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경제연구소가 6월 10일 발간한 보고서는 ‘히딩크 리더십’에 관한 상세한 분석을 담고 있다. 연구소는 히딩크 감독의 사례를 통해 한국기업의 경영혁신 방향을 조언하고 있다. 히딩크 리더십은 다음의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1. 전문적 식견
히딩크 감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유럽 축구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던 경험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특정 부문의 전문가를 영입하여 선수관리·전술구사의 전문성을 높였다.
주요수상경력 : 네덜란드 리그 우승 : 1986/1987/1988(PSV 아인트호벤), 네덜란드 FA 컵 우승 : 1988 (PSV 아인트호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1988 (PSV 아인트호벤), 도요타 컵 우승 : 1998 (레알 마드리드), 월드컵대회 4강 : 1998(네덜란드 대표팀), 유럽선수권대회 8강 : 1996(네덜란드 대표팀)
2. 공정한 선수선발
히딩크 감독은 명성이 아닌 실력과 현재 상태 위주로 선수를 뽑았다. 외국 영입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연고나 파벌, 외풍에 영향받지 않고 공정하게 선발한 것이다. 선수들간의 내부경쟁을 통해 긴장감을 유지하고 일부선수의 부상으로 전력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예방했다.
“나에겐 이른바 스타플레이어의 명성은 중요하지 않다.”- 2001년 이집트대회 직전의 한 인터뷰에서
3. 펀더멘털(fundamental)
원칙과 규율을 강조함으로써 소프트(???) 측면의 펀더멘털을 강화했다. 체계적인 체력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수준의 체력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드 측면(???)의 펀더멘털을 보강했다. 특히 2002년 3월부터 5월까지 9단계의 체력강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규율을 지키고 강조해 온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 2001년 훈련도중에 한 말
4. 방향·비전의 제시
창의성에 바탕을 둔 생각하는 축구를 표방했다. 90분 동안 모든 선수가 적진을 압박하고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 공격축구를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내 목표는 90분 동안 통제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이다.”- 2000년 취임(???) 인터뷰에서
5. 신뢰와 소신
컨페더레이션스 컵과 골드컵에서의 부진에 따른 비난여론 속에서도 소신을 갖고 팀을 이끌어 갔다. 월드컵 개막 직전까지 체력훈련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훈련을 계속했다. 선수들 간에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해 선후배사이의 경직된 관계를 깼다.
“당신들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6월을 기다려 왔다.우리는 월드컵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 2002년 네덜란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히딩크와 이공계 살리기
우리나라가 월드컵 출전 반세기 만에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우리 대표팀이 무적함대 스페인을 격침시킨 22일 인터넷은 온통 히딩크 감독에 대한 얘기로 꽉 차 있다. 그에게는 우리나라의 명예 국적을 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를 교조(敎祖)로 섬기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할 것이라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가위 하늘을 찌르는 인기다.
하지만 불과 두어달 전까지만 해도 히딩크 감독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깜박이는 등잔불이었다. 아예 우리 안방에 불러들여 하는 이번 월드컵에서 만약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야반도주를 해야 할 신세였다.
히딩크 감독이 어떻게 이처럼 막강한 신임을 한 몸에 얻을 수 있었을까? 나는 주저없이 그가 기초를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그동안 쏟아진 많은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우리 선수들의 기초체력과 기본기를 다지는 일에 매진했다. 이제는 우리 모두 그를 믿는다.
*** 기본기 중요성 일깨워
얼마 전부터 이공계 위기가 국가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공계의 위기가 기초의 부실에서 온 것임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理)를 홀대하다가 잘 나가는 줄 알았던 공(工)까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일전에 서울대를 평가하러 온 외국 석학들은 "어떻게 이처럼 열악한 실험 환경 속에서 논문을 쓸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과학기술 투자가 많이 늘었다는데도 기초과학 연구실에서는 새로운 실험기구 하나 마련하기 힘들다.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과학'보다 당장 상품화해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때문이다.
기초과학 분야의 한 교수는 "실험실 대학원생들이 10년도 넘어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이런 심정을 지닌 사람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교육제도도 기초를 외면한다. 교차지원이 가능하게 해 수학 등의 기초가 없는 학생이 대거 이공계에 진학하게 했다.
