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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2년 2월 20일 주일 설교
제목 : 희망은 믿음 가진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자의 것!
본문 : 마가복음 9장 24절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장 24절, 새번역>
안녕하세요.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하며 인사를 드립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2월 한 달 반환점은 잘 돌고 계십니까? 남은 2월의 시간은 모두 하루하루가 의미 있는 나날들이 되길 기도해 봅니다. 그 의미 가운데 가장 큰 의미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허락하십니다. 이제 마가복음 9장 24절을 본문으로 하여 ‘희망은 믿음 가진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자의 것!’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마음과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체험하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새번역으로 준비된 말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장 24절, 새번역>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정도로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재미있게도, 아니 이상하게도 주일학교와 절에 동시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보통 주일학교는 주일 오전 9시에 시작해서 10시쯤 끝나곤 했었는데 먼저 주일학교에 가서 예배를 드린 후 마치게 되면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대구에서 유명한 절이 있던 팔공산으로 향했습니다. 자전거로 근 2시간정도 타고 가야 겨우 산 밑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리였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어떻게든 차비를 마련해서 버스를 타고 갈 정도로 열심히 있었습니다. 버스종점에서도 다시 2시간 남짓 산을 올라 이윽고 도착하는 곳이 유명한 돌부처상이 있는 “갓바위”라는 곳이었습니다. 매해 수능 때가 되면 인파로 설자리조차 없이 가득 차는 곳으로 뉴스에서 늘 소개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돌부처 상에 저마다 소원을 가지고 와서 간절하게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무리에 들어가서 108배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절하고 있는 모습 속에 묻어 나오는 진실한 간절함이 어린 나이에도 참 보기가 좋았었습니다. 고작 13살밖에 안된 저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108배를 하면서 그 갓바위 부처상에게 우리 집이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고, 가난에서 벗어나 일을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서 108배를 마치고 나면 절에서 나누어주던 기가 막히도록 맛있는 시래기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열심히 절도 했으니 그 간절함이 통해서 돌부처상이 어떻게든 나의 소원을 들어줄 거 같은 기쁜 예감을 가지고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주로 불렀던 노래는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나 “참참참 피흘리신”, “주오시면 천국에서” 등등 매 주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찬송을 부르면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저는 참 엉뚱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만큼은 진실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당연히 무언가 간절하게 소원을 바라면 누군가 듣고 꼭 이루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108배를 하던 어른들의 그 간절한 눈빛과 몸짓이 저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간절한 눈빛과 몸짓을 하면, 내 안에 가득했던 소원들도 당장 현실이 될 것 같은 희망이 넘치는 곳이 바로 그 현장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교회는 최소한 제가 볼 때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또래 아이들은 예쁜 옷을 입고 호호 깔깔 거리며 걱정이 없어 보였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차에서 내리는 어른들의 양복은 이상하리만큼 저를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에서 마주친 그들은 무엇인가 간절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것이 제 시선이었습니다. 집에서 언제든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곳곳에 널린 교회에 비해 갖은 노력을 다해서 4시간이나 가야만 다다를 수 있는 그 곳, 대구에서 한 곳에만 있는 간절함의 종결지 ‘갓바위’, 정성으로 보든 뭐로 보든 그만큼 제 간절함을 들어줄 대상이 하나님보다는 갓바위가 더 크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사실은 갓바위에 가서 절을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더 이상 교회도, 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벽신문배달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중 3이 되었을 때 고입을 앞두고 오후 4시에서 새벽 4시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자 그토록 간절했던 ‘간절함’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 간절함에 대답해 주지 않았던 갓바위가 야속했고 또한 세상이 야속했기에 간절함과는 담을 쌓고 하루하루 현실 속에서 무기력한 시간으로 흘려보냈습니다. 책이나 TV에서 보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꽤나 실망감이 컸습니다. 아직 어리기만 한 16살에 느꼈던 절망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간절함 뿐이라 다시 간절함을 선택했고, 또 실망하고, 다시 간절해지고의 반복적인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반복적 일상이 계속되어가자 그로부터 몇 년 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간절해야 할 이유조차도 모르는 삶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간절함에 대한 뜻과 간절함에 대한 대상이 분명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특히 고등학교 시절 때는 정말 간절하고 싶지도, 간절함 자체도 싫었던 시기였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이 '간절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한 간절함으로 살고 있고, 그렇게 ‘간절함으로’ 살아야 하고, 교회를 향한, 미래의 아이들을 향한, 제 가족을 위한 간절함이 삶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하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바로 “간절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9장 본문에는 누가 보기에도 간절한 소원을 가진 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간질과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 그 고통 속에서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아들을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들고 가슴 아픈 시기를 보내왔을 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가 있어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손가락질도 받았을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바닥이 나서 이제는 더 이상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입니다. 감히 상상도 못할 절망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은 아이뿐만이 아니라 이 아버지의 말문마저도 막히게 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버지에게 과연 희망이 남아 있을까요?
