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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65코스 역방향 제2부
우모도-예동마을-심포마을-화덕마을-독대회관
20220412
1부에서 이어짐
1.들길에 피어나는 팔영산 그림자와 산길에서 만나는 여자만 풍경
우모도를 돌아나오니 이상한 바위가 있다. 속이 텅 빈 바위 안에 동그란 돌덩이가 들어앉아 있다. 마치 용이 입 안에 여의주를 머금고 있는 모양이었다. 판단한건대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왔을 법하고 바위가 바닷물에 침식 당하여 저런 모양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럼에도 바위 안의 모습은 기묘하였다.
65코스 역방향의 후반부, 정코스의 전반부는 들길을 걷고 산길을 걷는 것이 중심이 된다. 물론 심포마을 앞 방조제를 걷는 것이 있지만 주로 들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심포방조제를 지나서 호덕마을 가는 길은 산길이 중심이 된다. 들길에서는 여전히 팔영산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탐방객들의 눈에 안긴다. 그 모습은 각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예동마을에서 쌍정자길에서 팔영산의 형상은 최고 절정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 환상에 젖어 쌍정자길을 따라 정골들을 가로질렀다. 아마도 들길에서 바라보는 팔영산의 환상적 아름다움은 여호방조제와 간척지 들길에서 그리고 정골들길에서일 것이다.
팔영산의 그림자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쌍정자길에서 심포길로 들어서 심포고개를 넘어서면서이다. 팔영산의 영봉들과 작별하고 갯벌바다와 만난다. 심포방조제 앞은 갯벌바다, 짱뚱어들이 몇 마리 편안한 자세로 휴식하는 모습이 보였다. 방조제를 건너 산길로 들어서 길게 이어지는 산길을 걸었다. 들길에서 팔영산 조망이 절정이라면 산길에서는 고흥 앞 바다 건너편의 여자만 해안 풍경이 환상적이다. 안개가 감싼 여수 화양면의 봉화산과 고봉산, 의젓하게 위치의 기준이 되는 여수 화양면 이목리의 서이산과 이영산이 모두 조망된다. 아쉬운 점은 고흥 앞 바다의 섬들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남파랑길 전망 좋은 곳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고흥 앞 바다의 섬 사진에 지명을 달아 놓는다면 탐방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클까? 이번 코스에서는 두 지점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이런 작업을 한다면 고흥의 관광객을 훨씬 늘어날 것 같았다. 여호항으로 가는 남산 허릿길에 전망대를 두 곳 설치하고, 화덕길 임도에서 한 군데의 전망대를 둔다면 남파랑길 65코스는 더할 나위 없는 명탐방코스가 될 것이다.
화덕마을을 거친다. 과역면 호덕리의 세 마을은 호덕, 화덕, 여동임을 마을에서 만난 아주머님 설명을 들으며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화덕삼거리로 나와 잠시 머뭇거렸지만 남파랑길을 단축하지 않고 길게 이어가는 것으로 결정하여 호덕천이 흐르는 들판으로 나갔다. 호덕천 상류 호덕저수지 위쪽에 호덕마을이 보인다. 호덕리 여동마을은 화덕마을 너머에, 화덕마을은 연등리 독대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호덕천이 사이에 흐르는 넓은 목초지를 가로질러 연등리로 넘어왔다. 고흥의 특징이 되는 간척지의 넓은 목초지와 갈대습지가 호덕천이 바다로 들어가는 배수갑문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다. 배수갑문 위에서 들녘 방향과 바다쪽을 모두 조망하였다. 들녘 방향에 독대농장이 목초지를 앞에 두고 자리하고 있는 고흥의 특징이 보인다. 바다쪽 왼편으로 독대마을이 그리고 백일대교로 연결된 백일도가 바다로 길게 뻗쳐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남파랑길 65코스가 마무리됨을 알았다.
과역로를 따라 고개에 이르면 독대회관 그 앞에 옥림정과 두 그루의 팽나무가 의젓하게 자리한다. 그 옆 남파랑길 65코스 시작지점에서 65코스를 끝내는 역설을 마주하니 마음이 상쾌하지는 않다. 독대회관 맞은편 마을 수퍼에서 캔맥주를 사서 동행한 송다래님과 함께 마셨다. 목을 타고 넘는 맥주가 무엇이라고 말한다. "제대로 보았는가? 너무 시시콜콜하게 보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대담하게 통크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어?" "예, 맥주님, 저는 언제나 쫌팽이 멍텅구리옵니다. 타고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소탐대실합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걸으며 한눈 팔지 않고 더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맥주님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며 조금 더 통크게 노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통쾌하기도 하고 섭섭하고 아쉽기도 한 탐방을 맥주 한 방으로 얻어맞고는 버스를 타고 고흥군 녹동항 숙소로 향하였다.
