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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속집 제3권 / 부록(附錄)
동계 정온 신도비명(桐溪鄭蘊神道碑銘) - 조경(趙絅)
동계(桐溪) 정공(鄭公)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상기(喪期)가 끝난 이듬해에 사자(嗣子) 전 현감 창시(昌詩)가 안음(安陰)에서 서쪽으로 600리 길을 달려 홍양(洪陽)의 해상(海上)에 이르렀다. 가장(家狀) 한 권을 갖고 와서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건네고 울면서 말하기를, “선친의 묘소에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나 자랐습니다.
불초한 제가 밤낮으로 선친을 생각하면서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힘껏 비석을 마련하였습니다.
감히 영원히 전하게 할 비문을 집사에게 부탁하니, 집사께서는 명(銘)을 내려 주십시오.” 하였다.
경(絅)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아, 불녕(不佞)한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선군자께서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올린 항소(抗疏)와 정축년(1637, 인조 15)에 결행한 충렬(忠烈)은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전해지고 있으며, 더구나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을 수립하고 돈돈히 하여 문식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은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장차 태사씨(太史氏)가 사책(史策)에 기록할 것이 한둘이 아닐 것이고, 서원과 학궁(學宮)에서도 제물을 갖추어 제향할 것이니, 비천한 나의 말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함부로 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창시가 또 일어나 울면서 말하기를, “불초한 제가 선친을 위하는 방도는 오직 이 일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또한 나의 선친을 깊이 아는 분이 집사 외에 그 누가 있어 이를 기록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마음이 서글퍼져 감히 다시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손을 씻고 가장을 살펴본다.
공의 휘는 온(蘊)이고, 자는 휘원(輝遠)이고, 성은 정씨(鄭氏)이다. 그 집은 곧 안음(安陰)의 역양리(嶧陽里)에 있으니, 이로 인하여 동계(桐溪)라 자호(自號)하였다. 그 선계(先系)는 초계(草溪)에서 나왔는데, 고려 시중(侍中) 배걸(倍傑)로부터 세상에 드러났다.
배걸의 후사세(后四世) 습인(習仁)은 벼슬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이다. 방정(方正)한 성품으로 이름이 났고,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전(傳)을 지었다. 이분이 전(悛)을 낳으니, 문학으로 당시에 으뜸이었다. 세상에서 팔계선생(八溪先生)이라 일컬었고, 관직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제학이 생원 제안(齊安)을 낳고, 생원이 목사(牧使) 종아(從雅)를 낳았다.
목사가 별제(別提) 옥견(玉堅)을 낳으니, 증(贈)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이고, 집의가 증(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휘(諱) 숙(淑)을 낳고, 승지가 증(贈) 이조 참판(吏曺參判) 휘 유명(惟明)을 낳으니, 진사인데 공의 고(考)이다. 공의 현귀(顯貴)함으로 인해 3대가 증직(贈職)된 것이다.
참판공은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스승으로 섬겨 그 학문을 극진히 하였으므로 함께 나아간 문인 중에 가장 뛰어났다. 금상조(今上朝 인조조(仁祖朝))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장사랑(將仕郞) 진주(晉州) 강근우(姜謹友)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의 오빠 강익(姜翼)은 선비의 행실이 넉넉했는데, 부인은 그 오빠의 풍모가 있었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에 역양리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뚝 두각(頭角)을 드러내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일찍이 죽마(竹馬)를 타고 장난하며 말하기를, “작은 골짜기에 대인이 태어났도다.” 하니,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 말이 어눌하여 글을 외움이 같은 또래들보다 뒤떨어졌지만 가만히 익히고 애써 인내하며 백배 노력하려는 뜻을 두었기 때문에 마침내 민첩한 자질로 변화되어 문리가 갑자기 향상되었고, 약관이 되기 전에 문득 큰 재목을 이루어 명성과 칭찬이 자자하였다.
갈천은 본래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한 번 공을 보고는 문득 원대한 공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였다. 공은 비록 젊었으나 기우(器宇)가 엄정(嚴整)하고 제행(制行)이 방정(方正)하며 자처하는 말이 적고 오직 글읽기를 부지런히 하니, 종유하는 선비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19세에 향시(鄕試)에서 장원하였다. 참판공이 부인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대는 그 영화를 누릴 것이지만 한스럽게도 나는 미처 보지 못하겠구려.” 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참판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공은 발을 구르며 밖에서 기도하다가 기절하여 다시 소생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 당시 왜적이 남쪽 지방에 벌 떼처럼 모여 있었으므로 공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호남과 영남 사이에 피난하였다. 떠돌아다니고 급박한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질대(絰帶)를 차고 다녔고, 길에서 걸식하였으나 당시 모부인이 드시는 것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영남에서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릴 때, 선비들이 공을 추대하여 서울에 들어가게 하였다. 선묘(宣廟)께서 가상하게 여겨 정시(庭試)를 설행(設行)하였는데, 공이 제2등을 차지하였고, 서울 사람들이 그 문장을 자자(藉藉)하게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했다.
병오년(1606)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별시에 제3등으로 급제하였다. 다음해에 성균관에서 춘방 설서(春坊說書)에 제수되었고, 이윽고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가 곧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해에 창덕궁이 낙성되어 광해군이 거처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요망한 고사(瞽史)의 말에 현혹되어 곧 정릉궁(貞陵宮)으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공이 독계(獨啓)하여 강력하게 간쟁하니, 광해군이 진노하여 즉시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임(補任)하도록 하였다. 공이 서울을 떠날 때에 정승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가 전송하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은 언관의 소임을 다했지만 나라는 장차 어떻게 해야겠소?” 하였다.
공은 부임한 후 주장(主將)을 섬기고 이민(吏民)을 대하는데 각각 옳은 도리로써 하였다. 이해 북로(北路)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경성이 더욱 굶주림이 심하였으나 공의 구황(救荒) 정책에 힘입어 소생하게 되었다. 갑인년(1614)에 공이 옥리(獄吏)에게 심문당할 때에 경성(鏡城) 사람들이 서울로 달려와 묵으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은덕을 끼쳐 주신 분이다.” 하였다.
임자년(1612)에 광해군이 무신년(1608)에 상소한 사람의 공을 책훈(策勳)하였다. 공도 여기에 포함되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징환(徵還)되었으나 공은 공훈이 없다는 이유로 함껏 사양하였다. 이이첨(李爾瞻) 등이 노하여 말하기를, “정모(鄭某)가 이 책훈을 사양하는 것은 나라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하였다. 이에 공이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묵묵히 물러났다.
계축년(1613) 여름에 무뢰배 서양갑(徐羊甲) 등이 구금당했는데, 마침내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도모한다고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였다. 이에 자전(慈殿)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부채질하여 화를 빚어냈으나 공경대신(公卿大臣)은 자못 무고인 줄 알면서도 입을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공이 하루는 이이첨을 보고 책망하기를, “여덟 살의 아이가 어찌 역모를 알겠소. 듣건대 자전께서 상식(尙食)을 폐하고 대군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네가 죽으면 나 또한 죽으련다.’ 하시니, 만일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소?” 하니, 이이첨이 발끈 소리 높여 말하기를, “대비마저 함께 폐하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소?” 하였다.
공이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니, 이이첨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을 품었다. 5월에 공이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이 정인홍(鄭仁弘)의 거처와 가깝고 또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서 편지를 보내어 “여덟 살의 아이를 죄주기를 청하니, 온 조정이 모두 잔인한 사람이다.”고 극언하였고, 또 정인홍이 손을 써서 대군을 구하기를 바랐으나 정인홍은 공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다.
