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중학교 개교 60주년을 돌아보며
금계중학교와 내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6.25사변 발발 후 1.4후퇴 때 풍기로 피난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서울서 중학교 2학년 올라가자마자 중단된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풍기중학교를 찾아가니 편입학 기부금을 내라고 한다. 호구지책도 어려운 피난 생활이어서 언감생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니 내 학업이 이렇게 중단되는가 하는 서글픈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나이 어리다고 놀 수만은 없는 형편이어서 당시 삼가동 사방공사판에 가서 자갈도 나르고, 때론 어리다고 쫓겨 오기도 하다가, 마침 죽령 재 확장공사를 하는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생활로 1년여를 전전하였다.
그 때 같은 동내 김용기(金容旗)의 권유로 금계고등공민학교를 알았다. 우선 돈이 없어도 입학이 된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앞뒤를 가릴 것도 없이 고등공민학교면 어때 하며 바로 2학년에 편입학을 하였다. 그 때가 단기4285년(1952)이다. 그런데 3학년으로 올라가니 중학교로 정식인가가 났다. 이렇게 해서 나와 김용기는 금계중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전쟁의 포화가 휩쓴 자리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그 당시 학교 사정도 어려워 교실이 없어 태반이 야외수업이었고, 또 오전 수업만 마치고 2.3학년은 삼가동 당골에 가서, 그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교실을 지을 나무(雪害木)를 날라 와야 했다. 차병태 선생님의 자택에서 시작한 야학이 김상규 선생님이 희사한 땅에 공회당을 개조하여,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고, 흙벽을 바르는 사이에, 초가지붕 교실이 한 칸 두 칸 지어지고, 맨 흙바닥이지만 실내에서 수업을 한다는 기쁨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생각하면, 그 흙바닥 교실의 흙냄새는 천연 황토방(黃土房)이고, 소나무에서 풍기는 향(香)은 자연 삼림욕(自然森林浴)이었다. 고생은 했어도 지금까지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학교생활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조영주 선생님이 지도한 집단체조, 김상규 선생님의 곤봉체조는 당시 풍기체육대회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둔군 부대장 강원채장군(계삼정 교장선생님 평양숭인상업학교의 제자)이 주선하여 준 군부대차량을 이용하여 부석사로 원족을 갔던 일, 경주 수학여행 도중 불국사에서 백선엽 대장(당시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같이 사진을 찍었던 일 등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던지 이 일로 한때 육사지원을 생각하기 까지 했었다.
어느 선생님이라고 기억에 안남을 수 없겠지만, 특히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두 분의 선생님이 떠오른다. 먼저 학교 설립자이시며, 언제나 흰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셨던 계삼정(桂三正)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을 잊을 수가 없다. 열심히 배우고 꿈을 키워 장래 이 나라를 걸머지고 가야할 청소년들이 읽을 책도, 쓸 종이도, 가르쳐 주는 이도, 배울 장소도 없어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모습을 안타까이 여겨, 배움의 길을 열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금계학원을 설립하셨고, 누구든지 공부할여는 의지만 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도 돈과 관계없이 입학을 허용하였으니, 나 같이 가난한 피난민에게는 복음이요 구세주였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던가? 만약 그때 학교를 못 다녔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금계중학교가 있어 배움의 연결이 이어졌고, 대학을 갈 수가 있었고, 졸업 후 초창기 수출 업에 종사하다가, 그 덕으로 은퇴 후 중기청수출담당자문위원, 대학교외래교수까지 했으며, 또 지금 이 나이에 아직도 수출회사 UPI의 수출담당고문을 하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금계중학교는 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또 잊지 못할 한 분은 3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허윤(許玧) 선생님이다. 가끔 금선정에 갔다 오는 길에 선생님 댁을 찾곤 했다. 그 당시 초창기에는 선생님들도 무보수로 봉사하셨으니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난 속에서도 우리 제자들에게 장래에 꿈을 심어준 참 스승으로 기억에 남는다. 수업료를 제 때 못 내서 시험을 못보고 돌아서는 제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이 역경을 기회로 삼아 이기면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좌절하면 낙오자가 된다.”며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신 선생님으로 눈에 선하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 뒤 삶에서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참 스승의 가르침이 있어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보고 싶은 선생님 중에 한 분이시다.
당시 학교시설은 열악하였지만, 그래도 전쟁의 폐허 위에서 배울 수 있다는 기쁨을 느끼며 하루하루 열심히 참말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때론 끼니도 거르고, 기식하는 주인댁 농사도 거들며 주경야독을 하였다. “사람이 태어나서 배우지 아니하면 어둡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太公曰 人生不學 如冥冥夜行)”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교훈처럼 금계중학교는 나에게 캄캄한 앞길을 밝혀 준 배움의 터전이었다. 내 인생이 영글어가는 청소년의 시작을 보낸 곳, 장래 꿈이 영그는 이상이 싹튼 곳이 바로 금계중학교다. 국적은 변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고 금계중학교는 나와 영원히 함께할 운명체이다.
자랑스러워라 금계중학교여 !
그런 모교가 있어 우리 동문도 있고,
나도 있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소중한 인연 영원히 간직하고 가꾸기 위하여
모교 금계중학교 개교 60주년을 축하하며 기념한다.
강신용(姜信鎔) (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