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8일, 1년 4개월에 걸쳐 내가 쓴 부산여대 김교성 이사장님의 자서전 '나의 선풍기, 나의 테니스'가 출간되었다.
테니스 동호인 기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지평을 연 부분이다. 출판된 책을 처음 받는 그 생경한 느낌 속에는 매우 복합적인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적인 뭔가가 있었다. 가끔은 문맥이 매끄럽지 않고 오타도 있고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해 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계기가 되었고 80되신 한 어른의 일생을 뒤돌아보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인생을 공부하게 되었다. 자서전을 대필하여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평생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자서전 의뢰인은 맨 처음 작가들이 대필해주는 전문 저서전 대리인들을 만났었다. 그러나 총 다섯 번 만나서 책을 두 달 만에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경악해서 고민하다가 차라리 테니스 부분도 잘 알고 있는 내가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나에게 자서전을 의뢰하게 되었다. 그 가교역할은 박원식 편집장이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 동안 족히 40번은 만난 듯 하다.
맨 처음 시도할 당시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았으나 다른 분의 자서전을 대필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일이었고 겁도 나게 했다. 처음 해 보는 일 인만큼 주변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바짝 긴장하여 몇 개월간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많이 방황을 하면서 그때부터 다양한 자서전을 사서 읽으며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시중에 나온 자서전들은 대부분 엄청 뻥튀기로 부풀려 화려한 글로 현혹을 시키거나 너무 철학적이어서 나 같은 초보가 읽고 모방을 하기엔 너무나 거창했다.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 하는 의뢰인의 취지에 전혀 맞지가 않았고 그 중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님의 자서전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를 보면서 신격호 회장의 주변 분들을 인터뷰해서 넣은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자녀와 측근의 회사동료 그리고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서 그분은 어떤 분인지, 평소 어떤 마인드로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스케치 한 부분을 도입하고 싶었다. 마침 편집에 도움을 주시겠다는 박원식 편집장님께도 건의하여 허락을 받으면서 굵은 아우트라인을 만들었다.
나는 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나의 모자라는 필력을 워낙 매서운 실력을 갖고 있는 편집장님이 보충을 좀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박 편집장님은 예상 밖으로 그 부분에 전혀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 마침 편집장님은 개인적인 사유로 테코를 그만두고 푸르덴셜 보험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고 나의 일인 만큼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탓인지 글에 대해 전혀 떤 반응도 하지 않아서 더욱 더 폭폭 함은 증폭되었다. 중간 중간 의뢰인과 함께 만나 체킹을 하면서도 자서전이 개인 블러그에 올리는 글인 줄 아느냐며 핀잔만 어찌나 해 대는지 갈고 닦기를 수십 번 했다.
의뢰인은 매우 다양한 삶을 사신 분이시다. 그 분은 평범한 일생을 사신 듯 하지만 평범 속에서도 매우 비범한 삶을 산 특별한 분이셨다. 자서전을 하나 만들어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기 위한 작업을 수십 년 전부터 해 오셔서 어찌나 꼼꼼하게 자료들을 준비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 인간의 삶, 80인생의 혼을 책 한 권에 다 넣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글이 모자라고 창의력이 부족한지 수도없는 한계를 느꼈다. 그냥 다른 작가들의 글은 술술 잘도 익히는데 내가 써 놓은 글들은 자꾸 읽다가 브레이크가 걸렸다. 매끄럽지 못한 글매에 주름이 지고 한숨이 늘어갔다. 그렇다고 중간에 못하겠다고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그대로 홀딱 벗은 나신으로 세상에 나가야 할 판이었다. 얼굴이 두껍거나 뻔뻔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라고 생각하면서 마무리 해 갔다. 내 눈에 비치는 흰머리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얼굴은 이미 육순이 된 여자처럼 움푹 패여 생기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러기를 10개월, 얼추 자서전 초안이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리된 자료들을 넘기고 올 8월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의뢰인은 나에게 넘겨받은 자서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보며 첨삭할 자료들을 엄청 많이 준비해 놓고 계셨다. 일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고 그 이후 나는 점점 더 지쳐갔다. 창의력도 없는 사람이 체력까지 지치다보니 시간은 점점 더 길어져 원래 계획했던 11월 말 출판을 한 달 더 미루어 겨우 2011년을 넘기지 않고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책이 처음으로 내 손에 닿는 순간, 내 몸에 이상야릇한 전기가 흘렀다. 기쁨보다는 홀가분히 먼저였다. 숙제를 다 해냈다는 느낌,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에서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홀가분 이라고 했다는 그 정신과 의사의 표현이 실감이 가던 순간이었다. 나의 부족한 글이 세상에 빛을 보면서 평생을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계기야 말로 더욱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를 하면서 나는 더욱 더 치열한 독서를 하면서 정진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아래는 김교성 이사장님의 서문과 후기를 책 속에서 옮겨 본다.
2012년은 여러분들이 더욱 더 건강하고 소망하는 일들이 순탄하게 풀리기를 기도하면서...
송선순배상
프롤로그
80인생을 회고하며
내 나이 80,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건강하여 날마다 운동할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되고 1남4녀 모두 반듯하게 자라 결혼하여 21명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나의 세상이며 나의 우주인 아내와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게 감사드린다. 감사하는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과 같다고 하니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서전을 준비하면서 80년의 지난 세월을 회상하던 중 다양한 나 자신과 만나게 되었다.