겨울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제수되었으나 당시의 여론과 크게 합치하지 않자 휴가를 청하여 체직되었다. 요로(要路)에 있는 자들이 심지어 역당(逆黨)으로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갑인년(1614, 광해군 6) 2월에 영창대군이 배소에서 죽었으니,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항(鄭沆)이 조정의 의논에 부화(附和)하여 죽인 것이다. 공이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으면서 천 몇백 글자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대략에,
“전하께서 인륜(人倫)의 변고를 당하시어 변고에 대처하는 방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끝내 거칠고 사나운 무부(武夫)에게 손을 빌리고 말았으니, 그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이미 크지 않겠습니까. 무고(無辜)한 범인(凡人)을 죽여도 오히려 용서할 수 없거늘, 하물며 우리 임금의 친동기(親同氣)를 죽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정항을 참수하지 않으시면 전하께서는 선왕의 묘정(廟庭)에 설 면목이 없을 듯합니다.
대비(大妃)가 비록 전하께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전하께서 어찌 대비에게 효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 참소하여 무함하는 길을 배척하여 끊으시고, 전하께서도 마땅히 자식 된 직분을 공손히 다하여 문안하고 반찬을 살피는 예(禮)를 폐하지 말아서 대비가 기뻐하시도록 힘쓰신다면 오히려 이전의 잘못을 가리고 새로운 교화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간 정조(鄭造), 윤인(尹訒), 정호관(丁好寬) 등이 처음으로 폐비(廢妃)와 살제(殺弟)의 의논을 일으켰으니, 신하가 되어서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모자간의 은혜를 온전히 하려 하신다면 속히 세 사람을 잡아 변방으로 쫓아내어 나라 안에 함께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뒤라야 참언(讒言)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않고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우주에 밝게 빛날 것입니다.”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광해군이 크게 진노하여 승정원을 엄중히 문책하고 상소를 봉입한 승지를 파직시켰다. 이에 삼사(三司)가 모두 삭탈한 뒤 절도(絶島)에 안치하는 것으로 의논했으나 광해군은 오히려 처벌이 가볍다고 노여워하며 삼사를 준엄하게 꾸짖으니, 이에 곧바로 나국(拿鞫)하기를 청하여 공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의금부에서 관례에 따라 여러 대신의 평의(評議)를 청하였다. 우의정 정창연(鄭昌衍)과 원임(原任) 이원익(李元翼)이 헌의(獻議)하기를, “정모(鄭某)는 진실로 광망(狂妄)하여 거리낄 줄 몰랐지만 어찌 임금을 무시하거나 부도(不道)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원컨대 너그럽게 처벌하소서.” 하였고, 정승 심희수(沈喜壽)의 의논도 그러하였다.
광해군이 이완평(李完平)에게 답하기를, “정모의 소는 글자마다 음흉하니,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한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삼사와 관학(館學)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무장법(無將法)’, ‘불병역(不兵逆)’ 등의 말로 소장을 올려 원한을 품으니, 예(羿)의 과녁 속에 던져진 것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6월에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여 공초를 받은 뒤에 하옥시켰고, 가을에 다시 공초를 받고 이어서 대정현(大靜縣)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감옥에 갇힌 날이 모두 다섯 달이었다.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어떤 한 노파가 길에서 축원하기를,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어진 분으로 하여금 감옥에서 죽게 하지 말지어다.” 하였고, 옥졸(獄卒)도 서로 경계하며 공경하였다. 정항 또한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는 공의 의로운 공초에 감복했으니, 저는 결코 공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호관은 공의 상소문을 보고 또 말하기를, “나는 천고의 죄인됨을 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드디어 날마다 술을 마시다가 병들어 죽었다. 선생이 출옥했을 때 도성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느라 거리마다 무리를 이루었다. 압송하는 수레가 가시로 되어 있으므로 모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공이 살아남을 기뻐하고 공이 귀양 감을 슬퍼하였다.
이때에 아동(兒童)과 주졸(走卒)들도 모두 공의 이름을 전송(傳誦)하였고, 부녀자들도 공의 상소문을 번역하여 집집마다 전하며 읽기까지 하였다. 공이 해남(海南)에 도착하였을 때 호남의 유생 송흥주(宋興周) 등이 소를 올려 임금에 대한 공의 충성과 사랑을 극언하였고, 정언(正言) 오장(吳長), 이언영(李彦英), 강대수(姜大遂)도 공의 일을 언급하다가 찬축(竄逐)되거나 파출(罷黜)되었다.
공이 대정(大靜)의 가시울타리 속에서 귀양살이한 것이 10년이었으나 천명(天命)으로 여기며 편안히 지냈고, 오직 백운사(白雲詞)를 지어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을 부쳤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금상(今上)이 반정(反正)한 다음 혼조(昏朝) 때 도리를 곧게 펴다가 쫓겨난 사람을 발탁하였는데, 공이 그 첫 번째에 해당하였다.
처음 헌납(獻納)으로 부름을 받았고, 제주를 떠난 뒤 며칠 되지 않아 사간(司諫)으로 승진하니, 왕명을 받든 관리가 도로에 계속 이어졌다. 이로부터 해마다 제수되고 해마다 옮겨 가서 비옥(緋玉)을 입고 금대(金帶)를 차는 반열에 이르렀다. 사간원에서 헌납과 사간이 된 것이 각각 한 번, 대사간이 된 것이 일곱 번이었고, 사헌부에서 대사헌이 된 것이 네 번이었다.
네 번 부제학이 되었고, 세 번 도승지가 되었고, 이조(吏曹)에서 참의와 참판이 된 것이 각각 세 번이었다. 그 외에 예조, 병조, 형조의 참판과 한성 좌윤(漢城左尹),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냈으니, 혹은 특은(特恩)으로, 혹은 봉양을 위해, 혹은 호종한 공로로 제수된 것이다. 그러나 공은 대부인(大夫人)이 매우 연로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한 관직에 몇 달씩 머물지는 않았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에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이 반역하여 상이 남쪽으로 거둥하니, 공이 이조 참의로서 호종하였다.
정묘년(1627) 1월에 오랑캐가 북쪽 변방을 침범하자, 상은 강도(江都)로 거둥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는 호남으로 내려갔다.
공이 당시 고향에 있다가 변란 소식을 듣고 그날로 달려가 문안하기 위해 길에 올랐다. 길에서 조사(朝士)를 만나면 “오랑캐의 기마가 횡행하므로 비록 가더라도 필시 행재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였고, 공의 맏아들도 분조로 달려가기를 고청(固請)하니, 공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사세를 관망하여 편리함을 취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당시 사방에 흩어져 있던 사대부들은 모두 편리한 길로 전주(全州)로 달려갔고, 곧바로 강도로 달려간 것은 공 한 사람뿐이었으니, 온 조정이 찬탄하기를 초(楚)나라 사람이 섭공(葉公)을 볼 때와 같이하였고, 민심도 이로 인해 견고해졌다. 이에 공이 소를 올려 먼저 화의(和議)의 그릇됨과 강홍립(姜弘立)의 죄를 말하고, 끝으로 적(敵)과 우리나라의 형세를 논하니, 사실에 근거하여 옳음을 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이 평소에 공의 곧은 절개를 중하게 여겨 공을 예우함이 군신(群臣) 중에 각별하였고, 조정의 사류(士類) 또한 모두 공을 흠모하여 신뢰하였다. 간혹 몹시 시기하는 자도 없지 않았으나 공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예전의 절조(節操)를 더욱 가다듬어 매섭고 강직하게 하였다.
어렵고 쉬운 일을 막론하고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간쟁하였고, 남들이 꺼리는 바를 용감하게 맞이하여 피하지 않았다. 사간으로 있을 때에 광해군의 폐세자가 땅을 파고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공이 삼사(三司)의 안율(按律)하려는 논의를 연달아 막았고,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인성군(仁城君)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되었는데, 합사(合司)가 죄를 청했으나 공이 힘껏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다.
