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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선교정보, 선교지 소식 스크랩 페트라 신전 (요르단)
한광기 추천 0 조회 66 08.01.19 06: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Djin Blocks 10 Corinthian Tomb 19 Qasr Al-Bint 28 High Palace of Sacrifice

2 Obelisk Tomb 11 Palace Tomb 20 Unfinished Tomb 29 Lion Monument

3 Al-Siq 12 Sextus Florentinus Tomb 21 Al-Habees Museum 30 Garden Temple Complex

4 The Treasury 13 House of Dorotheos 22 Petra Archeological Museum 31 Triclinium

5 Street of Facades 14 The Nymphaeum 23 Lion Triclinium 32 Renaissance Tomb

6 The Theater 15 Colonnaded Street 24 Al-Deir 33 Broken Pediment Tomb

7 Aneisho Tomb 16 Byzantine Church 25 Turkmanian Tomb 34 Roman Soldier Tomb

8 Urn Tomb 17 Winged Lion Temple 26 Conway Tower 35 Snake Monument

9 Silk Tomb 18 The Arched Gate 27 Moghar Annassara 36 Crusader Fort

위 지도의 출처는  ⓒhttp://www.atlastours.net/jordan/petra_map.html.

 

1.  페트라 입구에서 알-키즈네까지 (지도상의 연두색 표시 1~4번 길)

출처-  ⓒhttp://www.atlastours.net/jordan/petra_map.html

출처-  둘라의 아랍 이야기

소요시간: 도보 약 1시간, 지형: 거의 평지

특징: 약 100m 높이의 암석 사이에 펼쳐진 시크 협곡의 거대함&그 끝에서 더욱 빛나는 알-키즈네

 

유적지 입구에서 시크에 들어가기 전까지

(출처-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1548

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 2007.2. 다마스커스가는길

 

모뉴먼톨게이트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시크에서 알-키즈네까지

 


시크 협곡에서 본  알 카즈네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알- 카즈네

 

알- 카즈네  (출처- 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

 

알- 카즈네(보물창고)       (출처- http://blog.paran.com/jhd112/14818027)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알카즈네(보물) 신전 위쪽의 보물항아리

 

알카즈네 신전 중앙의 이시스 여신조각

 

알 카즈네 내부

 

알 카즈네 내부 조각

 

2003년 알카즈네 지하에서 새로 발굴된 50대의 왕족 무덤, 알 카즈네가 장례를 위한 신전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이다.

 

 

2. 페트라 알-키즈네 주변에서 알-다이르 산 초입의 박물관까지 (지도의 4~22번 길)

소요시간: 도보 약 30분, 지형: 거의 평지

특징: 강렬한 햇볕 아래 지친 몸을 기댈 그늘조차 거의 없는 황야지대의 유적들 

 

알- 카즈네 주변

 

바로의 궁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로마극장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카즈네 오른쪽에는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로마극장         (출처- http://weekly.encyber.com) 

 

로마극장 

 

로마시대의 시가지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열주대로 (콜로네이드)        (출처- http://weekly.encyber.com) 


현재 페트라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AD 363년 페트라의 대 지진으로 80% 정도가 아직 매몰되어있다.

 

로마거리의 입구에 서있는 로마게이트(Roman Gate) 

 

열주대로 옆의 새롭게 발굴된 비잔틴시대 교회 

 

교회 바닥의 돌 모자익 조각

 

 

 

 

 

 

 

 

 

 

 

 

 

 

 

 

스데반 기념교회

 

크사르 알 빈트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있는 신전 크사르 알 빈트는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본전은 높이 23m로서 열주랑·전실(前室)·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도시의 서쪽 끝에는 장례사원인 알-다이르 유적이 있다.

 

박물관 

 


페트라 바로왕의 딸을 위한 궁전

 

또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와디 무사'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의 페트로 합병, AD106년 로마는 페트라의 수로를 차단함으로써 합병에 성공했고 이로써 페트라는 상업도시의 기능을 잃고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3. 페트라 패케이드 거리에서 희생제단으로 가는 길 (지도상의 5~33번 길) 

 

소요시간: 도보 약 1시간 반 (패케이드 거리->희생제단->열주대로), 지형: 돌산

특징: 거친 돌산 등반, 희생제단을 오르고 내리면서 보여지는 페트라 유적지의 전경

 

 패케이드 거리->희생제단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정상의 희생제단과 오벨리스크  (하이플레이스)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나바테아 여신에게 양이나 염소 등의 희생제물을 드리던 제단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피 모으는 곳 

 

희생제단의 주신인 나바테아 여신 (바위의 여신) 알 우자


나바테아인들이 페트라 암벽 협곡에 도시를 세우고 바위속에서 생활하며 장사지내는 모든 것은 바로 그들이 섬기던 바위여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페트라 산당

 

두 사자 신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에 사자들이 조각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내부가 로마의 3면 식탁 모양인 트리클리니움으로 되어 있어서 '트리클리니움'이라고도 한다.

 

 

 

 

 

 

 

 

 

 

 

 

 

 

 

 

 

 

 

두 사자 신전 사자  

 

르네상스 무덤       (출처- http://weekly.encyber.com) 

 

가든 무덤

 

가든 무덤 시스턴

 

로마 병사의 무덤

 

브로큰페디먼트 무덤

 

실크 무덤

 

 

희생제단에서 열주대로로 내려가는 길

 

4.  페트라 로마극장에서 무덤군으로 (지도상의 6~13번 길)

 

소요시간: 도보 약 10분, 지형: 거의 평지, 특징: 그 옛날에 돌산을 깍아 만들었다는 무덤군들의 스케일

 

왕족 무덤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왕궁 무덤

 

코린트 무덤,   알 파라사(Wadi Al-Farasa) 협곡입구에 있는 무덤이다.

