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기미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문용기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3월 26일 이래 격렬히 전개되어온 만세시위운동을 이
리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는점과 약속된 장날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수백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4.4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문용기 열사의 지휘에 의하여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대열을 지어 시가 (현익산역)에서 현(남부
시장 ) 까지 행진을 하여 당시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점차 장터에 모인 군중들까지 수백 여명으로 늘어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쿠리를 휘두르며 무차별 진압을 강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일본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그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 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헌병은 그를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니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