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부르크 부근에서 야곱슈타이너에 관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다.그 이전에는 슈타이너와 그의 작품 스타일을 추종했던 악기 제작자들의 자료가 쟈크 프랑세의 뉴욕 전시회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슈타이너는 스트라디바리와 델제수에 이어서 가장많이 언급되는 바이올린 제작자 일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화려하고 범상치 않은 인생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 그의 작품이 연주회보다는 박물관이나 책 속에서 더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제작자 들은 도처에 있고 현재 쓰이고 있는 휼륭한 18세기 악기들이 이들 에게서 나온 것이다.이들 카피본 중에서 일부는 품질이 매우 뛰어나서 제대로 보관되지 못한 원작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뿐아니라 연주가 들이나 투자가들은 진품에 대한논란에 자주 부딪히기도 한다.
슈타이너의 상표가 찍히고 진품이라는 보증을 받은 모조품이 있는가 하면, 진짜 슈타이너의 작품이면서도 클로츠(klotz)혹은 유사작품으로 잘못 인식되어 지는 악기들이 많다. 이때문에 독창성과 개성으로 인식되는 자신의 작품에 "in manu propria"라고 직접 써넣을 정도로주의를 기울였던 슈타이너의 이름이 더렵혀 진다.
지난 50년간 연주에 있어서 그러한 혁신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슈타이너가 남긴 유산이 오늘날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초기 바로크음악 ,정격연주? 뭐라고 정의 하든간에 그것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제작가들에게 음량과 소리가 멀리 뻗어나가는 힘보다는 높은 퀄리티와 섬세함이 두드러 지는 음색의 세계로 이끌며 또다른 삶을 선사했다.
슈타이너의 바이올린들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그만의 형태와 양식으로17세기 연주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인 아브삼(Absam)은 알프스 산맥 아래 크레모나 반대편에 위치하는데,크레모나와 유사한 공동체로 한때 돈으로 살 수있는 최고의 바이올린을 찾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장먼저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후 수년간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에 필적할 만한 북부 알프스산 악기는 나오지 않았다.슈타이너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해서 대부분의 18세기 이탈리아 제작가 들은,특히 피렌체 베니스 로마에서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네리 보다는 슈타이너의 아이디어를 따랐다.
만투아의 피에트로 과르네리는 티롤 출신의 슈나이더에게 주목했고 심지어 초기의 델제수 악기중 한두 개는 흥미롭게도 부풀린 아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탈리아라고 부르는 지역의 제작자 들은 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 국수적인 충성심을 보였던 것일까? 그들은 단지 성공을 쫓았다.
음악가들은 확실히 다른 무엇 보다도 슈타이너 바이올린의 감미롭고 은은하면서 정재된 음색을 높이 평가했고 아마티의 기법을 전수받은 것은 스트라디바리가 아닌 바로 그였다. 그는 크레모나에서 처음 교습을 받았을까? 기초를 베니스,아니면 보다 생각이 깊은 퓌센 제작자들 에게서 배워왔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그리 적절치 않다.
그가 만든 모형의 뛰어남은 그가 1683년 사망한 이후 1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중 크레모나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 졌다. 그는 아마티 모델을 받아 들였고 스트라디바리와 반대 방향이긴 했지만 그것을 고수했다. 그의 아치형은 보다 높고 급격해 졌으며 풀루팅은 더 좁고 깊어졌다.
실은 스트라디바리 역시 초기 시절에는 그러한 방향으로 옮겨갔었지만 슈타이너가 사망할무렵, 방침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1690년대 스트라디바리는 긴 악기형을 도안했고 1700년에는 평평해지고 보다 강력해진 아치 형태를 가진 악기들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슈타이너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티롤 출신의 제작자들은 이미 티롤의 악기 제작 중심부에 있었던 기존의 퓌센 제작자들의 방식을 따랐을 것이다. 16세기 주도적인 형태는 브레시아 제작자들의 스타일로 마치 작품아래에 부정확성을 숨기고 있는 듯이 빠르고 급격한 작품, 대담하게실행되고 있는 일반적으로 길고 급하게 나타나는 f홀과 종종 자주 겹치는 장식들을 반영했다.
