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4)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4)
따라서 이 당시에도 이미 본관이 나누어진 채 천년 이상을 따로 계통을 확립해 간 순흥, 죽산, 광주의 각 문중이 공식적으로 세개의 본관이 동일한 선조인 중국인 이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선대를 연구하는 개별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전승이 안씨의 연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가능성으로 간주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야말로 안씨의 연원이다라고까지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승의 존재에 바탕하여 1871년에 간행된 순흥안씨세보초(順興安氏世譜抄)에서 안재향(安在享)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안씨의 본성은 이씨이며 시조 안경(安瓊)은 중국인이다. 당 헌종 원화 3년 정해년에 동쪽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지춘, 다음이 엽춘, 그 다음이 화춘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왜란 때 3형제가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케한 공이 있어 안씨를 사성받았다.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에, 엽춘은 방걸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안씨 성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형제가 이어서 광주군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이 있다. 시조 자미는 광주군 정걸의 10세손이다(“安氏本姓李氏 始祖安瓊中國人 唐憲宗元和三年丁亥 東入於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倭亂 三兄弟謂有靖國安民之功 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封竹山君 葉春改名邦傑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封廣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兄弟繼爲廣州君可疑 始祖子美廣州君廷傑十世孫”).
순흥안씨는 특히 그 시조를 이원(李瑗)이라거나 혹은 일부 기록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이완(李椀)이라고 쓰지 않고 독특하게 이경(李瓊)이라고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흥안씨 추원록(順興安氏追遠錄)이라는 순흥안씨 전래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고성이씨와 함께 중국에서 도래한 시조의 이름을 이경(李瓊)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보더라도 중국 이씨 도래설을 비난하는 측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그 전승이 근거도 없이 어디서 별안간 나와서 전국 안씨 문중에 퍼지게 된 것이 아니라 이에 관한 별개 복수의 전통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승의 내용은 그 전달 및 발견과정에서 오류가 개입되기 마련이고 그 세부에 이르러서는 상위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 전승이 주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전승의 대체(大體)는 오류의 개입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며 어김없이 전달된다. 중국 이씨 도래설의 전승 역시 세부적인 내용에서 별개 복수의 전승들이 다소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을지라도, 결국 안씨가 본래 이씨이며 중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관하여는 완전히 일치하는 바, 이는 그 전승이 전달하려는 바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상호보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순흥, 죽산, 광주의 주요 안씨 계통이 일치하여 안씨가 중국의 이씨로부터 연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을 매우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점은 쪼개진 족보를 바탕으로 각 주요 계통이 서로 남남이라고 믿고있는 지금의 실정에서 보면 충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에 들어와 순흥, 죽산, 광주안씨의 각 문중에 전래되던 중국 이씨 도래설의 전승은 일부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선대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 반면 일부에서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대의 증명을 기약하여 전의(傳疑)의 예로써 남겨두는 등 각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태도에 있어 다소 간의 차이를 보였을 지라도 그 어느 본관에 의하여도 공식적으로 배척된 바 없이 하나의 진지한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이 순흥, 죽산, 광주안씨 간에 존재하던 암묵적인 이해로서의 중국 이씨 도래의 가능성이야말로 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간행된 거의 모든 근대조선의 씨족 연구서에서 한결같이 안씨는 본래 이씨로서 중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이다.