처음에는 아들을 낫게 해 주고픈 간절함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간절함이 허용되지 않을 만큼 어려워진 상황에 아버지는 지쳐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포자기! 매일 눈물로,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원망으로 살아가는 하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의 나날들 가운데 병을 치료해 주는 하나님의 치료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마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침 받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온 동네에 퍼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던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드디어 도무지 캄캄하기만 했던 어둠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 그 아버지는 느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모두가 메시아가 왔다고 말하며, 못 고칠 질병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예수’라는 사람을 당장 찾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는 만나지 못하고 그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 9명은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께로부터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부여받았기에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너무 큰 기대는 견딜 수 없는 큰 실망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를 대적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모습처럼, 제자들은 계속해서 귀신을 쫓아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습니다. 아들이 낫기는커녕 점점 더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이윽고 논쟁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그 광경을 보고 하이에나처럼 몰려든 율법학자와 서기관들에게 제자들은 꼼짝없이 논쟁거리가 되자 이 아버지는 이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모양이니 스승인 ‘예수’란 자에 대해서 조금도 기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바로 그 때 아버지가 원래 만나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치료사로 불리던 ‘예수’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궁지에 몰려있던 9명의 제자들은 예수를 보자마자 크게 기뻐하며 자신들의 선생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데 궁지에 몰렸던 한 아이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던 아빠를 만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빠 뒤에서 “너희들 이제 다 큰일났어, 우리 아빠거든!”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어 찾아오실 수 있는지!! 물론 그 타이밍은 제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뻐하고 있던 제자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께 의외로 따끔한 질책을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마가복음 9장 19절, 새번역>
이제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야 하는데 아직도 제자들은 어린 아이 같은 ‘제자리걸음’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시선을 돌려 그 아버지와 아들을 부르셨습니다. 자신들을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난 후, 고민하며 머뭇거리던 아버지는 ‘그래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치료사로 불리던 ‘예수’ 앞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들 속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대면하자 더욱 격렬하게 발작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들이 구르며 거품을 흘리는 그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차분하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셨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마가복음 9장 21절, 새번역>
예수님의 질문 속에는 그 아버지를 향한 긍휼함과 안타까움과 위로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혼자서 이런 아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지치고 괴로웠을지 나는 잘 안다. 많이 힘들었겠구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전에 예수의 제자들을 만난 후 크게 실망했던 아버지는 스승이었던 예수 역시 믿지 못하는 마음이 컸기에 그저 원망과 절망 섞인 말투로 깊은 한숨 같은 말만 내 뱉었습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장 22절, 새번역>
진짜 불쌍히 여기고 도와 달라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방금 당신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못했는데 선생님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한 번 보여 달라며 그냥 툭 던진 말입니다. ‘제자들처럼 못 고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이 속아서 이젠 간절하게 바라고 싶지도 않습니다. 또 실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실망과 절망의 긴 세월이 만들어낸 영혼의 기근이 크게 느껴지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부탁 할 때 ‘혹시 가능하시다면’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곤 합니다. 부탁을 받는 사람도 여러 가지 제약과 제한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 일을 해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대답으로 "무슨 소리! 가능하면이라니!" 하고 항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제약, 지혜의 제약, 능력의 제약, 공간의 제약을 받는 제한된 여건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그저 툭하고 부탁을 드리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말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바로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먼저 귀신들린 아들보다도 아버지의 영과 마음을 치료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하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마가복음 9장 23절, 새번역>
들을 때마다 전율이 느껴지는 선포입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내 아들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낫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동시에 가지고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 하실 일이 없는 분이시다. 그것을 먼저 믿어야 한다.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는 없다. 믿는 자는 희망을 가지게 되어 있다. 희망은 간절한 자의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를 믿음의 세계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구하면 아들이 고침을 받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을 네가 믿지 못한다면 결코 아들은 고쳐지지 않는다.” 엄숙하고 분명하게 그 아버지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포가 끝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선포를 듣고 있던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에 숨겨져 있던 간절함이 살아나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음의 세계로 초청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스스로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즉각적으로 고치기를 원했습니다. 실로 엄청난 결정이었습니다. 모든 절망의 세월을 뛰어넘어 간절함을 해결해 줄 대상을 제대로 만난 듯 확신에 찬 얼굴입니다. 그 빛으로의 초청 가운데 자신을 드리기로 결정한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두들 놀라움으로 그저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숨과 절망 섞인 말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간절하게 큰 소리로 소리치며 울면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장 24절, 새번역>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 내가 믿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모든 이들 앞에서 선포했습니다. 그냥 믿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믿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마음의 상태도 거짓 없이 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도와주소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아버지의 믿음은 곧 예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아들을 귀신에게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무리가 어울려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서,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 <마가복음 9장 25~26절A, 새번역>