2.걸은 과정
방조제에서 오른쪽 뒤 우모도 앞을 통과하여 왼쪽 뒤의 길을 걸어 이곳으로 왔다.
바위가 속이 비어 알 같은 것을 머금고 있다.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 같다.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바위가 속이 깎아 내린 것 같다.
팔영산의 영봉들이 그림자를 날려내본다.
오른쪽에 원주도, 방조제와 그 왼쪽에 우모도, 왼쪽 앞 해삭 작용의 여의주바위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
표지판 방향은 왼쪽 농로가 되어야 할 듯. 오른쪽에 남산과 여호마을, 왼쪽에 원주도가 보인다.
여도진로로 올라서기 직전에 여호제가 있다.
노란 화살표는 우모도 가는 표시이다. 왼쪽 길에서 올라왔다.
65코스 시작점까지는 아직도 16.1km 3시간 31분이 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돌의 우모도 표시가 거칠다.
앞 남파랑길 이정목에서 오른쪽 농로로 꺾어 들어간다.
65코스 시작점까지 15.7km, 농로를 따라 예동마을 고개로 향한다.
여도진로에서 꺾어서 걸어온 길이다. 맞은편 너머는 점암면 화계리의 중심지인 것 같다. 팔영산 영봉들이 솟아 있다.
왼쪽고개를 넘어 예동회관 앞으로 왔다.
고흥군 점암면 화계리 예동마을이 예동회관 아래에 있다. 뒤쪽에 팔영산이 손짓한다.
"예동(禮洞)마을은 옛날 배가 닿는 곳에서 고개를 넘는 지점에 마을이 형성됐다 하여 마을 이름을 한때 “배월금”이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 앞에 대룡나무가 많아 대룡나무의 꽃을 비유하여 “약동”, “예동”이라 하였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전에서 분리되면서 예의를 숭상하는 뜻으로 “예동(禮洞)”이라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이 마을은 배가 닿는 곳에서 고개를 넘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배월금'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내용을 알면길 이름을 '배넘기미길'이라 한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배넘기미길에서 쌍정자길로 나와 농로를 걷는다. 남파랑길은 바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앞 왼쪽 마을은 화계리의 중심지 화전마을인 듯, 뒤쪽에 팔영산이 보인다.
남파랑길은 정골들판을 가로지르는 쌍정자길을 따라 나간다. 이제 점암면 화계리에서 과역면 신곡리로 넘어왔다.
왼쪽 건너편에 화계리의 화전마을이, 중앙에 팔영산이 부드러운 곡선을 연출한다.
"화전(花田)마을은 마을의 뒷산이 연화산(連和山, 峰)이므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어 당초에는 화계리(花鷄里)라 불리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행정구역개편 당시 마을이 연꽃밭(섶밭)이라는 뜻에서 화전(花田)으로 개칭하여 변함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정골들을 가로질러 쌍정자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맨 뒤에 보이는 산은 우미산인 듯, 남파랑길 66코스에서 이어갈 것이다.
남파랑길은 쌍정자길에서 중앙에 보이는 심포길을 따라 심포마을로 이어진다.
정골들을 거쳐 걸어온 쌍정자길을 돌아보았다. 팔영산은 여전히 탐방객의 눈길을 끈다.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은 신전마을인 듯.
"신전(新田)마을은 1952년에 신전저수지가 방조되면서부터 아랫동네가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새점”이 “신점”으로 다시 신전마을로 고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남파랑길은 쌍정자길에서 오른쪽 심포길로 꺾어 이어진다.
고흥군 과역면 신곡리 심포길을 따라 심포마을로 향한다.
과역면 신곡리 쌍정자길에서 심포길로 들어왔다. 팔영산과 건너편의 점암면 화계리 신전마을이 들어온다.
오른쪽 아래에 축사가 있다.
266간척지들을 가로질러 방조제로 올라간다.
심포고개를 넘어 축사 앞을 거쳐 간척지둘 농로로 들어왔다.