© 2009 historyofahn.blog.com
Posted by nickname in 14:30:43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3)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3)
광주안씨인 안정복은 당시에 존재하던 이와 같은 중국 이씨 도래설 및 안씨사성설이 믿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광주안씨 내부에서도 이러한 전승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제각기 달랐으며, 안정복과 동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광주안씨 서령공(署令公)파 문중 가첩에서는 시조가 단순히 중국의 어느 이씨라고 하는 것을 넘어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까지 밝히고 있으며 순흥, 죽산, 광주는 모두 그 시조의 세 아들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광주안씨 절첩보라고도 알려진 이 기록은 농서이씨설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조 원(瑗)은 성이 이씨로서 본은 농서(隴西)이며 당원종 원화 2년 정해년에 조선반도로 들어와 강원도 송악산 아래에서 세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이다.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왜란이 있었을 때 형제 3명이 함께 그 난을 평정하여 나라로부터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고 하여 안씨를 사성(賜姓)받았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고쳐 방준, 방걸, 방협이라고 하고 각각 순흥, 광주, 죽성에 봉함을 받았다. 방걸은 광주인으로서 그 지방인이 성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대의를 주창하고 이를 토평하였다. 고려조에 대장군이 되어 광주군(廣陵君)으로 봉해졌다(“始祖瑗 姓李氏 本隴西 唐元宗 元和二年丁亥 東入朝鮮 江原道 松岳山下 有三子 枝春 葉春 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時 兄弟三人 共平其亂 自國命其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改名 邦俊 邦傑 邦俠 一封順興 二封廣陵 三封竹城. 邦傑 廣州人 邑人殺其主叛 公倡大義討平之 麗朝拜大將軍 封廣陵君”).
따라서 지금 흔히 중국 이씨 도래설을 공박하는 쪽에서 논하는 바와 같이 안정복이당시에 이미 동설이 근거없음을 지적하였으므로 이를 허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당시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중국 이씨 도래설을 지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극히 소수설에 불과한 견해를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일부 광주안씨 입장에서는 죽산안씨의 1805년의 을축보 서문에 보이는 따위의 기록이 허무맹랑하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죽산안씨가 시조는 중국인 이씨로서 안씨를 사성받았다고 하기에 이른 것은 위 서령공파 문중 가첩 등을 비롯한 광주안씨의 일부 기록보다 오히려 후대이며 광주안씨 내부에서도 안정복의 회의론에 동조하지 않는 계통이 분명히 존재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대미상이나 185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순흥안씨 판관공(判官公)파 전의록(傳疑錄)에서도 이와 같은 전승이 순흥안씨 문중원의 기록에 기재되어 있는 사실을 적으면서 그러한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의 보첩에 이르기를 중국인 이원(李瑗)이 당(唐) 원화(元和) 2년 정해(丁亥)에 동으로 와서 강원도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살았는데, 아들 셋이 있어 장남은 지춘(枝春), 차남은 엽춘(葉春) 막내가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왜란 때에 3형제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賜姓)받고, 이름을 고쳐 방준(俊封)은 죽산(竹山), 방걸(邦傑)은 광주(廣州), 방협(邦俠) 죽성(竹城)에 봉군되었다. 방걸(邦傑)의 관직은 대장군(大將軍)이다 라고 하였다(“藍浦安廷晉譜牒曰 李瑗 中原人 唐元和二年丁亥 東入 江原道 松嶽山下 有三子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 以平亂功 賜姓安氏 仍改名 邦俊封竹山 邦傑封廣州 邦俠封竹城 邦傑官大將軍云云”).
또한, 순흥안씨인 안도징이 지었다는 점리와선생문집(點离窩先生文集)은 저자의 생몰연대인 17세기가 아니라 19세기 말인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간행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안씨의 본성은 이씨로서 이원(李瑗)이라는 분이 당 헌종 2년 동쪽으로 와 본국 송악산 아래 살았는데 아들이 셋이 있어 장남은 지춘, 차남은 엽춘, 막내가 화춘이라고 하였으며, 신라 경문왕 4년 흑치(黑齒)의 난을 당해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안국공신으로 안씨를 사성받고, 이름을 고쳐 지춘은 방준으로 죽산군, 엽춘은 방걸로 광주군, 화춘은 방협으로 죽성군에 봉군되었고 그 이후 그 자손들이 안씨가 되었다는 기록을 수록하고 있다(“惟我安氏本李氏 而有諱瑗 唐憲宗二年 東入于本國松嶽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當黑齒亂 兄弟三人 以平亂 故以爲安國功臣 賜姓安氏 因更名 枝春爲邦俊封竹山君 葉春爲邦傑封廣州君 花春爲邦俠封竹城君 其後爲其子孫者 仍爲安氏”).
