桂陽君 이 증은
조선 제 4 대왕 세종의 후궁 신빈 청주 김씨 소생 6 군중 맏이로
1427 년 정미년 세종 9 년 8월12일에 태어났다. (양띠 )
(세종대왕이 승하하시던 해 경오년에 담양군께서 12세 나이에 미장가로 돌아가시어 후손이 없었는데 맏형인 계양군의 제 2자인 강양군이 숙부 담양군의 후계자가 되었으므로 세종왕자 담양군파 후손들은 종통상 담양군의 자손이나 혈통상 계양군의
자손이므로 계양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두어야 계통을 이해 할 수 있다.)
계양군은 어릴 적 부터 학문에 소양있고 특히 글씨를 잘 써서
부왕 세종과 이복형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1 세 되던 세종 19 년 1437 년 12 월에
당시 중추원사 양절공 한 확의
2 녀인 청주 한씨와 혼인하였다.
세종대왕이 직접 나서서 정선군부인 청주한씨를 며느리로 선발하였다.
이 때 한 확의 두 여동생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간지
각각 20년 10 년 지난 때 였다.
이 해 정사년에 계양군 막내 처제인 인수대비 한씨가 태어났다.
한확의 6 녀가 바로 훗날 성종대왕의 모친 즉 인수대비가 된다.
한 확은 세조좌익공신으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고
세조 등극을 허락 받으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귀국길에 졸하였다.
증 영의정 서원부원군으로 세조와 함께 종묘에서 제향 받고 있다.
계양군은 16 세 무렵 부터 부왕의 명으로 훈민정음청에서
이복 형 화의군과 함께 학생교재인 동자습서를 지을 때 감수하였다.
그 밖에 여러 언해 번역 작업에 참여 하였다.
성품이 소탈하여 귀한 신분을 과시하지 않고 담소를 즐겼고
상당한 미남이었는데 당시 세련되게 옷을 잘 차려 입는 사람으로 소문 났다.
10 살 연상인 이복형 세조가 아껴 잠저 시절 부터 서무를 출납케 하고 이르기를
발호시령 출입기거라 하니 세조가 있는 곳이면 늘 계양군이 있게 되었다.
또 세조가 계양군의 걸출한 막내 처제를 탐내어
맏며느리(훗날 인수대비 성종 모친 ) 삼았으므로 겹 사돈으로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또 세조대왕비 정희왕후 파평 윤씨의 친동생이
한계미 ( 세조공신 판서 )와 혼인하여 낳은 세째 아들이 한흠인데
계양군의 세째 사위가 되었다.
즉 여주목사 지낸 한 흠은
개국공신 영의정 한상경의 증손자이다.
( 한상질 손자 상당부원군 한명회를 기른 작은 조부)
계양군은 세종왕자중 가장 처가가 막강하고 화려 하였는데
계양군의 처가는 왕실과 겹사돈 관계면서
명나라 황제에게 두 딸이 후궁으로 뽑혀가 당시 외교에 일조 하였다.
계양군의 배위 정선군부인 한씨의 큰 고모 즉 한 확의 여동생이
태종 18 년 1418 년 무술년 명나라에 3 차 공녀로 가서
제 3 대 명나라 황제 성락제의 후궁 려비가 되었고
세종 9 년엔 또 다른 여동생이 제 5 대 황제 선종제의 후궁 공신부인이 되었다.
한 확은 1418 년 19 세에 명나라에서 광록소시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18 세 부터 57세로 죽을 때 까지 거의 매년 양국을 오가며 외교 하였다.
한확이 18 세에 여동생을 수행하고 명나라에 처음 들어 갔었는데
황제가 두 남매를 겪어 보고 매우 흡족하게 여겨 한 확을 손주 사위로
삼고자 했는데 고국의 노모를 봉양 해야 한다고 정중히 거절 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한확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들과 조카들이 외교에 일조 했는데 한확과 그 아들들
조카 또한 인물이 장대하고 수려 했다고 한다.
그러한 가문에서 보고 자란 정선군부인이나 인수대비가 특히 출중 하였으니
세종과 세조가 탐내지 않았겠는가?
계양군은 세조가 정권을 도모 할 때
장인 처제등 처가 일족과 동생 익현군과 함께 협조하여
세조 정사공신 ( 1453 년 계유년 계유정난 ) 및
좌익공신 ( 1455 년 을해년 세조등극 )이 되었다.
