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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의 향기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촌장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2 )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의 말씀인데, 먼저 영화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조 블랙의 사랑'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주 좋은 영화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디어계의 재벌인 빌 패리쉬라는 회장(안소니 홉킨스가 그 역을 맡고 있습니다) 은 경쟁사와의 합병 문제로 심각한 위기를 맡게 되며, 또한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도 함께 찾아옵니다.
빌 패리쉬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큰딸은 백수건달에게 시집가서 남편을 회사 이사로 만들었지만 전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친구며, 둘째 딸은 의사인데 회사의 유능한 간부와 연애 중입니다. 어느 날 출근하는 비행기 안에서 아빠가 둘째 딸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정열적인 사랑을 해 봐라. 사랑은 정열과 집착이다. 그 사람 없이는 못 사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깊은 사랑을 안 했다면 산 게 아니다." 아버지가 볼 때 둘째 딸이 연애를 하면서도 신나는 기쁨과 가슴 설레는 흥분이 없습니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연애를 한다면 뭔가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충고를 합니다.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첫눈에 불꽃이 튀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나는 네가 기쁨에 겨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노력을 해라.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산 게 아니다."
저는 그 두 가지 말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주님과 정열적인 사랑을 해 봐라. 그분 없이는 못 사는 것이다. 사제로 살면서 주님과 깊은 사랑을 안 했다면 사제로 산 게 아니다."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첫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다. 나는 네가 기쁨에 겨워 늘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다. 노력을 하거라. 노력도 안한다면 그것도 사제로 산 게 아니다."
저는 그날, 영화를 보고 싶어 본 것이 아니라, 수녀님들과 함께 출장 다녀올 때 수녀님들이 영화나 한 편 보고 가지고 졸라 제목도 안 보고 들어갔다가 뜻밖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마침 제 사제수품 기념일이었기에, 그 영화가 마치 저를 위해 만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에서 둘째 딸은 바로 그날 아침 커피숍에서 정말 눈에 불꽃이 튀는 남자를 만납니다. 그 남자가 바로 유명한 배우 브래드 피트입니다. 처음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남자도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래서 헤어지는 것을 몹시 아쉬워하다가 브래드 피트가 그만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라, 방금 모퉁이를 돌아섰던 여자
는 브래드 피트의 죽음을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저승사자가 공교롭게도 죽은 브래드 피트의 육체를 입고 빌 패리쉬를 찾아옵니다.
저승사자가 찾아왔으니 빌 패리쉬에겐 굉장히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런
데 저승사자는 이때를 애용해 휴가를 즐기면서 엉뚱하게 둘째 딸과 깊은 사
랑에 빠집니다. 둘째 딸은 저승사자의 정체를 모르고 커피숍에서 만났던 남
자로 착각하며, 이제 비로소 아버지가 말한 정열적인 사랑을 찾았다고 기뻐
합니다.
둘째 딸이 저승사자와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을 보며 아버지 빌 패리쉬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일이 하필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말려도 딸은 이해를 못하며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빌 패리쉬에게 65회 생일이 다가오는데, 큰딸은 아빠의 생신을 위해 온갖 수고를 다합니다. 아빠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빌 패리쉬는 자기 생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화사가 거덜 날 판에 생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저승사자에게 끌려갈 판국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둘째 딸만은 아버지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신을 위해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데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합니다. 마치 루카 복음 10장 38-42절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같습니다.
성경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 온갖 수고를 다하면서도 주님의 칭찬
은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바쁘다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마르타 야, 마르타 야!" 아마 답답하시니까 두 번이나 부르셨을 것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그게 뭡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많은 갈등을 느낍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수고하는 언니 마르타는 꾸짖으시고, 대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동생 마리아만 칭찬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게 뭐죠? 참 좋은 몫은 뭐고, 빼앗아서는 안 될 그 한 가지는 뭡니까?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아빠가 드디어 저승사자와 함께 이승을 넘어갈 때 아무도 눈치 못 채는데 둘째 딸만은 저승으로 넘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뛰어갑니다. 큰딸도 모르고 둘째 딸만 바라봅니다. 왜 그랬죠? 사실은, 둘째 딸이 누구보다 아빠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과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이 마르타의 집에 다시 들르셨을 때 마르타는 여전히 시중을 들고 있었고, 마리아는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걸 보고 유다가 불평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때 300 데나리온이라면 현재 시가로는 500만 원이 훨씬 넘습니다. 이처럼 엄청나게 비싼 것을 한 사람의 발에 붓다니, 돈이 너무 아깝고 마리아가 바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무슨 날이라고 했죠? 장례 날!
