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권오경 선생
1990년대 극장 간판. 한국영화자료원 홍영철 저서 부산영화 100년에 실려 있다.
내가 그린 간판요? 천 점은 더 되지요. 일주일에 서너 편 그릴 때도 있었어요. 연지동에서 실내 인테리어 업을 하는 권오경(57) 선생은 부산의 극장 마지막 간판쟁이다. 군대를 제대한 24살 풋풋한 나이에 극장 미술부원이 된 뒤 45살 되는 2003년까지 간판을 그렸다. 극장 이야기가 나오고 극장 간판 이야기가 나오면 감회가 남다르다.
권 선생이 간판을 처음 그린 곳은 남포동 왕자극장. 월급도 없이 일했지만 신이 났다. 곧 재능을 인정받았다. 운이 좋아 이직하는 선배 빈자리를 꿰찼다. 제일극장과 삼성, 삼일을 거쳐 부산극장 미술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39살 때였다. 미술부장은 극장에선 절대적인 존재였다. 간판 수준에 따라 관객 수가 좌우되었다. 경험 많고 노련한 50대 중반이 미술부장을 맡는 게 관례였다. 사십도 안 된 서른아홉 새파란 게 미술부장을 맡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미술부장 일은 단순한 것 같아도 중요했다. 밑그림은 아랫사람이 다 그리고 부장은 바깥에서 시간을 죽쳤다. 권 선생 표현대로 술 먹고 논다. 그러다가 완성하기 직전 그러니까 간판을 올리기 직전 들어와 한두 군데 점을 찍고 선을 그었다. 그게 전부였다. 화룡점정이었다. 그 점 몇, 그 선 몇이 간판 수준을 좌우하고 극장 수준을 좌우했다. 손님 수를 좌우했다. 미술부장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자리였다.
그가 그린 간판은 남은 게 없다. 보관하기 버거운 대형이고 지우고 새로 그리는 특성 때문이다. 대신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이 2001년 펴낸 자료집 부산영화 100년에 권 선생 작품이 다수 사진으로 실려 있다. 주로 남포동 부산극장 미술부장 때 작품이다.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다이하드 시리즈는 명절 대목을 노린 초대형 간판이라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간판 크기는 극장마다 달랐다. 극장 건물 크기가 다 달랐으니 당연했다. 부산극장의 경우 가로 16m, 높이 8m50이었다. 주인공 눈썹 하나 길이가 1m나 되곤 했다. 명절 대목이 되면 특수를 노려 초대형으로 만들었다. 합판을 위로 잇대고 옆으로 덧대는 방식이었다. 기역자 극장 건물을 간판이 빙 두른 적도 있었다. 보통은 간판을 아홉 등분해 하나하나 그림을 그려 짜 맞추었다. 짜맞춘 뒤 손닿지 않는 곳을 보완하려고 낚싯대 같은 긴 작대기 끝에 페인트 붓을 매달아 썼다.
환등기도 이용했다. 1990년대 소극장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일일이 데생할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돈이 없어 환등기를 사지 못하고 자체 제작해 썼다. 연탄난로처럼 생긴 통을 잘라 양끝에 돋보기 유리를 단 환등기였다. 통에 스틸사진을 집어넣고 빛을 비추면 간판에 그림이 투영됐다. 환등기를 통하면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최고 20m로 확대할 수 있었다. 이대근이 한복 입고 춤추는 장면을 그린 21m 호걸춘풍도 그런 식으로 그렸다.
간판은 자주 바뀌었다. 관객이 많아 한 달을 걸어두는 대작도 있었다. 한 달을 걸어둬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수시로 간판을 보수했으며 차기작을 준비해야 했다. 간판 종류도 많았다. 옥외 전면 대형간판이 있었고 측면 간판이 있었고 가로세로 4m 내지 5m짜리 실내 로비 간판이 있었다. 길거리 붙이는 선전 간판도 미술실 소관이었다. 부산극장 산하 부산극장 1/2/3관, 연흥극장, 자갈치극장, 뒤에는 제일극장을 부산극장이 인수하면서 제일극장 간판까지 그렸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어요. 권 선생이 극장을 떠난 것은 2003년 10월. 복합극장이 늘어나면서 간판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사진과 실사출력이 대체되던 무렵이었다. 2003년 이후에도 삼일(2006년 폐관)이며 보림(2007년 폐관)이며 삼성(2011년 폐관) 등 극장은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간판쟁이라 부르는 건 무리가 아닐까. 무리는 아니다. 당시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장은 극장인데 간판을 바꾸지 않았고 바뀌더라도 제목만 바뀌는 식이었다. 간판을 몇 년 동안 그대로 쓴 곳도 있었고 친구 같은 영화 촬영을 위해 새 간판을 다는 정도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순수미술을 하고 싶다는 권 선생. 부산의 마지막 극장 간판쟁이가 부산진구 연지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