또 사육신이 거사하기 전에 그 중 집현전 학자 김 질이 장인에게 실토하자
장인 영의정 정창손은 사위 김질을 데리고 수양대군 (세조)에게 가서 자수하였다.
김 질은 용서 받고 훗날 좌의정 지냈고
계양군의 3 남 부림군이 김질의 사위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세조는 어찌 되었든 계양군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 성종대왕이 생부를 덕종으로 추승하고 명나라에 가서 허락을 받아 온 이도
김질이다.
계양군은 대군은 아니지만
일생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후궁 신빈 청주 김씨의 첫 아들이라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명나라 황실과 닿은 처가를 둔데다 세조공신으로 보상 받고
세조대왕의 총애를 받아 당대에 견줄 사람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 뒤 사악한 무리들과 어울려 음주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여 지탄을 받았다.
급기야 세조로 부터 질타를 받았고 끝내 그로 인하여 병 들어 38 세로 졸 하였다.
계양군은 당시 세조일등공신이라 곱지 않은 눈총을 받은건 사실이지만
성품이 착하여 귀한 티 내지 않았고
공신이지만 다른 욕심 없어 세조대왕에게 오해 받은 적이 없었다.
세조 10 년 1464 년 8 월 16 일에 계양군이 졸하니
세조가 조회를 그치고 슬퍼하고 미워하며 탄식하고 애도 하며 예법대로
쌀과 콩 100 석 종이 200 백권 정포 60 필 백저포와 백면주
각각 10 필 석회석 60 석을 내리도록 지시 하였다.
계양군이 졸하고 17 년 뒤 배위 정선군부인 한씨가 졸하였다.
이모 한씨 상에 성종대왕은 법대로 쌀과 콩 40 석 정포 50 필 청필 7 두 기름
10 두 종이 100 권 석회석 50 석을 내렸다.
앞서 계양군 장모 즉 성종대왕의 외조모 한 확의 배위 남양홍씨 ( 인수대비 모친 )가
죽었을 때 명나라에서 국내에 없는 초대형 최고급의 돌을 코끼리에 실려
보냈으므로 다듬어 신도비를 세우니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유일했다.
성종은 이모 한씨와 그 소생 영원군 강양군 부림군등을 끝까지 우대 하였다.
부인이 병석에 있을 때 위문객이 전국에서 몰려왔다고 한다.
장남 영원군은 후사 잇지 못해 동생 부림군의 아들을 양자 삼았고
차남 강양군은 숙부 담양군이 후사 없이 미장가로 죽어 양자로 갔고
평생 당대 제일의 부귀인으로 살았다. 47세졸
계양군의 3 남 사우정 부림군은 학식이 높고 품격 높은 시를 잘 지었다.
조선 9대왕 성종과 왕의 친형 월산 대군 부림군 강양군은 절친 하게 지냈다.
세조대왕은 아꼈던 계양군 아들들도 특별히 대궐 사부에게 배우게 했다.
부림군은 부친 계양군을 닮아 미남이었고 당대 명창이기도 했으며
문집으로 사우정집이 있다
매우 빼어났던 듯 하다 계양군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취중 실언 한 사람이 처
벌을 받았으니 장례원 종 이동이다.
평판이 좋았고 대궐 사부들도 부림군을 크게 칭송 했다고 한다.
세조대왕 계양군등을 크게 비판한 당시 유명한 문인들도 부림군과는 교류하였다.
부림군은 상낙부원군 영의정 김 질의 사위가 되었고
영의정을 하도 오래 지내
김 시습이 대로에서 욕으로 일갈 했다는 정창손은 김 질의 장인이다.
부림군 여식이 평산 신씨가로 출가하였는데
고려태조 왕 건과 용모가 닮아서 대신 전사한 충신 신숭겸 장군의 후예로
남편은 호조판서를 역임한 신 상이고
세 아들도 모두 크게 현달 하였다.
부림군의 여식의 손자가 유명한 신 립 장군이다.
신 립의 딸은 선조대왕 왕자 신성군에게 시집 갔는데
임진왜란이 일어 난 해 신 립이 4 월에 전사하고
11월에 피난지 의주에서 그의 사위 신성군도 15 세로 죽었다.