슈타이너가 이룬 업적은 북유럽에서 이전에 보였던 것보다 훨씬 규칙적이고 통제가 된 접근 법을 도입하면서 제작기술과 디자인에서퓌센 전통을 아마티 수준의 정교함과 겹합시킨 것이다.또 다른 악기 제작자인 마티아스 알바니 (mathias Albani) 는 슈타이너와 같은 시기에 유사한 방법을 도입했는데 그의 영향력은 대등하게 초기 이탈리아 작품에 흘러내린다.
알바니가 사용했던 짙은 붉은색 바니시는 고전 바이올린 제작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슈타이너의 유약은 스트라디가 썼던 깊고 풍부한 붉은색과 비교 되지 않지만 아마티의 것과는 비등했다.즉 조직과 색조는 풍부하지만 좀 더 어슴프레한 호박색이나 골든 브라운 색을 띠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것은 슈타이너가 내부형틀의 사용과 목과 위쪽 부분을 분리하는 트레모나 스타일의 제작기법을 도입했고 그는 전유럽에 이런 기법을 전파 하는데 큰 역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슈타이너가 없었다면 유럽전역의 제작자들은 단순히 브레시아-퓌센 제작자의 스타일에서 크레모나 스타일이었다가 전형적인 스트라디바리적인 스타일로 변해갔을 것이다.나폴리에서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현대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감사히 여길 만한 골격이 큰 갈리아노 (Gagliano)악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단지 나폴리의 에베를레(Eberle)바이올린만이 슈타이너의 제자가 제작한 네모진 아치와 시계의 용수철 같은 스크롤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18세기 제작자들은 이미 독일의 영향력을 깊게 받은 상태였고 소수의 크레모나 제작자들은 베냉(아프리카 서부의 공화국)의 청동 제작자나 명왕조 도자기처럼 다른 지역의 현악기 제작자들에게 이질적이었고,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슈타이너 아류작들이 넘쳐나는 와중에 진품은 희귀해 졌고 간혹 보다 열정이 담긴 ,실험을 기울여 제작된 유사품들이 나와 진품과 구별하기 힘들어 졌다. 질이 낮은 악기들 (그들 중 몇개는 무척이나 형편 없었다)은 18세기 후반에 런던에서 사라졌고 1세기 후 독일 북부지방의 가내수공업장에서도 사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명장 슈타이너의 사망과 그의 스타일을 추종하는 제작자들의 등장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정확히 1737년 스트라디바리의 죽음과 당시 여전히 슈타이너 스타일을 강력히 고수하던 경향이 조금씩 변화되면서 1789년대가 되자 다른 유럽 제작가들이 스트라디바리의 형태를 도입했던 과정에서 똑같이 볼수 있다.
슈타이너 아류작들이 진정한 활성기를 맞은시기는 18세기 중반이었다.그의 악기들은 전유럽 대륙에 퍼졌다.메디치 (Medici)가는 1700년 이전에 나온 슈타이너의 악기들을 소유했었고 힐(Hill)가는 만투아의 피에트로 과르넬리의 보다 극단적인 모델들의 일부가 슈타이너의 영향력 탓이라고 분석했다.
과르네리는 아마티에게 확실하고 집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슈타이너의 영향력도 간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슈타이너 추종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로마의 제작자인 다비드 테글러 는 일반적으로 슈타이너 리스트(슈타이너 기법의 추종자)라고 언급되지만 그는 그런 조류가 무너지기 전에 사망했다.
그는 아우그스부르크에서 1656년에 태어났고 찰스비어는 <그로브>(GROVE)지에 "그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작자의 작품이 다른 지역에서 처럼 로마에 큰 영향력을 행사 했다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테글러는 슈타이너의 모방자가 아니다" 라고 분석했다. 진정한 슈타이너 모방자를 찾기 위해서는 로마의 테글러의 추종자들인 미카엘 플라트너 와 프란체스코 에밀리아니의 세대를 뛰어넘어야 한다.
잉글랜드에서 슈타이너의 작품은 1720년 무렵 잘 알려 졌고 런던에서는 샌도스 공작이 슈타이너가 1660~78년에 만든 네개의 바이올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제작자에게 한번에 주문된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 구입 되었다.
"the stradivai legacy"(스트라디바리가 남긴 유산)에 실린 기사에 키에사와 로젠가든에 의해 작성된 1740년 마르퀴스 카르보넬리 의 목록에는 최상급 크레모노풍 악기들과 보다 트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탈리아인 마르틴 오트와 카를로 토노니의 작품과 함께 두개의 슈타이너 작품이 실렸다. 그렇다면 슈타이너 모방품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디자인의 어떠한 면들이 그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가?
