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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거대한 시화(詩畵)를 보는 것 같은 교회공동체, 쌍샘자연교회를 다녀왔다. 청주에서 30분가량 떨어진 호정리라는 마을에 교회를 개척한 후 한 세대, 한 세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마을의 원(原)주민들과 더불어 꽤 규모가 있는 마을공동체가 되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소담스럽게 자리한 교회마당에는 조용하고 깊은 평화가 숨 쉬고 있었다.
1. 쌍샘자연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저희가 여기 들어온 지는 12년 정도 됩니다. 그 전에는 92년 7월에 청주 쌍샘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10년 정도 있었어요. 이 교회가 쌍샘교회예요. 쌍샘은 동네이름이고요. 샘 두 개가 붙어 있어서 쌍샘골. 그래서 쌍샘교회라고 했고, 쌍샘골은 달동네였습니다. 교회가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목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교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작은 교회지만 지역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가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했어요. 교회개척과 동시에 공부방을 함께 시작해서 1년간 공부방을 운영했고, 1년 후에는 주민 도서실을 운영하고, 또 좀 있다가는 지역사회 학교를 열어서 한글학교도 하고요. 쌍샘골에서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런 일들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했어요. 교회성장보다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면서요. 그런데 97, 98년 정도 되었을 때 지역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어요. 정부가 도시 영세민 아파트를 지은 거예요. 열 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대거 지어서 도시영세민들을 그쪽으로 이주시켜갔죠. 그러면서 동네가 개발되고 아이들은 떠나고 판잣집은 헐리게 되었어요. 자연히 교회도 이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가 없었고요. 그냥 계속 있자니 뭔가 차질이 생겼고, 어디로 옮기자니 교회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시골로 들어가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교인들에게 얘기를 했더니 당연히 깜짝 놀라죠. 목사님 제정신이냐고요. 교회가 가까이에 있어도 가기 어려운데 멀리 가면 어떻게 교회를 가냐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교회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쌍샘에서도 10년동안 그런 생각으로 사역을 했고 옮겨가는 것도 그런 뜻을 가지고 옮겨가고자 했기 때문에 교인들한테 전부 다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았어요. 혹 거리가 너무 멀어서 교회에 못오겠다고 하면 가까운 교회를 소개해드리겠다고 했죠. 그러니까 오히려 교인들이 다 쫓아오더라고요.(하하)
2. 교인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교인들의 3분의 2정도는 청주에서 오고,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동네에서 나오시는 분들이 3분의 1정도 됩니다. 저희가 여기 들어온 지 한 12년 됐는데, 들어오면서 교인들에게 가능하면 들어와서 같이 집짓고 살자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거기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실제로 들어와서 살고 있어요. 도시에도 살아야 되지만, 농촌마을이 살아야 도시도 살고 나라가 균형을 이룬다고 설득을 했죠.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한자리 수밖에 안되잖아요. 다 수입농산물에 의존하고요. 그런 면에서 농촌마을이 살아야 한다는 얘기도 하지요. 또 교회가 지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마을을 만드는 데 일조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면서 귀농은 아니더라도 귀촌이라도 해서 사람 사는 마을로 변화되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런 차원에서 카페라든지 도서관이라든지 갤러리 등 이런 것들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봐요. 농촌마을에 살기 위해서는 다른 것도 있어야 하지만 교육과 문화가 함께 뒷받침되어야만 사람들이 마음을 붙이고 거기에서 삶을 펼쳐갈 수 있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젊은 사람들도 실제로 들어와서 같이 살고 있어요. 어엿한 마을공동체가 형성된 것이죠.
3. 마을에 들어오고 난 후에는 청주에 있을 때와는 다른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했을 텐데요.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으셨나요?
청주에 있을 때는 사회선교라고 하는 한 가지 주제에만 집중했는데, 이쪽으로 오면서 상황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었으니까 어떻게 목회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좀 했어요. 제일 먼저 한 것은 교회 이름을 ‘쌍샘교회’에서 ‘쌍샘자연교회’로 바꾼 거예요. ‘자연’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거죠. ‘전원교회’도 생각은 해보았지만, 도시에 있는 교인들이 시골에 가서 전원생활 하는 그런 차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용납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자연’이라는 단어를 넣었죠. 그리고 목회 방향을 조금 수정했어요. 그래서 사회선교에만 집중되어 있던 중심축을 세 개로 정했어요. 신앙, 선교, 영성위원회와 생명, 자연, 생태위원회와 문화, 공동체, 사회위원회가 그것입니다.
