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黃順元) / 시인, 소설가

1915. 3. 26 평남 대동 출생~2000. 9. 14 서울 별세.
시인·소설가.
본관은 제안(齊安). 자는 만강(晩岡).
시인으로 등단해서 뛰어난 단편소설가로, 다시 장편소설가로 거듭 변신하면서 문학세계를 넓힌 작가이다.
생애와 활동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교사였던 아버지 찬영(贊永)과 어머니 장찬붕(張贊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해 1년 6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다.
오산중학교를 거쳐 숭실중학교를 마쳤으며, 193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2고등학원에 입학, 재학시절 이해랑·김동원 등과 극예술연구단체인 '동경학생예술좌'를 조직했다.
1935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도쿄[東京]에서 시집 〈방가〉를 펴냈다는 이유로 평양경찰서에 29일간 구류되었다.
1939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생활하다 1946년 월남했다.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7년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80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를 지냈다.
숭실중학 시절 시 〈나의 꿈〉(동광, 1931. 7)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시창작에 몰두하는 동안은 당시 문단의 큰 흐름이었던 모더니즘 시를 주로 썼다.
시집 2권을 펴낸 다음 1930년말부터 소설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초기 단편들인 〈별〉(인문평론, 1941. 2)·〈목넘이 마을의 개〉(개벽, 1948. 3)·〈황노인〉(신천지, 1949. 9)·〈노새〉(문예, 1949. 12)·〈독짓는 늙은이〉(문예, 1950. 4) 등은 빼어난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섬세한 내면세계와 인간 사이의 교감을 그려내는 휴머니즘이 주조를 이룬다.
또한 시적 정취를 자아내는 간결하고 서정적인 문체는 당시 문체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8·15해방 후 장편 〈별과 같이 살다〉(여러 잡지에 분재하다가 1950년 단행본으로 펴냄)를 발표한 이후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에 주력하여 잇따라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았다.
장편소설을 통해 본 그의 문학세계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카인의 후예〉(1954)·〈인간접목〉(1957)·〈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등은 6·25전쟁 전후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그려낸 데 반해,
〈일월〉(1962)·〈움직이는 성〉(1972)·〈신들의 주사위〉(1982) 등은 신분적 질곡, 현대사회의 윤리와 전통의 문제, 종교문제 등을 다루어 소설적 주제가 매우 다양해졌다.
이중
〈별과 같이 살다〉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며, 곰녀라는 한 여인의 짧은 생애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그려냈다. 곰녀는 〈카인의 후예〉에 나오는 오작녀와 매우 닮은 인물로,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한 원형을 이룬다.
〈카인의 후예〉는 8·15해방 직후 북한의 토지개혁과정을 통해 인간의 소유욕과 윤리적 패덕에 대한 강한 응징을 보여준 작품이며,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전쟁 체험이 낳은 비극적인 인간성 파괴를 다룬 작품으로 장편소설로서의 진가를 유감 없이 발휘한 문제작으로 꼽힌다.
황순원은 수많은 작가들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굴복해 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친일 작품을 휘갈겨댄 일제말 모국어로 작품 쓰기를 고집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며 평생 잡문을 쓰지 않은 작가로서 크게 존경받았다.
시집으로 〈방가〉(1934)·〈골동품〉(1936)과
소설전집으로 〈황순원전집〉(1964)·〈황순원문학전집〉(1973)·〈황순원전집〉(1985) 등이 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1년 3·1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0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백과사전>
황순원 시모음
꽃
말하지 않겠네
꽃이 나를 위해
이러큼 아름답게 핀다고
생각지 않겠네
꽃이 나를 위해
이러큼 향기를 풍긴다고
저 고통으로 응축된
빛깔,
그 때마다 신음하는
내음,
어찌 저를 버리려 하시나이까
해를 우러러 그렇게 서있을 뿐
꽃은 오직
나의 꿈
꿈, 어젯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언제고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져 흩어진 이 내 머릿속에도
굳게 못 박혔도다
다른 모든 것은 세파에 스치어 사라져도
나의 이 동경의 꿈만은 길이 존재하나니
ㅡ 1931. 삼월
세레나데
버스에서 혹은 어느 집회소에서
당신은 내가 앉았던 자리에 와 앉는다
허지만 당신은 내가
누구라는 걸 몰라도 좋다.
밤거리를 또는 어두운 다리 위를
당신은 내가 거닐던 곳을 지나간다
허지만 당신은 내가
누구라는 걸 몰라도 좋다.
그러면 그런 대로 좋은 이여
우리 서로 이렇듯 가깝고도 먼 서러운 별들
나도 당신이 앉았던 자리에 와 앉고
당신이 거닐던 곳을 지나쳐도
당신이 누구라는 걸 모르고 지내리.
그러면서 때로 나는 술을 마시며 살리
그리고 때로는 웃기도 하며 살리.
공(空)에의 의미
ㅡ 徐廷柱에게
이 사람은 서라벌 한 절간 우물 속에다 용을 기르되
한갓 강고기나 다를 바 없이 기르고
이 사람은 송도땅 깊은 산속 한 폭포에다 잉어를 기르되
폭포 위나 밑이 아닌 바로 폭포줄기 한복판에서 살게 하고
이 사람은 한성 한 선비집 사랑방 병풍 속에다 자짜리 붕어를 기르되
먹이 없이도 살찌게 하고
이 사람은 서울 변두리 마을 자기집 뜰안 연못에다 비단고기를 기르되
있게도 기르고 없게도 기르고
황순원 작품 모음
<소나기>
줄거리
소년은 서울서 왔다는 윤초시의 손녀딸을 처음 만난다. 소녀는 모든 것이 낯설어 소년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지만, 매우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소년은 자기와 동떨어진 상대라 생각한 나머지 소녀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어 느날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수줍은 소녀와 마음을 모르고 둑에 앉아서 소녀가 비켜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때 소녀는 하얀 조약돌 집어 '이 바보'하며 소년 쪽으로 던지고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막 달려간다. 소년은 그 조약돌을 간직하면서 소녀에게 관심을 갖고 소녀를 그리워한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개울가에서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나다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이 있니?'하며 벌 끝을 가리키는 소녀와 함께 소년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들은 무도 뽑아 먹고 허수아비를 흔들어 보기도 하면서 논길을 달려 여러 가지 꽃들이 어울러진 산에 닿았다. 소년은 꽃묶음을 만들어 소녀에게 건넨다. 마냥 즐거워하던 소녀가 비탈진 곳에 핀 꽃을 꺾다가 무릎을 다치자 소년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생채기를 빨고 송진을 발라 주었다. 소년은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양 소녀 앞에서 송아지를 타기도 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내렸다. 비안개 속에 보이는 원두막으로 소년과 소녀는 들어갔으나 비를 피할 수 없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은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는 소녀를 위하여 수수밭 쪽으로 달려가 수숫단을 날라 덧세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좁디좁은 수숫단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위해 주려는 마음이 생기고 서먹했던 거리감도 모두 해소된다. 돌아오는 길에 도랑의 물이 엄청나게 불어있어 소년이 등을 돌려 대자 소녀는 순순히 업히어 소년의 목을 끌어안고 건널 수 있었다.