1950년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금성사에 입사하여 온갖 어려움 속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선풍기를 만들었고 대한특수가스로 옮겨 반도체용 공정가스를 국산화함으로써 반도체 육성에 앞장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뿐 아니었다. 1975년부터 혜화학원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 부산여자대학 이사장에 취임하여 34년 동안 사립학교 교육발전에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사단법인 한국사립 초·중· 고 학교법인협의회 정기총회에서 공로상 봉황장(제1524호)을 받았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회가 많았다
산업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남미, 유럽, 아시아 등 세계를 순회했고 대기업의 상무이사, 중소기업의 사장 그리고 한국시니어테니스협회 회장, 아시아시각장애인테니스보급협회 부회장 등 내가 맡은 일들은 크고 막중했으며 따라서 나는 그 직위에 따르는 명예도 가져보았다. 매순간 치열하게 살았던 80인생의 다사다난도 지금 뒤돌아보니 한 순간이었다. 인생은 결국 잠깐 스쳐가는 노정일 뿐이다. 언제 만나고 언제 헤어지는가를 정하는 것은 신이다. 부귀영화와 명예, 권력보다는 건강이 최우선이고 다만 얼마나 성실하게 인생을 살았고 얼마나 떳떳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을 추구하는 법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식을 낳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책을 쓰는 것’이라 한다. 특별하지 않은 80년간의 생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후손들에게 내가 살아온 흔적과 정신의 일부를 남기고자 시작한 일이다. 나는 몇년 전부터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테니스 보급을 위해 힘을 써왔다. 70여년 테니스를 취미로 축복받은 삶을 살았으니 그 기쁨을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일본에서 시각장애인에 관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연맹을 창설하였고 전국의 12개 맹학교에서 시범경기를 마쳤다. 3년이 지난 후 2010년에 전주 우석대학교에서 ‘시각장애인 테니스 대회’까지 마쳤으니 이를 발전시키는 일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이처럼 시각장애인들도 건강한 사람들처럼 테니스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내 생애 마지막 남은 목표이자 숙제가 되었다.
나는 요즘 욕심을 내어 중국어 배우기에 몰입하고 있다. 영어와 일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움에 힘을 쏟는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테니스 보급을 할 목표 때문이다. 70여년 테니스를 하면서 얻은 수많은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시작한 이 봉사활동은 날마다 새로운 힘이 솟게 했다. 젊음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나이듦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나이의 숫자는 늘어가나 내가 하고자 하는 삶을 향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는 아흔이 넘어서도 하루에 6시간씩 첼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유를 묻는 기자들 앞에서 카잘스는 말했다. “나는 지금도 매일 발전해 가고 있는 것같소(I think I’m still improving everyday).” 나 역시 전세계의 시각장애인들에게 테니스를 보급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한 조금씩 발전해 가리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행복 중에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더라도 자신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바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머지 않아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그가 그립다. 그가 여기 있는 동안 세상은 꽤 괜찮은 곳이었노라고.”
* 후기
자서전을 정리하면서 일 년 가까이 김교성 부산여대 이사장님을 만나왔다. 그동안 테니스코리아 동호인 기자로 취재를 하면서는 알 수 없었던 인생의 진진한 부분들을 공부한 시기였다. 아직 어린 필자가 80되신 김 이사장님의 삶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놓칠 수 없었던 점은 김 이사장님께서 평생 '성실'한 삶을 살아오셨고 80을 넘은 연세에도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다.
최근에도 매일 밤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한 시간이상 근력운동을 하며 체중을 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이유는 유서 깊은 전 일본 론코트베테랑테니스선수권대회 80세부 우승을 목표로 체력을 기르는 중이라고 하신다. 80연세에도 '목표'를 설정해 놓고 노력하는 그 모습에서 평생 녹슬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김 이사장님의 인생 키워드는 테니스였다. 테니스는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었고 그 에너지로 미개척 분야였던 국내 선풍기의 최초개발과 적산전력계 계량기의 개발, 산업가스 선진화에 열정을 태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또 80연세에도 국내외에 시각장애인 테니스 보급에 힘을 쏟는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매우 궁금했었다. 그런데 지난번 호텔에서 열린 김 이사장님의 산수연傘壽宴에 참석해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김 이사장님은 누구보다 튼튼한 심장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행복한 가정! 1남 4녀의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게 성장하여 총 21명의 대 가족을 이루었는데 그 자리에서 손자 손녀들이 피아노 바이올린 플룻 첼로등 다양한 악기로 협연하는 ‘즐거운 나의집’을 들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다. 행복한 가정은 김 이사장님이라는 전투기에 기름을 넣고 정비하는 기지(基地)요, 흔들리지 않도록 현실의 땅에 내려놓은 닻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일본에서는 '100세 현역'이라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전 세계에 제시하고 있는데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김 이사장님의 열정적인 활동을 보면서 100세 현역이 먼 이웃나라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앞으로도 건강한 활동을 기대하며 책을 쓴 경험이 전혀 없는 저에게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김 이사장님께 감사드린다. 또 편집을 도맡아 해 주신 박원식 전 테니스코리아 편집장님께도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싶다.
테니스코리아 동호인 기자 송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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