© 2009 historyofahn.blog.com
Posted by nickname in 14:28:19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2)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2)
이와 같이 15세기, 16세기부터 일부 가문을 중심으로 족보의 발간이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17세기,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자신의 가문에 관한 기록이 다른 가문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전혀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부분도 이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전혀 알지 못하였던 내용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심지어 지금도 타본관이 소장하는 기록에서 자신의 본관의 사리진 기록을 발견하는 예가 있다. 안씨소원(安氏遡源)이라는 순흥안씨 2파의 족보에는 죽산안씨 중 소부소감공파의 1744년 갑자보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부분의 계보가 기재되어 있다. 연구자들 중에는 이 부분의 기록이 고려 말에 작성된 계보일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안씨의 중국인 도래설 역시 이와 같은 시기에 파악되게 된 내용으로 보이는데 그와 같은 사실은 안정복 선생이 1790년에 간행된 광주안씨 경술보(庚戌譜)에 쓴 순암공(順菴公) 변무(辨誣)에서 자신이 안씨의 연원에 관하여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후인들에게 이를 믿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今世傳 安氏三派 謂自中國來姓李 當新羅景文王時 有兄弟三人曰 枝春 葉春 花春 平倭亂有安國之功 故賜姓安氏 三人改名 邦俊 邦傑 邦俠 分封竹山廣州 廣州傳十餘世 又分順興 今刊譜首板別錄 國信以下十二代卽是也 此甚 孟浪無據 且其官名與麗誌年代不合 其僞書無疑矣 … 恐有後人傳以爲信 故拔此條 作辨誣以正之”).
그러나, 이 당시 나타난 안씨의 중국인 도래설은 광주안씨의 시조 이하 12대 결세 기록이 순흥안씨의 외손의 집에서 발견된 경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에 속속 발견되기 시작한 씨족 전승의 일부로서 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는 순전히 그와 같은 구전적 증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달려있었다. 중국인 도래설이 근거가 없으므로 믿지 말라고 한 안정복은 마찬가지 이유로 결세 12대에 대한 순흥안씨 측 기록도 근거가 없으니 믿지 말라고 하였으나, 똑같은 결세 12대에 대한 기록에 대하여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안정복의 부친 안극은 중국인 도래설에 대하여도 진실한 전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안극은 1741년에 쓴 광주안씨 무오보(戊午譜) 서문에서 “일찍이 듣기를 우리 안씨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나 관련 자료가 없어 이를 살펴볼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신당서(新唐書)에 중국 안씨가 요동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이들 안씨가 국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嘗聞吾安氏出自中國而 舊序中又有別記 中國安氏之所由起 今無其書可巧矣 頃見新唐書有云 姬姓昌意子 安別姓安氏 其子孫漢末居洛陽 晋魏間居安定 後徙遼左之於我東壤界相接 國亂來寓 亦或然也”).
물론 안극이 쓴 내용은 중국 안씨가 도래하였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므로 이씨 혹은농서이씨가 도래하여 안씨를 사성받았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으나, 이 부분은 안씨가 중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는 18세기에 발견된 새로운 전승에 대하여 당대 이름난 학자 가문의 부자 간에도 그 접근태도가 사뭇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결국 이 문제는 증거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이것이 근래에 마치 중국 이씨 도래설을 지지하면 환부역조(換父易祖)나 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당시 안씨가 중국에서 도래하였다는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죽산안씨에서도 듣고 있었다. 현재 논의되는 내용을 보면 마치 어느 문중에서 자신의 시조를 과장하기 위하여 중국인 도래설을 조작해 내 것처럼 공격하고 있는데, 18세기 내지 19세기의 기록을 통해 나타난 사실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순흥, 죽산, 광주의 각 문중이 모두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전승을 듣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죽산안씨인 안성흠(安聖欽)이 1805년에 쓴 복야공(僕射公)파 을축보(乙丑譜)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번역: 죽산안씨대종회보 제10호(2004년 5월)).
