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의산 최동오와 전 외무부 장관인 그의 아들 최덕신은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같이 묻혀 있다. 이들은 일제시대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남쪽에서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하다 북으로 가게 된 공통의 운명을 갖고 있다. 하지만 월북해 함께 묻혀 있는 두 부자의 인생유전은 남쪽에 혈육을 남겨둠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들 분단과 함께.
손홍규 | 객원기자, 소설가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는 김규식 윤기섭 엄항섭 이준 이현상 조소앙 홍명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숱한 민족주의 인사들이 잠들어 있다. 명절이 되면 애국렬사릉은 성묘를 위해 찾아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그 가운데 남쪽에 혈육을 남겨 둔 넋들의 경우 제 살붙이가 올리는 떡 한 조각 먹지 못해왔다. 그런 넋들을 염두에 둔다면 최동오, 최덕신 부자는 그나마 복 받은 축에 낀다고 할 수 있다. 죽어서나마 같은 자리에 묻힐 수 있었으니.
의산과 춘교
의산 최동오는 1892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이다.
원래 동학 집안이었던 터라 의산 역시 천도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손병희 선생을 주축으로 한 천도교 세력들이 3·1운동을 준비하던 때, 의산 역시 의주 지역에서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각계 민족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천도교의 각 지부 역시 이에 호응해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의주 역시 열렬히 호응한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3·1운동 뒤 천도교는 내부적 갈등을 겪는다. 일단 교단을 정비한 채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자는 측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측으로 나뉜 것이다.
의산 최동오는 후자에 속했다. 의산은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9년 가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의산은 상하이에서 천도교 포교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해 11월 14일 내무부 참사를 시작으로 임시정부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의산 최동오는 같은 천도교 교도인 춘교 류동열과 깊은 친분을 맺는다. 류동열은 1878년 평안북도 박천 출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를 배후조종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된 경력이 있다. 그 뒤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으나 복역 도중 풀려 나와 만주로 망명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군무총장과 참모총장을 지냈다. 해방 후 초대 통위부장을 지냈고 전쟁 때 사망했다..
최동오와 류동열은 둘도 없는 막역한 사이였다. 의산은 1932년에 임시정부 국무위원, 1939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지냈다. 춘교는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내다가 1932년 임시정부에 복귀하여 군무부장을 지내고 광복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의산과 춘교는 독립운동의 한 배를 탄 동지였으며 또한 혈연적인 끈으로도 단단히 엮이게 되었다.
바로 1937년 6월 의산의 아들인 최덕신과 춘교의 딸인 류미영이 결혼을 한 것이다.
최덕신은 당시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군에 복무 중이었으며 류미영은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김구의 《백범일지》를 보면 당시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최동오 역시 그런 독립운동가들의 곤궁한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의산이 임시정부 정의부에서 운영하던 2년제 군정학교인 화성의숙의 교장으로 있던 때였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의 자식들이었는데 고 김일성 주석도 한때 그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의산은 배곯는 많은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시래깃국이나마 먹이면서 가르쳤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아들 최덕신은 베이징의 향산 자유원이라는 고아원에 맡겨둔 상태였다. 대개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렇듯이 최동오 역시 자신의 가정을 돌볼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새파랗게 살아있는 부모를 두고도 고아원에서 지내야 했던 최덕신. 그 어린 아이에게는 망국의 설움보다 부모를 생이별한 설움이 먼저 찾아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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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은 1914년 9월 17일 출생해서 초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뒤 외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천도교 교령으로 있던 1986년 입북했당.<신인간>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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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최덕신이 북경의 고아원에 맡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1920년대 초반 상하이의 천도교인들은 임시정부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제의 소탕 작전에 휩쓸려 가는 상황에서도 임시정부가 외교주의 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의산 최동오 역시 임시정부 노선에 비판적이었고 결국 상하이의 천도교 포교를 위한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성화회실을 1921년 8월에 베이징으로 옮겨버렸다. 1921년은 최덕신이 여덟 살이 된 해이며 후일 최덕신의 부인된 류미영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몇 해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의산은 1925년 말 그곳을 떠나 화성의숙을 설립하고 교육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 시기에 바로 최덕신이 베이징에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덕신은 아버지 최동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훗날 천도교 교령이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최덕신은 1933년 중국 남경의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 졸업한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자녀들은 조선인이 세운 학교뿐만 아니라 중국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상관없었다.
최덕신은 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정을 잠시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중국 중앙군에서 근무했다. 그는 인도, 미얀마 전선 등 항일전선을 두루 섭렵하며 전투에 참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중국 신일군(新一軍) 참모였던 최덕신은 광동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무장해제를 담당했으며, 1945년 12월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조선인 사병들을 중국화남지구 한국적사병 집중훈련총대로 조직하여 총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들을 비롯해 귀국하고자 하는 조선인 3000여 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이국만리를 떠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쳤다는 점에서 그렇다.
