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2-2) 내 영에 비밀히 내주하시는 성령에 이르는 길을 빗나가게 하는 것들(2)
(1) 첫째는 선(善)이다.
대적은 우리가 영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한다. 그래서 대적은 우리가 구원받자마자 선을 행할 것(행위)을 결심하도록 부추긴다. 아무도 이 간교한 제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좋은 기도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에게서 나온 기도는 아니다. 이것은 간교한 대적에게서 온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에게 우리를 떠나라고 축사해야만 한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해보자.
요한15장 5절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자신의 노력에 속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분 안에 거하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허락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풍성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것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다만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결과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게 행한 모든 사업들을 생각해보라. 교회가 운영하는 그 많은 신문사들. YMCA, 복지단체들, 학교들, 이 모든 것이 당초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뜻에 크게 어긋나 버렸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인간의 탐욕과 배신과 이념 사상 인본주의의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곧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나는 가지요 그분은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 안에 살아야 하며 그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열쇄이다.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실로 큰 유혹이며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데서 멀리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진리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실로 교회거 묵상과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남 후에 찾아오는 선에 대한 유혹 때문에 엄청난 시행착오와 실패를 맛보았다. 선에 대한 행위의 유혹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데서 멀리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아무도 이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그 많은 설교가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지 못하는 표준이하이기 때문이다.
(2) 둘째는 교리이다.
교리는 추구하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에게 멀어지게 하는 대적이 사용하는 또 다른 도구이다. 나는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들 중 한 사람은 걸어다니는 성구 사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생명으로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과 살아 계신 주님을 아는 문제는 전혀 별개이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접촉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손이나 기억 속에만 가지고 있을 뿐 그들의 영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율법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돕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려고만 할 뿐 그리스도를 무시했다. 율법이 잘못 사용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동일하게 남아 있다. 같은 원칙이 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교리들에 적용된다. 교리들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수단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와 지식을 사용해 그리스도를 대치한다.
(3) 셋째는 은사이다
대적이 이용하는 또 다른 것은 영적인 은사들이다. 하나님의 경륜이 은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려면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 원칙은 모든 은사에 적용된다. 은사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은사에만 지나치게 집중할 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소흘히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치유의 은사는 알고 있지만, 영을 분별하고 그리스도를 접촉하는 법은 모르고 있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지만, 은사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 로마서는 전체 16장 가운데서 12장만 은사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12장은 예언 뿐만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것과 구제하는 것도 은사 중에 열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은사들은 믿는 이들 각자가 그들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은혜로 체험한 결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예언의 은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은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영적 상태는 육신에 속했고 아주 어렸다(고전3:1). 이러한 은사를 통하여 우리는 분명히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알아야 한다.
표적과 지혜도 은사이다(고전1:22).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바울의 유일한 의도는 은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능력과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공급하는데 있었다.
은사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목표와 표적은 아니다. 표적(標的)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은사들은 다만 이 표적을 깨닫도록 우리를 도와줄 뿐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은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되어 들어오신 만유이신 그리스도이다.
물론 우리에게 이 표적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어떤 가르침과 은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리나 은사가 이 표적을 대신해서는 안된다. 이 표적은 그리스도, 곧 우리 영 안에 살아 계신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경륜의 열쇠라는 점을 분명하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이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았다면 어떤 종류의 가르침이나 은사에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없다. 내 손에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모든 문을 열어서 온 집을 다 누릴 수 있다. 만일 열쇠가 없다면, 열쇠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내게 열쇠가 있다면 열쇠공의 봉사가 필요치 않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열쇠공이 아닌 열쇠이다. 열쇠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열쇠공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을 분별하고 내 영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접촉하고 그분과 교통하는데 모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쇠를 얻을 수 있도록 어떤 은사와 가르침을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열쇠공에게만 집착하여 날마다 그에게 가서는 안된다. 일단 열쇠를 얻었다면, 열쇠공에게 감사하고 그를 떠나야 한다. 건물 안에 들어와 그 풍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열쇠를 사용해야 한다.
날마다 이 놀라운 삼위일체 하나님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만유를 포함하신 성령을 누려야 한다. 영을 분별할 때 우리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 중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접촉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표적이다. 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침과 은사를 주실지라도 그 목표는 곧 만유를 포함한 완전하신 주님 자신이다. 그분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정착하지 말라.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온종일 우리의 영 안으로 돌이키기를 추구하며, 영을 분별하여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접촉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올바르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요한4장24절의 해석>
이제 위의 내용들을 이해한 수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기도 중에 받은 그날, 기뻐 뛰며 춤추던 그날의 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요한4: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원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예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해야 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여기서의 영은 단지 주 “영”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 자체를 가리킨다.
영이신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우리의 영으로 경배해야 한다. “경배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려면 그녀의 영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곧 우리의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경배하는 것, 예배하는 것)이 생수를 마시는 것이며, 생수를 마시는 것이 하나님께 참되게 경배하는 것이다. “영 안에서,” 이 영은 우리 사람의 영이다.
예표에 따르면, 하나님은 (1)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위해 선택하신 곳(신명12:5, 11, 13-14, 18)에서, (2)제물들(레위1-6장)로 경배를 받으셔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위해 선책하신 곳은 오늘날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지성소인 사람의 영을 예표한다(엡2:22). 또한 이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할 때에 드린 모든 제물의 성취이시자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밸하라고 가르쳤을 때에, 주님은 그녀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닌 그녀의 영 안에서, 또한 제물들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었다.
진실함이라는 인간 미덕을 산출하는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요한4:25-26) 모든 그림자와 예표는 자나갔다. 요한복음 4장의 문맥과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계시에 따르면, 여기서의 “진실함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배를 위하여, 신성한 실재가 사람에게 참됨이 되고, 성실함(이것은 부도덕한 사마리아인 경배자의 위선과 반대된다(요한4:16-18))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신성한 실재는 실재(reality 요한14:6)이신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구약의 모든 제물의 실재이시고(요한1:29; 3:14), 믿는 이들이 참여하고 마신 생수의 원천, 곧 생명 주시는 영(요한4:7-15)으로서 믿는 이들에게 실재가 되시는 분이시다.
이 실재는 결국 믿는 이들에게 참됨과 성실함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진실함으로는 그녀의 영 안에서, 그녀의 영 안에 계신 제물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24절의 중점은 영이며, 동시에 진실과 실재를 동반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이란 사람의 영 안에서, 영 안에 살아계신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접촉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을 접촉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영 안에 있다.
진리의 영은 실재(reality)의 영이다. 그러므로 영적 실재는 성령 안에 있게 마련이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것만이 영적으로 참이며, 이는 모든 영적인 것이 성령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경배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갖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포함한다.
그분께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경배(=예배, 접촉)란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의지하고, 교통하는 것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배는 모든 것을 포함한 문재로서, 하나님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영으로 돌이켜야만 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