부제학 홍서봉(洪瑞鳳)과 성상 앞에서 쟁론할 때에 홍봉서가 공을 비난했으나 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불가함을 주장하니, 상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사간의 말이 옳다.” 하였다. 공이 처음 도승지에 제수된 때는 병인년(1626)으로, 상이 막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였다.
공이 소를 올려 “고례(古禮)를 어기고 사친(私親)을 위하여 삼년상을 단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경오년(1630) 봄에 태묘의 소나무에 벼락이 쳤다. 공이 구언(求言) 중의 ‘형옥(刑獄)이 알맞지 않은 것’이라는 항목으로 인해 수백 글자를 반복하여 공족(公族) 중에 연좌되어 귀양 간 노약자를 용서하기를 청하니, 양사(兩司)에서 역적을 비호한다고 탄핵하여 여러 날을 논죄했으나 단지 체직만 되었다.
계유년(1633)에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가 있었는데, 공이 대사헌으로서 논죄하여 무고한 자는 연좌되고 체포된 자는 석방되었다. 또 ‘대군(大君)이 궁핍할 때에 궁가(宮家)를 건립하느라 백성을 수고롭게 한다’고 논하니, 상이 즉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동지경연(同知經筵)에 제수되었을 때, 소를 올려 부친의 묘소를 수리하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역마를 내려 주었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제물을 갖추어 예제(禮制)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해 가을에 대명전(大明殿)에 벼락이 쳤다. 공이 고향에 있으면서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인주(人主)의 대본(大本)에 대해 극언했는데, 그 뜻은 오로지 임금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약석(藥石) 같은 말은 큰 띠에 새겨 잊지 않겠노라.”는 비답이 있었다.
이듬해에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사은(謝恩)하기 전에 승지로 이배(移拜)되었다. 이는 당시에 전례(典禮)가 거의 결정되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이 언관을 담당하게 되면 반드시 이 문제를 쟁론할 것이라 염려했기 때문이다. 승정원에 들어가서 즉시 소를 올렸는데, 경사(經史)에서 증거를 갖추어 말한 것은 모두 예법을 논한 제유(諸儒)들도 일찍이 말하지 않은 것이어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을해년(1635) 여름, 목릉(穆陵)과 유릉(裕陵)에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는 재해가 있었다. 상이 대신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했으나 아뢴 내용이 중론(衆論)과 다르자, 공이 봉사(封事)를 올려 바르게 말하여 피하지 않았다. 또 예관이 두 능(陵)이 재앙을 당한 날에 부묘(祔廟)의 예(禮)를 거론하는 것은 그 죄가 윗사람을 기망(欺罔)하는 것이라고 탄핵하자, 듣는 사람들이 몹시 경탄하였다.
가을에 또 번개가 치고 폭풍이 부는 변고가 있자 공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폭풍이 사직과 종묘의 나무를 뽑아 버리니, 이 무슨 하늘의 경계란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몸을 반성하고 깊이 두려워하여 견책당한 대신을 소환하고 간언한 신하를 모두 석방하신다면 거의 하늘의 경계에 성실하게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바깥 사람들의 떠들썩한 말에 의하면, ‘금원(禁苑)에 못을 파는 것은 배를 띄워 크게 즐기려는 조짐으로, 자못 성상의 마음을 미혹시킬 것이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와 같다면 큰 바람은 재앙이라 할 것도 없을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경계하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서경》 홍범(洪範)에 ‘서민(庶民)은 오직 별이니, 별은 바람을 좋아하는 것이 있고, 비를 좋아하는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서민이 제자리를 잃은 것이 오늘날 매우 심하니, 큰 바람과 미친 듯이 퍼붓는 비는 아마도 그 유(類)에 따라 반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해를 당한 지역의 금년 세금을 견감하는 은혜를 내리시어 넉넉히 구휼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여 매우 간절하게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온유(溫諭)하기를, “경처럼 충직한 사람이 어찌 조정을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 정경세(鄭經世)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현광(張顯光)은 매우 늙었으니, 경이 어찌 또 떠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묻기를, “경은 일찍이 이와 같이 참혹한 풍재(風災)를 본 적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미처 보지는 못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묘년(1591, 선조24)의 풍재가 있고서 임진년(1592)의 변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겨울에 부제학으로서 시강(侍講)하였다.
공이 진언하기를, “옛사람이 시를 해석함에 있어 굳이 장구(章句)를 인용하지 않고 뜻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였다. 《시경》 유녀동거장(有女同車章)을 강론할 때에 말하기를, “유녀동거는 남녀가 서로 즐거워하는 지극한 정입니다.
옛말에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 하였으니,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면 어진 이를 좋아함이 진실될 것입니다.” 하였고, 탁혜장(籜兮章)에 이르러서는 “나무가 말라 떨어지려 할 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떨어짐이 쉬울 것이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 또 좋지 못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어찌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다른 장에서도 모두 비유를 끌어 와서 깊이 잠간(箴諫)의 뜻을 갖추니, 상이 재삼 좋다고 칭찬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공이 또 진언하기를, “시사(時事)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일이 만약 급하게 되면 지존께서는 어느 곳으로 피하겠습니까. 오직 사직과 함께 죽으려는 마음을 가진 연후에야 나라가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2월에 청(淸)나라 사신이 노하여 돌아가니, 조야(朝野)의 인심이 바야흐로 흉흉하였다.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조목별로 논한 것이 모두 세 가지였다.
첫째는, “‘쇠란(衰亂)한 국운을 흥기시키고 난리를 다스리는 군주는 영무(英武)한 이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이강(李綱)의 말
입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소선(素膳)을 행하시어 한갓 아녀자의 일을 본받고 계시니, 쇠란한 국운을 흥기시키고 난리를 다스리는 영
무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仁祖)의 비(妃)가 승하하여 산릉(山陵)이 겨우 끝났으므로 공이 깊이 성체(聖體)를 염려했기 때문에 그
렇게 말한 것이다.
둘째는, “절개를 굳게 지키고 의리를 위해 죽는 선비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며 직간(直諫)하는 사람 중에서 구해야 함은 불변의 정론(正論)
입니다. 전례(典禮)할 때에 그 일에 관해 언급한 신하들이 어찌 성상의 뜻을 거스르며 직간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무리들
은 급히 감별하여 서용(敍用)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셋째는, “아문(衙門)의 군관(軍官)을 기르는 것과 포수(炮手)와 살수(鎩手)를 훈련시키는 일은 정히 급할 때의 소용이 될 것이고, 정예병
을 뽑아 적을 대적하는 일은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의주(義州)에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를 설치한다면 또한 군대의 사기를 장
대하게 하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모두 합당했으나 당시의 여론이 오활(迂闊)하다고 여겨 채용하지 않았다.
이해 12월에 적(敵)이 조약을 어기고 쳐들어오니, 며칠 만에 황봉(黃鳳)이 뚫리고 송경(松京)이 무너졌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대가(大駕)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공은 이조 참판으로 호종하였다. 산성이 포위된 가운데 차자를 올린 것이 네 번이었다.
차자의 대요(大要)는 ‘군신과 부자가 죽을 각오로 결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니, 굽히지 않는 주장을 견지하여 조정의 의논을 크게 거슬렀다. 24일에 공은 적이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를 내어 주기를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먼저 보내 달라고 청했다.
이날 밤중에 난병(亂兵)이 칼날을 드러내고 행전(行殿) 밖에 이르러 척화를 주장한 신하를 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묘당에서는 10명의 성명을 열서(列書)하여 그들을 묶어서 적의 진영으로 보내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상에게 말하기를, “척화를 주장한 여러 신하는 모두 당대에 백성의 신망을 받는 사람입니다. 후세의 평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께서 척연(惕然)하여 즉시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정축년(1637) 1월 27일에 당사자(當事者)가 국서를 갖고 적의 진영에 들어갔으나 국서의 내용이 비밀에 부쳐져 세간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공이 통분하며 말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가 감히 죽음을 아끼겠는가.” 하고, 새벽에 일어나 통곡한 다음 이불과 베개를 정돈하고 누운 채 패도(佩刀)를 뽑아 자신의 배를 찔렀다.