1946년 4월 15일 광동을 떠난 지 보름만인 5월 1일 최덕신은 부푼 가슴을 안고 해방된 조국,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씁쓸한 귀국
허나 그를 기다리는 건 따뜻한 환영의 인파가 아니었다. 최덕신을 비롯해 귀국선에 타고 있던 3000여 명의 사람들은 무려 18일 동안이나 상륙하지 못하고 해상에 묶여 있어야 했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돌림병이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최덕신은 5월 18일 미 군정 기관인 항만사령부에 불려갔다.
약간 미심쩍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서 조국에 돌아왔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를 기다리는 건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계 2세인 미군 상사로부터 면접이 아닌 사실상의 심문을 당했으며 지니고 있던 권총과 미화 500달러마저 몰수당해야 했다. 그 사이 배에 타고 있던 3000여 명의 사람들은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있던 최덕신으로서는 어리둥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최덕신이 겪은 일은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에서는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환대 아닌 냉대와 모멸감마저 받은 최덕신은 이튿날인 1946년 5월 19일 가족이 살고 있는 서울로 간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가족들은 적산가옥이나마 을지로 6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최덕신의 조부모를 비롯해 고향인 의주에 살고 있던 가족들이 모두 내려와 함께 살고 있어 집안은 비좁을 대로 비좁았다.
최덕신은 아버지 최동오와 장인 류동열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다음 해인 1947년 봄 사관학교 특별반 3기생으로 입학한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소위로 임관하지만, 일본군 하사관 출신 역시 그와 같은 소위로 임관하는 걸 보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중국군 대령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당시 최덕신의 장인 류동열은 초대 통위부장을 지내고 있었다. 통위부는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청이 설치한 국방사령부가 1946년 6월 이름을 바꾼 곳으로 군사 통할기관이었다. 하지만 통위부의 실세는 류동열이 아닌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 출신들을 극도로 경계했고 그들이 군내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마냥 모른 체 할 수만은 없었던지, 최덕신은 소위 임관 뒤 소령으로 특별 진급하였다. 원래의 계급인 대령보다는 한참 낮았지만 최덕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덕신은 대전의 2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고, 그곳에서 중령으로 승진하였다. 2연대 연대장직을 수행하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가 교장으로 있던 시절, 아버지 최동오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을 거쳐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남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 오래 전 스승과 제자였던 의산과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김일성 위원장은 옛 스승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식사대접을 하는 등 극진히 대우했으며,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의산은 최덕신을 불러다 놓고 북의 김 위원장이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그 학생이 맞노라며 자랑을 했다.
11사단장 시절
최덕신은 초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직을 물러난 뒤 3사단장으로 복무한다.
그때 군내부에서는 이른바 숙군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공산주의와 연루된 흔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력을 불문하고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최덕신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사실상 숙군은 일본군 특히 만주군 출신들이 독립운동 출신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최덕신은 어쩔 수 없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으며, 그러던 차에 유학의 기회가 생기자 미련 없이 3사단장 자리를 내놓고 1949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공항에 배웅나온 아버지 최동오의 모습을 그 날 이후로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 날의 작별인사가 부자에게는 생의 마지막 작별인사였던 셈이다.
흔히 최덕신이 6·25 당시 사단장을 지낸 사실과 거창 민간인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지독한 반공주의자였던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평가에는 허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방 뒤 이른바 반민족행위자들의 숙청이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친일파들이 득세하게 된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
친일파들의 득세는 군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항일경력을 가진 사람들은 군부 내에서 일부는 숙군 대상이 되었고 나머지는 별로 힘을 쓸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다.
만주군 출신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뻗치는 중이었고 독립운동 출신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반공에 몸을 담아야 했다. 최덕신도 그런 경우에 속했다.
공항에서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아버지 최동오와 이별한 최덕신은 미국의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보병학교로 옮겨갔다. 그는 1950년 6월 23일 보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그로부터 이틀 뒤 전쟁이 일어났다.
최덕신이 전쟁 중인 고국에 도착한 건 7월 14일.
아버지 최동오와 장인 류동열은 이미 북쪽의 ‘모시기 공작’에 의해 월북한 상태였으며 생사도 불분명했다. 그리고 여전히 항일 경력자들은 한직을 떠돌고 있었다.
최덕신은 상부에 1선 지휘관 직책을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가까스로 아직 편성되지 않아 간판뿐인 11사단장을 맡게 된다.
최덕신은 11사단장을 지내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개념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견벽청야는 중국 한나라 때 변경지역방어를 위해 사용된 전술개념으로 성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알려진 것과 달리 최덕신이 견벽청야를 실행한 이유는 빨치산 토벌이 아닌 군 내부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빨치산을 찾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소모적인 작전에 회의를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는 병력을 정규부대원으로 훈련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덕신은 빨치산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굳게 문을 닫고 지키는 전술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함평과 거창의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병력은 11사단 소속이었다. 당시 11사단은 후방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장교를 긁어모아 지휘관으로 채우고 지방 병사국에서 징모한 신병들로 충원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대였다.