그 후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소녀를 그리워하며 조약돌을 만지락거린다. 그러다가 개울가에서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난다. 그 소나기에 감기를 앓았다는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보면서 '그날 도랑 건널 때 내가 업힌 일 있지? 그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하는 말에 소년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날 헤어지면서 소년은, 이사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소녀의 눈동자에서 쓸쓸한 빛을 보았다.
소녀에게 줄 호도알을 만지락거리면, '이사하는 걸 가 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하다가 잠이 들락말락하던 소년은 마을 갔다 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다.
작품 해제
[소나기]는 1953년5월 [신문학] 4호에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순정어린 사랑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표현하려는 이 작품은 관찰자 시점이면서도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작 가 황순원은 초기에는 시를 쓰다가 1940년 첫 단편집 [늪]의 발간을 계기로 단편 작가로 전환한 후 다시 장편 소설로 자기 문학 세계로 확대시켜 나갔다. 그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오직 소설 창작에만 몰두하였는데, 단편에 치중하여 [소나기]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카인의 후예] 단행본으로 발표하면서 장편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황순원의 초기 시에서 소박한 서정 시인과,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지식 시인의 면모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그의 문학 세계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그의 소설에서는 서정성을 절제된 모습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그의 작품(특히 단편)에서는 실제의 세계가 아닌 이미지의 세계에 대한 집념이 시적 분위기와 간단 명료한 문체로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년과 소녀의 만남, 그들의 순수한 사랑 그리고 소녀의 죽음을 서정시와 같은 보편적 정감의 세계로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성적 성숙의 단계로 넘어 가는 사춘기 시절) 정서적 경험과 연결시키고 있다.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이 있다. 사람은 그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 추억의 내용에 관계없이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소 년과 소녀가 등장하는 황순원의 일련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성숙한 세계로 입문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의 시련을 지니고 있다. 소녀와의 만남, 조약돌과 호두알로 은유되는 감정의 교류, 소나기를 만나는 장면, 소녀의 병세 더침, 그리고 소녀의 죽음 -- 이러한 스토리 속에서 사랑이 움트는 어떤 소년과 소녀의 미묘한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면서, 내면적으로는 소년이 소녀와의 만남과 이별의 관계를 통해 유년기를 벗어나는 통과 의례의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소녀의 죽음은 소년에게 고통을 남기면서 유년기에서 성년에 이르는 성숙의 어려움을 깨닫게 한다.
아무튼 이 짤막한 단편 소설은 성숙의 징검다리를 건나갈 때면 누구나 겪게 되는 정서적 경험을 재확인시키며, 보편적인 정감의 세계로 독자를 연결시킨다.
이 소설은 1959년 영국의 '인카운터(Encounter)'지의 단편 콩쿠르에 유의상의 번역으로 입상되어 게재되기도 하였다.
<카인의 후예(後裔)>
줄거리
박훈은 평양에서 공부하는 동안 조부와 아버지의 사망으로 지주가 되었고, 이십여 년 동안 훈이네 토지를 관리해 온 마름 도섭 영감의 딸 오작녀를 오래 전부터 좋아했다. 훈이 고향으로 돌아와 배우지 못한 소작인의 자식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하자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오작녀는 훈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수발을 들어 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북한 세력이 들어서면서 훈은 야학을 압수당하고, 도섭 영감은 마름을 한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주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군당부의 압력을 받아 토지 개혁에 앞장서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 대회가 열리고 지주인 박용제와 윤주사가 반동 분자로 몰려 숙청을 당하지만 훈은 오작녀의 도움으로 숙청을 면한다. 그러나 딸의 소행으로 인해 훈의 토지를 갖지 못하게 된 도섭 영감은 훈의 할아버지 송덕비를 도끼로 때려 부순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은 사촌 동생 혁을 통하여 오작녀와 함께 월남할 것을 계획한다. 그는 순안으로 돌아오다가 도섭 영감이 주도했던 지난 농민 대회 때 숙청당한 삼촌 박용제를 본다. 사동 탄광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용제 영감은 트럭에서 몸을 날려 자살한 것이다. 오작녀와 순안을 떠나려고 했던 훈은 도섭 영감을 죽이기도 작정한다. 이즈음 아들 삼득이가 박용제 영감의 묘자리를 파 주었다는 이유로 도섭 영감은 농민 위원장 자리에서 숙청된다. 산으로 올라가 훈과 맞선 영감은 훈의 칼에 옆구리를 찔린다. 영감은 살기가 등등하여 갈아 둔 낫을 휘두른다. 항상 훈의 신변을 걱정하여 미행해 오던 오작녀의 동생 삼득이 이를 저지하다가 상처를 입는다. 영감은 삼득과 실랑이를 하다가 살의를 버린다. 삼득이가 훈에게 오작녀를 데리고 빨리 떠나라고 말하자, 정신을 차린 훈은 오작녀와 함께 양짓골을 떠난다.
