕의 13대 손인 경세급간으로 하여금 가락국 2대 거등왕 당시 수로왕 제사 때와 같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 밥, 차, 과자 따위의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않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릉 경포대 한송정에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 사선(四仙)이 와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540~576)때 였다.
2000년 전에 왔던 1500년 전에 왔던 이 땅의 차는 중국과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세계에서도 물이 좋기로 이름난 금수강산이라 물 때문에 차를 타 마시지는 않았다. 우리의 차는 그야말로 멋이요, 풍류였다. 제상에 오른 의례물이었고 손님을 접대하는 접빈차였다.
고려태조 왕건은 신라의 전통과 문화를 그대로 계승한다. 특히 귀족층에서 즐겨 마시던 차를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 의례품으로, 또 약으로 마시도록 권장하는 정책을 폈다. 전국 곳곳에 차를 파는 상점과 정자가 많았다. 차 문화가 가장 꽃을 피우던 시대였다.
왕자의 출생을 축하할때, 공주가 시집갈 때, 왕세자의 책봉식, 명산대찰에서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제레를 올릴때, 팔관회나 연등회, 기우제 등 국가적인 행사에는 의례 차가 제상에 올려졌다. 설 단오 추석 중양절 등 '고려사' 「예부」에 기록된 98가지 의례 중 11가지 의식에 차가 올려졌음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국사를 다루는 사헌부 다시청(茶時廳)은 궁중에 차를 취급하는 부서이다. 사헌부의 고관들이 국가 중요사를 결정할 때 머리를 맑게해주는 차를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고 신중한 판단을 얻고자 했다.
조선조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차의 기록은 1500회가 넘는다. 태종(1400~1418)때 사신을 맞아 차례를 올렸다는 기록으로부터 행다례(行茶禮) 진차례(進茶禮) 주차례(晝茶禮) 별차례(別茶禮) 등 헤일 수 없이 많다. 태종 16년(1416) 9월 흉년이 들어 쌀로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고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차 대신 술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다만 태조 헌강대왕과 신의왕후의 제사에만 술을 쓰고 나머지 묘제에는 모두 차를 쓰라고 했다.
조선조 예서인 김장생(1548~1631)의 '상례비요도'나 '가례집람'을 보면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차례때 신주의 오른쪽에 술, 왼쪽에 차를 올려 놓도록 그림까지 그려 놓고 있다. 천지신명에게 기원을 할때 사람이 태어나거나 또 생일잔치, 이름을 짓고 성인식을 할 때, 혼례때,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 선조의 제사 때 등 모든 의례에 차를 올렸다.
선비들의 수많은 차시는 중국과 일본과는 격이 다르다. 금수강산 물이 좋았기 때문에 차는 더욱 그 맛이 깊었을 것이다. 한 잔의 차로 선경을 노닐고 한 잔의 차로 구름위를 날았다. 조선조 말 다승인 초의스님(1786~1866)은 ‘차는 천선인귀(天仙人鬼)가 다 애지중지하는 신물(神物)’이라며 ‘차와 물이 서로 어우러지면 혼(魂)과 백(魄)도 아우러져 하나가 되는’ 경지가 바로 다도(茶道)의 경지라 했다.
아무려나 우리의 차는 생필품의 차가 아니었다. 우리의 차는 자연스럽다. 우리의 건축이나 정원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자연미이고 균형미이다. 예를 중시했고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를 강조했다. 한 잔의 차에서 멋을 찾고, 선경을 찾았다. 그리고 각종 의례상에 오르는 필수품이었다. 이웃인 중국과 일본과는 전혀 다른 차문화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전차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우리 차맛을 보고는 “차가 왜 이런 맛이느냐”며 찡그린다. 우리의 전통 차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일본 전차맛을 보고는 찻잎으로 만든 차가 아니라고 한다. 말차 또한 마찬가지다. 일본의 말차 맛은 부드럽고 은근하다. 재배부터 재조까지 모두가 철저한 인공이다. 일본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철저히 개량된 것이다. 말차의 전성기때인 송나라때 말차맛이 일본의 말차 맛일 수 없다.
우리의 전통찻잎으로 만든 말차가 일본의 것과 같이 부드러울 수 없다. 김치와 된장, 우리의 음식에 길들여진 우리의 입과 일본 사람의 입맛과 같을 수 없다.
<맺음> 환경이 그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만든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내 것은 옳고, 네것은 거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것을 자랑할 줄 알면 남의 것을 존중해 줄 줄도 알아야 한다. 제것이 최고인 줄을 알면 남의 것도 높이 평가할 수 있어야 문화인이다.
다양한 차의 종류와 차의 종주국이라는 중국에, 또 세세연연 자기의 차문화를 지키며 세계에 당당히 자랑하는 다도의 종주국 일본의 사이에서 우리는 설자리를 잃은 듯 준혹이 들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형편이 차문화를 들추어 낼 그런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불과 20년 전 일본은 국민 1인당 1년간 차소비가 1000g을 넘을때 우리는 1g에도 못미쳤다. 차의 맛이 어떻고, 그 색과 향이 어떻고할 여유가 없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듯 우리들의 Dna속에 잠자고 있던 차는 어느 날 갑자기 불붙기 시작해 지금 우리의 차소비는 20년 전 보다 100배의 수준을 넘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규대학 차과가, 그리고 5개 대학원 석사과정이 생겨 났다. 21세기 새로운 차의 종주국으로 발돋움하는 밑거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자랑하던 보이차니 발효차니 하던 것이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마신 차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됐다. 중국과 일본에 가서 직접 배워보고야 우리것이 소중하다는 화개나 보성의 차 제조업자들의 말은 우리차의 내일을 보는듯 희망적이다.
초의스님이 '동다송'에서 "중국의 육안차는 맛으로, 몽산차는 약으로 유명하다지만 우리 차는 이 둘을 다 가지고 있다"고 했다. 중국의 무가 이 땅에 오기만 하면 산삼이 되는 토질을 가진 땅이 이 땅이다. 차나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이 폐기한 야부기다 종도 농약과 비료없이 제대로만 키운다면 신차(神茶)가 된다는 것도 이젠 터득이 됐다.
중국은 곡예같은 행다의 기예로, 또 다양한 제다기술로 수많은 맛을 무기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일본은 깔끔하고 격조높은 다구와 근엄한 다도로 세계를 일본다도 일색으로 만들겠다는 야무진 전략도 갖고 있다.
센리큐 15대 종장인 센켄시스씨는 중국과 우리를 겨냥한 듯 찻잎을 우려내 마시는 전차(煎茶)로는 다도에 이를 수 없고 오직 ‘말차만이 다도에 이른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초의스님의 다도에 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상대를 존경해 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예를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 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치러야 하는 각종 통과의례에 차를 매개체로 했다는 것은 오랜 우리의 차문화 역사가 낳은 세계적 유산이다. 한 잔의 차로 탄생을 축복하고 한 잔의 차로 선조와 하늘에 예를 올려 온 미풍양속이다. 여기다 우리의 솜씨로 덖어낸 깔끔하고 시원한,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깊은 우리의 차맛에 세계가 주목할 날 멀지 않을 것이다.*
'오 설록' 2006년 신년호에 게재된 원고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