또한 11사단은 미 9군단장 쿼터 중장 휘하에 배속되어 있어 미국의 허락 없이 단독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쿼터는 호남일대의 유격대를 소탕할 토벌임무를 최덕신에게 부여하였고 최덕신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나름대로 견벽청야라는 전술을 사용하여 빨치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그 와중에 돌발 사건이 일어났는데, 최덕신이 토벌대장으로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있을 때, 예하 부대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9연대는 원래 미 9군단에 배속되어 있다가 11사단으로 복귀한 부대였다.
9연대는 연대본부를 진주에 두고 경남 서부 산악지대 관할했다. 1950년 12월 5일 거창 신원면의 경찰지서가 습격 당하여 30여 명의 경관이 살상 당하자 11사단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이하 800명의 병력이 거창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경남 계엄사령부의 요청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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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힌 의산 최동오 선생의 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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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북으로 간 까닭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을 접한 최덕신은 자체적으로 진상조사단을 꾸려 사건 현장에 내려보냈다. 그리고 진상조사단의 보고서를 가감 없이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그대로 보고하였으나 그의 보고는 묵살되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그 역시 사단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단순하게 최덕신을 극렬한 반공주의자로 매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그가 맡고 있던 11사단이 민간인학살에 연루된 점, 어찌되었든 국방군으로 인민군에 대응하여 싸운 점 등을 놓고 볼 때, 그런 혐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당시 대다수의 독립운동 출신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최덕신에게 군인으로서 호승심과 명예욕마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과오가 없었다고도 할 수 없다. 허나 알려진 것처럼 그가 극렬한 반공주의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종국에는 동포의 가슴으로 총부리를 돌려야했던 역설의 상황은 우리 현대사가 안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공통의 죄업이 아니었을까.
남측 표현을 빌자면 납북, 북측 표현을 빌자면 이른바 모시기 공작에 의해 아버지 최동오와 장인 류동열은 북으로 갔다. 게다가 장인 류동열은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뒤 미군정 통위부장을 지내면서 한국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한 인물이다.
군인의 길을 걸은 최덕신이 장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최덕신은 여러 차례 자신의 아버지와 장인을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노라고 밝혔다. 그에게 북은 미지의 대상 혹은 아버지와 장인을 납치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결국 월북하여 그곳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정착한 사실은 참으로 한 사람의 인생역정을 볼 때 예측할 수 없는 인생사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어떻게 북으로 가게 되었을까?
1953년 1월 한국군 연락장교단의 일원으로 동경에 주재했던 최덕신은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 총사령관의 임명을 받아 1953년 휴전회담에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1956년 4월부터 베트남 대사직을 수행했으며 그 와중에 5·16을 맞이한다.
자신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시절 가르친 8기생들이 주축을 이룬 쿠데타였다.
최덕신은 고국으로 돌아와 외무부장관을 지내다가 1963년 9월 서독대사로 임명된다. 그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다니던 시절 배운 독일어와, 한때 국민당 정부의 군사위원회 소속인 번역처에서 독일어 번역과 통역을 담당했던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서독대사 시절 큰 어려움에 처한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 때문에 서독 정부의 거센 항의를 받고 불명예스럽게 대사직을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최덕신은 윤이상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라는 중앙정보부의 요구를 묵살했으며 훗날 윤이상 역시 최덕신이 동백림 사건과는 무관함을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동백림 사건을 막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최덕신과 박정희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며 최덕신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해 모종의 회의를 느끼게 된다.
천도교 교령에 취임한 건 1967년 4월이었지만 대사직을 그만 둔 9월에야 귀국해 교령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의 큰아들 최건국 역시 송두율과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에 참여하여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입국이 거부되었고 여태 망명객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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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힌 최덕신 선생의 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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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인생역정
10년 남짓 천도교 교령으로 지낸 그는 결국 자신을 압박해오는 박정희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1976년 2월 17일 한일종교인협의회에 참석한다며 영영 고국을 떠나고 만다.
이때부터 그와 그의 부인 류미영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망명을 하여 반유신 활동을 하는 바람에 남쪽에 남아있던 그의 자녀들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더구나 최덕신 류미영 부부가 1986년 입북한 뒤로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과 함께 정보기관의 감시, 협박에 시달려야 했고, 둘째 아들 최인국은 무려 열 번 이상 직장을 옮겨야만 했다.
최덕신은 1986년 영구 입북한 뒤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대의원 등 북측의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89년 11월16일 사망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최덕신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으나 그의 부인 류미영(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측 방문단장으로 남측을 방문해 혈육을 만날 수 있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역정이다.
이미 애국렬사릉에는 의산과 춘교가 묻혀 있었다. 춘교는 입북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하였고 의산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9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애국렬사릉이 조성된 뒤 독립운동의 거목이자 절친한 벗이었던 이 두 사람은 함께 안장되었으며 최덕신 역시 아버지와 장인이 누운 그곳에 묻혔다.
어쨌든 수십 년을 돌고 돌아 아버지 최동오와 아들 최덕신이 한 자리에 묻혔으니 질곡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견뎌 온 보상은 받았다고 여겨야 할까. [200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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