시자(侍者)가 이불을 걷어 보니, 칼이 뱃속 깊이 박혀 있었다. 놀라 부르짖으며 칼을 뽑아내자 선혈이 거꾸로 솟았고, 숨을 헐떡이다 숨이 끊어진 지 한참 후, 평소에 알던 대신들이 모두 달려와서 구원하였다. 상이 소식을 듣고 측은히 여겨 내의(內醫)를 보내 구제함으로써 거의 죽었다가 회생하였고, 또 하교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하여금 있는 힘껏 의약(醫藥)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때 공의 상처를 살펴본 어의가 말하기를, “뒷날 혈옹(血癰)을 이루어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더니, 공이 세상을 떠날 때 과연 그러하였다. 공이 병 때문에 수가(隨駕)하지 못하자, 차자를 올려 작별하였다. 차자의 내용은 한결같이 의리에서 나온 것이고, 이해(利害)를 섞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보류되었다.
2월에 공이 편여(箯輿)에 누워 남쪽으로 돌아왔으나 집에 거처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남한산성에서 죽어 국은(國恩)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스스로 처자의 봉양을 편안히 받겠는가.”하고, 드디어 덕유산(德裕山) 남쪽 기슭 모리(某里) 골짜기로 들어가 띳집을 짓고 기장 밭을 일구며 세월을 보냈다. 신사년(1641, 인조 19) 6월 21일 기축(己丑)에 졸(卒)하여 모년 모월 모일에 모산(某山)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 공은 백척(百尺)의 대나무처럼 정정한 곧음이 있고, 추상백일(秋霜白日)처럼 만고에 항상 깨끗한 절개가 있었다. 앞의 계축년(1613, 광해군5)에는 간신(奸臣)들이 난동을 부려 권력을 훔치고 법망(法網)을 휘둘러 공을 보궁(保宮)에서 곤액(困阨)을 당하게 하였다.
죄수복을 입히고 형틀을 씌운 것이 반 년 가까이나 되었고, 마침내 풍어(風魚)와 장독(瘴毒)이 가득한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니, 죽을 길은 아홉이고 살길은 겨우 하나뿐이었지만 공의 곧음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뒤의 병자년(1636, 인조 14)에는 철갑을 두른 기마병 수십만이 고립된 성 아래로 육박해 왔으나 팔도의 근왕병(勤王兵)은 혹은 패하고 혹은 달아나서 밖으로 개미 한 마리의 원군(援軍)도 없으니,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두렵고 겁이 나서 모두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공의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 곧음과 이 절개는 양성한 뿌리가 있고 흘러나오는 근원이 있었으니, 공자가 이른바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는 뜻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말한 ‘부귀로도 음란하게 할 수 없고 위무(威武)로도 꺾을 수 없는 대장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개 직신(直臣)으로 공을 개괄(槪括)하고 일개 절사(節士)로만 공을 드러낸다면 이는 천장부(賤丈夫)의 식견이 아니겠는가.
공의 학문은 가정에서 감화를 받은 것이 얕지 않았지만 약관의 나이에 조월천(趙月川 조목(趙穆))과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두루 노닐면서 퇴도(退陶 이황(李滉)이 선생(李先生)의 서업(緖業)을 듣고는 기뻐하여 사숙(私淑)한 것이 또한 많았다. 그러나 독실하게 실천한 공부는 모두 자득(自得)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평생토록 ‘직방대(直方大)’ 삼자(三字)를 일신(一身)의 부절(符節)로 삼았다. 본원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것은 《심경(心經)》에 근본한 것이고, 의리에 젖어든 것은 송나라 제유(諸儒)의 글에 근본한 것이고, 《성리대전(性理大全)》으로 말하면 가장 일찍이 힘을 쏟은 것이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 때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일 외에는 털끝만큼의 생각도 밖으로 내달림이 없었고,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있을 뿐 종일토록 삐뚤게 서거나 기대어 앉지 않았다. 일찍이 선배들의 인품이 같지 않음을 논하기를, “사람의 성품은 두 가지가 있으니, 강(剛)과 유(柔)일 뿐이다.
강은 양(陽)에 속하고 유는 음(陰)에 속하니, 강유(剛柔)의 바름을 얻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강(剛)에 치우치는 잘못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易)에서 양강(陽剛)한 군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자는 응당 ‘마음씀은 세밀하게 하되 담력은 크게 가지도록 하는 것’으로 일신(一身)의 입각(立脚)하는 터전을 삼아야 한다.
속수씨(涑水氏)가 ‘평생에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는 것은 담력이 컸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뒷날 수용(受用)한 것은 대부분 이 한 절조(節操)였다 할 것이다. 공의 사람됨은 광명준위(光明俊偉)하고 표리가 한결같았다.
남과 함께할 때에는 신실(信實)하고 화락(和樂)하여 규각(圭角)을 드러내거나 경계(境界)를 짓거나 모나게 과격한 일을 하지 않아 온통 ‘요순(堯舜)도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조정에 서서 시비를 다툴 때에는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여 태산교악(泰山喬嶽)처럼 우뚝하였으니, 비록 스스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고 여기는 자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또 평소에 항상 하는 말은 오직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에 관한 것일 뿐이고, 심오한 이치와 은미한 말은 가볍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공이 독실한 진유(眞儒)임을 알지 못했다. 원조자경잠(元朝自警箴), 구중설(求中說), 덕변록(德辨錄) 같은 글은 곧 공이 중년 이후에 저술한 것이니, 여기에서 공의 일신(日新)한 덕과 견도(見道)의 명확함을 볼 수 있다.
제주도에 있는 10년 동안은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글을 끊임없이 읽어 밤을 지새기까지 하였다. 《주역》은 날마다 한 괘(卦)를 외웠고, 문장은 맹자와 한유(韓愈)의 글을 가장 좋아하더니, 만년에는 구양수(歐陽脩)를 좋아하였다. 무릇 문장을 지을 때에는 구상하지 않는 듯하나 잠시 사이에 수천 글자를 이루어 내매 이치가 넉넉하고 말이 통달하니, 문장을 잘라 와서 글을 엮어 내는 자로서는 감히 그 깊이를 엿볼 수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었다. 나이 10세에 참판공을 여막에서 모시면서 집전(執奠)하고 배헌(拜獻)하기를 한결같이 어른처럼 하였고, 또 대상(大祥)을 마치도록 육미(肉味)를 끊은 것도 한결같이 참판공처럼 하였다. 모부인이 고기를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참판공은 제사 지낼 때에 비록 혹독한 추위라도 반드시 목욕하여 정결히 하였다.
공은 아이로서 감히 어른의 욕탕(浴湯)을 함께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찬 우물에서 목욕하였는데, 결국 이로 인해 배 아래에 덩어리가 맺히는 병이 생겨서 평생의 근심이 되었으나 또한 부모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다. 모부인이 평소에 설사를 앓은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 공은 반드시 설사를 맛보아서 심할지 멈출지를 점쳤다.
돌아가시던 해에 또 설사가 있자, 공이 맛본 뒤 울며 말하기를, “맛이 예전과 다르구나.” 하더니,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공의 나이가 62세였으나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면서 맛있는 채소도 입에 대지 않았고, 최질(衰絰)을 잠시도 푼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의 배묘(拜墓)도 풍우(風雨)와 한서(寒暑) 때문에 그만두지 않았으나, 상기가 끝나도록 또한 몸이 훼상(毁傷)됨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 사람은 비록 신명이 부지(扶持)한 바이지만 타고난 강한 기운도 참으로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하였다.