4. 이 세 위원회에 대하여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첫째는 신앙, 선교, 영성위원회인데요. 우리는 ‘교회’잖아요. 신앙공동체. 그래서 신앙, 선교, 영성위원회가 있어요.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일을 아무리 많이 하고 잘 해도 신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거나 성숙한 관계로 나가지 못하므로 신앙과 영성을 탄탄히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중요한 축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고요.
둘째는 생명, 자연, 생태위원회입니다. 저희가 청주에 있을 때도 환경운동은 했거든요. 강좌도 하고, 공부도 하고 노력도 했는데, 들어오면서 성경을 다시 보니까 생태와 자연 환경은 운동차원이 아니더라고요. 신학적이고 성서적이고 신앙적인 이슈더라고요. 성경을 펼치자마자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것이고 이 자연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섭리와 은총이 다 잠겨있는 거예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말고는 이 자연의 은총이 너무나 크고 놀라운 거예요. 우리는 다 이 자연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삶의 기반이 자연이잖아요. 근데 이 자연을 신앙으로 고백하지 않고, 이 자연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자연이 주는 은총을 너무나 가볍게, 또 너무나 홀대해왔던 게 사실이잖아요. 특히 기독교는 서구적인 방식으로 지나친 개발에 몰입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자연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보존도 하고 지키기도 하면서 이런 모든 가치들을 함부로 하지 않아야 되는데……. 성서가 답을 주기도 하고 성서에 그런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자연과 생태의 이 일을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고 신학적으로 해석해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위원회가 정해졌습니다.
셋째는 교회가 지역사회 속에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만들어진 문화, 공동체, 사회위원회입니다. 교회는 크든 작든 공동체성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지역사회 속에 있잖아요. 우리가 이 시골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일 겁니다. 교회가 지역사회 속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자연스럽게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고요. 교회가 건강하고 신앙 안에 바로 서있으면 건강한 기독교문화를 양산해낼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만들어진 위원회입니다.
이 세 개 위원회가 우리 교회의 핵심적인 축이예요. 그래서 교인들은 연말이 되면 이 세 위원회 중 하나에는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 외에도 다른 위원회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지만, 이 세 위원회 중 하나에는 의무적으로 들어가서 같이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기도하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 위원회 아래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세 위원회의 위원장과 위원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예요. 그래서 신앙, 선교, 영성위원회에 속한 분들은 좀 어려워하기도 해요. 이것은 전통적으로 목회자 영역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저도 참여하지만, 우리 교우들의 신앙을 향상시키고 영성을 깊게 하고 믿음을 함께 모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안을 내는 일에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5. 예배는 어떻게 드리시나요?
신앙, 선교, 영성위원회가 주관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저희는 아이들에서 노인까지 같이 예배를 드려요.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 등이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가 다 같이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나 하고 염려하기도 하지만, 한 시간씩 예배 잘 드려요. 한 번은 신부님이 오셔서 주일 예배 말씀을 인도하신 적이 있어요. 말씀을. 대개 신부님들은 강론이 길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 신부님은 말씀을 한 시간 반을 전하셨어요. 그래서 전체 예배 시간이 두 시간에 달했는데, 아이들이 그 시간을 견디더라고요. 그렇게 훈련이 되어 있어요. 각 연령별로 순서를 맡아서 아이들도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고요. 물론 예배 마치면 아이들이 따로 모여서 그들 또래끼리 나누어야 할 것을 나누고 하거든요? 그런데 공동체라고 하면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배우는 거잖아요? 연령별로 나누어서 뭔가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적어도 공동체라면 함께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아이들은 언니 오빠들 보고 배우고, 언니 오빠들도 형들 보고 배우고, 형들은 또 어른들 보고 배우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아, 당연히 주일날은 예배를 드리는 거고, 함께 이렇게 어울리는 거구나’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홀수 달에는 성찬식을 하고 짝수 달에는 애찬식을 해요. 성찬식을 할 때는 세례를 안 받으신 분들이나 아이들은 참여를 하지 못하니까 굉장히 궁금해 해요. 그런데, 공동체 전체를 놓고 볼 때는 다 중요하잖아요. 세례 받은 교인들만 아니라 세례 받지 않은 성도들과 아이들도 다 소중한 지체들인데, 세례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찬식에 참여시키지 않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렇다고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모두에게 세례를 주어서 성찬식에 참여시킬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은 목회자가 집례하고 애찬식은 교우들이 준비해서 진행해요. 어떤 가정이나 위원회나 선교회 등이 원하는대로 신청해서요. 그런데 애찬식이 성찬식보다 훨씬 은혜로워요. 관계도 훨씬 좋아요. 재미도 있고. 성찬식은 뭔가 ‘거룩해야 한다, 진지해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약간 무게감이 있는데 애찬식은 다 털어놓고 하니까요. 봄에는 진달래 화전을 부치기도 하고 쑥개떡을 만들어가지고 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자연에서 나는 이런 것들 가지고 먹을 것, 마실 것을 만들고 아이들도 참여하니까 상 자체가 훨씬 풍성한 거예요. 우리가 성찬식을 그 나름의 의미와 뜻을 가지고 하듯이 애찬식도 그렇게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하니까 좋은 것 같아요.