네델란드의 야코프스 잉글랜드의 커스버트와 애거터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의 피에레 (pierray)와 보케(bocquay)같은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제작가들은 17세기 후반 슈타이너 자신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킨 아마티의 작품을 잘알고 있었다.대략적으로 1690년경 보첸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마티아스 알바니는 아마티 형식을 거의 그대로 본떴다.
슈타이너는 확실히 이것에 만족하지 못했고 어퍼바운드가 눈에 띌 정도로 짧아진, 자신의 고유의 작품들과 유사하면서도 개성 있는 디자인 을 만들어 냈다. 그결과 로마 스타일 악기들이 전형적으로 어퍼 바운트에서 브리지까지 거리가 확대된 반면, 이 디자인은 윗부분전체에 걸쳐저 약간 각진 모형과 짧아진 스톱을 가지고 있다.
슈타이너 악기의 f홀은 아마티 모델보다 화려한데,측면이 확대되고 비틀려 땅딸막하고 넓은 외형을 이루고.몸체에서 약간 높은곳에 위치한다. 정확하게 재단된 스크롤은 아마티에게 영향을 받은 정교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나선형은 뚜렸하고 기하학적 중심으로 향하게 고정된 축이 있어 첫번째 회전부분이 매우 넓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 나선형 중심 뒤에서 올라가는 확대되는 마지막 회전 부분이다.이러한 특징은 많은 아마티 스크롤에서,특히 니콜로의 아들인 지몰라모 2세의 것들과 초기 스트라디바리 악기 에서 볼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슈타이너 모방자 들은 이것을 슈타이너 본래의 특징으로 여긴다.
실제로 윌리엄 포스터와 벤저민 뱅크스에 의해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영국제 모방품들은 이러한 개성 있는 스크롤 덕으로 아마티 혹은 슈타이너 유형으로 불린다.뱅크스와 포스터 역시 백조의 목형상을 한 슈타이너 식 펙박스를 많이 만들었는데 이것은 위쪽 측면에서 눈에 띠는 s자 커브를 보인다.
뒤판과 중심 아치의 특징적 모형은 가장자리 플루팅 (fluting)에서 나오는데 이는 깊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넓다.많은 아마티 스타일의 악기들은 폭이 넓은 가장자리 흠과 심지어는 수축된 중심부를 가지고 있지만 슈타이너 악기들의 악기들의 아치는 매우 튼튼하고 브레시아 스타일로 채널에서 부터 약간 평평해진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솟아 나온다.
이것은 약간 네모난 형태를 띠는데 이는 슈타이너를 제대로 모방하지 못하는 사람들중 일부가 슈타이너의 음색과 명성을 가차 없이 망가 뜨리며 과장하는데서 나오는 특징이다.
초기 빈의 악기들은 슈타이너의 것들과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전시회에 진열된 한스 괴글의 1674년산 악기들과 더 잘 알려진 1720년 제작된 안토니 포슈 (antony posch)의 악기가 그 예이다. 그러나 이들 악기들의 아우트라인과 f홀은 전형적으로 확장된 형태를 취한다. 빈은 18세기 후반 피츨 과 티르의 작품이 나오면서 악기 제작의 정신이 슈타이너 모델에 더 가까워 졌다.
마티아스 알바니의 장남인 요한 알반이 그라츠로 자리를 옮겼을때 그의 아버지가 고수 했던 아마티 스타일에서 벗어나 슈타이너 스타일에 가 까웠는지 살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1707년도 그 도시에서 만들어진 테너 비올라 역시 슐로스 암브라스 고유의 것이다.슈타이너의 모델은 매우 광범위하게 전파 되었다.
에베를레(eberle)가는 프라하에서 주로 활동 하였는데 이곳에서 요한 울리히가 매우 좋은 악기형을 사용했지만 불투명한 철분이 함유되어 있는 붉은 바니시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모호하게 했다.나폴리의 토마소 에베를레는 슈타이너가와 갈리라노가의 스타일을 모두 반영하는 매우 미묘한 악기들을 만들었고 전형적인 나폴리의 골든 브라운 바니시를 사용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아마티 주형이 시대의 유행으로 슈타이너 주형의 명성을 능가 했다.야코프스는 크레모나 스타일을 고수하는 매우 진보되고 세련된 제작자 였지만 그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피에터 롬 보우츠 는 흑 적색 바니쉬와 고래뼈로 만든 자신만의 넓은 퍼플링을 고수 하면서 슈타이너 풍을 대안으로 채택했다.