백형을 공손히 섬기고 동생을 우애로 보살폈다. 형제와 함께 밥상을 나란히 하여 음식을 먹지 않은 날이 없었고, 창안백발(蒼顔白髮)로 날마다 마주 대하였는데, 즐겁고 화락한 기색은 손으로 움켜쥘 듯이 분명하였다. 대개 공의 도는 효성이 극진했기 때문에 충성으로 옮겨 갔고, 충성이 극진했기 때문에 절의가 이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절의는 곧 변란을 만났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다.
선생이 인묘(仁廟)에게 지우(知遇)를 받은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 할 만하지만 누가 이를 저지했기에 그 도가 끝내 세상에 크게 시행되지 못하고 끝내 위난(危難)을 만나 단지 의열(義烈)로만 세상에 이름이 났던가. 아,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금상(今上) 3년 임진년(1652, 효종 3)에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에 추증되었고, 정유년(1657, 효종 8)에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부인 윤씨는 파평의 저명한 성씨로, 충의위(忠義衛) 모(某)의 따님이다. 성품이 곧고 굳세며 맑고 밝았다. 비복을 부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모두 법도가 있었다. 공이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에는 집이 축나거나 살림이 줄어들지 않았고, 세 아들이 때에 맞게 제주도로 왕래하게 했으니, 그 현명함을 알 수 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공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거창의 치소(治所) 북쪽 주곡(主谷)에 안장했다. 선생과 묘혈(墓穴)을 함께 했다가 신묘년(1651, 효종 2)에 묘소를 옮겨 합장했으니, 곧 거창 용산(龍山)의 선비(先妣) 묘소 앞 오향(午向)의 언덕이다.
아들이 셋이다. 장남 창시(昌詩)는 벼슬이 공조 정랑이고, 네 번 현감으로 나가서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다. 창훈(昌訓)과 창모(昌謨)는 모두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연이어 일찍 죽었다. 측실의 아들 창근(昌謹)은 사과(司果)이다. 정랑은 충의위(忠義衛) 이희옹(李希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기수(岐壽)는 지금 성현 찰방(省峴察訪)이고, 딸은 최서옹(崔瑞翁)에게 시집갔다. 창훈의 전취(前娶)는 류영정(柳永貞)의 따님으로, 1녀 2남을 낳았다. 딸은 이휘(李𧃸)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기헌(岐憲)과 기장(岐章)이다. 후취(後娶)는 신전(愼諯)의 따님으로, 1남을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창모는 대군사부(大君師傅) 박공구(朴羾衢)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기윤(岐胤)이고, 큰딸은 조하현(曺夏賢)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고, 둘째 딸은 윤형귀(尹亨龜)에게 시집갔다. 창근은 도사(都事) 이서(李𥳕)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들어 4녀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찰방은 목사(牧使) 나위소(羅緯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녀 1남을 낳았다. 큰딸은 강휘만(姜徽萬)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기윤은 장령(掌令) 허목(許穆)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불녕(不佞)한 나는 선생보다 17세가 젊기 때문에 어른의 항렬로 선생을 보았으나 선생은 선배나 후배라는 이유로 다르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출입하며 자리에 가까이한 지가 10여 년이 되므로 선생의 덕을 보고 마음으로 도취된 것이 진실로 적지 않지만, 진퇴에 용감하고 대절(大節)을 수립한 것으로 말하면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만 볼 뿐이니, 어찌 감히 선생을 안다고 하겠는가. 예전에 불녕이 모리(某里)로 선생을 방문하였는데, 띠로 엮은 오두막에서 와기(瓦器)에 거친 밥을 먹고 계셨다.
선생에게 “참으로 괴롭겠습니다.”라고 여쭈었더니, 빙그레 한 번 웃으실 뿐이었다. 불녕이 어찌 감히 선생을 안다고 하겠는가. 마침내 명(銘)을 짓는다.
중주의 청숙한 기운 동방으로 울창히 뻗어 / 中州淸淑迤東蔚
덕유산과 용문산에 넓고 깊게 응결되었으니 / 德裕龍門瀜而結
땅의 신령함과 짝하여 위인을 탄생시켰다네 / 鍾生偉人地靈匹
혼조에 벼슬하며 깨끗한 지절을 유지했으니 / 往當幽國作玉雪
혹독한 모함을 당해도 자신의 도리를 지켰고 / 吉網如荼不含噦
대정현에 귀양 가서도 한 몸을 깨끗이 하였네 / 載遷之靜醨羞啜
교룡과 뱀이 득실대도 삼분 오전을 보았으니 / 蛟蛇與對典墳閱
고초를 통해 얻은 지혜 그 누가 업신여길까 / 疢相德慧光誰衊
성군이 인륜을 회복하자 귀양에서 풀려났네 / 聖奮斁倫公脫絏
대각에서 직간한 말은 계피처럼 매서웠나니 / 騫于臺閣桂愈辣
복의가 한 번 일어나 뭇 주장이 시끄러웠으나 / 濮議一起衆喙吃
예법에 근거한 완숙한 주장 너무도 우뚝했네 / 據禮酋酋龍喉屹
직무를 행하면서 어찌 혀를 부드럽게 하리오 / 當官而行安柔舌
무슨 일이든 쟁론함은 급암조차도 무색했고 / 靡事不爭汲猶劣
결점을 모두 보충함은 보에 겨룰 만했네 / 靡闕不補甫可埒
짝할 이 없이 꼿꼿하여 강철 같은 마음인지라 / 介然無徒肝鑄銕
임금만이 귀를 기울여 목마른 듯이 자문하니 / 天獨下耳咨如渴
공께서 계책한 바는 본래 직설과 같았다네 / 其所規畫本稷卨
병자년 봄까지도 호란의 방어책을 올렸나니 / 于丙子春亦獻說
계책이 명백하여 위난을 막을 수 있었건만 / 顜筴指掌可輓臲
누가 선비들은 대비책에 오활하다고 했던가 / 孰謂儒迂桑土撤
구멍 뚫린 하늘이라 막기 어려움 어찌하리 / 奈何乎天隙難窒
말고삐를 잡고 호종했으나 군사가 고립되니 / 覊靮以從戈之孑
한번 싸움도 못하고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네 / 宵攻不試鯨噴渤
산성 가득한 울부짖음 정강지변의 답습이라 / 滿城嗷嗷靖康轍
임금의 치욕에 신하가 죽음은 옛날의 의열이니 / 主辱臣死古爲烈
내 칼을 내가 갈아 배를 찔러 한 번 자결했네 / 吾刃吾礪腹一抉
끊어졌다 다시 소생하매 붉은 피가 솟아나니 / 絶而復甦丹迸血
성상이 충정을 알고서 어의와 약을 보내왔고 / 上憫其忠藥醫挈
열성조에서 배양한 의기를 그 누가 더럽힐까 / 列聖培養氣孰涅
허나 공이 간직한 것이 어찌 한 절개뿐이랴 / 然公抱負奚一節
낙강의 제 선생에게 배워 깊이가 끝이 없으니 / 澡身洛派汲毋竭
경이직내 의이방외로 평생의 지결을 삼았네 / 直內方外百年訣
서원에서 제향을 올리며 위패를 모시게 되니 / 序庠芬苾柏板揭
천추만대 후학들이 태산북두로 우러를 것이라 / 千秋蛾子仰嵽嵲
내가 명을 지어 전현과 같은 분임을 보이노라 / 我銘示後媲前哲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경(趙絅)은 삼가 짓다.
<끝>
[註解]
[주01] 이로 …… 자호(自號)하였다 :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역양고동(嶧陽孤桐)’의 뜻을 취하여 자호하였다는 말이다.
역양(嶧陽)은 역산(嶧山)의 남쪽이고, 고동(孤桐)은 우뚝 자라는 오동나무이다.