6. 생명, 자연, 생태위원회가 하는 일. 자연학교도 활발한 것 같습니다. 소개를 좀 해주시지요.
자연학교는 이 곳에 온 후 생명, 자연, 생태위원회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예요. 우리 교회 아이들과 청주의 아이들의 신청을 받아가지고요. 자연학교는 말 그대로 자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교육의 대상으로 삼죠. 나무가 무엇인지, 흙이 무엇인지, 물이 무엇인지, 물이 오염되면 물이 어떻게 자정작용을 하는지……. 숲, 계절. 건강, 농사 등 다양한 것들이 다 교육의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잘 모르니까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강좌를 열기도 했는데 지금은 우리 가운데 숲 해설가도 있고, 도자기나 염색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우리들 스스로가 강사가 되어서 강의도 하고 그럽니다. 봄, 여름, 가을은 자연학교를 하고, 자연 휴지기인 겨울에는 놀이학교를 해요.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나 오락 같은 것에 많이 빠져 있잖아요. 그래서 주로 공동체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놀이들로 1박2일 동안 실컷 놀게 합니다. 공동체 놀이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하는 거죠. 혼자 노는 것보다는 친구랑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부모들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금방 친해지고요. 밝아지고요. 저희는 그런 것들이 아이들을 섬기는 방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연, 생명, 생태위원회에서는 ‘착한 살림’ 같이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고 나누고 공급하기도 합니다. 인문학 나눔을 하는 사랑방, 향토카페, 생태도서관도 모두 이 위원회에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7. 지금 교회의 세 축을 형성하고 있는 위원회들이 하는 일을 듣고 있는데요. 셋째 위원회인 문화, 공동체, 사회위원회가 하는 일도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시지요.
문화, 공동체, 사회위원회는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 문화 형성과 지역사회 속에서의 문화 형성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갤러리, 공방을 하고 있고요. 시작단계이긴 하지만 ‘꽃잠’이라고 해서 출판도 하고 있고요. 요즘에는 유명한 작가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좋은 글을 많이 쓰니까 이런 식으로 다르게 해보자고 생각하는 것이죠. 각자가 쓴 좋은 글들을 내주면 우리가 책을 내겠다고 합니다. 나누자는데 목적이 있으니까 책값은 후불제로 하고요. 갤러리도 작년에 문을 열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전시회가 벌써 네 번째입니다. 사진, 그림 등을 전시해요. 이런 사업들이 지역과 소통하는 장이 된다고 봅니다. 작가와 주민과의 소통도 되고, 교회와 세상과의 소통도 되고요. 유명한 작가들은 전시장소를 잘 마련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그런 기회를 갖기가 어렵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드리는 거죠. 현수막도 걸고 팸플릿도 만들어서 그런 분들 인준해주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체로는 1년에 한두 차례 기획전을 열었어요. 지역주민들, 아이들의 작품들을 받아서 전시했습니다.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장도 되고요. 유명하고 좋은 갤러리들도 많지만, 우리 갤러리는 우리의 삶의 일상을 나누는 차원에서도 작가 분들도 상당히 좋아하고 우리 교우들이나 주민들도 좋아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다녀가십니다. 그러면서 마을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런 일들은 교회가 함께 해야 되는 거 같아요. 저 혼자서는 못하죠. 교회 일이 굉장히 다양하고 많거든요. 장(場)만 만들어놓으면 교우들이 다 하시더라고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교회 와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종교적인 일들만 하면 되지 교회가 그런 걸 왜 하냐는 말씀들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교인들은 다른 활동들은 밖에 나가서 할 수 밖에 없죠. 취미활동으로 축구나 등산동아리 등은 하지만 다른 활동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들은 잘 못하거든요. 교인들은 밖에 나가면 모두 전문가고 자기 몫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재주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신앙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공동체에서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을 마련해주면 교우들이 자신들의 재능과 은사와 장점을 살리고 다 찾아서 가더라고요. 그러면서 배우기도 하고. 인문학당만 해도 우리 교인들도 참여하지만 외부사람들도 같이 와서 참여하고 있어요. 인문학당 같은 것이 우리 교회를 만들어온 정신적인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신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처럼 문화적이고 생태적이고 인문학적인 것들이 교회를 만들어오는 정신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8. 방금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정신적 내용들은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용들이 형성된 과정에 대하여 들을 수 있을까요?