이 때문에 공대 학생이 같은 과 친구에게 수학 과외를 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우리의 중등교육이 기초를 다지지 못한 학생들을 양산했고, 이공계 대학은 별 수 없이 이들을 받아들였기에 일어난 해프닝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대학만 기초 부실에 시달리는 게 아니다. 중.고교의 과학 실험기구조차 불량품이 많아 실험 중에 용기가 깨져 학생들이 다치기도 한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많은 과학 전시품을 보며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국립자연사박물관 하나 없는 게 우리나라다.
한 경제연구소에서 자연사박물관을 세우는 계획은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하지만 자연사박물관이 자손 대대로 가져다줄 '교육 및 문화유발 효과'는 왜 계산에 넣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기초에 투자하는 것이 당장의 손익만 따지기 위함은 아니지 않은가.
*** 학문도 장기적 투자 절실
월드컵이 개최되기 전 히딩크는 패배를 거듭해 한때 '오대영(5-0)'이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을 가졌다. 그러나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히딩크는 승승장구했다.
나는 우리 대표팀의 놀라운 선전을 지켜보면서 만일 히딩크 감독에게 우리나라의 살림을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봤다.
그는 우선 교육.문화.과학 등 국가 발전의 기본이 되는 부문에 과감한 투자를 요구할 것이고, 어김없이 기초부터 다질 것이다. 당장 밥 벌어먹기도 바쁜데 어느 세월에 기초부터 다시 할 수 있느냐는 주위의 비난에도 끄떡하지 않고 기초학문의 육성과 교육에 온 힘을 쏟을 것 같다.
월드컵 승리의 감격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기초의 힘을 보았다. 히딩크는 우리에게 누구라도 상대할 자신감과 기본기를 갖게 해줬다. 싸우는 것은 우리 몫이다.
- 최재천 서울대 교수 -
한국선수들의 열정에 매료된 ‘1년 6개월’
- 김은선 :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
과거의 한국 축구팀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방의 소속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의 팀이며 한국은 내가 이끌고 있는 팀의 나라다.”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말이다. 히딩크 감독의 한국생활이 시작된 것은 1년 6개월 전인 2000년 12월 18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대한축구협회와 감독계약 체결식을 하면서부터 ‘타향살이’가 시작됐다. 그가 1986년부터 이끌던 네덜란드 아인트호벤팀은 세 시즌 연속 네덜란드 리그를 제패했다.
그는 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아 4강까지 이끌었다. 그가 아시아지역인 ‘변방’의 한국팀을 맡기로 마음 먹은 것은 “한국축구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대한축구협회의 솔직하고 진지한 제안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한국 축구팀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았다. 그만큼 잠재력 있는 팀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선수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순수함도 그를 사로잡았다. 히딩크 감독은 후일 네덜란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위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자신의 몸값 올리기에만 급급한 유럽 선수들에 비해 한국 선수들은 나보다는 팀과 국가를 먼저 내세웠다. 16강에 진출하겠다는 의지와 열정도 강했다. 한국국민들의 뜨거운 열망도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그가 ‘히딩크 스타일’에 낯선 한국선수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프로의식 덕분이다. 그는 처음에 박씨와 김씨의 발음조차 구분하지 못했지만 첫 전지훈련 캠프에 합류한 지 채 1주일도 안돼 선수들의 이름과 얼굴을 80% 이상 외워버렸다. 경기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로 미리 얼굴을 익히고 식사시간마다 확인했다. 다른 문화권의 외국선수들 이름을 외우고 호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네덜란드어가 영어의 ‘j’를 발음기호 ‘i’로 발음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김은중과 박지성을 ‘은융이’와 ‘이성이’로 부르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번은 한국 코치들이 선수들을 부를 때 성을 빼고 기현이, 동국이처럼 끝에 접미사 ‘이’를 붙이는 것을 보고는 안정환을 ‘안이’라고 불러 선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은 규율과 규칙을 강조한다. 훈련·식사·이동 중에는 선수·코칭 스태프는 물론 통역과 주무 등 지원단도 핸드폰을 반드시 꺼놓아야 한다. 선수와 스태프들간의 복장도 통일해야 한다. 송기룡 대표팀 지원부 과장은 “해외 전지훈련 때 옷이 든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렸는데 ‘대표팀 유니폼을 못 찾으면 당장 선수단의 저녁식사에도 끼이지 못한다’는 히딩크 감독의 엄포에 서둘러 택시회사를 수소문해 찾아낸 적도 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성격도 워낙 철두철미해 상대팀 정보를 매일 꼼꼼히 분석했고, 훈련때마다 선수들에 대한 강점·약점·특징 등을 상세하게 메모했다고 한다.
