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희망의 비상구’, 문학
오 승 철 / 시인
<1>
위미(爲美)는 나의 놀이터였다
아직도 입술에 묻어 있는 휘파람이며, 고향이다.
<2>
섬과 섬 사이로
물소리만 들려라
외로운 날이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담 너머
저무는 산만 목마르게 불렀다
돌아와도 남녘 한 끝
시름은
못 재우네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 곤냇골,
지는 꽃의 설움에
깔리는 노을
바닷가 뉘 무덤가에 이르러
내 목빛도 붉어라
위의 시는 1980년에 쓴 연작 「섬동백」의 두 번째 작품이다. 굳이 이 시로 글을 여는 것은 20대 초반 위미에서의 내 자화상인 까닭이다. 그랬다. 내 고향 위미는 동백마을이었다. 앞바다에 지귀도가 있고, 동백나무 군락에는 140여년 생 500여 그루가 울타리를 둘러 장관을 이룬다. 나는 종종 이 동백 숲을 한 바퀴 휘 돌아오면서 수평선 너머 휘파람을 날렸고, 세상을 뜬 첫사랑에 꿩, 꿩 울었다. 그렇게 고향의 동백꽃은 그리움으로 피고, 지는 것이었다.
<3>
제주의 마을들이 그렇듯, 위미에도 등 뒤에 오름이 있다. 오름의 이름은 자배봉이다.
옛 지도나 구전에 따르면 ‘잔을 엎어놓은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뭔가 잘못된 표기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도내 368개의 오름 중에 잔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이 어디 자배봉 뿐이겠는가. 대부분의 오름이 화산이 터질 때 생긴 분화구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아마 20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내가 도청에서 일하고 있을 때 ‘오름나그네’ 김종철 선생께서 자배봉을 함께 오르자는 전갈이 왔다. 오름을 오르기 직전 우리는 감귤꽃의 향기에 한참을 홀려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오형, 혹시 이 오름에 자배나무가 많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들과 지넹이(지네) 잡으러, 고사리 꺾으러, 제밤(구실잣밤) 따러 이 오름을 들락거렸기 때문에 손금 보듯 구석구석을 꿰차고 있었다. “예, 이 오름은 특이하게 굼부리(분화구) 서쪽에 <안부리>라는 계곡이 있는데 거기에 자배나무가 엄청나게 많습니다”고 답했다. 그제서야 확신하듯 ‘자배나무가 많아서 자배봉’이라고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위미의 ‘배머들’이란 지명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땐 이 오름을 ‘망오름’이라고 했다. 현재는 남쪽 정상에 ‘봉수대’ 터가 복원돼 있다. 조선시대 통신수단인 봉화가 삼매봉 – 예촌망 - 위미 망오름 - 토산 망오름으로 연결되면서 도 전역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구실을 했다. 그 망오름 앞에 ‘망아피(대성동)’라는 마을이 있고, 거기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었다. 아직도 ‘망아피’라고 하면 “오마, 내 강생이 오란디야”라는 그 음성이 풀피리로 묻어난다.
내 유년 시절의 잠을 깨운 것은 개마띠(세천포구)에서 들려오는 발동선 시동음이었다. 그 통,통,통 소리를 받아 마침내 ‘꼬끼오’ 수탉 소리가 새벽을 열어젖혔다. 그때는 1km 쯤 떨어져 있어도 발동선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고, 파도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 장사를 하셨다. 그 덕택에 부유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점방’도 하셨는데, ‘과자’라는 무기가 있어서 나는 골목대장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 몰래 과자 한 봉지를 슬쩍하고 내달리면 또래들이 따라오는 것이 그렇게 신나는 일이었다.
사실 초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공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방과 후의 공부야 학교 선생 자녀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을 뿐이다. 동네 선배들은 간간이 동화책도 읽었지만, 나는 그마저도 안했다. 책보를 내던지자마자 고기 낚으러나, 지네 잡으러, 유름(으름)이나 제밤(구실잣밤) 따러, 그리고 꿩코(올가미)나 목제비코, 생이첫(새덧)을 놓으러 뛰쳐나가기에 바빴다. 노는 데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고, 열 살 이내는 모두가 친구였으며, 산과 들녘, 바다 모두가 놀이터였다.