작품개괄
<< 제목의 의미 >>
" 카인의 후예”는 소설의 주제를 강하게 암시하는 제목이다. 카인은 하느님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 중 맏이로서 아우인 아벨을 죽여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다. “카인의 후예”란 최초의 살인자이며 형제를 질투하고 증오한 카인의 피를 받은 후손이라는 뜻이다. 박훈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념의 도입으로 인해 질투하고 증오하고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은 형제와 다름없는 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범죄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박훈의 고향 마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삼팔선 이북 지역 전체에서 일어난 일이며, 나아가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우리 민족 안에서 빚어진 질투, 증오, 살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 안에서 빚어진 이런 비극과 범죄는 카인과 아벨, 아담과 이브에게로 소급되어 인류의 원죄와 연결된다. 소설 “카인의 후예”는 그렇듯 해방 직후 평안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인류의 원죄까지 연결시키고, 또 거꾸로 인류의 원죄라는 거대한 주제를 평안도 시골 마을의 조그만 사건으로 상징화시키는 작업을 해냈다. “카인의 후예”는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 의미로 확대시켜 형상화한 훌륭한 작품인 것이다.
<< "카인의 후예"의 시대적 배경 >>
이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시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겨 식민 통치를 받은 끝에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연합국을 대표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그런 가운데 삼팔선 이북 지역의 변혁은 급격했다. 소련의 군정이 급조해 놓은 이북의 임시 정권은 1946년 3월 5일, 전격적으로 토지 개혁을 발표해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했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 삼팔선 이북에 세워진 공산주의 정권이 정한 인민의 적 숙청과 토지 개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개성적인 성격 묘사 >>
이 작품에 빛을 더해 주는 것은 등장 인물의 성격 묘사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격변기에 대응하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마치 정말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실감나는 것은 등장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각기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鶴)>
줄거리
한 마을에서 단짝동무로 지냈던 성삼이와 덕재는 6.25가 나면서 이념을 달리하는 적대관계로 만나게 된다. 치안 대원이 된 성삼이는 덕재가 체포되어 온 것을 보고, 청단까지 호송할 것을 자청하여 데리고 나선다.
호송 도중, 유년 시절에 호박잎 담배를 나눠 피우던 생각과 혹부리 할아버지네 밤을 서리하다가 들켜 혼이 난 추억들을 떠올리며 내적 갈등을 느낀다.
농 민 동맹 부위원장까지 지낸 덕재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품기도 했으나, 대화를 하면서 점차 감정이 누그러지고 그의 진실을 알게 된다. 즉, 덕재는 아무런 이념에의 동조없이 빈농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용당했을 뿐, 실은 땅밖에 모르는 순박한 농민이었던 것이다.
덕 재는 아버지가 병석에 있고 농사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착으로 인하여 피하지 않고 남았음을 이야기한다. 성삼이는 자신이 피난 가던 때를 회상하면서, 농사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피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시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덕재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증오의 마음이 점차 우정으로 바뀌면서 고갯마루를 넘는다.
성삼이는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전처럼 살고 있는 학 떼를 발견하고 옛일을 회상한다. 어린 시절, 학을 잡아 얽어매 놓고 괴롭히다가 사냥꾼이 학을 잡으러 왔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서 학 발목의 올까미를 풀어준 적이 있다. 그때 처음에는 제대로 날지 못하다가 자유로워진 학이 푸른 하늘로 날아갔던 추억.
성삼이는 덕재에게 학사냥이나 한 번 하자며 포승줄을 풀어 준다. 덕재는 성삼이가 자기를 쏘아 죽이려나 보다고 생각하나, "어이, 왜 맹추같이 게 섰는 거야?" 하는 성삼이의 재촉에 무엇을 깨달은 듯 잡풀 사이로 도망친다. 때마침 단정한 두세 마리가 가을 하늘을 날고 있다.
작품개괄
이 작품은 6. 25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적 상황과 인간애를 소설화한 것이다.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적 비극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순수한 우정을 통하여 이념을 초월한 따뜻한 인간애를 서정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순수한 인간의 본성(학)과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도록 여운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황순원의 초기 작품들이 시간이나 공간을 의식하지 않은 것에 비해서 이 작품에는 6.25라는 전쟁 상황과 삼팔선 접경 마을이라는 뚜렷한 배경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국토 분단과 동족 상잔의 참화를 겪은 비극의 현장으로서 이 나라 강토를 대표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6.25라는 비극의 시대가 무한한 자유를 동경하던 유년 시절과 대립되어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이러한 특정의 시공간은 소설 속에 사건의 전개와 논리적으로 일치하고 있으며 작가의 주제 의식을 표출하기 위해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학'은 주제적 사물로서 작품의 절정 부분에서 나타난다. 소년들이 학을 풀어 주었던 과거의 에피소드는 이데올로기에 왜곡된 인간을 구원하는 힘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밖에 없다는 작가 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학은 우정 회복의 매체가 되어 손상된 우정을 치유하는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고결함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별한 애착을 받는 길조인 '학'을 중심으로, 이념적 갈등이 빚은 인간성의 파괴와 상실을 사랑의 힘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데 주제 의식을 두고 있다.
<< 구성과 문체상의 특징 >>
현 재의 순차적인 진행 속에 몇 개의 과거를 삽입시키는 역전의 질서로 되어 있어, 결말을 위한 예시, 주제의 암시, 현실과의 대조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 여기에 삽입되는 에피소드는 담배와 밤서리, 학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모두 과거에 덕재와 나누었던 추억을 회상시키는 것으로 우정을 회복하게 하는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또 고개를 중심으로 한 공간의 변화에 따라 갈등이 고조되고 이완되는 구조도 독특한 발상이다. 즉, 결말부에 가서 고개를 중심으로 성삼과 덕재의 우정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고개라는 것의 상징적 이미지를 이용해 고개를 넘어섬으로써 이념이라는 갈등을 넘어서고 우정이 회복되는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성삼과 덕재의 성격을 해설하거나 논평하지 않고 압축적인 서술과 간결한 대화를 통해 간접적인 제시를 한 것도 구성의 긴밀성에 이바지한다. 예컨대 덕재를 호송해 가는 도중 성삼이 연거푸 피워 대는 담배는 자신의 착잡하고 초조한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어릴 때 덕재와 함께 태웠던 호박잎 담배에 대한 추억에, 새로 피워 문 담배를 내던지는 것은 덕재에 대한 우정을 형상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체에 있어서는 각 문장이 짧고 수식어가 적으며,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상황이 주는 이미지 전달에 주력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생각하는 부분이나 대화 부분에 따옴표를 생략한 곳이 있고, 자유 간접 화법으로 처리한 곳이 많다.