 

궁 묘  (Palace Tomb)


약간 작은 규모의 이 묘는 심한 풍화작용으로 보존상태가 좋질 않다. 알 카즈네의 모습과 비슷한데 로마의 양식을 모방하고 잇다.  특히 정문은 많이 훼손 되어있고 그 뒷쪽의 방은 비어있으며 아무런 장식도 없다.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  [Sextius Florentinus]


왕묘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묘는 AD 130년 로마의 행정관 플로렌티우스시대에 만들어졌다.  높이 6m의 정문의 작은 입구 안에는 이 행정관이 묻혀있으리란 추정을 하고있다.

 

우른 묘 palacetomb


2개의 층으로 보존 상태가 좋다. 20m높이의 로마시대의 기둥의 모습이 보인다

 

왕족 무덤 (납골당)

 

단층 지괴의 낮은 부분에 있는 무덤이다.  페트라 건축물의 대부분이 바위를 파서 만든 것으로 그 정교함과 우아함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특히 누비안(Nubian)의 사암(sandstone)이라는 한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구축한 완벽한 조형과 핑크빛, 계피빛을 띄고 있는 절벽과의 색채조화는 자연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류 최고의 유적지 중 하나인 페트라는 그 면면히 지켜온 역사 속에서 영원히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납골당 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트라는 나바테안 왕국(Nabataean kingdom)의 수도였던 곳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영위하다가 7세기부터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지진등의 자연재해로 묻히게 된다

 

 

납골당 내부 

 

왕족 무덤 

 


오벨리스크 무덤과 트리클리니움 무덤

 

윗층이 오벨리스크 무덤이며, 아래층은 로마의 식탁과 비슷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어 트리클리니움 무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아래와 위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아래층의 무덤이 시기적으로 훨씬 오래된 것이다

 

트리클리니움 무덤    (출처- http://weekly.encyber.com) 

 

트리클리니움 무덤 내부  

 

 무덤 내부           (출처- http://blog.paran.com/jhd112/14818027)

 

5.  트라 알-다이르 산 지역 (지도상의 22~24번 길)

 

소요시간: 도보 약 2시간 반~3시간 (박물관->알-다이르산 정상-> 박물관)

지형: 돌산, 특징: 돌산을 오르며 군데군데 볼 수 있는 시간의 흔적& 알-다이르 유적

 

박물관 뒷길로 알-다이르산 오르기

 

 알-다이르, 알-다이르산 페트라 수도원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이 건물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부 벽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 수도원으로 추정한다. 이 부근은 기독교인들이 바위 굴 속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원  

 

 


수도원 상단에 있는 조각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돌을 파내 규모가 큰 직사각형 방들을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내부 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가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 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 

 


페트라 전경

 

로마시대의 유적들

 

페트라를 중점으로한 무역로

 

나바테아인들이 무역 중심지로서 건설했던 페트라의 무역대상인들을 위한 숙소

 

대상인들을 위한 숙소를 설명하는 안내인

 

 대상인 숙소 천장의 프레스코화

 

대상인 숙소

 

아인무사(모세의 샘 므리바물), 페트로에서 1.5km 떨어진 페트라의 물 공급지

 

모세의 샘

 

수로 시스템


강수량이 부족하고 물이 없는 페트라가 물 공급을 받을 수 있었던 페트라 도시의 수로 시스템, 인근 1.5km 되는 모세의 샘을 비롯한 샘에서 수로를 연결하여 물 공급을 받았다.

 

수로 시스템

 

수로

 

수로

 

수로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수로의 모양

 

수로

 

수로관

 

수문

 

가정 물 저장소

 

나바테아인, 페트라를 건설한 사람들

 

나바테아인 


(사진출처- 페트라의 무역대상인 숙소, 비잔틴교회, 수로 및 수로시스템 등은 2007.1.21 KBS 방영된

"역사기행 아시아 불가사의 시리즈 (3)사막에 새겨진 암벽도시-페트라 " 에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페트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이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의 산악도시로서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역로의 교차지점에 있어서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며 번영을 누렸다.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3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뛰어난 기술로 세워진 건축물과 수로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카즈네 피라움은 장례사원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로서 바위산 벽면을 깎아 만들었다. 사원 정면에는 높이 약 30m, 너비 약 25m의 파사드가 있고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파사드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즈네 피라움 오른쪽에는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암벽들 사이에는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모습이 사각형이면 나바테아인의 주신인 ‘두샤라(돌 속에 숨은 신이란 뜻)’를 의미하고, 오벨리스크 모양이면 죽은 이들을 추도하는 기념비를 가리킨다. 열주대로의 서쪽 왼쪽에 카스르 엘 빈트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나바테아 만신전의 최고 신 두샤라를 상징하는 표석(神石)을 모시는 신전이다. 본전은 높이 23m로서 열주랑·전실(前室),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도시의 서쪽 끝에는 장례사원인 앗데이르 유적이 있다. 이 신전에서 좀더 가면 바위 언덕 위에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인물 부조와 조각 등 소품들밖에 별 볼거리가 없다. 198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페트라에는 모세가 출애굽 중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있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 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 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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