우선 제가 먼저 준비가 되어야 했는데요. 저는 농촌 출신이기도 하고, 학교 다니면서는 진천 쪽에서 농촌 목회를 했지만 그 때는 잘 몰랐어요. 뭘 하고 싶어도 할 게 없기도 해서 도시로 나왔어요. 청주에 있는 도시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그 때 총회 사회부 산하의 사회선교협의회에서 일을 좀 하면서 공부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또 어렵게 공부했던 시절도 있었고 해서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가 워낙 많으니까 교회가 없는 마을로 또는 교회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교회개척한 후에는 공부방을 먼저 시작했던 거고요. 그리고 교회개척을 준비하던 91년도 가을에는 친구 목사랑 같이 배낭 하나 짊어지고 교회 탐방을 했어요. 대구에 갔다가 ‘작은 교회’라고 하는 교회에 가서 보고 ‘나도 이렇게 교회 사역해도 재미있겠다, 나도 이런 목회를 해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었어요. 30년 전에 이미, ‘작은교회’라고 이름을 짓고 목회를 하고 계시는 모습에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그 교회의 목사님은 민중신학을 하고 노동선교도 하신 분인데 지역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사역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저도 교회개척을 한 후에는, 제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사역을 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교회의 크기보다는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 또 지역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교육, 생태, 문화와 관련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열린 강좌 같은 것도 많이 개설하고요. 쉽지는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교회가면 종교적인 활동, 예를 들면 기도하거나 하나님 말씀 배우는 것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느끼는데, 이런 활동들에는 낯설어하고 자꾸 딴 길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게 사실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지속적으로 꾸준히 했어요. 그랬더니 같이 가는 교인들이 생겨났어요. 일단 그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오시는 분들에게는 이런 일들을 같이 해나갈 수 있는 마인드가 형성되더라고요. 그렇게 쌍샘교회의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아갔어요. 그러다가 그 지역에 변화가 생겨서 이 곳으로 들어오기 직전에는 저희 공동체가 해마다 갔던 여름수련회에서 워크숍을 했어요. 그 당시에 저희 교인들이 이십 몇 명 됐었는데요. 만약에 우리에게 땅이 주어진다면 그 땅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우리교회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조별로 나누어서 이야기해보게 한 다음에 발표를 하게 했어요. 땅이 없었는데도 그렇게 하니까 또 하고 싶은 것들이 나오더라고요. 청주에 있을 때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해서 그런지 ‘땅이 주어진다면’이라는 가정을 주었더니 그게 단서가 되어서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갔고요. 그 다음에는 둘씩, 셋씩 짝을 지어서 우리보다 먼저 그런 일들을 시작한 교회들에 탐방을 보냈어요.
9.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주 아담하고 아름답습니다. 교회당과 카페, 도서관 등이 들어선 이 곳은 마치 전체가 하나의 시화(詩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저희가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 수없이 많은 땅을 보러 다녔어요. 그 당시 우리 교회의 전 재산인 2천4백만 원을 들고서요. 그런데 땅이 없는 거예요. 결국은 여기까지 왔는데 이 땅이 너무 좋더라고요. 천 평 정도 되는데, 그 당시 가격으로 7천만 원 됐어요. 저희 재정으로는 턱없이 모자랐지요. 그래서 ‘교회를 1, 2년 할 것도 아니고 평생을, 주님 오실 때까지 할 건데 땅값은 차차 갚아나가자’고 생각하고서 계약을 했어요. 이 땅은 그렇게 부채를 안고 구입하게 됐고요. 계약하고 나서 회계를 보시던 집사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저한테는 ‘잘 하셨습니다.’ 하셨는데, 교인들에게는 ‘큰일 났다. 목사님이 일을 저지르셨다.’고 하셨다더군요. 하하. 그리고 교회 건물은 짓지 않고 천막을 치려고 했어요. 교인들에게도 땅을 사면 거기다가 천막을 치겠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천막교회를 했는데, 천막교회 그게 괜찮아 보인다고 했지요. ‘그게 뭐가 중요하냐. 