<독 짓는 늙은이>
줄거리
독 짖는 송 영감은 늙은 몸에 병까지 깊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7살난 어린 아들마저 팽개치고 젊은 조수와 눈이 맞아 도망가 버린다.
송 영감은 노여움과 심약함으로 도망간 마누라를 호령하며 마누라는 잠꼬대를 하다가 아들의 울먹이는 소리에 잠을 깬다. 울먹이는 당손이를 달래다가, 마지막 가마에 넣으려고 조수가 혼자서 만들다시피 한 독들이 달빛에 비치자 조수의 그림자처럼 느껴져 모조리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아들 당손이와 둘이서 겨울을 보낼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참는다.
다음 날부터 송 영감은 머리를 감싸고 독을 짓기 시작한다. 한 가마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손놀림도 예전과 같지 않고 신열까지 겹쳐 쓰러지고야 만다. 방물장수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가져왔다는 미음을 아들을 의해서 억지로 입술에 바르고 다음날부터 다시 독짓기를 한다. 그렇지만 쓰러지기를 거듭 할 따름이다.
날이 갈수록 송 영감은 독짓기보다 쓰러지는 횟수가 잦았다. 미처 한 가마를 채우지 못하고 독을 내어 조수가 빗은 독하고 나란히 놓았다. 마치 조수와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드디어 가마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불질하는 것을 지키고 있는 송 영감의 두 눈도 타고 있었다. 송 영감이 '이제 조금만 더'하고 속을 죄고 있을 때 뚜왕! 뚜왕! 독 튀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자기가 빗은 독들이 튀는 것을 알고 송 영감은 그만 쓰러지고 만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송 영감은 자기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앵두나무집 할머니에게 당손이를 부탁한다. 마침내 그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 아이는 떠나고, 송 영감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러는 송 영감의 눈에 독가마가 떠올랐다. 송 영감은 독가마 속으로 계속 기어 들어갔다. 터져 나간 자기의 독을 대신이나 하려는 듯 송 영감은 흩어진 독 조각들 앞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품개괄
이 작품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어느 단적인 인상을 집어내는 데 주력하면서 절제된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또한, 대화에 의한 장면의 제시가 없이 설명적 진술과 서사적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적 전달 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통적인 기법이라 할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여 송 영감의 정신적 갈등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행동에 대한 해설을 수행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가치 체계의 붕괴를 겪는 세태에 대항하려고 하는 한 노인의 집념과 좌절을 보여 줌으로써, 격변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인 송 영감이 죽은 듯이 가장하며 아들인 당손이와 헤어지는 장면이라든가 스스로 독으로 화신(化身)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장면은 깊은 감동을 준다.
이 소설의 바탕에는 문명 이전의 순수한 삶을 다음 세대로 이어 주지 못하는 한 자연인의 비극적 종말이 어느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작가 정신이 담겨 있다
<< '독‘의 상징성 >>
전통적 가치
투철한 예술 정신의 표현
인간의 본연적인 삶의 집착과 한국의 전통적 인간상 제시
<< "독 짓는 늙은이"의 서술 기법 >>
작 자는 특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깊은 관찰과 섬세한 문체, 치밀한 구성을 갖춘 작품들을 많이 썼다. 이 작품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노인의 심리 상태를 절제된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화에 의한 장면 제시는 거의 없고, 인물의 내면 세계에 대한 작자의 설명적인 진술이나 태도의 묘사에 치중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극한 상황에 처한 노인의 심리 상태에 대한 강한 인상을 선명하게 독자에게 전해 주는 데 적합하다.
<출처: J캠프입시학원>

황순원의 작품세계
― 한국적 인간상·고독의 문제 ―
천이두
1 .
황순원(黃順元)의 친지인 원응서(元應瑞)는 황순원의 인간을 말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마디로 황형의 성격은 자꾸만 위를 향해 올라가는 대나무와도 같다고 할까, 굽힐 줄 모르고 그냥 곧추 위로 올라가기만 하는 성격이랄까, 또 번거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랄까, 물론 때가 때인 만큼 모래터 시절은 여럿과 어울려 다니는 걸 즐기지 않았다기보다도 꺼려하는 편이었다. 워낙 직설적인 성미여서 눈에 거슬리는 일이 많아서인지 몰랐다. 나는 그의 직설적인 데가 좋았다. 그의 그것은 우격적인 직설이 아니라 사리에 합당한, 언제나 바른 말에 가까웠다. 싫은 것과 좋은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서 '불쾌'라는 어휘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한편, 그의 심중은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과 사랑의 교차를 기원하고 있다. 이 기원은 …… (중략) ……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 삼중당 {황순원 문학전집} Ⅲ에서
그 어려웠던 일제 말기의 고향에서의 일을 회상하면서 쓴 이 구절은 작가 황순원의 인간과 문학을 집약적으로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학과 그 작자의 인간과는 일단 별개의 것임을 부인할 수 없고, 또 이런 점과 관련하여, '글은 곧 사람이다' 하는 말이 이따금 시비거리의 제재로 되어온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경구가 지닌 일면의 진실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황순원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것을 느끼게 한다. 원응서가 증언한 바 황순원의 대나무같이 곧은 성품, 번거로움을 많이 타는 성품, 싫고 좋고가 분명한 성품, 그러면서도 심중에서는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는 그의 성품은 이 작가의 문체, 등장인물들(특히 긍정적 인물들)의 생태,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장편소설에 있어서의)를 통하여 일관성 있게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우선, 그의 문체부터가 번거로움을 많이 타는 문체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쇼트 센텐스이다. 가능한 한 군더더기를 제거해 버리려는 이 작가의 유다른 결벽증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이 작가의 고전적이라 할 만큼 엄격한 지적 절제에 의하여 그의 문장들이 통제를 받고 있는 탓이라 할 것이다.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런 점은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대상을 부각시킴에 있어서 그는 세부묘사 같은 것은 최소한의 필요 조건을 제외하고는 대담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에 있어서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은 이런 개개의 형상들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풍겨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단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화가로 비유하자면 사실파가 아니라 인상파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이 작가의 유다른 결벽증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점은 그의 첫 창작집인 {늪}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스타일이다. 가령, 그의 20대의 작품인 <그늘>(1924년)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언제나 여인이 앉아 있는 목로상 안쪽하며, 갖가지 안주감이 들어 있는 진열장하며, 구석구석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한가운데 늘이운 십육 촉짜리 전등불 하나로는 어쩌지 못할 그늘이었다.
