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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본관은 여흥, 성은 민씨, 여주출생. 1851~1895 숙종계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자 철종 때 신혜청 창남과 여주군수를 역 임했던 민치록의 딸. 8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부대 부인에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됐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궁궐을 탈출, 화개동 윤태준에 집을 거쳐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하던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이 선포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요청을 함.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자 청나라에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가도록 요청하고 민씨정권을 재 수립 하였다. 1894년 흥선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 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고로 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8월 2일 일본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 건천궁에서 그녀를 난자 시해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하여 소각하였다. 그 뒤 그녀는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광무1년) '명성' 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밖 홍릉에서 장사 지냈다. |
넓은 뜰에 세워진 (명성황후추모비)
세종대왕 영릉의 원찰인 (여주신륵사) 가는 길목 입구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넓은 후원에 대대적으로 정비한 사적들이 7월초 여강의 바람과 함께 ....
박물관 내부에 명선황후와 고종황제
고종황제가 국명을1897년 대한제국이라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즉 상제님께 신고식을 했던 곳이 바로
조선호텔 옆 고층 빌딩 사이에 있는원구단
덕수궁 시청옆에 있는데 거의 호텔들이 줄잡고 있다.
명성황후 (1851~1895)는 26대 고종의 妃 이며
명성왕후는 숙종의 어머니로 18대 임금
궁궐을 옮겨 놓은듯 하다.
민유중의 신도비
거북형상의 귀부가 이정표인듯~! 민유중의 묘지쪽을 가리키고 있어 특이하다.
명성황후생가터 뒷쪽으로 올라가는 민유중의 묘지 가는길..
민유중(閔維重)에 대하여
1630년(인조 8)∼1687년(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막내아들이며, 모친은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봉교‧세자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
□ 소재지 : 여주읍 능현리 산26-23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향토유적 제5호
민유중(1630~1687)은 숙종대의 척신(戚臣)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 1595~1659)의 아들이며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동생이자 숙종(肅宗)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의 생부(生父)이다. 당대의 대학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문인(門人)인데, 송준길은 그의 장인이기도 하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후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681년(숙종 7)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노론(老論)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으며 사후 효종(孝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는 능현리 명성황후생가의 뒤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높이 15, 폭 126, 두께 46), 상석(높이 50, 폭 196.5, 두께 1181), 향로석(높이 55, 폭 40, 두께 38), 망주석(높이 185, 폭 43, 두께 43), 문인석(높이 188, 폭 65, 두께 51), 배설석(높이 10, 폭 80, 두께 19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봉분의 사방에 방형(方形, 높이 64, 폭 700, 두께 733)의 호석(護石)을 설치한 것이 주목되며, 뒤쪽에는 용미(龍尾)를 마련하였다. 또한 문인석 뒷면의 후수(後綬)와 폐슬(蔽膝)의 문양이 매우 화려하며, 망주석에는 세호(細虎)를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그러나 상석(床石)을 받치던 고석(鼓石)은 망실되어 근래에 추설(追設)하였다. 봉분 좌측에는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약 231)가 세워져 있다. 비신(높이 142, 폭 65, 두께 30)의 앞면에 아름다운 촉체(蜀體), 즉 조선화된 송설체(松雪體)로 피장자의 신원을 써 놓았는데, 우측 상단에 작은 글씨로 “어필(御筆)”이라 표기되어 있어 숙종(肅宗)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권상하가 지은 신도비문 참조). 정확한 연대가 없지만 전후 사정으로 보아 1687년(숙종 13)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 아래 명성황후생가의 우측에는 귀부개석(龜趺蓋石)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472)가 당당하게 서 있다. 귀부(龜趺)가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며 머리가 좌측으로 돌아간 것이 특징이다. 용두화(龍頭化)된 머리위에는 “왕(王)”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首弟子)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선(폶)하고 큰아들인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서(書)하였다. 둘째아들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증영의정(贈領議政) 시문정(諡文貞) 민공신도비(閔公神道碑)”라고 쓴 전액(篆額)을 통해 민유중의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회색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높이 245, 폭 106, 두께 46.5)의 사면(四面)에 비문을 각자하였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지팔십년(崇禎紀元之八十年) 정해(丁亥, 1707, 숙종 33) 사월(四月) 일립(日立)”이다. 민유중 묘와 신도비는 숙종의 국구(國舅)라는 그의 신분을 감안할 때, 왕실의 공장(工匠)들이 참여한 당대 최고의 역사(役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묘제(墓制)와 석조미술사(石造美術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명성황후가 마지막 살다간 곳으로 안내합니다.
명성황후가 머물던 이곳 건청궁은 경복궁 내에서 맨 뒷쪽에 있는 양반가
주택처럼 지어 졌으며 앞에는 향원정이 있고 건청궁 뒤에는 현 청하대가 자리하고 있다.
밀고자가 없다면 쉽게 거처를 찾을 수 있는 곳도 아닌데 ...
경복궁을 범궐할 때 건청궁 뒷쪽 현 청하대 쪽으로 나있는 문을 누군가가 열어 주었기에 쉽게 접근하여
일본 폭도들이 궁 내부대신 이경직과 훈련원 대장 홍계훈을 죽이고 왕비까지...
슬픈 역사 현장이다.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한 비극의 현장인 곤녕합(坤寧閤)과 옥호루
을미왜변때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숨을 거뒀다.
명성황후 얼굴을 쉽게 알아보지 못한 자객이 이 옥호루에서 궁인을 살해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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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성황후가 시외된 곤녕합 동영상을 (일반게시판) 212번 대통령의 별장 청님대편에....
동춘당(송준길)의따님이 민유중의 둘째부인으로 인현왕후 어머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