장례가 뭡니까? 예수님이 이젠 곧 죽어 저승으로 넘어가실 긴박한 상황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그저 '한자리' 해 먹을 궁리만 하는데, 오직 마리아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왜 마리아만 알까요? 마리아가 누구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5백만 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지막 가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있는 재산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습니다.
제가 왜 영화 얘기를 장황하게 했는 고 하니, '영화에서 둘째 딸이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내가 과연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가?' 라는 질문에 대답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과연 마음을 열고 노력하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이 궁했기 때문입니다.
"정열적인 사랑을 해 봐라." " 마음을 열고 노력해라."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립니다.
흔히 마르타를 행동하는 여자, 마리아를 관상하는 여인으로 설명합니다.
맞는 말이겠지만, 그러나 그런 판단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좀 더 그 의미를 넓게 새겨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은 관상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너무 지쳐 있을 때는 누가 음식을 권해도 반갑지 않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피곤하다고 음식이 다 좋은 게 아니고,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술이 좋은 게 아닙니다.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상황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설교하시고 안수하시고, 반대자들을 피해 전교하시면서 심신이 굉장히 피곤한 상탭니다. 우리가 상상해 보면 짐작이 갑니다. 그럴 땐 먹는 것도 귀찮고 씻는 것도 귀찮습니다. 가만히 쉬고 싶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광주에 사는 어떤 형제가 자기 집에 저를 한번 모시고 싶다 해서 강론이 끝났을 때 그 집에 가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에도 강론하고, 그리고 직장인들을 위해 밤늦게까지 강행군을 했습니다. 강론이 모두 끝나고 밤 10시가 넘어 아파트
에 도착했을 때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아파트 동에 사는 신자들이 다 모여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주도 몇 병 나왔고 안주도 좋게 준비했는데, 저는 솔직히 술과 안주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먹고 마시고, 한참을 떠들다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날 싫다는 표정은 못했어도, 손으로는 고생 무지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자기들 성의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죠. 그러나 그 성의라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본인들은 모릅니다. 이제 문젭니다. 자기생각만 하고 다른 사람 생각은 전혀 못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지는 것입니다.
20 여 전의 일입니다. 서울에서 어떤 자매가 저를 데리고 어느 호텔 뷔
페 식당으로 갔는데, 뷔페 식당 출입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큰 홀에 음식이 잔뜩 널려 있는데 뭘 먹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가 음식을 대충 담아서 가져다가 먹는데 그때 자매가 제가 먹는 음식 접시를 보더니 화를 냈습니다.
"비싼 돈 내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적게 잡수시면 어떻게 해요?" 하더니 자기가 다시 가서 두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 와서는 다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뷔페에서는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먹지도 않을 음식을 잔뜩 가져다가 남기는 것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제 입장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먹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다른 한편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다르며, 좋아하는 반찬, 좋아하는 기호가 다 다릅니다.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 것을 먹어야 잘 먹는 것이지, 꼭 비싼 것을 많이 먹어야 잘 먹은 것이 아닙니다.