[주02] 후사세(后四世) : 〈동계선생팔계정씨세계도(桐溪先生八溪鄭氏世系圖)〉에 의하면, 동계 선생의 세계는 전세(前世)와 후세(后
世)로 나뉘어져 있다. 전세계(前世系)는 배걸(倍傑)로부터 시작하여 전삼세(前三世)에서 끝나고, 후세계(後世系)는 후일세(后一
世) 승(丞)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桐溪先生年譜》
[주03] 예(羿) : 중국 상고 시대 유궁국(有窮國)의 임금으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다.
[주04] 비옥(緋玉)을 …… 반열 : 비옥은 비단옷과 옥관자(玉貫子)로, 당상관(堂上官)의 관복을 말하고, 금대(金帶)는 2품 이상의 관복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주05] 초(楚)나라 …… 때 : 섭공(葉公)은 초나라 섭현(葉縣)의 현령(縣令)을 말한다. 이와 관련된 고사는 자세하지 않다.
[주06] 이강(李綱) : 송나라 소무(邵武) 사람으로 금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주전(主戰)을 주장하다가 귀양 갔고, 고종(高宗)이 남도(南渡)
한 뒤 재상으로 기용하자 국력을 회복하는 데 힘을 다했다. 《宋史 卷358 李綱列傳》
[주07] 직방대(直方大) :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는 말이다.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에 “육이는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 익히
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六二 直方大 不習 无不利]” 하였다.
[주08] 속수씨(涑水氏) : 송나라 때의 학자이며 명상(名相)인 사마광(司馬光)을 말한다. 사마광이 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 속수(涑
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마광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없거니와 다만 평소 행한 바가 일찍이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司馬溫公 嘗言吾無過人者 但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 하였다. 《心經附註 卷1》
[주09] 요순(堯舜)도 …… 똑같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저자가 말하기를 ‘왕이 사람을 시켜 부자를 엿보게 하시니, 과연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리오? 요순도 다른 사람과 똑같다.’ 하였다.[儲子曰 使
人瞯夫子 果有以異於人乎 孟子曰 何以異於人哉 堯舜 與人同耳]” 하였다.
[주10] 삼분 오전(三墳五典) : 옛 전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삼분은 삼황(三皇)의 글이고, 오전은 오제(五帝)의 글을 말한다.
[주11] 복의(濮議) : 인조의 생부모에게 시호를 추존하여 종묘에 배향하려는 의논을 말한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복안의왕(濮安懿王) 윤양(允讓)의 아들 월서(越曙)로 뒤를 잇게 하였는데, 그가 영종(英宗)이다. 영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조
칙을 내려 생부(生父) 복안의왕의 숭봉(崇封) 문제를 의논하도록 하면서 발생했던 논의를 복의라 한다.
[주12] 급암(汲黯)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직간(直諫)을 잘하던 신하로, 성정이 매우 엄격하여 무제가 옛날의 사직(社稷)의 신하에
가깝다고 하였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주13] 보(甫) : 당(唐)나라 숙종(肅宗) 때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한 두보(杜甫)를 지칭하는 듯하다. 습유(拾遺)는 임금의 궐실(闕失)을
보완하여 보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14] 직설(稷契) : 순(舜) 임금의 어진 신하인 후직(后稷)과 설(契)을 말한다. 순 임금을 잘 보필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하였다.
[주15] 정강지변(靖康之變) : 정강은 북송 흠종(北宋欽宗)의 연호이다. 정강 2년에 금(金)나라 군사가 남하(南下)하여 송도(宋都)인 변
경(汴京)을 함락하고 휘종(徽宗)과 흠종을 인질로 잡아간 변란을 말한다.
[주16] 낙강(洛江)의 …… 배워 : 조월천(趙月川)과 정한강(鄭寒岡)의 문하에 두루 노닐어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의 서업(緖業)을
듣고 사숙(私淑)한 것을 말한다.
[주-D017]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 :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 육이(六二)〉에 이르기를, “군자가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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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神道碑銘 - 趙絅