축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의 장연환 과장은 “히딩크 감독은 요즘에도 매일 저녁식사 후 방에 틀어박혀 과거 한국경기와, 상대팀의 최근 경기 테이프를 분석한 후에야 잠을 청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캠프에서의 그의 생활은 단조롭다. 훈련·비디오분석·음악듣기 외에 저녁에 카드를 치면서 보내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가끔은 파주 캠프 근처 양식당인 ‘프로방스’에 가서 식사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히딩크가 늘 엄격하기만 한 완벽주의자는 아니다.
축구를 안했으면 농부가 됐을 거라는 히딩크 감독은 자신에 대해 “개방적이며 직설적이지만 열정이 넘쳐 자주 폭발하기도 하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1월부터 히딩크 감독을 곁에서 지켜봐 온 김광명 기술위원은 “히딩크는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고 일 못지 않게 노는 것도 좋아한다”며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나 주변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때론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98년 도요타컵에서 우승하고 수염을 깎았는데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면 무얼 보여주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16강에 진출하면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자르겠다.
단 박항서 코치처럼 빛나는 대머리 스타일로 하지는 않겠다”고 대답해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장난기는 훈련중에도 이어져 감독하면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로만 알고 있던 한국 선수들이 히딩크 감독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 가끔씩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도 한다는 게 코칭 스태프들의 얘기다.그는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꼽히는 네덜란드 출신답게 자유분방한 성격도 갖고 있다. 음악, 특히 재즈를 좋아하며 운동을 좋아해 캠프를 벗어나면 테니스·스쿼시·골프 등을 즐긴다.
두바이 4개국 대회에선 아랍에미리트(UAE)전을 마치고 코칭 스태프들과 함께 4륜 구동 차량을 타고 사막투어를 하기도 했다. 감독이든 선수든 휴식이 필요하다며 네덜란드로 날아가 버리거나 예정일보다 며칠씩 늦게 돌아와 한국의 축구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곤 했다.
히딩크 감독은 적응력이 뛰어나 낯선 음식도 가리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곤혹스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돼 훈련을 마치고 선수들과 함께 횟집을 찾았을 때다. 히딩크와 핌 베어벡 코치, 얀 룰푸스 테크니컬 코디네이터를 아연실색케 한 음식이 나온 것이다. 칼로 난자당한 채 접시에서 꿈틀거리는 산낙지였다. 베어벡 코치가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면 먹겠다”고 정중히 거부 의사를 밝히자 히딩크 감독은 한 술 더 떠 “목표가 그것밖에 안돼? 나는 한국팀이 결승에 오르면 이 음식을 먹겠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유발했다.
55세인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에 아내와 두 아들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혼을 원하지만 아내쪽에서 거부해 별거중이라고 한다. 현재 그의 곁에는 사귄지 4년째 되는 연인 엘리자베스가 있다. 엘리자베스는 신장 1m70cm의 수리남 출신 30대 흑인여성으로 네덜란드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지난해 5월 경기도 미사리 구장에서 열린 나이키 프리미어컵 유소년대회 개막식에 처음 얼굴을 보인 이후 수차례 한국과 해외에서 히딩크와 동행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히딩크가 선호하는 여성상은 현모양처형인데 엘리자베스가 바로 그렇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은 “엘리자베스는 애인이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라고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관리에서 만큼이나 자신의 사생활도 철저하게 보호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그런 만큼 선수들의 사생활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고종수와 이동국이 음주와 병역파동으로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사생활이 어떻든 간에 피나는 훈련을 통해 경기때 최적의 컨디션과 기량을 펼치기만 한다면 상관없다”고 말했다. 이는 마약 복용과 동성간 결혼을 인정하고, 매춘부 노조가 있을 정도로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개인적인 나라, 네덜란드인의 국민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