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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무덤은 이땅에 있다 / 이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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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에게 ‘식민지 조선’, ‘일본 제국’,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말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생경하고 현실감 없는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코 식민지 조선, 일본 제국,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행 그 자체’라는 과장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지독한 가난보다 더욱 그녀를 괴롭혔던 것은 불화로 점철된 가족사였다. 후미코 부모의 부부관계는 일찍이 파탄에 이르렀다. 후미코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를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친척집을 전전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냉대와 멸시, 학대와 방치 속에서 자라났다. 1912년 아홉 살의 후미코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으로 건너간다.
당시 충청북도 청주군(현재 청원군) 부용면에 고모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 양녀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에 불과했을 뿐, 고모 내외와 할머니는 어린 후미코를 고된 집안일로 매일같이 혹사시켰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후미코는 고모의 집에서 7년 동안이나 하녀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의 서러운 처지 속에서 그녀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이중삼중으로 고통과 핍박을 겪고 있던 주변의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후에 후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 그때 그저 눈에 비쳤을 뿐인 사건들이 지금은 크나큰 반항의 뿌리가 되어 제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 생활 동안의 견문 때문에 저는 조선인들의 일본제국주의를 향한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쿄로 올라오자마자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 혹은 민족운동자와 벗이 되었습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열여섯의 후미코는 스스로 독립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러나 가족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질긴 가난의 굴레와 인습의 폐해로부터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후미코는 혼자 도쿄로 상경해 갖은 고생을 해가며 자립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누구보다 배움에 목말랐던 그녀는 부단한 독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다져갔다.
그런 후미코가 운명의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인 조선인 유학생 박열(朴熱, 1902-1974)을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열아홉, 1921년의 일이었다. 당시 도쿄에는 수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각각 조선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었지만 ‘내지(內地)’인 일본에서 피지배민족으로의 차별과 설움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의 암담한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는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등과 같은 개혁적 사상이 활발히 대두되던 시기였다.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몇몇 열강들이 침략과 약탈을 통해 전 세계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열강들이 내세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모순과 사회적 병폐를 양산했다.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상을 그 대안으로 삼고자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은 물론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조선의 유학생들도 새로운 사상에 심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일본 정부로부터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박열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사회변혁을 꿈꾸던 인물이었다. 후미코를 만날 당시 약관의 나이였던 그가 철저한 사상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합리한 모순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는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후미코는 깊은 사랑과 연대감을 느꼈다.
동지이자 연인이 된 후미코와 박열은 아나키스트로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세우고 그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발행했다. 다음은 <흑도>에 실린 ‘선언’의 일부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자아에 입각하여 산다. 일상의 일거일동도 모두 자아에서 그 출발점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철저한 자아주의자를 통하여 인간은 서로 으르렁댈 필요 없이 상호 친밀하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우리들은 각자의 자유로운 자아의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불합리한 인위적인 통일에 끝까지 반대하며, 또 전력을 다하여 그것을 파괴하는 데 노력할 것이다. //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한다. 밖에서 오는 어떠한 강한 권력도 우리들의 행동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후미코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 인간으로 당당히 살아 있음을 느꼈다. 가족들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살가운 사랑과 삶에 대한 의욕을 그녀는 박열과 사상적 동지들, 그리고 독립을 꿈꾸는 식민지 조선을 통해 느꼈다. 그러나 몇 년 뒤인 1926년, 스물셋의 후미코는 감옥에서 목을 맨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사실상 의문사였다.)
후미코와 박열이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은 1923년 9월 일본을 강타한 ‘관동대지진’ 직후였다.
일본 언론들은 ‘지진의 혼란을 틈타 천황 일가의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순한 사상을 가진 조선인을 일컫는 말)들의 비밀결사가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사회적 공황상태를 잠재우기 위해 조직적인 조선인학살이 이루어진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후미코와 박열의 체포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흑도회’ 회원들이 천황을 암살할 목적으로 중국에서 폭약을 입수했으며, 후미코와 박열은 그 주동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후미코와 박열은 시종일관 의연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다. 그들은 감옥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그들의 재판은 일본은 물론 조선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감옥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던 후미코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황실의 명으로 그녀와 박열의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후였다. <가네코 후미코>의 저자 야마다 쇼지는 다음과 같은 말한다.
“내가 가네코 후미코에게 끌린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인의 고통과 해방을 위한 그녀의 투쟁이 형식적이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공감해서 나온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가네코 후미코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무적자(無籍者)였고,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으며, 나아가 자기의 의지를 무시당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에게 조선은 확대된 자아였다.”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은 확대된 자아였던 이 땅 조선에, 남편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