나라 안의 사대부 가문에 족보가 없는 집안은 없는데 족보라는 것은 정부자(程夫子)가 이른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밝혀 세족이 의의를 거두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죽산안씨는 한나라의 사대부로서 마땅히 족보가 있어야 할터인데 내가 비록 좁은 집안에 살았으나 이를 본적이 없다, 일찍이 종인(宗人)인 참판공 鎭씨댁에 족보가 있으나 그것이 언제 이뤄졌는지 알 수 없고 우리 시조 상서 좌복야 상장군 휘 영의공(令儀公)이 별록으로 들어있음을 들었다. 대저 우리 安氏가 3파가 있으나 그같은 다른 계파로 나뉜 것은 알지 못하겠고 동원(同源)이 멀어져 각각 갈리게 되고 상세한 내막도 알 수 없다. …
[중략] 우리 증조부이신 진사공께서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동종 같은 성 같은 본관이 있음을 들으면 찾아가 그 세파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참고 하였는데 고려 말 족보 서문에 이르기를 옛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에 중국인 李公(諱)瑗公의 아들 휘 邦傑 邦俊 邦俠 삼형제가 신라 敬文王때 왜란이 일어나자 나아가 이를 평난하여 나라와 국민을 편안히 한 공으로 安氏姓을 받았는데 邦傑公은 본관을 順興으로 邦俊공은 본관을 竹山으로 邦俠公은 본관을 廣州로 하였다.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물어보고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한탄은 진실한 것이었으며 이는 이 당시 선대의 기록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는 어느 문중에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 을축보 서문에서는 당시인 1700년대 말 및 1800년대 초에 지금은 실전하는 고려말 족보 서문에서 중국인인 이원이 도래하여 안씨를 사성받아 순흥, 죽산, 광주의 계통이 분파한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麗末譜序曰 在昔唐憲宗元和二年丁亥 中原人李公諱瑗之子 諱邦傑邦俊邦俠三兄弟 公出于新羅敬文王時適値倭亂有靖國安民之功 故賜姓安氏自 邦傑公始貫順興 邦俊公始貫竹山 邦俠公始貫廣州云”). 여기서 말하는 고려말의 “족보”라는 것은 조직적인 족보 편찬 작업은 고려 말은 물론 조선 초까지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 “족보”라기 보다 개별 가통에서 전승되는 가첩과 유사한 단편적 기록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앞서 남양홍씨의 경우에도 이러한 흩어진 가첩 등을 종합하여 겨우 계보를 밝혀낼 수 있었다는 예와 마찬가지로 을축보 서문에서 지적하는 그와 같은 단편적 기록이 이미 고려 말에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위 을축보 서문이 완전한 허위로서 전혀 없는 사실을 창작해 낸 것이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기록이 아니라면, 여기에 남긴 내용을 그 보다 이미 300년이 더 경과한 지금에 와서 가짜라고 일축할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이 별반 존재하지 아니한다.
© 2009 historyofahn.blog.com
Posted by nickname in 14:25:37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1)
II. 안씨의 연원에 관한 논쟁
4. 18-19세기 족보 관련 기록의 검토(1)
죽산, 광주, 순흥의 각 안씨 가문별로 선대의 기록을 찾아내어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은 18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이 기간은 거듭된 전란으로 신분질서가 동요되고 족보가 우수죽순처럼 발간되기 시작하였으며, 탁보, 위보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 기간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기간은 족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곳곳에 숨겨져 있던 귀중한 상대 관련 자료들이 발견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안씨가 본래 중국에서 도래한 이씨 혹은 농서이씨라는 전승 역시 이 기간 중에 순흥, 죽산, 광주의 각 족보 관계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자료 수집을 통하여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현재 중국 이씨 도래설이 18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 근거없는 이야기라는 이유로 이를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 광주안씨이었다. 앞에서 조종운의 씨족원류에서 조차도 시조 안방걸에서 중흥조인 안유에 이르는 구간은 채워 넣을 수가 없었으며 더 나아가 몇 대가 흘렀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광주안씨가 최초로 간행한 1739년의 족보인 기미보(己未譜)에서는 대장군 안방걸 이하 중흥조인 안유에 이르기까지 12대의 직함(職啣)과 휘함(諱啣)을 전하면서 상세한 고증을 후대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할 데 없는 귀중한 정보가 18세기에 들어서야 족보에 기재되게 된 것은 1719년에 원주에 사는 광주안씨 안처대(安處大)가 충주 위류면의 어느 순흥안씨 외손인 선비의 집에서 보관 중이던 순흥안씨간판구보(順興安氏刊板舊譜)를 보고 실전된 12대의 각 역대의 직함과 휘함을 등사하여 온 것에 바탕한 것이다.
