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2. 11 발행
악성(樂聖)하면 흔히 베토벤의 대명사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악성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악가를 든다면 필자는 작곡가 김동진옹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옹은 1913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교회가 바로 평양의 주기철 목사가 시무했던 산정현 교회와 그리고 김화식 목사가 시무했던 장대현 교회다. 바로 그 유명했던 장대현 교회의 김화식 목사가 김동진옹의 아버님이다. 또한 그의 조부님도 역시 목사였으며 특히 아버님 4형제중 3형제가 목사였다. 이러한 연유로 김동진옹은 유년시절부터 교회를 다녔고 교회의 찬송가와 풍금소리에서 그의 어린 시절은 항상 음악과 더불어 성장해왔다. 숭실중학에 입학 할때는 이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했고 작곡까지도 하게 되었다. 김동진옹이 숭실중학 5학년때 김동환의 시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봄이 오면>을 노래로 만들어서 주위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숭실중학을 졸업하고나서 다시 숭실 전문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 담임으로 양주동 선생을 만나게 된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양주동 선생은 노산 이은상의 시 가고파를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날 양주동 선생의 가고파 강의가 김동진 학생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강의를 들으면서 "이 좋은 시에다 곡을 붙인다면 얼마나 좋은 노래가 될까"... 내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어느날 이 시(詩)에 대해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하는 가운데 작곡의 영감이 떠올랐다. 그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악보를 그려 나가는 그의 손과 연필은 멈추지를 않았다. 김동진 학생이 이 가고파를 작곡할 때만 해도 그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작곡에 대한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었으며 그저 막연하게 그 시가 너무나 좋아서 작곡을 한번 해본 것 뿐이다. 김동진 학생은 어느날 음악 선생을 찾아가 자신이 작곡한 <봄이 오면>과 <가고파> 두 곡을 보여드리고 직접 연주를 했더니 음악 선생은 깜짝 놀라면서 피아노 공부도 함께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김동진 학생은 계속해서 <발자욱, 땅달구리, 대동강, 뱃노래> 등을 작곡해냈으며 1936년 숭실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2년간 음악공부를 끝낸 후 만주로 건너가 만주신경교향악단의 작곡 담당자로 일하게 된다. 이때 <양산도>를 오페라로 만들어서 큰 환영을 받았고 뒤이어 <내마음은 호수요> 그리고 <수선화> 등이 작곡되었다. 그 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교향악단을 창단하고 그 외에도 합창단, 음악학교 설립 등 왕성한 의욕으로 평양에서 음악인으로서 김동진씨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음악은 좋지만 그 출신성분이 목사집안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그를 음악계에서 숙청해 버렸다. 그 후 아무일도 못하고 지내다가 6·25전쟁의 1·4후퇴를 이용하여 서울로 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김화식 목사는 장대현 교회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월남을 거부했는데 후일 흥남 감옥소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한편 김동진씨는 월남 후 특히 음악계의 선후배가 없는 낯선 서울에서 고군분투했다. 혼자서 결코 노력하지 않으면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음악탑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작곡 공부에 사활을 걸었다.
1953년 그의 음악 실력을 인정한 당시 서라벌 예술대학이 김동진씨를 교수로 영입했으며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못잊어> <진달래꽃> <자장가>를 작곡했다. 세월이 흘러 1978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장을 끝으로 교단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1987년 그의 자택에서 있었던 필자와의 방송대담때(인간만세) 74세의 나이를 잊은 듯 <가고파>를 테너로 불러주었는데 그 음성이 40대의 성악가로 들렸다. 그런데 필자는 그때 김동진옹의 청각 장애가 이미 심각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부터 신경쇠약 증세로 고생을 많이 해왔는데 결정적으로 청각장애를 일으킨 것이 알라스카 여행 때문이었다. 지난날 대학교수들과 함께 알라스카 선상 여행 중 바로 옆에 있던 외국인이 갑자기 바다의 물고기를 향해 총을 쏘는 바람에 그 총소리의 충격으로 청각기능은 크게 악화되고 말았다. 보청기가 없으면 전화 벨소리도 잘 들을수 없어 전화기에는 신호가 오면 빤짝거리는 장치를 해두고 있다. 베토벤이 그랫듯이 김동진옹도 청각장애를 겪으면서도 작곡 활동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00년 9월 3일 미국 뉴욕에서 거행된 한국의 날 기념 행사에서 이 행사를 주관한 유엔(유네스코)이 한국의 김동진옹에게 그날 행사에서 연주될 음악의 작곡을 요청해 왔다.
김동진옹은 이 요청을 수락하고 시인이며 동요작가인 김종철씨 (현KBS TV 기술국 감독, 2003년)의 작품 <사랑을 찾아서>란 시(詩)를 노래의 가사로 채택했다. 가곡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만남>이란 제목으로 이날 행사에서 재미성악가 홍혜경씨가 불렀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레코딩이 되지 않았다. <내 마음 작은 실개울로 그대 사랑이여 노 저어오오 / 그대 자문거린 물 무늬로 서서히 내몸 무너지고 / 쓰러지는 슬픔보다 더 크게 자라나는 기쁨 / 그대 알지 못하리 ‥‥‥> 이 시는 남과 북의 남녀가 분단민족으로서 겪는 사랑의 연민을 그려본 시라고 작사가 김종철씨는 말하고 있다. 이 가곡 <만남>은 김동진옹이 미수(米壽)를 맞이하던 해 KBS가 목원대 임산 교수의 음성으로 제작했는데 김동진옹 생전에 그의 음악 예술을 KBS에서 영구히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김동진옹은 매주 주일 날 아침이 되면 서울 남대문 시장 앞에 있는 성도교회로 향한다. 부인은 영락교회를 나가는데 함께 가지 않고 혼자 이 교회로 나가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도교회 정정일 목사는 누구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목사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이곳 성도교회에는 아버지 김화식 목사를 잘아는 평양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끝으로 김동진옹의 부인 이보림 권사(서울영락교회)는 남편의 그 유명한 가곡들이 작곡된 배경에는 시아버지 김화식 목사의 기도로 인한 하나님와 영감(靈感)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중학교 학생이 그 아름다운 가곡 <봄이 오면>을 작곡할 수 있었겠으며 또한 <가고파> 역시 어느 누구에게 작곡 공부를 전혀 한일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좋은 가곡들을 만들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한 수많은 찬송가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작곡 되었듯이 남편이 작곡한 무려 1천여곡의 작품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의한 작곡이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글 : 김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