桐溪鄭公旣卒之葬而喪之卒。若而年。嗣子前縣監昌詩。自安陰西走六百里至洪陽海上。手家狀一卷。授漢陽趙絅。泣而言曰。先人之墓木拱矣。不肖蚤夜以思。斤斤自祗。力治牲繫石。敢以不朽。屬執事。惟執事賜之銘。絅禮辭曰。惡。不佞惡敢當。子之先君子于癸丑抗疏。于丁丑蹈烈。赫赫照人耳目。況修齊之學樹惇。而文者爲之本哉。將太史氏書諸筴不一。書序庠塾俎豆之矣。傖父語惡敢慁其間。子其愼哉。昌詩又作而泣曰。不肖之爲先人道。惟在於是。世且知吾先人之深。疇出執事外而文之。於是愴然不敢復辭。遂盥而按狀。公諱蘊。字輝遠。姓鄭氏。其家卽安陰之嶧陽里。仍自號桐溪。其先系出草溪。自高麗侍中倍傑顯。倍傑之后。四世至習仁。官左散騎常侍。以方正名。李文靖穡爲之傳。是生悛。文學爲一時最。世稱八溪先生者。官卒寶文閣提學。提學生齊安。生員。生員生從雅。牧使。牧使生玉堅。別提。贈司憲府執義。執義生贈承政院左承旨諱淑。承旨生贈吏曹參判諱惟明。進士。公之考也。以公貴。推恩三代。參判師事林葛川薰。盡其學。同進門人。皆出其下。今上朝以孝行旌其閭。聘將仕郞晉州姜謹友之女。兄翼優於儒行。夫人有乃兄風。隆慶己巳。生公于嶧陽里第。公生而頭角嶄然。異凡兒。嘗騎竹戲嬉曰。小谷生大人。里中父老咸奇之。始公入學也。口訥倍文。後同隊。然伏習忍苦。有人十己千之志。故卒輒變爲敏。文理驟進。未冠輒成大材。聲稱藉甚。葛川素有水鑑。一見公。輒期以致遠。公雖少。器宇峻整。制行方嚴。寡言自可。惟讀書是勤。從遊之士。皆敬畏之矣。十九鄕解高等。參判公屬夫人曰。此兒必大顯。子享其榮。恨吾不及見。丙申參判公疾革。公雀立露禱。絶而復蘇者累。時倭寇蜂屯南徼。公奉母夫人避之嶺湖間。流離顚沛之謂何。而猶絰而行。行乞於道。時母夫人食飮節無匱。萬曆乙巳。嶺南請五賢從祀封疏。多士推公入京。宣廟嘉之。爲設庭試。公居第二名。京師人口相傳其文藉藉。丙午。成進士。庚戌。登別試第三人。明年。自成均館拜春坊說書。俄陞司書。旋除司諫院正言。是年。昌德宮成。光海居未幾。惑妖淫瞽史說。便欲還貞陵宮。公獨啓爭之強。光海震怒。卽令補鏡城判官。公之去京也。一松沈相。送而執手曰。公得言矣。國將如何。公之任。事主將。臨吏民。各以其道。是歲。北路侵鏡。尤菜色。賴公荒政。獲蘇醒。至甲寅對吏。鏡人走人起居曰。於我有德。壬子。光海策戊申上疏人功。公與焉。以掌樂僉正徵還。公辭以無功甚力。李爾瞻等慍曰。鄭某之辭此勳。爲國之不久耶。於是公知無奈何。悶默而退。癸丑夏。無賴賊徐羊甲等被執。遂誣引延興府院君金悌男。謀擁立永昌大君。於是甘心慈殿者煽而媒孼。公卿大臣頗知其誣。而噤不敢吐一言。公一日。見爾瞻責之曰。八歲童子安知逆謀。聞慈殿廢尙食。拊大君曰。汝死吾亦死。如有不諱。誰當其咎。爾瞻勃然厲聲曰。藉幷大妃而廢之。誰曰不可。公卽望望而去。爾瞻嗛之次骨。五月。公被劾還鄕。家與鄭仁弘居。近且有舊。抵書極言請罪八歲童子。擧朝忍人也。且望仁弘出手救。仁弘不能用。冬。除侍講院弼善。與時議大不適。謁告遞。當道者至目以逆黨。甲寅二月。大君死於圍籬中。江都留守鄭沆。蓋附朝議。殺之也。公以副司直。上封事凡千有百言。其略曰。殿下遭人倫之變。欲盡處變之道。終未免假手於麤悍武夫。其爲聖德累不旣大乎。殺凡人無辜。猶且罔赦。況殺吾君同氣之親乎。臣以爲不斬鄭沆。殿下無面目立於先王廟庭也。大妃雖不慈於殿下。殿下安得不盡孝於大妃。願自今斥絶讒邪交搆之路。殿下亦宜恭爲子職。無廢問安視膳之禮。務得大妃歡心。猶足以掩前失而明新化矣。頃者臺官鄭造,尹認,丁好寬等。首發廢妃殺弟之議。爲人臣子而是可忍耶。殿下如欲存母子之恩。亟取三人者。投諸四裔。不與同中國。然後讒說者不得作。而三綱五常。昭揭於宇宙矣。疏入光海大憑震電。切責政院。勘罷捧疏承旨。於是三司竝論以削奪。絶島安置。光海猶怒其罰輕。誚責三司峻。於是直請拿鞫。公就獄。禁府例請議諸大臣斷讞。右議政鄭昌衍,原任李元翼獻議曰。鄭某誠狂妄。不知忌諱。夫豈有無君不道心。願從寬典。沈相喜壽之議。亦然。光海答李完平曰。鄭某之疏。字字陰兇。非無君不道而何。是時。三司館學鵲起。以無將法不兵逆等語將疏相銜。舁之彀中。不足喩其危也。六月。光海親鞫招訖。下獄。秋。再招。仍命安置大靜。公在圄者凡五閱月。初就獄時。有一老嫗當路祝曰。天乎天乎。願使賢人毋死於獄。獄卒亦相誡加敬。鄭沆亦送人言曰。沆服公義。招絶不及公。丁好寬見公疏。亦曰。吾不免千古罪人。遂日飮病死。及先生出獄。都人聚觀。街巷成群。車爲枳。咸咨齎涕洟。喜公生而悲公謫也。當是時。兒童走卒。無不誦公名。婦孺至繙公疏。家傳誦之。公到海南。湖南儒生宋興周等上疏極言公忠愛。正言吳長,李彥英,姜大遂。亦坐言公事。或竄或黜。公居大靜栫棘中。不見天日者十年。安之若命。唯作白雲詞。以寓思親意。癸亥。今上反正。拔擢昏朝時直道見逐者。則公其首也。始以獻納徵。離濟未數日。陞司諫。將命之吏相望於途。自是年除歲。遷以至衣緋帶金。於諫院。爲獻納,司諫者一。大司諫者七。於憲府。爲大司憲者四。四爲副提學。三爲都承旨。吏曹則參議而參判者三。其他禮兵刑三曹參判,漢城左尹慶尙監司南原府使。或以特恩。或以便養。或用扈從勞也。然公以大夫人甚老故。未嘗居一職數月淹。天啓甲子。平安兵使适反。上南幸。公以吏曹參議從。丁卯正月。西聳。上幸江都。昭顯世子分朝下湖南。公方家居。聞變。卽日發奔問行。遇朝士於途。言虜騎方橫。雖行必不達行在。公胤子。亦固請赴分朝。公叱曰。觀望就便。非臣子義。時大夫士在散者。率皆便道趨全。直赴江都。惟公一人。擧朝贊歎。若楚人之見葉公。人心亦以坐牢。於是公上疏。首言和議之非及弘立之辜。末論敵與我國形勢。無非實事求是。上雅重公以直節。禮待公異於群臣。朝之士流。亦皆靡然慕用公矣。間有堅忮者則不能無也。而公則夷然不屑也。益厲舊操。棘棘亢亢。事無難易。遇則必爭。人所憚爲。勇往不避。其爲司諫也。光海世子跳出事起。公連柱三司按律論。爲大司諫也。仁城君出逆招。合司請罪。公力主全恩。與副提學洪瑞鳳爭論於上前。瑞鳳語侵公。公凝然不顧。愈執不阿。上頷之曰。大司諫之言是也。公始拜都承旨也。其年爲丙寅。上方遭仁獻王后喪。公上疏言。違古禮。爲私親。斷行三年喪。不宜。上嘉納之。庚午春。太廟松震。公因求言中。刑獄失中者。反復累百言。請宥公族之坐遷者老弱。兩司劾以庇逆。論累日。只遞職。癸酉。有誣告獄。公以大司憲論之。誣者坐。逮者釋。又論大君於時詘。營室勞民。上卽命停。拜同知經筵也。上疏乞修父墳。上特給傳。且令本道備物禮登。是年秋。大明殿震。公在鄕應旨。極言人主大本上。意竱先格君心也。有藥石書紳之批。明年。又拜憲長。未及謝。移知申。蓋時典禮垂定。朝廷慮公當言責。則必爭故爾。入政院。卽疏備證經史。皆議禮諸儒所未嘗言者。物論韙之。乙亥夏。穆,裕兩陵。有雷雨災。上遣大臣奉審。所奏與衆議之異。公上封事。質言不避。又劾禮官。擧祔廟禮於兩陵災日。罪在罔上。聞者吐舌。秋。又有震風變。公獻言。風拔社樹廟木。此何等天警也。殿下宜反躬兢惕。召還被譴大臣。盡釋言事之臣。庶幾哉應天以實。又曰。外人譁言。禁苑鑿池方舟。盤樂之漸。頗蠱上心。審若此。大風不足言災也。願殿下戒之。又曰。書曰。庶民惟星。星有好風好雨。民之失所於今甚。震風狂雨。迨類之應乎。願殿下賜被災地今年租。