심포(深浦)마을은 옛날 바닷물이 마을 앞 150m까지 들어왔다고 하여 마을 명을 “지푼개”라 불러왔으나 1930년 일제강점기 지방 행정구역개편시 마을 이름을 한자화할 때 깊을 심(深), 개 포(浦)로 고쳐 심포(深浦)로 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짱뚱어들이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포고개를 내려와 간척지들을 가로질러 방조제로 올라왔다.
방조제를 건너 맞은편 마을 앞 방죽길을 따라 오른쪽 산길로 오른다.
오른쪽 해안으로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앞산의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방조제를 건너 밀물 때면 물에 잠길 듯한 심포길을 따라왔다.
과역면 신곡리에서 호덕리로 넘어온 듯
과역면 호덕리 화덕길을 따라 진행
임도 왼편으로 아담한 집이 있다. 뜰의 나무가 멋져서 살폈지만 이름을 알 수가 없다. 알아보니 양다래나무라고 한다.
앞쪽 섬들의 이름을 분명히 알 수 없다. 길게 뻗어나온 섬은 백일도일까? 맞은편 멀리 여자만의 여수 화양면의 서이산, 이영산이 보이는데 여자만 해안이 안개에 감겨 있는 모습이 멋지게 조망된다.
앞쪽의 고흥 바다 섬들 이름이 궁금하다. 여자만 뒤의 왼쪽 서이산, 오른쪽 이영산, 맨 오른쪽에 고봉산과 봉화산이 안개에 감겨 있다. 아름답다.
저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저 언덕을 넘어서 이 언덕으로 왔다. 왼쪽 집에는 예술의 향취가 있는 조형물들이 많다.
남파랑길 65코스 시작지점인 대독마을과 다리로 연결된 섬 백일도가 길게 뻗쳐 있다.
화덕길에서 뒤돌아 보았다. 아래는 비닐화우스 설치 공사에 분주하다.
도라산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산인데 그곳에서 여기까지 꿀벌을 치러 왔을까?
도라산꿀벌농장이 왼쪽에 보인다.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왔다.
청미래덩굴 잎에 싸서 만든 떡을 경상도에서 망개떡이라고 이른다. 청미래덩굴의 경상도 방언이 망개나무, 전라도 방언이 명감나무이다.
화덕길을 따라 앞들로 나간다. 왼쪽에 넓은 목초지와 축사가 있다.
화덕길을 따라서 중앙의 화덕마을로 들어간다.
화덕(火德)마을은 설촌(設村) 당시 마을 이름은 “터예(垈禮)”라 하였는데, 옛날 소태봉에서 풍수들이 동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을 따라 대명지(大明地)가 있다고 하여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 번창할 것이라는 뜻으로 집터 대(垈, 터)자와 예도 예(禮)자를 써서 “터예”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 폐합 당시 마을 뒷산의 형국(形局)이 화로와 같으므로 마을 이름을 다시 화덕(火德)으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과역면 연등리 독대마을과 과역면 백일리 백일도를 이어주는 백일대교가 보인다.
이 옆에 효열부 수원 백씨 기적비와 효부 김경숙여사 기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지난 시대의 유물인 듯한데, 고흥 지역에서는 이런 효열부 기적비 등이 눈에 많이 띈다.
'여'자는 여동마을을 이르며 화덕마을 뒤쪽에 있다고 한다. 화덕교회가 뒤에 보인다.
"여동(麗洞)마을은 호덕리 지역에 속하며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山)의 형국이 까치집과 같으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작포(鵲浦) 즉 “작개” 라고 불러 오다가 일제강점기 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 폐합 당시 마을 안의 꽃이 많아 화려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여동(麗洞)이라 고쳐 부른 이래 1986.7.14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법정마을로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이정목의 표지는 오른쪽으로, 이정목 기둥의 표시는 직진으로 되어 있다. 길게 이어가기 위해 진진한다.
왼쪽으로는 호덕마을, 오른쪽으로는 독대마을로 향한다. 남파랑길은 왼쪽 과역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판의 원연등길로 진행한다.
오른쪽 화덕길을 따라 과역로로 나왔다.
위쪽으로는 호덕마을로 이어진다. 남파랑길은 전봇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원연등길을 따라 진행한다.
남파랑길을 단축하고자 하면 화덕삼거리에서 과역로를 따라 독대마을로 향하면 가깝다.
이 길을 따라가다가 끝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간척지에 목초가 풍성하다. 왼쪽에 큰 축사가 있는 독대농장이 보인다.
호덕천 위 왼쪽에 호덕마을이 보인다.