숯불을 피워놓은 큰 화로가 불거우리해 있으나, 이 숯불 역시 그늘을 태운다기보다는 그늘을 피워놓기나 하듯이 화로가 둘레는 도리어 짙은 그늘이 서리어 있었다.
이 구절에는 여인, 목로상, 진열장 등 술집 내부의 풍경들은 사실주의적인 의미로 볼 때, 그 윤곽이 지극히 희미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술집 내부는 '한가운데 늘이운 십육 촉짜리 전등불 하나로는 어쩌지 못할 ' 짙은 그늘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 술집 내부에서 윤곽이 비교적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불거우리해 있는' 숯불을 피워놓은 큰 화로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유독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는 까닭은, 그 숯불이 '그늘을 태운다기보다도' 오히려 그 둘레에 더 짙은 그늘을 서리게 하는 탓이다. 이 구절에서 독자가 뚜렷하게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여인도 목로상도 진열장도 아니며, 그보다 비교적 윤곽이 뚜렷한 숯불 화로조차도 아니다. 그런 시각적인 것들이 어둡고 막막한 어떤 분위기 속으로 통틀어 하나로 녹아들게 하는 짙은 그늘인 것이다. 어둡고 막막한 그늘 속에 젖어 있는 술집의 단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여인 목로상, 진열장 등을 비롯하여 술집 안의 모든 가시적 대상들은 어둡고 막막한 그곳의 그늘에 휩싸인 분위기를 빚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들일 뿐이다. 이러한 우울하고도 암담한 분위기야말로 이 작품 전체의 기본적 톤이라 할 수 있으며,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어두운 식민지 시대를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청년이나 남도사내의 마음의 분위기이기도 하다.
'웅변을 교살하라'고 베를렌은 그의 <작시법>에서 말한 바 있다. 말로 시작하되, 말을 넘어서려는 것이 모든 시인의 야심이라 하겠거니와, 작가 황순원의 문학에서도 일관하여 이런 야심의 반영을 보게 된다. 즉, 그는 어떤 대상을 들어 모사하는 일을 최대한으로 생략하거니와, 설사 최소한의 묘사가 불가피한 경우라 할지라도, 언제나 그 묘사를 넘어선 자리에서 신선한 이미지가 환기되어 오기를 염원하다. 그의 문체에서 언제나 시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황순원에 이르러 한국의 산문은 한 고전적 스타일이 성취되었다고 할 것이다.
번거로움을 타는 그의 성품, 즉 말로 시작하되 말을 넘어서려는 그의 야심은 일체의 사변적(思辨的)인 것에 대한 그의 유다른 혐오의 경향에서도 볼 수 있다. 그의 일관하는 신조는 문학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잡문 한 편 쓰지 않은 그의 이제까지의 궤적에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거니와 자신의 문학 세계 안에서 생경한 육성의 노출을 엄격히 통제하여온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대들이 말하는 불안이니 절망이니 하는 어구들이 불행하게도 내게는 아무런 실감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들이 말하는 어구들이 아직 그대들 자신에 의해 육체화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들의 그러한 어구들이 내게 있어서는어렸을 때 어머니
등에서 그림자를 보고 놀랐던 공포나 불안감만큼도 실감을 못 갖는 것이다.
-<내일>에서-
대체로 작자 자신이라 해도 좋을 한 작중 인물의 말을 통해서 이렇게 피력하고 있거니와,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이 작가의, 일체의 소피스티케이션에 대한 유다른 혐오의 경항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타고난 직관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반영을 볼 수 있다. 말이란, 사람이 발견해낸 전달의 수단일 뿐이지 진실 그자체는 아니다. 진실이란, 언제나 말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더구나 말이 말로써의 메커니즘을 갖춘 소피스티케이션이란, 진실의 자리에서 보면 더 많은 협잡이 끼어들 개연성을 갖고 있다. 작가 황순원이 혐오하는 것은 바로 이 협잡인 것이다. 그에 있어서는 이 협잡과 대칭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직관인 것이다. 직관은 맹목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협잡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임은 사실이다.
인간의 타고난 직관에 대한 그의 무한한 신뢰는 가령, {카인의 후예}에 있어서의 '오작녀'의 생태를 통해서 탁월하게 반영되어 있다. 황순원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정치적 이슈와 관련되는 유일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있어서 8.15 해방 직후의 북한 땅에 빚어진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대응하는 여주인공 오직녀의 자세는 정치적 이슈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맹목적 직관적인 그것이다. 가령, '박 훈'의 집에 몰려든 군중 앞에서 위기에 몰린 박 훈을 구출하는 그녀의 당돌한 용기는 무슨 소피스틱한 이념의 결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타산적 판단에서 연유되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타고난 본성에서 연유된 것일 뿐이다.
타고난 본성, 타고난 직관에 대한 그의 신뢰는 현대적 교양의 세례를 거치지 않은 토속적 인간상이나 순진한 어린이들에 대한 이 작가의 유다른 애착의 발로로써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많은 작품들에서 우리는 오작녀와 혈연을 같이하는 인간상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도 그 대문이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작가의 상당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 동물들의 생태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타고난 본성(본능) 내지 직관에 대한 신뢰는 필연적으로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외경의 자세로 나타나기도 한다.
{비늘}, {달과 발과}, {이리도} 등은 그러한 문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인은 만수 외삼촌의 눈앞에서 권총을 한번 뒤집었다. 거기에도 같은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이게 뭐냐고, 만수 외삼촌이 권총에서 눈을 달자 주인이 사뭇 침통한 어조로,
이게 바로 이리의 이빨자국이요, 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리의 이빨자국? 음, 이게 바로 이리의 이빨자국이라?
다음은 주인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좋았다.
이리도, 그러면 이리까지도?