以示優恤焉。居無何。以特進官入侍。請老甚懇。上溫諭曰。如卿忠直。豈宜去朝右。今鄭經世已死。張顯光甚老。卿豈可又去。仍問卿曾見風災之酷如此否。對曰。臣未之見也。人皆言辛卯有風災。壬辰亂作。冬。以副提學侍講。公進曰。古人於詩。不必引章句。以義喩之者多。至講有女同車曰。有女同車。乃男女相悅之至。古語曰。賢賢易色。以好色之心。移於好賢。則好賢誠矣。至籜兮章曰。木枯將落。有風吹之。則其落也易。國將亡。又有政事之不善。豈非促之亡乎。其他章。皆有引喩。深得箴諫之義。上稱善再三。講畢。公又進曰。時事甚可慮也。事若急。至尊避之何處。惟以同死社稷爲心。然後國可保矣。丙子二月。敵使怒逸。朝野方汹。公在玉堂。上箚條論凡三。一曰。興衰撥亂之主。非英武。不足當之。李綱之言也。殿下猶行素膳。徒效兒女子事。其可謂興衰撥亂之英乎。時仁烈王后新陟。山陵才畢。公深爲聖躬慮。故云然。二曰。伏節死義之士。求之於犯顏中。不易之論也。典禮時言事之臣。庸非犯顏者乎。如此等輩。宜急甄敍。三曰。畜衙門軍官及訓鍊炮鎩。正爲緩急。用抽精銳當敵。不可遲也。於義州。設效死科。亦壯軍聲之一助。言皆中端。而時議以爲迂。不能用。是歲十二月。敵敗盟入寇。不數日。穿黃,鳳。綴松京。報急如羽。大駕避之廣之南漢城。公以吏曹參判從焉。圍中上箚者四。大要以君臣父子背城借一死執不撓。大拂廟議。二十四日。公聞敵求斥和臣。請以身先之。是日夜半。亂兵露刃詣行殿外。請斥和臣。於是廟堂列書十人姓名。將縛送敵營。有言于上者曰。斥和諸臣。皆一時民望。如後世議何。上惕然。卽命止之。丁丑正月二十七日。當事者持書往敵營。書辭祕。世莫得以聞。公憤曰。主辱至此。臣敢愛死。晨起痛哭。正其衾枕而臥。拔佩刀。剚其腹。侍者開衾視之。則刃沒腹矣。驚號而拔刃。鮮血逬出。氣咯咯絶者良久。朝紳相識者。咸來救。上聞而斯惻。遣內醫救藥。殊而回生。又下敎。令廣州牧。專意供醫藥。其時御醫之視公創者曰。後成血癰難救。公之沒也果然。公旣病。不能從駕出。乃上箚以辭。其辭一出義理。不雜利害。皆留中。二月。公臥箯輿而南。不處其家曰。吾不死於南漢。以答國恩。何面目。自安妻子之奉。遂入德裕山之南麓某里谷。結茅舍。易秫田以度朝夕。辛巳六月二十一日己丑卒。某年某月某日。葬某山之原。嗚呼。公有百尺亭亭之直。有秋霜皎日萬古常鮮之節。前之癸丑。群奸內奰。竊大阿而擧文網。阨公于保宮。服囚服。關木索。半載于幾。竟投之風魚瘴毒之聚。其死九而生堇一也。然不能奪公之直也。後之丙子。浴鐵之騎數十萬。肉薄孤城之下。八路勤王師。或衂或遁。外無蟻子之待。亡論文吏介冑。震怖悼慄。相率而入乞憐中。然亦不能撓公之節也。之直之節。其養有根。其出有源。夫子所稱三軍可奪帥也。匹夫不可奪志者非耶。孟軻氏所言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大丈夫者非耶。然以一直臣槪公。以一節士颺公。是淺之爲丈夫哉。公之學。耳目濡染於家庭者旣不淺。及其弱冠。徧遊趙月川鄭寒岡之門。聞退陶李先生之緖。悅而淑之者亦多。然其踐履篤實之功。則皆自於自得。平生以直方大三字。爲一身之符。警惕于本源則本之心經。浸灌乎義理則本之洛建諸老書。於性理大全。着力最早。夜深而寢。鷄鳴而寤。盥櫛定省之外。無毫髮念走外。對案危坐。終日不跛不倚。嘗論先輩人品之不同曰。人性有二。剛與柔爾。剛屬陽。柔屬陰。與其不得剛柔之正。寧失於剛。故易貴乎陽剛君子。又曰。學者。當以心小膽大。爲一身立脚地。涑水氏平生無不可對人言者。以膽大也。故公后日受用處。多是一節云。公爲人光明俊韙。表襮如一。與人恂恂愷悌。不爲牙角。不爲畦畛。不爲嶄截矯激。全有堯舜與人同底意思。至其立朝廷。爭是非。謇謇諤諤。屹如喬嶽。雖自謂貴育。不能奪。且所雅言。惟在孝悌忠信中。奧理微言。不肯輕說。由是世之見公者。皆不知篤實眞儒也。元朝自警。箴若求中說。若德辨錄。卽公中晩後所著也。於是可見公一身之德。見道之明且確也。居濟十年。經史百家。伊吾不輟。至焚膏繼晷。大易則日誦一卦。於文章。最喜孟,韓。晩好歐陽凡爲文辭。渙若不思。頃刻就數千言。理勝辭達。割裂點綴者。不敢窺其際。孝友天植也。年十歲。侍參判公于廬所。執奠拜獻。一如成人。又絶肉以終再朞。一如參判公。母夫人勸之肉不可。參判公於終身之喪。雖隆寒。必沐浴澡潔。公則以兒子。不敢同長者浴湯。浴氷井。遂媒疾塊結腹下。爲平生患。亦不使父母知。母夫人素患泄積有年。公必嘗泄以驗𤭏歇。及歿之年。又泄。公嘗而泣曰。味與疇昔異。竟不起。是時。公年六十二。廬墓下終三年。菜之美者。亦不近口。衰絰未嘗暫釋。朝夕拜墓。不以風雨寒暑或廢。服闋。亦無演門之毀。人以爲夫夫也。雖神明所扶。稟賦之遒。固異夫人云。事伯兄。畜其季。能敬而友。與之連案飮食無虛日。蒼顏白髮日相對。怡怡和樂之色可掬。蓋公之道孝之盡。故移於忠。忠之盡。故節義乃著。然節義。卽變之遭也。先生之受知於仁廟。可謂不世事。而誰使尼之。其道終不能大行於世。終値危難。只以義烈鳴。於乎天哉。今上三年壬辰。贈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丁酉。賜諡文簡公。夫人尹氏。坡平著姓。忠義衛某之女。性貞毅淑明。御婢使。治家第。皆有法。當公之謫濟也。宅不翦而業不鏟。資三子往來海外以時。賢可知也。與公同年生。先公一年卒。辛巳。葬于居昌治北主谷。同先生竁。辛卯。遷寢合葬。卽居昌龍山先妣墓前午向原。丈夫子三人。長曰昌詩。仕爲水曹正郞。出爲縣監者四。俱有治績。曰昌訓昌謨。咸有才行。不幸相繼早歿。側室子曰昌謹。司果。正郞娶忠義衛李希雍女。生一男一女。男岐壽。方爲省峴察訪。女適崔瑞翁。昌訓前娶柳永貞女。生一女二男。女李薇。男岐憲,岐章。後娶愼諯女。生一男。幼。昌謨。娶大君師傅朴羾衢女。生一男二女。男岐胤。女長適曺夏賢。蚤歿。次適尹亨龜。昌謹娶都事李𥳕庶女。生四女。幼。察訪娶牧使羅緯素女。生四女一男。長適姜徽萬。餘幼。岐胤娶掌令許穆女。生三男。不佞。少先生十七歲。以丈人行視先生。先生則不以先後輩致異。踵相接出入邇列者十有餘年。覿德而心醉。固不淺淺矣。而至其勇進退。立大節處。瞠若乎後。其敢曰。知先生乎。昔不佞訪先生于某里。編茅矮屋。土▼(土+刑)脫粟。問先生良苦。則猶然一笑而已。不佞其敢曰。知先生乎。遂爲之銘。銘曰。
中州淸淑迤東蔚。德裕龍門瀜而結。鍾生偉人地靈匹。往當幽國作玉雪。吉網如荼不含噦。載遷之靜醨羞啜。蛟蛇與對典墳閱。疢相德慧光誰衊。聖奮斁倫公脫絏。騫于臺閣桂愈辣。濮議一起衆喙吃。據禮酋酋龍喉屹。當官而行安柔舌。靡事不爭汲猶劣。靡闕不補甫可埒。介然無徒肝鑄鐵。天獨下耳咨如渴。其所規畫本稷卨。于丙子春亦獻說。顜筴指掌可輓臲。孰謂儒迂桑土撤。柰何乎天隙難窒。羈靮以從戈之孑。宵攻不試鯨噴渤。滿城嗷嗷靖康轍。主辱臣死古爲烈。吾刃吾礪腹一扶。絶而復蘇丹逬血。上憫其忠藥醫挈。列聖培養氣孰涅。然公抱負奚一節。澡身洛派汲毋竭。直內方外百年設。序庠芬苾柏板揭。千秋蛾子仰嵽嵲。我銘示後媲前哲。正憲大夫知中樞府事趙絅。謹撰。<끝>
桐溪先生續集卷之三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