자매가 그 후로 식사를 또 대접하겠다고 몇 번 전화를 했는데, 안 갔습니다.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 음식을 준비했어도 '필요한 한 가지'가 빠지면 그 음식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신부 되고 첫 본당에 갔을 때 '현애원' 이라고 한센 가족만 사는 정착마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나름대로 애정을 가지고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공소를 방문했는데, 얼마나 지나자 공소 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찾아와서는, 신부님이 이렇게 자주 오시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아니, 뭐가 곤란한가? 공소야 신부님이 안 와서 곤란하지 자주 오는 것이 뭐가 곤란한가? 알고 보니, 거기는 환자 마을이라 제가 갈 때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일당을 주고 식사를 준비하는데, 찬거리도 그때마다 읍내에 가서 사와야 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공소 재정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비로소 이해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회장님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사람을 사서 식사를 준비하지 마시고 대신 제가 신자들 집집마다 다니며 먹을 테니 순서나 짜 달라고 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가정 분위기도 파악하고 기도도 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부님이 환자들 집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때 마을에 집이 백 호가 넘었는데 제가 무려 네 바퀴 반이나 돌았으니, 한 집에 네 번 이상 찾아가서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첫 번째 집에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미사가 끝난 후 회장님과 함께 그 집에 도착하니 부인들 몇이 주일 미사에도 나오지 않고 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남편은 술 받으러 가서 아직 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시끄럽다고 일찌감치 밖으로 다 내몰았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대화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식사 때도, 같이 먹자고 해도 그들은 안 먹고 구경만 합니다. 보세요. 신자들이 주일 미사까지 빠져 가며 본당 신부님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면 제가 편하게 먹겠으며, 또 혼자만 먹으란 다 해서 제가 편하게 먹겠습니까? 그렇게 하려고 간 게 아닙니다.
제가 반찬도 미리 주문했습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좋아하니, 돼지고기가 없으면 그냥 김치찌개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먹지도 않는 홍어회와 산 낙지가 집집마다 나왔습니다. 제가 그때만 해도 썩힌 홍어는 냄새나서 먹지 않았고, 신학생 때 산 낙지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적이 있어서 낙지만 보면 닭살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먹지도 않는 것만 골라서 돈만 많이 들여 장만합니다. 그럴 줄 알고 제가 신신당부를 했어도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제가 뭘 좋아하거나 말거나 자기들 식대로, 자기들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들 성의라고 하지만, 받는 쪽에서는 몹시 불편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모릅니다.
물론 자기 성의도 좋은데, 그러나 저분이 뭘 원하시는지 그걸 얼른 깨달아야 합니다. 그게 꼭 필요한 한 가집니다. 이게 빠지면 다른 것은 가치 없습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성가실 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한 가지가 빠진 사람을 보통 '나사가 빠진 사람' 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신부님 중에도 있습니다. 그때 첫 본당에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부임할 당시 본당이 1년 예산이 주일 헌금과 교무금을 합쳐서 모두280만 원이었습니다. 1982년도입니다. 아주 가난한 본당이었습니다. 그때
사목회장이 첫 부임하는 신부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모시는 것은 좋은데, 신부님 목구멍이 무섭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본당이 워낙 가난해서 제 앞에 계셨던 외국 신부님이 본당을 비우고 본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본당에 1년 동안 신부가 없었습니다. 이제 후임으로 한국 신부가 와서 좋긴 한데, 본당 예산으로는 신부님 생활비를 드릴 수가 없으니 신부님 목구멍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환자 마을에서 매년 천만 원 가까운 예산을 지원해 줍니다. 주일 헌금만 자기들이 관리하고 교무금은 전액 본당으로 보내 줘서 어려운 본당에 큰 힘이 됩니다. 본당 1년 예산이 280만 원인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소에서 그 세 배도 넘는 천만 원이 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다른 게 아닙니다. 본당 신부가 환자들 집에서 밥 한 번 먹은 것이 그들 마음을 꽉 채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들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 가 채워지니까 다른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잘되는 것입니다.
그때, 잘못하면 성당 문을 닫을 뻔했는데, 공소 때문에 묵은 빚도 다 갚고 본당이 다시 일어섰습니다. 환자 마을에서 받았던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가지 제가 장황하게 말씀드렸는데, '꼭 필요한 한 가지' 그리고 '참 좋은 몫'은 무엇인가? 뭐죠? 이것은,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술을 원하신 땐 술이 필요한 한 가지며, 십자가를 원하실 땐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참 좋은 몫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만 채워 드리면 만사가 오케이지만, 이것이 안 되면 백날 기도하고 백날 봉사해도 헛된 것이 됩니다. 오히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시며 주님의 꾸지람을 들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 이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땐 밤새 기도하며 찾아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 이라고 하시면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도 두려우셨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제자들에게 왔다 갔다 하시면서 번민하십니다. 나중엔 예수님이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바로 이겁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이것이 필요한 한가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아비지의 뜻을 찾지 않고 자기의 뜻만 고집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참 기쁨을 얻을 수 없고 참 소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면 그 는 다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보면 1절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하면 내 뜻만 골라서 길게 말씀드리는데, 그건 일명 '이방인의 기도' 입니다. 그런 기도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도륵 기도할 때, 그때 백 점짜리 기도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물과 수고와 아픔이 필요합니다. 그 눈물과 땀과 수고와 아픔이 바로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 눈물, 내 땀, 내 수고, 내 아픔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질 때, 그가 아버지를 사로잡는 행운아가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그건 참 부러운 것입니다. 행운아는 그래서 고생이 많지만, 그는 그것을 고생스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특권이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때는 울면서도 기쁘고 고생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본당에서 본당 신부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얼굴이 예쁘다고 신부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모 본당에 있을 때 여자 레지오 단장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후임으로 임명할 단장감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프레시디움에서 차출해 와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아도 실상책임자로 일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수녀님께 의뢰를 했습니다.