광야교회같이 천막교회 하면서 봄, 여름, 가을은 거기서 모이고 겨울에는 교인들 집에서 모일 것이다’라고 했지요.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게 네 교회냐?’ ‘이런, 아니 교회가 왜 제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지.’ ‘그런데 왜 네가 스스로 하고 너 혼자 하려고 하느냐?’ 그래서 어디 가서 도움 받고 하는 것을 잘 못하는 제게 ‘그 교회를 함께 지으면 어떠냐?’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 교회라면, 충북이 고향이고 여기까지 왔는데, 도움을 받아서 함께 교회를 지어볼까? 우리 교인들의 힘만 가지고는 힘든데...’ 그래서 쌍샘자연교회이야기를 다섯 장으로 만들었어요. 쌍샘교회가 92년도부터 쌍샘에서 해온 일을 소개하고, 지역의 변화로 인해 교회가 고민했던 일, 시골로 가기로 결정하고 땅을 구입한 과정, 천막을 치려고 했으나 그것보다는 어차피 교회당을 건축해야 한다면 주님의 교회를 함께 지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 등을 넣었습니다. 이걸 들고서 모교회인 상당교회로 향했어요. 가서 한 구좌만 도와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한 구좌가 1백만원이거든요? 한 구좌만 도와주면 우리 교회한테 큰 힘이 되겠다고요. 상당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에 청을 넣었는데,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도와주시더라고요. 우리 교인들도 동참하게 해서 어렵지 않게 백 구좌를 만들어서 건축을 하게 되었어요. 예산보다 좀 초과하기는 했으나 안고 갈 수 있는 정도였고요. 아직도 부채는 좀 가지고 있지만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0. 교회가 들어올 때 마을에서 반발은 없었나요? 아무래도 시골은 도시보다는 배타성이 좀 더 강한 것 같아서요.
교회 건축할 때 주민들이 반대했어요. 길을 막고. 여기에 교회가 왜 들어오나 이거예요. 동네가 큰 것도 아니고 10호 밖에 안되는 작은 동네에. 애들도 다 도시로 나가고 이웃들도 도시로 나가고 정말 조용했거든요. 교회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떠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았을 동네였어요. 그런 추세에 있던 이 마을에 교회가 들어온다고 하니 이해가 안됐던 거죠. 저희가 봐도 그럴 것 같았어요. 쌍샘교회 설명을 했지만 곧이듣지도 않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쌍샘교회에도 가보셨더라고요. 달동네에서 그냥 집 하나 구해서 거기서 교회사역을 한데다 십자가도 없었으니 이게 교회냐, 사이비나 이단 아니냐 그랬던 거죠. 그런데다 이 너머에 있는 기도원에서 나온 사람이 동네어른들을 때린 적이 있었대요. 그래서 교회를 못짓게 했던 거예요. 결국 동네분들에게 각서를 써드리고 나서야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민들이 반대하는 일은 하지 않겠고, 주민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면 우리 교회가 여기를 떠나겠다는 각서요. 청주에 있을 때부터 ‘교회가 적어도 앞서 가거나 보조를 맞춰서 가야지 지역에 끌려가거나 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걸림돌은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잖아요? 그 정도의 소명과 헌신성은 있어야 하잖아요? 환경이면 환경, 교육이면 교육, 문화면 문화. 그래서 각서를 자신 있게 써드렸고, 그 후에도 각서 가지고 와서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단지 우리 교회에 수련회온 교회들이 드럼치고 기타치면서 ‘주여 주여’ 하며 기도하니까 약주 한 잔 하고 얼큰해지신 어르신들이 ‘목사 동생’ 하고 찾아와서 불만을 얘기하신 적은 있었지만요. 그런 일을 제외하면 좋아하십니다. 젊은 세대들이 들어오고, 아이들이 생기니까 아이들 소리가 나고 노는 소리 들리니까요. 그 적막하고 고요했던 동네에 사람 소리가 나고 또 집들이 새로 생기면서 땅값도 오르고 하니 좋아하세요. 교회가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전도나 선교는 기본이고, 지역을 살리는 일에 교회가 좀 나섰으면 좋겠다는 거죠. 지금도 더 들어오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는데, 들어와도 아이들 교육이라든지, 그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구비되어 있지 않으니 망설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자꾸 도시로 나가고 도시에 의존하게 되고요. 다행히 저희 교회가 들어오고 난 후에는 도서관, 카페, 갤러리 등이 생기니까 동네 주민들의 자녀들이 주말에 오면 이제는 우리 교회에 와서 놉니다. 교회 마당에서 놀기도 하고 차도 마시고. 또 생태도서관이라는 전문성이 있으니까 필요한 사람들은 와서 이용도 하고요. 이렇게 교회가 동네 주민들과 잘 어울려 지내면서 한 마을을 이루게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