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본래 왕릉 앞에 비를 세우지 않았다. 고구려에 광개토왕비가 있으나 이는 순수한 능비가 아닐 수도 있다. 고구려의 어느 왕릉에도 능비가 있는 곳이 없고, 비문의 내용에 광개토왕의 일대기와 수묘(守墓)에 관한 법률을 기록해두고 있으며 능의 앞에 있지도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고구려의 능비가 없다. 백제에도 능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라에서는 무열왕릉에서 처음으로 무덤 앞에 피장자의 일대기를 새겨 비를 세웠다.
이에 비하여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비를 세웠다. 북방 유목사회의 대표적인 종족으로는 흉노, 선비, 오한, 부여족 등인데 이들 중에서 부여족의 한 갈래가 고구려와 백제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고조선 계열의 후예들이 남하한 일파와 진나라에서 무거운 부역을 피해 도망해온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신라의 김씨는 기마민족의 후예로 판단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비를 세우지 않는 것도 한족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는 법흥왕 이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쓰면서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고 불교를 유입을 통해서 중국문화를 일부 수용하기도 하나 계속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무열왕대에 이르러 삼국통일 전쟁의 과정에서 중국의 연화와 복식을 받아들이는 등 중국화의 길을 걷게 된다. 경덕왕대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치고 중국왕릉의 제도를 받아들여 비를 세우게 되는데 이는 삼국통일과정에서 나당연합의 이면계약(裏面契約)에 의한 것이었다.
<무열왕릉 귀부>
귀부의 예술성을 살펴볼 때 이 귀부는 완성도가 가장 높다. 신라인들은 삼국통일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장인들을 신라로 데려온다. 이들을 통하여 발달된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신라문화는 한층 꽃피게 되는데 약3대 1백여 년 후에 그 문화의 꽃을 피운다.
귀부의 모습도 처음 무열왕대에는 거북머리를 하지만 9세기 전후에 이르면 용의 머리로 바뀐다. 거북 머리는 무열왕릉비를 비롯하여 김인문묘비 그리고 사천왕사비 등이며 용두화(龍頭化)한 귀부는 숭복사비등이 있다.
<무열왕릉비 이수>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고 비신은 없어졌는데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인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의 학자였던 매계 조위(梅溪 曺偉)의 시에 "뿌려진 비석이 황초(荒草) 가운데 버려져 있고 / 읽어보고 싶으나 결락(缺落)이 심해서 읽을 수가 없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비신이 부근이 있었던 것 같다.
흔히들 문화재가 파괴된 것은 일인(日人)들의 소행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나 조선시대의 양반들에 의해서 파괴된 것이 많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수에는 6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있는데 그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 글자가 현침자(懸針字)로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이 무덤이 태종무열왕릉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침자는 660년경에 유행한 서체로 글자 끝이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태종무열대왕지비가 새겨진 이수>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소정방의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의 글씨도 현침자인데 이 글씨로 하여 신라왕릉 편년의 기준이 되고 있다.
포항의 냉수리 신라비, 울진의 봉평신라비, 경북대 박물관의 무술오작비, 영천의 청제비, 마운령, 황초령의 진흥왕 순수비, 그리고 단양의 적성비 등 삼국시대의 비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또 면을 구분하지 않고 비문을 썼다. 심지어 적성비의 경우는 어느 면부터 비문이 시작되는지를 판별하기가 곤란할 정도이다.
<귀부의 머리부분>
남산의 신성비와 같이 단순한 비의 내용과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만을 새겨넣었다. 그런데 창녕의 진흥왕 순수비는 자연 암반에 글씨 쓰는 면만 다듬어서 썼으며 북한산비의 경우 돌을 갈고 이수를 끼우고(이수를 끼웠던 흔적만 있음) 자연 바위에 끼워 넣어서 세웠다. 드디어 중국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무열왕대에 오면 문장이 세련되고 비문이 화려해지고 미사여구가 등장한다. 김인문묘비 역시 화려하다. 이때부터 중국문화가 유입되고 중국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