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과 함께하는 돌공예사 이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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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여행을 하러오는 관광객 중 제주라면 처음 떠올리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돌은 아닐까?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낮은 돌담들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돌하르방. 아마도 잊지못할 제주의 풍경들이 아닐까 싶다.
30년이상을 돌공예에 전념하고 있는 조각가 이길조 선생님을 만나뵙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저는 조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경주에 한 선생님께 그림을 배우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림을 배우며 자연스레 패각공예를 배우게 되었고, 제주에 와서는 돌이 너무 좋아 돌이미지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돌 조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30년 세월을 짧게 이야기해 버리시는 모습에 60~70년 그 당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 어렸을적부터 이런쪽에 손 재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질문을 드렸더니 웃으시며 “어렸을적에는 재주가 없었습니다.”하고 말하여 버린다.
단지 돌이 좋아 시작하게된 돌공예…
“지금은 불법이지만 예전에는 산지를 다니며 직접 돌을 채취하였습니다. 제주도 전지역을 답사하면서 돌을 찾으러 다니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지요. 서광 산간에서 해가져서 산속에서 밤을 지새기도 하고, 서귀포 위미리 사림리라는 마을에서 몇일씩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림리가 그때는 4가구 밖에 없는 산속 마을이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렵고 힘들어도 그때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돌을 보고 돌을 수집할 수 있다는 거… 지금은 할 수가 없는 일이죠.”
선생님은 제일 하시고 싶은 일이 원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수공예품을 만들다 보니 토산품점 납품하는 시간에 맞추기도 힘들어 거의 작품 활동을 못하기 때문이라며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제주에서 조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저의 작품을 구입하여 주셔서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 바램은 상품으로서 제주의 이미지가 좀더 고급스럽게 만들어 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정당국의 지원이 재정적인 면도 필요하겠지만 디자인면과 연구개발면에서도 지금 제주도의 실정에 맞는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것이죠. 이런 지원이 가능해 진다면 제주도에 있는 조각가들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신 질문을 던지신다.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주도에서 또, 제주관광상품 중 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기념품으로서의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수지제품은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가격이 저렴합니다. 하지만 모든 제품에는 장단점이 있듯이 돌의 투박함이 더해진 제품은 나름대로 시선을 끌게 되는 거죠. 저는 더 많은 상품이 나와서 제주도의 관광상품이 다양하고 완성도가 높은 상품으로 변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예전에 비해 돌에 대한 관광객들의 관심도가 높아져 흐뭇하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제가 자전거에 돌을 실고 다니면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많이 웃었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할 당시 돌을 등에 지고, 자전거에 싣고 옮기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음직도 하다.
오랫동안 돌공예를 해오신 선생님께 젊은 인재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저는 이 작업을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너무 솔직하게 말을 한다. 서귀포에서 많은 조각가들과 같이 일을 하실때 생각을 하시면서 돌공예 작업이라는 것이 다른 업종에 비해 인건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자멸할 수 밖에 없다고 하신다.
“돌공예는 먼지도 많이 나는 작업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일하는 직업이라 많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제가 천지연에서 조각을 할때… 그때가 겨울이었습니다. 공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조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참 뒤 제 머리 위, 어께 발위에 눈이 소복히 쌓여 있더라고요. 그 정도로 인내와 집중력이 필요하죠. 또 앞에서 말한 것 처럼 고부가가치를 꿈꾸며 이 일을 시작한다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작품위주로 석공예를 하게 되면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 질 것입니다.”현실적인 모습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각가라는 멋있는 타이틀을 떠나 생존경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하셨다. “혹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돌조각가 되고픈 젊은이가 있다면 저는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며 다시한번 당부를 하신다. “정말 의미를 가지고 이 직업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항상 연구개발 해야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전통공예라고 해서 한가지만 고수해서는 안되거든요.”
걱정이 얼굴에 물이들자 유쾌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돌공예를 해오면서 재미있었던 일들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한 72년도쯤 되었나, 서귀포 정방폭포에서 한 관광객이 자신이 ‘곰’동호회 회원인데 회원들이 곰형태를 만들어 갖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돌로 곰을 만들려고 하니 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생각이 안나는 겁니다. 그날 조각가 몇분들과 같이 밤새도록 돌로 곰을 조각했던것이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곰들이 각각 제각기 모양도다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돌 조각가가 곰을 조각하다니…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요즘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있단 소리를 듣고 걱정스러워 질문을 했더니 공예협동조합에서 90년대에 공동채취를 하여 자재걱정은 한시름 덜었다고 하셨다. 또 돌의 질과 크기에 따라 다양한 작품을 시도해 봄으로서 원자재의 활용이 많이 되어져 자재를 아낄 수 있다 하신다.
그리고 몇번씩 고객들에게 감사한다고 이야기 하신다. 고객은 작품을 인정해 주고, 또 작품을 만든 사람은 그것에 감사할 줄 알고, 이런 사이가 더욱 오랜 세월 흘러가면 이것이 바로 신용이 되고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쑥스럽게 감사할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실 고마운 이야기를 정작 제 아내에게는 못해 봤습니다. 돌을 쳐다보고 돌을 만지다 보니 제 성격도 무뎌졌는지… 제 아내에게는 마음을 표현 못하고 지나치게 됩니다. 맘속에서는 고마운 마음이 많이 있지만 표현 못하는데… 그것 까지 이해하며 참고 넘어가주는 아내가 정말 제일 고맙습니다.”
아내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하고 당당한 이야기가 많은 교훈을 안겨준다.
소박하고 당당한 꿈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바라며 돌공예사 인터뷰를 마쳤다.
글 / 최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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