죽어가던 아들의 몸과 영혼을 살려주신 것은 물론이요 오랜 시간 죽어있던 아버지의 영도 동시에 살려주시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귀신에 붙들린 아들이 고침 받은 것도 기적이지만, 그 믿음의 고백을 외친 아버지의 변화야말로 본문에서 말하고 싶은 진짜 기적일 것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간절하게 자신의 아들이 낫기를 구했지만 진정한 간절함의 뜻과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회복되어야 하는구나!’ 믿음 없이 그저 간절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내 영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구나. 맹목적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함정에 빠져 있었구나. 그건 사실 해결이 아닌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그저 원망만 하고 절망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모든 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길을 찾았습니다. 믿음의 길이야말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간절함을 선택하고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바로 그 간절함을 가진 자의 것이었습니다. 희망은 믿음 가진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자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도 각자 소원이나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간절함’ 가득한 기도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 삶에서 지금 중요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해결 못한 숙제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지금 이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랜 시간동안 그저 서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고백 드리는 우리의 태도, 마음, 믿음은 어떠한지 말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 앞에서 ‘할 수 있으시거든 날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는 이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과연 하실 수 있을까, 정말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정말 내 기도에 귀 기울이실까?, 정말 현실이 변화될까??’ 반신반의하면서 기도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 말씀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십니까?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 새번역>
혹시라도 지금 가진 간절함이 믿음과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면, ‘믿음 없는 간절함’은 곧 오늘 함께 나눈 본문의 그 아버지처럼 ‘간절함 없는 기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주실 수 있으시면 주세요. 하실 수 있으시면 하세요. 못 주시면, 못 하시면 어쩔 수 없구요." 이렇게 믿음 없이 기도하며 고백한다면 우리 삶에서는 어떤 능력도 기적도 일어날 수 없고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도도 무미건조해 지게 됩니다. 기도할 의미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간절함으로 인해 이런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믿음을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할수록 더 큰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다면 당연하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하게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믿음을 가지고 간절하게 구해야 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간절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 한계가 없으신 능력이 나의 믿음을 통하여 현실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 땅, 내 직장, 내 가정, 내 삶에 나타내 주시옵소서. 나의 믿음을 통하여 기적의 역사를 체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우리의 간절함을 믿음이 있는 간절함으로 바꾸어 기도하며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주님, 나의 믿음이 적음을 도와주시옵소서!!"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눌러 꾹꾹 채워 주실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함께 나눈 본문에서 외치고 있는 그 아버지의 믿음의 고백이 곧 우리의 외침이고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는 간절함에서 이어진 간절함이 없는 기도가 곧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점을 본다거나 사주, 팔자를 보는 것과 같이 그저 맹목적인 바람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예 ‘기도’란 말을 사용하지 않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음의 소원쯤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안 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의 커다란 벽에 가로막혀 그 분의 흔적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기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겨우 스스로 버텨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내일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오늘 하루에만 충실하고 현실에만 충실한 로봇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나의 힘과 지식과 경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되면서 결국에는 이 '믿음이 없는 간절함'에서 시작해서 '간절함 없는 기도', 기도 없는 삶을 거쳐 마지막으로 '신앙의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희망’은 정말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도 부족한 때인데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도가 가장 빠르고 중요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려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달라질 거 없는 삶 기도해서 무엇 하겠는가? 간절히 구해봤지만 달라진 건 없잖아! 무엇하러 힘들게 내 시간 들여가면서 기도해? 쉴 시간도 부족한대!’ 결국 이렇게 기도가 삶에서 사라지면 간절해야 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게 됩니다. ‘왜 내가 하나님께 간절해야 하는 거지? 난 무엇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하는 거지? 교회의 부흥, 세계선교,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전도, 말씀, 예배, 기도 왜 간절해야 하지?’ 이렇게 신앙의 혼란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의 혼란 가운데 빠지면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없는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더 멀어집니다. 점점 더 세상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점점 더 희망이 없는 절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 9장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오늘 이야기의 후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귀신에게 놓임 받은 후 처소로 돌아온 제자들은 혼란스러웠던 자신들의 하루를 돌아보며 실패의 이유를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을 향한, 아니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답변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마가복음 9장 29절, 새번역>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의 기도야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믿기까지는 했지만, 이러한 믿음만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런 기적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믿음은 기도로 이어져야 한다. 기도야말로 바로 믿음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은 그제야 왜 기도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제자들은 모든 사역활동을 필히 기도와 함께 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기도함으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이 있으실 때마다 아니 오히려 바쁘실 때에도 더욱 기도하러 가신 본을 보이신 것도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셨겠습니까? 믿고만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희망의 씨앗이 되셨습니다. 희망은 믿음 가진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자의 것임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믿음 가진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자가 되어 주십시오. 믿음 가진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 모두 이 땅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총 3가지의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이 구했던 아버지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믿음 가득한 간절함을 알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있었지만 기도하지 않았던, '기도 없던 간절함'을 가진 제자들의 모습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3가지 회복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회복을 선포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나의 친구야.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단다. 믿음을 가졌다면 이제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믿음과 기도는 결코 서로를 떼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로 표시되어 집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인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간절함을 가진 사람은 간절함을 이루어줄 대상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게 될 때 간절함은 곧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간절함에서 벗어나 진짜 믿음이 있는 간절함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믿음 없는 기도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초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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