안처대가 베껴왔다는 순흥안씨간판구보에 따르면 순흥안씨도 역시 광주군을 시조로 하여 8대를 내려와 내사령 안필몽(安弼夢)이 안홍미(安弘美)와 안자미(安子美) 두 형제를 두었는데 안홍미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안자미는 순흥안씨의 시조로서 관향을 순흥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광주안씨인 순암 안정복의 부친인 안극(安極)은 광주 문중에 전해지는 십이대결세전의록(十二代缺世傳疑錄)에서 말하기를 “안씨는 고려에서 먼 조상 이하 십칠대에 걸쳐 대대로 나라의 은총을 받아 시중(侍中)이 팔인이요 학사(學士)가 칠인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새로이 발견된 12대의 기록을 보니 이러한 전승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고, 이 12대의 기록을 믿을 이유는 충분하나 자신이 그 원본을 직접 보지 못하였고 그 원본이 이제는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므로 “바로 수록하기는 아직 안고(安固)하지 않아 마땅히 의혹을 전하는 예”로서 이를 기록하여 후일의 검증을 기약한다고 하고 있다(“且以野史所記 思簡公語觀之 安氏 在王朝 遠祖以下十七代 世受國恩 有侍中八人 學士七人云則 與十二缺世 實爲暗合 但不見刊板舊譜之前 直錄未安 當付傳疑之例也 今姑書之于家狀之首而竢後日”).
이 12대에 관한 기록은 1922년에 광주안씨의 임술보(壬戌譜)에 이르러서는 본계에편입됨으로써 광주안씨의 세계에 관한 공식기록으로서 자리잡았으나 같은 기회에 안처대가 등사한 순흥안씨가 광주안씨로부터 분파하였다는 기록은 아직 순흥과 광주의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광주안씨의 선대 기록이 순흥안씨의 외손의 집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현재와 같이 순흥, 죽산, 광주 등 본관이 마치 한치의 오차도 없이 확립된 것처럼 보이게 된 지금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문중이 조직되어 있지 않고 족보가 없는 상태에서 선대에 관한 정보가 개개의 가통을 따라 일부씩 전수되고 있던 것이 조선 중기 이후 문중과 족보를 정리하면서 부딪히게 된 상황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93년의 순흥안씨 찬성공파보의 전의록에 실려있는 연대미상의 기록은 광주안씨의 선대기록이 순흥안씨 쪽에서 나온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 종인 중에도 충주에 사는 우리 안씨의 외손인 유씨 집안에서 그 판본에 등사된 호군공(護軍公) 이상 9세(世)를 얻어 보고는 등사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충주지방에 이러한 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는 한편, “족조(族祖)인 당진공 우제씨(唐津公羽濟氏)의 세보(世譜)에도 또한 이르기를 이 구보(舊譜)는 병오보(丙午譜) 이전의 본(本) 인듯하다”라고 하고 있다(1850년경으로 추정되는 순흥안씨 판관공파 전의록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此舊譜似是丙午前譜也 吾宗人亦有得見 其板本謄來 護軍公以上九世則 忠鄕之有 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즉, 임진왜란 전인 1546년에 비교적 일찍 최초의 족보인 병오보를 발간한 순흥안씨의 경우에도 종인들의 개별 가통을 따라 전수되고 있던 선대에 관한 기록들이 병오보 작성 과정에서 모두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 2009 historyofahn.blog.com
Posted by nickname in 14:21:14
|
//
|
|
첫댓글 잘지내시죠 컴이 고장나서 오래만에 들려읍니다 유익한 정보 안문의 내력과 역사의 기록을 제공해주세서 감사합니다
족숙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시죠? 족숙님의 격려가 제겐 큰 힘이 됩니다 자주 방문하셔서 좋은글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