"호덕(虎德)마을은 뒷 주산(主山)이 복호형국(伏虎形局)이라 하였으며 그 아랫마을이므로 “호동(虎洞)”이라 불렀으며 주산인 호덕산 옆에 개형국의 산이 있어 호랑이의 먹이가 풍부하여 호랑이가 덕이 있어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는 뜻으로 1914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방행정구역 폐합시 마을 이름 호동(虎洞)을 호덕(虎德)으로 개칭한 이래 변함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뒤쪽 언덕에 화덕교회, 중앙 왼쪽은 화덕삼거리이다. 화덕교회 왼쪽에서 화덕길을 따라 화덕삼거리로 나와서 과역길을 따라 오른쪽 호덕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원연등길을 따라 호덕천을 건너 연등리로 넘어왔다.
독대마을 입구에 배수갑문이 있다.
왼쪽에 화덕삼거리, 그 위 언덕에 화덕교회가 보인다.
왼쪽 호덕천을 경계로 호덕리와 연등리로 나뉜다. 호덕천 위 끝 산 아래에 호덕마을이 보인다.
중앙 뒤에 독대농장이 보인다.
과역면 연등리 독대마을이 정면에 보인다.
정면에 백일도가 보인다.
과역면 호덕리에서 과역면 연등리 독대마을로 들어간다.
남파랑길을 왼쪽 원연등길을 따라와서 과역로로 나와 배수갑분을 살핀 뒤 이곳으로 되돌아와 독대마을로 향한다.
독대(獨垈)마을은 원래 과역면의 가장 북동쪽에 위치하여 마을의 지형이 거미(蝳)와 같은 형국이며 또 마을 대지가 짐승같이 생겼다고 하여 독대(蝳垈)라고 부르다가 독대(獨垈)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이 충무공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장군의 ‘충현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가 2001년 과역면 소재지 현충탑 비석거리로 이설되었다.(고흥군청)
중앙 맨 끝 고개에 독대회관과 그 옆 남파랑길 65코스 안내도가 있는 곳이 목적지이다.
옥림정 옆 두 그루의 팽나무가 그윽하다.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듯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다.
1780년대 가장 먼저 마을에 제주 고씨께서 정착하였으며, 그후 담양 전씨, 성주 배씨, 김해 김씨, 김녕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최씨, 광산 김씨, 전주 이씨 등이 입향하였다. 옛날 마을 이름은 날꼬지, 진두라고 불렀다고 전해오며 마을 형국이 거미 형국이라 하여 거미 독(蝳), 터 대(垈), 독대(蝳垈)로 써오다가, 홀로 입향하였다 하여 홀로 독(獨), 터를 잡았다 하여 터 대(垈), 독대(獨垈)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 앞에 정자나무 20여 그루가 있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뜻을 모아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정자나무 밑에 당산 할머니 제를 지내기로 하고, 최초 마을 설립자, 우물 조성자, 굿매구 설립자 등 네 영령의 제를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 가장 큰 당산나무는 성인의 양팔 6명의 둘레까지 되었으나, 1955년 7월 소실되었으며 지금은 8그루만 남아 있다.
마을 큰샘은 고진태씨께서 진지도에 배를 타고 가서 4인조 목도를 하여 돌을 싣고 와서 샘 기초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지며, 그후 마을이 번창하여 총 151호, 주민 652명이 지금의 큰샘 우물 하나로 24개의 성씨가 생명수로 살아왔다고 한다.
남파랑길 65코스를 이곳에서 시작하여야 하는데 이곳이 65코스 끝지점이 되었다.
내일 순복음 승광교회 방향의 앞길을 따라 64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게 된다.
소개한 백일도, 팔영대교, 능가사, 팔영산 네 곳을 가볼 수는 없다. 네 곳 중 세 곳을 멀리서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첫댓글
가입인사를 여기 이곳에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걷기를 좋아하여,,
유익한 정보찾아서 가입 하게 되엇습니다
저도,,지금,,남파랑길을 걷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남파랑길 몇 코스를 걷고 계시나요?
저는 올해 9월에 끝납니다.
@대모산 남파랑길,부산코스,창원코스,
거제와통영코스를 끝내놓고
지금은 땅끝,,90코스부터 역으로 시작하여
내일은,,61코스 하려갑니다
남파랑은 곳,,끝날듯 합니다
@억수 그러면 서해랑길에 참여할 수 있겠네요.
5월 14일 서해랑 2코스가 진행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