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읽었던 책을 새롭게 다시 꺼내 봅니다.
많은 생각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천은 참 미천하네요.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을 행동일 텐데요.
항상 부끄러운 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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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최운경
내 피에는 아마도 ‘샌님’의 기질이 흐르나보다.
재주는 없고, 오로지 ‘읽는 기쁨’을 느끼며 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꽤 많은 활자의 중독 증세에 빠져 있긴 하지만, 심도 깊은 독서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여서 감히 실학자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읽었던 책들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사춘기에 한번쯤 문학소녀 아닌 사람 없고, 청소년기에 한번쯤 독서의 달콤한 맛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요즘은 논술세대여서인지 공부 외에도 책을 읽어야 하는 시대지만, 나의 학창시절은 책을 읽는 사람을 학대(?)하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 끝나고 읽으라고, 어떤 선생님께는 책을 빼앗긴 적이 있다. 고3시절 수학 선생님께 기형도 시인의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빼앗겼고, 고1때는 영어 책 속에 끼워놓고 보았던 니체를 빼앗겼으며, 고2때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를 빼앗겼는데, “농무”를 본 선생님은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그 때만 해도 농무는 절판된 시집이었고, 마치 볼온서적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2008년 수능 모의고사에는 기형도의 시와 신경림의 ‘농무’가 나란히 실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들의 작품을 논하고, 해석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때, 나는 문학의 무한한 상상력과,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다양한 사랑을 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완전한 나의 이데아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한 평 남짓 나의 방은 온통 환상의 공간으로 변했으며, 용돈을 아껴 모은 삼중당 문고판 세계문학과 우리 현대문학 작품들은 소중한 재산목록 1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어 선생님들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책을 보느라 시내의 대형문고에서 주말을 저당 잡히기 일쑤였다.
친구들이 독서실과 학교 빈 교실에서 영어와 수학 문제를 해결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때, 나는 선풍기 바람 시원하고 책냄새 그윽한 서점 구석에 틀어박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직원 언니의 온갖 눈총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읽어 댔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여고 2학년에 이르러, 이덕무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한 “백탑아래서의 인연”과 비슷한 인연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지금은 “원을 위한 구각형”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10명의 친구들. 그 시절엔 무엇이 그리도 허무함을 느꼈던지 “無”라는 이름으로 만났다. 일주일에 한권 책을 읽고 토론하고, 주말에는 산을 오르거나, 영화를 보고, 공연을 즐기고, 전시회를 가고, 책을 많이 읽는 선생님 댁을 마구 찾아가 질문을 하고, 고민을 털어 놓고...
아마도 우리는 이덕무와 같은 그런 종류의 호사를 누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친구 수정이와 내가 의기투합해서 만든 그 모임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정이 말고는 모두 같은 반도 한 적 없는 순수하게 문학과 역사와 예술과 사회의 많은 문제를 고민해 보자는 측면에서 의기투합이 되어 만난 친구들이다.
우리들은 졸업과 동시에 모두 각자 다른 과를 선택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원서를 쓰면서 선생님과 평탄하게 쓴 사람이 없다. 그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성적에 맞추어 학교에서 가라는 대학에 간 녀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나름의 신념이 있었고, 모두 우리 각자가 희망했던 공부를 하기 위해 흩어졌다.
대학에 가 보니 대학도서관 건물의 위용에 일단 놀란다. 하지만 지방 대학의 도서관에 있는 책이란 것이 1년 읽고 나니 볼 것이 없었다. 다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 관심분야의 책에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왔다. 그로부터 3년간은 방학만 되면 교보문고를 가기 위해 서울에 간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책을 먼저 구입한 후 남은 돈으로 다른 것을 한다.
과가 다른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가 3년을 조교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며 그 분의 독서 이력을 꿰어가며 읽던 시절도 있었다.(결국 그 양반이 결혼식의 주례도 서 주셨다)
대학시절 내내 미치도록 책을 읽었고, 미치도록 여행을 했다. 졸업을 하고도, 부모님 애간장 다 타들어가도록, 야간산행을 하고, 책을 읽고, 방 안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고,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원하던 일에는 번번이 물을 먹는다.
어쩌면 친구들이 절대 시집을 가지 않을 것이라 여기던 내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이상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끄집어내려는 내 부모님의 압력 같은 것에 떠밀린 감이 없지 않다. 절대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으리라 내심 이를 악물었던 결혼이란 제도에 쉽게 들어갈 줄 나 또한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만난 것이 ‘동화읽는어른’이다. 내가 책을 만나게 된 인연의 내력이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흘렀으나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10년의 세월은 멀리뛰기 위한 도움닫기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다시 새롭게 읽어내야 할 수많은 어린이 책과, 청소년들을 위한 책에 한동안 빠져 지낼 듯싶다. 20대까지는 내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여러 학문들에 대한 관심으로 지냈다면, 30대는 오로지 아이들과 그 중심에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다.
이제는 삶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긍정의 힘을 얻게 된 아줌마의 힘이 위대하고, 삶의 모퉁이마다에서 힘이 되어 준 책 동무들이 고맙고, 힘들어 할 때, 전화로 위로 받을 수 있는 조언자들이 많아서 행복하다.
조선후기 이덕무와 그의 벗들, 나이와 학문의 깊이와, 취향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책을 통한 진정한 우정과 학문의 교류가 못내 부럽고, 또 부럽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덕무가 조정에 부름을 받았을 때, 아비의 시대보다 나의 시대가 나아졌고, 내 아이들이 커갈 조선은 더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제가와 백동수같은 벗들을 보면서 서러움을 느꼈던 그들은 서얼출신들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올라갈 수 없는 한계를 느꼈을 때의 좌절감은 어떠했을까?
책만이 그들을 위로했으리라. 학문의 길만이 그들을 평등하게 했으리라. 그것을 나누는 벗들만이 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으리라.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백탑 아래 모인 이덕무와 그의 벗들처럼 옹송그리고 모여 무엇을 하는가? 책을 통해 무한한 꿈을 꾸고, 책을 통해 우리의 이상을 실현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덕무가 품었던 희망을 우리도 마음 한가득 품어 보면 어떨까?
그들은 진정 책만 보는 ‘바보’였을까? 그럼 우리는?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왜 (어린이) 책을 읽는가?
당신은 왜 동화읽는어른모임 활동을 하는가?
이 모임을 통해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책만보는바보.hwp
첫댓글 책을 읽는 일 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요? 누군가 구한 새 책을 눈이 빠지게 순서를 기다려 제본한 책을 쓰다듬으며 좋아하던 그들... 겨우 숨통 틔울 수 있게 해 준 정조임금이 너무 빨리 떠나 아쉬웠지만 그 자손들이 그냥 세월을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지요. 특히 유득공의 발해에 대한 탐구와 기술에 대한 부분에선 새삼 선인의 노력에 고개가 끄덕여 졌습니다. .... 교육부 모두 풍성한 한가위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