이것은 {이리도}라는 작품의 끝부분이다. 동물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다는, 그래서 피의 냄새를 맡게 되면 미치고야 만다는 이리까지도 그 피를 흘리게 하는 흉기(권총)에 대하여는 이빨 자국을 내고야 만다. '이리까지도?' 라는 이 작품의 맨 끝에 제기되 있는 물음이 무엇을 겨냥하고 제기된 것인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우리는 이 작품에서 가령, 조국의 영광이니, 대동아의 공영이니 하는 이름으로 자행된 일본 군국주의의 소행에 대한 비판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비판이 결코,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또 다른 소피스티케이션을 통해서 제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카인의 후예}에 있어서, 혁명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이름으로 강행된 일련의 가혹한 사태에 대응한 '오작녀'의 행동반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인간의, 넓게 말해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타고난 본능의, 맹목적이면서도 정당한 반사행동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작가의 생명의 신비에 대한 외경, 생명이 간직하는 직관과 본능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미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작가 황순원은 타고난 본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장한 루소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낙관주의자이다. 물론 황순원에 있어서의 낙관주의는 무슨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서 표방된, 웅변(소피스티케이션)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말을 넘어선 자리에서 구체적인 표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심중은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고 있다' 는 원응서의 증언도 이런 문맥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작녀'를 비롯한 그의 많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바 토속적 인간상들에서 느끼게 되는 따뜻한 체온은 이런 낙관주의에서 연유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미 말한 몇 가지 특질들이 집약될 때 한국적 인간상으로서 표상을 성취하게 된다. 특히 그의 단편문학의 주류적 과제는 바로 이런 한국적 인간상을 빚어내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인간상들은 이른바 산문적 인간상들이라기보다도 시적 이미지로서의 인간상들이다. 시대적, 역사적 굴레에서 벗어난 어떤 전형으로서의 한국인이다. 그의 이런 인간상들이 대개의 경우 당대 현실의 실제적 이슈보다는 시대를 넘어선 전설적 분위기 속에 살고 있는 것도 그 때문다. {카인의 후예}의 '오작녀'는 이런 인간상의 탁월한 샘플이 되지 않을까 한다.
2.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의 문학적 궤적에서 볼 때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는, 앞서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그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당대 현실의 정치적 이슈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고발 문학적 경향을 띠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의 단편 작가로서 추구하여 오던 문학적 과제가 한 정점의 성취를 이룩하면서 장편 작가에로의 지표를 열어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별과 같이 살다}에 이은 두번 째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별과 같이 살다}는 애당초, 개개의 부분들을 독립시켜 발표한 사실로서도 알 수 있듯이, 장편소설로서의 뚜렷한 서사적 골격을 갖추었다고 하기 어렵다. '곰녀'라는, 그의 단편 문학에 곧잘 등장하는 토속적 여인상의 인생의 여러 단면들이 그 자체로서는 아름다운 서정시적 정경을 펼쳐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연작소설 같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곰녀'라는 인간상 자체가 장편소설적 전개를 보이기에는 너무도 마뜩지 않은폐쇄성을 지니고 있다. '곰녀'의 생애의 과정과 병행하여 식민지 시대에서 8·15 해방이라는 역사적 전환기가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적 전환기를 자신의 생애의 과정 속에 탄력있게 수렴하면서 대응해 나가기에는 그녀는 너무도 완강한 성격적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커다란 변혁을 치르면서도 한결같이 소박하고 어리석고 착하고 따뜻한 자기 속성만을 간직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여기 비하면 {카인의 후예}에 있어서는 8·15 직후의 북한에 있어서 살벌한 격동기를 한 지식인 <박 훈>의 시선으로 대응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곰녀의 경우에는볼 수 없는 중요한 계기가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작중인물 <박 훈>과 당대 현실 사이의 갈등관계가 심화되고 또 내면화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장편 문학에의 지평은 이런 계기에서 열리게 된다. 박 훈의 모습에서 우리는 살벌한 사회적 격동기 속에 부대끼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식인의 갈등의 생태를 볼 수 있다. 가혹한 격동기에 대응하는 박 훈의 자세는 정면 대결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극적이며 방관자적 그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김병익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행동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 순응주의자, 체념주의자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는 끝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는 방관자의 위치를 고수함으로써 '침묵자로서의 부정의 행동'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중당 황순원 문학 문고, 김병익의 {수난기의 결벽주의자} 참조). 소극적인 듯하면서도 완강히 자기 내면의 순결성을 지켜가는 박 훈의 모습은 그의 그 뒤의 장편소설의 긍정적 인물들, 예컨대 {인간접목}의 종호,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 {일월}의 인철 등에도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면은 앞서의 원응서의 증언에서 볼 수 있는 바 작가 황순원 자신의 인간적 변모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이 작품은 고발 문학적 성격이 짙다고 했지만, 그러나 물론 이 작품은 그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다. 박 훈의 생태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가혹한 시대를 이겨내는 한 지식인의 갈등과 모색의 생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에 있어서 더 큰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은 '오작녀'의 모습이다. '오작녀'는 '곰녀'를 비롯한 많은 그의 단편소설의 토속적 여인상들과 진한 혈연을 맺고 있다. 그녀 역시 곰녀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시대적 소용돌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자리에 위치해 있는 인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작녀는 박 훈에게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이 발산하고 있다. 이 작품의 작중현실이 대체로 박 훈의 시선에 의하여 관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작녀의 강렬한 생명력이 발산하는 빛에 의하여 박 훈의 모습은 희미하다. 독자 앞에 정면으로 나타나는 박 훈보다도 그의 자의식의 시선을 거쳐서야 독자에게 전달되는, 따라서 그의 자의식의 피사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 오작녀의 모습이 더 신선하게 독자에게 인상지워 진다는 것은 분명 이 작품이 갖는 독특한 아이러니다.
그 아이러니의 비밀은 어디 있을까. 역시 실체 그 자체보다도 그것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이 작가의 예술적 특질 탓이 아닐까. 오작녀는 분명 오늘의 여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배후에는 무수한 세월의 부피가 깔려 있다. 그녀의 배후에는 큰 아기 바윗골의 전설, 뻐꾸기 울음, 망부석의 이미지 등등 무수한 한국적 여인상들이 무수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이룩하여 놓은 농도 짙은 환상의 여울이 깔려 있다. 그녀의 모습은 당대 현실의 산문적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시적 이미지로서의 그것이다. 예술가로서의 황순원의 매력은 오작녀에 이르러 한 분수령을 이룩하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단편 작가로서의 이 작가의 문학적 과제의 한 장점이기도 하다.