다른지역과 마찬가지로 런던에서는 제작자들이 18세기 동안 거대하게 부푼 아치형과 넓은 f홀, 작은 스크롤과 종종 채색된 퍼플링으로 이루어진 많은 슈타이너 모조품을 만들어 냈다.런던에서 제작되는 이들 악기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점은 간혹 장인 정신이 불완전하고 공법장마다 악기 스타일이 똑같다는 점이다.
악기 안쪽에 새겨진 서로 다른 자필 서명과 각 매매상의 라벨만이 그 악기가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 밝혀 준다. 헨리 제이,데이비드 퍼버,어서와 존 베츠 같은 제작자들은 모조품을 만들었고,존슨과 탐슨 같은 매매상들은 눈에 띄는 라벨을 붙여 돈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웸슬리와 뱅크스 같은 보다 사려깊은 장인들은 더욱 정제된 장인 정신과 질 좋은 오일 바니쉬로 섬세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런던의 제작자인 리처드 듀크는 조잡하고 싼 졸속으로 만들어진 모조품과 보다 정교하게 제작된 감성이 살아 있는 모방품 사이의 균형적이고 상업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아마도 슈타이너 추종자 중에서 가장 잘알려진 사람은 프로랑스 출신의 조반니 밥티스타 가브리엘리와 카르카시가 일 것이다.
가브리엘리의 작품은 아름다우며 종종 이탈리아의 성향 풍부한 오일 바니시 사용을 슈타이너 스타일 보다 미묘한 면들과 결합시칸다.카르카시가의 작품은 완성도가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사용한 바니시는 더 얇게 발라져서 특징이 없지만 티롤풍과 이탈리아 사운드로 정의되는 것을 결합한 것은 다른 이들이 이루지 못한 일 이었다.
슈타이너의 유행은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퍼져 스톡홀롬의 요한 오베르트의 비드할름과 런던 포스터 사이의 유사함을 조명하며 프로랑스의 카르카시의 작품과 근접한 스타일에 도달할 정도 였다. 베니스에서 그 시대를 주도했던 다른 주형들로 만들어진 악기들과 함께 고프릴러,토노니,세라핀,고베티 ,몬다냐나 같은 유명한 제작자들에 의해 슈타이너 풍의 악기들이 만들어 졌다.그러나 그들은 모두 매우 질감이 풍부한 베니스산 바니시를 선호 했다.
피에트로 과르네리의 존재를 잊지 않으면서 이러한 아마티,스트라디바리,혹은 슈타이너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베니스파들이 느끼는 만족의 근원이며 그 상업 도시로 쉽게 흘려들어오는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편견 없이 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채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텐발트파는 슈타이너가 남긴 유산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마티아스 클로츠는 그의 스타일을 슈타이너 쪽으로 옮겨갔고 그 가족의 후예들은 그런 공예를 예술의 수준으로격상 시켰다.제바스티안 클로츠는 이 매우 특징 있으면서도 가문의 성격이 강한 어떤 제작자 보다도 숙련된 장인들을 많이 보유하여 궁극적으로 바이올린 세계를 키워 냈으며 티롤 파트에게 영향을 받은 이 집단의 최고 제작자들 중 한명으로 칭송받는다.
스트라디바리 첼로가 약간 모호한 성취를 남겼다면 다른 크레모나 첼로들은 희귀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틈을 남겼다.슈타이너의 제자들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많은 작업을 했고 슈타이너의 아이디어에 기초한 상상의 첼로 모델로 최고급의 악기들을 제공했다.음색이 최고 수준인 거대한 테글러 (tecchler)와 플라트너(platner)첼로를 제외하고 영국의 현악기 제작들인 조셉 힐,웸슬리,뱅크스,포스터가 만든 슈타이너 모델의 악기들은 많은 오케스트라에게 중요한 악기로 쓰이고 가브리엘과 카르카스의 악기들은 2급품의 이탈리아 악기중 가장 좋은 품질에 속한다.
비록 오늘날 바이올린으로서 시대는 뒤떨어지고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 지 지만 슈타이너 모델의 음질은 현악기들 중 저음악기인 첼로나 더블베이스에는 잘들어 맞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