선조대왕은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차남인 신성군을 광해군 대신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어 세자 책봉을 서두르지 않았다.
사우정 부림군 이 식은 32 세로 요절하였다.
부림군 여식의 시모는 세조일등공신 권 람의 여식이다.
부림군의 손자 문천정 이 수갑이 양자로 가서 계양군파 종통을 이었는데 그 여식이
선조대왕왕비 의인왕후 박씨의 친어머니이다.
반남 ( 나주 ) 박씨 반성부원군 박응순이 선조대왕 장인이다.
계양군의 4 남 방산수는 스무 살 어린나이에
당시 유명한 어우동의 정인이 되어 팔에 어우동의 이름을 문신하였다.
그 일로 탄핵 받고 곤양에 10 년 귀양살이 끝에 군으로 승진 못하고
방산수로 종친부에서 제적되고 후손없이 30 세로 세상을 떠났다.
계양군의 맏 딸이 안계송에게 시집갔는데 궐 밖 행차 후
성종대왕이 이 이종 사촌 누님이 사는집에 갑자기 행차 하였는데
길쌈하다 누추한 차림으로 맞이하니 왕은 지닌 금품 다 주고
행차에 사용한 은 그릇 일체를 다 주고 가며
매형 안계송에게 당장 벼슬을 주었다.
안씨 집에서 성종이 앉았던 방석을 가보로 몇대째 매 달아 놓고 보았다.
계양군의 둘째 사위는 정경조인데
세조 공신 좌의정 하동 부원군 정인지의 5 남 2 녀중 네째 아들이다.
맏 형 정광조가 안 맹담의 사위이다.
한 확 ( 계양군 장인 )의 막내 아들 한치레의 처가 안맹담 여식이다.
안맹담은 세종의 사위이기도 하다.
둘째 형 정현조는 하성위로 세조대왕의 부마로 과거에 급제 했다.
계양군의 세째 사위는 여주 목사 지낸 한 흠이다.
청주 한씨로 증조부가 영의정 한상경이다.
명나라에 가서 국호 조선을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이 형인데
한상질은 한명회의 친 조부이다.
세조가 거사 할 때 이 청주 한씨 일가 친인척이 대거 가담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한 흠은 세조공신 이조판서 한계미가 부친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인데 세조대왕왕비인 정희왕후의 동생이기도 하다.
계양군 막내 사위는 정종선이다.
세조의 며느리 셋 모두 청주 한씨로 서로 가까운 친인척이다.
참고로 세조1417 년생 / 한 확은 1400 년생 / 한 명회 1415 년생
계양군 1426 년생 / 정선군부인 한씨1425 년생 / 인수대비 1437 년생
계양군의 자는 현지 시호가 충소이고 충소공이라 부른다.
영조때 영의정 4 번 역임하며 영조대왕께 건의하여 수 많은 사람을
신원 복위 시킨 김재로의 어머니 전주 이씨가 계양군 종가 후손이다.
김재로의 외조부 군수 이몽석이 계양군의 8 대 종손이다.
김 재로는 청풍 김씨로
계양군 후손 선조 때 완창부원군 호조판서 파곡 이 성중과
그 아들 의주목사 정민공 이 유징의 시장을 써 준 사람이다.
그 두 부자는 계양군 후손으로 임진왜란에 한달 사이에
각각 임지에서 순절하였는데 그 때 까지 나라에서 시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때 공신 시호 문제가 소홀하였다.
이에 파곡의 5대손인 형조참판 이 제화가
영의정 김 재로를 방문하여 시장을 받아
봉상시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때는 영조조로 선대 여러조에서 미결된 많은 일이 이때 이르러 해결 되었다.
유명한 열하일기 저자 박지원은 장인 이 보천과 처 숙부 이양천으로 부터 배웠는데
그 들이 계양군 후손으로 벼슬없이 처사로 살아가고 있었다.
영조때 유명한 실학자 성호 이 익의 첫 수제자인 실학자 소남 윤 동규도
담양군파의 사위다 즉 계양군 후손 ( 담양군 )의 사위 이다.
담양군파 후손들은 조선 후기 종친으로 실학자들과 친교가 있었고
배웠고 대개 남인에 속했고 그 들 끼리 혼인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