수녀님이 그때 세 자매를 추천해 주면서, 세 여자가 모두 능력 있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일 좀 하도록 맡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례로 찾아가서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더니, 세 사람이 다 거절했습니다.
첫 번째 자매는, 지금 레지오도 간신히 하고 있는데 단장까지 시키면 레지오를 탈퇴하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자매는 자기는 믿음이 없으니 단장을 시키면 성당을 쉬겠다고 했으며, 마지막 자매는 자기는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어떤 책임도 맞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런 여자들 앞에서는 본당 신부도 꼼짝 못합니다.
할 수 없이 세 자매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수녀님을 찾아갔더니 수녀님은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웃으며 다른 자매를 추천해 주는데, 그 자매는 남편도 없이 혼자 식당을 운영하면서 다섯 자녀를 키우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전화로 방문 통지를 해 놓고 식당으로 찾아갔더니, 저를 보자 마치 예수님이 오신 것 같다며 반겨 주는 자매에게 차마 단장을 부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머리만 긁으며 뭉그적거리자 그쪽에서 눈치를 챘는지 뭔 일이냐고, 자꾸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단도직입으로, 단장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가 웃으면서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밥입니다.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그쪽에서 너무도 쉽게 승낙을 하자 내 쪽에서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자 자매는 또, "신부님께 순명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쁜 사람은 말도 이쁘게 합니다. 요즘 신자들이 신부 말이라고 쉽게 순명하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바쁜 아줌마가 모든 것을 제치고, 본당 신부가하라는 대로 순명하니 제가 얼마나 고맙겠어요?
저는 그 후로 어떤 식으로든지 그 자매에게 고맙다는 보상을 해 주고 싶었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부활이 가까이 오기에 '그렇다! 부활 밤 미사 때 독서 하나를 시키면 되겠다.' 해서 그에게 독서 하나를 시켰습니다.
본래 부활 밤 미사의 독서는 사목회 임원들이 서로 나눠서 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습니다 다른 독서자들이 성경을 읽다가 다 몇 번씩 틀려서 분심이 들게 하는데, 이 자매만 틀리지 않고 그것도 아주 감동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왜 사람들이 독서를 가끔 틀리게 읽느냐? 이게 아주 중요한데요. 사람들이 독서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읽는 연습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례에서는, 내용이 아무리 쉽다 해도 몇 번이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거룩한 전례가 그만큼 훼손됩니다.
이튿날입니다. 제가 고마운 생각이 들어 수녀님들과 함께 식당에 찾아가
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어제 최고였다는 칭찬을 하자, 그 자매가 웃으면서 그랬습니다. "신부님, 제가 그 독서를 하기 위해 독서대에 스물일곱 번 올라가서 연습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두 번째 감동을 받았습니다.
독서대에 스물일곱 번 올라가서 연습했다면 집에서는 몇 번이나 읽으며
연습했을까요? 아마 쉰 번도 더 읽고 연습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읽고 또 읽고, 그리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자세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전 지금까지 이렇게 '예쁜 뚱뚱이' 는 보질 못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로부터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불평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는 주님의 밥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것이며, 둘째는 강론을 준비할 때 고치고 다듬어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연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신부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도 수고해야 한다면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고가 고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요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고생해도 재미있고, 수고해도 기쁘며,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순명은 하느님을 사로잡으며 그래서 순명은 하느님을 이긴다는 말도 합니다.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