장편 작가로서의 황순원의 주류적 과제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城)} 그리고 {신들의 주사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세 장편은 각기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인간 고독의 문제, 나아가서 인간관계의 문제의 탐구라는 이 작가의 문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내적인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그 중심인물들인 동호{나무들 비탈에 서다}, 인철{일월}, 성호{움직이는 성}의 궤적이 그러하다. 따라서 {일월}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선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 제기되어 있는 주제를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일월}에 접근하는 실마리로 삼아야 할 것이요, 나아가서 {일월}을 규명함으로써 {움직이는 성}에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듯하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6·25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작중의 모든 액션의 일차적인 계기는 그 전쟁에서 연유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이란, 외적 계기에 지나지 않으며, 근원적 계기는 그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작중인물 개개인의 자의식의 갈등관계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개인들의 상호간의 부딪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자의식의 상처의 양상이야말로 이 작품의 비극의 결정적 계기인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작중인물 상호간의 관계는 가해, 피해의 관계로서 전개된다. 말하자면 모든 타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자의식에 대한 가해자일 수 밖에는 없다. 따라서 각자는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적으로는 피해자이지만, 객체적으로는 가해자일 수 밖에 없다. 이리하여 모든 관계는 가해, 피해의 상승관계로서 펼쳐진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양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양식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 고독의 문제에로 확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마리를 토대로 하여 {일월}에서 볼 수 있는 바 인간의 숙명적 고독에 대한 성찰 및 그 고독을 넘어선 자리에서 새롭게 모색되지 않으면 안되는 새로운 차원의 인간관계의 설정에 관한 성찰 등이 펼쳐지기에 이른다.
{일월}에는 여러 가지 상징적 장치(device)가 동원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요소요소에 전개되는 드라마의 줄거리, 꿈의 장면 등의 삽입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장치들은 때로 그때그때의 작중인물들의 심리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중의 액션의 전개에 탄력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법적 특질들은 이에 앞선 작품들에서는 찾기 어려운 두드러지게 새로운 면이다. 황순원의 문학 세계를 전반적으로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에 되는 일이겠거니와, 그는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뚜렷한 스타일을 간직한 그런 점에서 완고하다 할 정도의 일관성을 간직하는 작가이면서도, 꾸준히 새로운 실험을 통해서 자신의 문학적 지평을 끊임없이 확대시켜온 작가인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여러 상징적 장치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백정에 관한 것이다. 이 백정에 관한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이 작품의 제일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로 제기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백정에 관한 역사적 및 민속학적 고증에 접할 수 있고, 이 계층에 대한 뿌리 깊은 인습을 재인식할 수가 있고, 또 그런 인습에 항거한 형평사 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사회운동의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백정의 문제는 이 작품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상징적 장치로 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주인공 인철을 비롯한 그 둘레 사람들의 비극의 결정적 계기이면서 또 그들의 삶의 전환점을 열어주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철에 있어서 그 문제는 숙명적 조건이다. 그가 백정의 후손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숙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할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의 모든 고뇌와 방황의 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물론 자기가 백정의 후손이라는 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인습의 굴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외적 굴레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그로서는 회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기정사실이다. 일단 그것을 자신의 숙명적 조건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그의 심각한 갈등의 계기가 있다.
인간이 자신의 숙명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는 수시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계기를 성공적으로 포착하기는 어렵다. 그 계기를 성공적으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슬기와 용기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상인은 한평생 자기 숙명과 정면으로 맞서보는 법 없이 안일한 인습의 굴레에 순응하고 만다. 설사 그것과 부딪칠 수 있는 계기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다가온다 해도, 애써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안일한 인습의 굴레에 속으로 도피하기가 쉽다. 이제껏 익숙해져온 인습의 굴레 밖으로 뛰쳐나오기가 지극히 두렵기 때문이다. 그 인습의 굴레는 일상인의 간편하고도 안이한 요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아의 근원적 조건을 바로 보고, 자아의 삶을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그 간편한 요람이 간직하는 엄청난 허위를 간파할 수 있는 슬기로운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그 간편한 요람에서 결연히 뛰쳐나와 고독한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경영해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슬기로운 통찰이요 과감한 자기 혁명이기 때문이다. {일월}의 주인공 '인철'을 비롯한 그 둘레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궤적들은 말하자면, 이러한 운명의 순간에 제기된 자아의 숙명과의 대결에 있어서의 그들 각자의 패배 내지 승리의 궤적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 인간의 숙명적 조건에 대한 성찰 내지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이라는 명제는 한국 문학의 전후 관계에서는 그다지 익숙한 주제라 할 수 없다. 인간의 문제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보다는 윤리적 규범적인 차원에서 제기 추구되어온 우리의 정신사의 문맥속에 있어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궁극의 차원에서 추구하기가 좀처럼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근래에 서구의 일련의 불안문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 작가 가운데서도 이러한 명제에 대한 추구가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생경한 사변적 요설로 기울어져 갔던 것도 결국 상기한 정신사적 배경의 차이가 주된 이유로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일월}에 있어서는 그러한 명제가 결코 생경하지 않게 형상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외래적인 명제가 한국적인 작중 현실속에 효과적으로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이 작가의 뛰어난 역량의 탓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하겠거니와, 이 작품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인간의 근저적 개안의 계기로서 백정의 문제를 설정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신 없는 우리의 정신사의 전후 관계에 있어서 그것에 맞먹을 만한 것이 있다면 각자의 숙명이라 할 것이며, 그 숙명을 찾는다면, 완고한 인습의 굴레 안에 모질게 깔려 이어온 백정으로서의 숙명이 아닐까 한다. 모든 숙명은 그 자체 안에 저마다의 지옥을 거느리게 마련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가장 농도 짙은 지옥이 백정으로서의 그것이 아닐까 한다. 신 없는 나라의 작가 황순원은 천국과의 대응관계를 단념한 대신 숙명이라는 이름의 지옥과의 대응 관계를 모색함으로써 인간의 근원적 고독의 문제를 추구하기에 이른 것이며, 그 점에서 그는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이 오랜 방황과 갈등 끝에 도달한 숙명적 고독이라는 지점은, 문제 해결의 종착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성실성에 의하여 새롭게 경영되어져야 할 삶의 시발점인 것이다.
이대로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다혜와 나미를 대해야 하는가.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인간의 관계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인간이 소외당한 자기 자신을 도루 찾으려면 우선 각자에 주어진 외로움을 참구 견뎌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할 거야. 기룡의 말이었다. …… 그건 그렇다. 허지만 외로움이란 인간과 인간이 격리돼 있는 상태에서만 오는 게 아니지 않는가. 서로 부딪칠 수 있는 데 까지는 부딪쳐본 다음에 처리해야만 할 문제가 아닌가 …….
오랜 방황과 갈등 끝에 자신의 외로움에 눈을 뜬 주인공 인철이 제기하는 이 물음은 정당하다. 인간이 자아의 고독에 눈을 뜬다는 것, 그리하여 자아의 성실성을 증명해 나간다는 것은 엄청난 슬기와 아울러 엄청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요청되는 행위이기는 하다. 그것은 자아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고독을 다시금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극복되어 나가지 않으면 않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 있어서의 자아에 성실한 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은, 인습적 인간 관계에의 반역을 통한 자기 고독의 확인인 동시에, 새롭게 펼쳐질 인간관계의 모색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 투입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바, '나미'의 집 정원의 나뭇가지에 꼬깔을 걸어 놓고 기룡을 찾아나서는 인철의 모습은 독자에게 여러 가지 점에서 상징적 암시를 준다. 고깔(가면)을 벗은 그가 고독의 실체와도 같은 기룡을 다시 만나려는 것은, 그에 있어서의 새로운 인간관계의 설정을 위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월}의 주인공 인철의 궤적에서 볼 수 있는 바 이러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설정을 위한 시도는 {움직이는 성}의 성호에게로 이어지면서 사랑과 자기 희생이라는 문제에로 확산된다.
<출처: 알맹이언어영역>
황순원의 <소나기>, 원제는 <소녀>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가 '소녀'라는 제목으로도 발표된 적이 있으며 처음 발표 때 결말에 네 문장이 더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동환 한성대 교수는 한국문학교육학회의 학회지인 '문학교육학' 26호에 실은 논문 '초본과 문학교육'에서 1953년 11월에 발행된 '협동'지에 황순원의 '소나기'가 '소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고 밝혔다.
또 최초 발표본으로 알려진 1953년 5월 '신문학' 속의 '소나기'와 비교한 결과 '협동', '신문학' 모두에서 지금까지 전해진 결말 이외에 네 문장이 추가돼 있다고 소개했다.
추가된 부분은 "'아마 어린 것이래두 집안 꼴이 안될걸 알구 그랬든가 부지요?' 끄응! 소년이 자리에서 저도 모를 신음 소리를 지르며 돌아 누웠다. '쟤가 여적 안자나?' '아니, 벌서 아까 잠들었어요. …얘, 잠고대 말구 자라!"는 네 문장이다.
이 부분은 3년 후 '소나기'가 작품집 '학'에 수록됐을 때부터는 빠졌다.
김 교수는 "'소나기'가 '신문학'을 통해 먼저 발표됐으나 제목과 표기법 등을 봤을 때 작가는 '합동'에 실린 '소녀'를 먼저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황순원의 제자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김종회 경희대 교수는 "생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소나기' 결말에 소년이 돌아눕는 내용을 넣었다가 원응서 선생의 충고에 따라 뺐다는 말씀을 들었다"며 "'소나기'의 묘미인 결말의 여운을 살리는 데 탁월한 결정을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또다른 제자인 문학평론가 하응백 씨는 "황순원 선생님은 작품을 발표하신 후에도 재수록 과정에서 끊임 없이 퇴고를 반복하신 작가"라며 "'소나기'의 창작과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9.18)
소설가 황순원 타계
[동아일보]
한국 현대 소설사의 거목
황순원 선생은 2000년 9월 14일 85세로 타계했다.
황순원 선생은 잠든 모습 그대로 평온하게 영면에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문제만큼 어떻게 생을 마감하느냐도 진지하게 고민하셨던 분이니까요."
선생의 수하에서 문학을 배웠던 김종회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는 스승에 대한 기억 한 편을 끄집어냈다.
"삶과 글에 굉장히 엄격하셨습니다."
황순원 선생은 '황고집'이라 불릴 정도였다. 단 한 번의 곁눈질 없이 작가 정신 하나로 70년 문학인생을 걸었다. 식민과 분단, 전쟁과 독재로 점철된 격변의 시기에도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원칙을 꺾지 않았다.
세속적인 욕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주겠다는 박사 학위도, 정부의 문화훈장도 거부할 정도였다. 문학 외의 글은 잡문(雜文)이라며 단 한 번도 원고 청탁을 받지 않았다.
미학적 극치를 시현한 그의 작가 정신은 그만큼 결벽에 가까웠다.
시에서 출발해 단편소설을 거쳐 장편소설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미학의 전범(典範)이 됐다. '소나기' '학' 등 단편의 서정세계와 '일월' '
움직이는 성' 등 장편의 서사적 완결성이 대표적이다.
작가로서의 황순원은 치열했지만, 스승 황순원은 자애로웠다.
26년간 경희대 국문과 강단에 섰던 황순원 선생은 제자 군단을 거느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설가 전상국 김용성
조세희 조해일 고원정 이혜경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문학평론가 신덕룡 하응백 한원균,
시인 정호승 이성부 등이 그들이다.
문학평론가 하응백 씨는 "선생님은 문학적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의 삶과 작품 자체가 문학인들의 사표(師表)였습니다"라고 전했다.
그 문하에서 걸출한 문인들이 대거 배출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황순원 선생은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제자들과 3개월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이번에 책을 낸 ○ 작가를 위해 건배∼."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제자들의 작품 활동을 일일이 챙기며 격려를 보냈다고 한다.
"선생님이 아직도 곁에 계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매년 그랬듯이 이번 7번째 기일에도 황순원 선생의 묘소를 찾는다고 했다. 문학의 스승을 찾아서….
<강혜승 기자 / 2007.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