그때 내가 즐겼던 놀이들을 새삼 헤아리면, 총싸움, 칼싸움, 활싸움, 기마전, 쟁기싸움, 싸움, 콩당당복닥, 한미소, 방치기, 빠짱(딱지)치기, 계급장치기, 다마(구슬)치기, 못치기, 군전치기, 쌈치기, 하나시, 꿘띄기, 삥이(삘기)치기, 고불락, 막을락, 발질로 찰락, 궁파쪼끼(가위바위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자치기, 송악총쏘기, 누래기총쏘기(고무총놀이), 탈락(생말타기), 죽마타기, 제기차기, 한다리 인다리 개천개, 우리집에 왜 왔니 등등이다.
<4>
사실, 위미마을이 언제 설촌 되었고, 그 지명 또한 어떻게 변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가 않다. 옛 기록이 부족한 탓이다. 1416년 제주가 3읍(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체제로 개편될 당시 지명을 문자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을 이름들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정의현에 속했던 위미는 마을 지형이 소꼬리 형상이라는데 연유해서 ‘우미(牛尾)’로 불렸는데,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또 우(又)에 꼬리 미(尾)로 잘못 기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고지도인 제주삼현도에도 ‘우미(又尾)’로 기록돼 있다. 이 지도는 1750년(영조 26년) 경에 만들어진 ‘전국군현지도첩’ <해동지도> 제7책 중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다. 그 후로 ‘뙤미’로 불리다가 1946년에 제주도제로 행정개편이 이뤄지면서 위미(爲美)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뙤미’ 또는 ‘웃뙤미’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위미는 정의현에서도 못 사는 마을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흥망성쇠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법이어서 감귤산업과 더불어 위미가 제주도 최고의 감귤주산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한때 전국 최고 수준의 고소득 마을이 되기도 했다.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저 푸른 초원 위에 목장을 경영하는 꿈을 갖고 서귀농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국어교사였던 정인수 선생님을 만나면서 그 꿈은 문인의 길로 바뀌게 되었다. 매일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찾아가 선생님이 귀찮아 할 정도로 습작시를 들이밀었다. 으레 선생님은 내 작품을 만년필로 좍 긋고 ‘문학이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현대시조를 처음 접한 것은 1974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 시조부문에 당선된 정인수 선생님의 ‘삼다도’란 작품이다. 물론 시조도 시이지만, 그 정형의 율격에 더 큰 매력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작품 한 편이 내 운명을 바꾼 것이다. ‘바람은 /파도 끝에 /파아란 불/ 켜/ 기어올라/ 소라 속 뒤틀린 세상/ 비비 틀어 올리다가/ 노오란 띠지붕 감돌아/ 밀감 잎에 스민다’ 는 그 작품은 아직도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정 선생님은 ‘삼나무문학동인회’란 이름으로 문예반을 지도하셨고, 선배 동인으로 김동주 김건일 김성진 형 등이 참여했다. 그때 담임이셨던 부희식 선생님께서도 문학의 길을 선택한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귀포를 중심으로 방황하던 문학청년들 끼리 모임을 결성했는데, 그것이 ‘정방’동인이다. 정방동인은 나의 문학에 대한 잔뼈를 굵게 하였고, 한기팔 선생님은 우리 동인들에겐 구원의 손길이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고, 서귀포 골목의 술집들을 쏘다녔다. 해마다 동미다방, 송미다방 등에서 시화전을 하였고, 꼬박꼬박 동인지도 냈다. 직장도 없는 우리의 호주머니는 쉽게 바닥이 났다. 그러다보면 시외버스 막차를 놓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왕 늦었다는 핑계로 외상술을 마저 마시고 자정이 넘어서야 혼자 20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무렵 술기운으로 ‘우리도 신춘문예에 한 번 응모해 보자’는 객기를 부렸다.
신춘문예, 그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복권을 사야하듯이,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위해 문방구에서 200자 원고지를 샀다. 그리고 두 군데 신문사에 원고를 보냈고, 곧 잊어버렸다. 애당초 당선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도 없었던 까닭이다. 시화전을 끝내고 집으로 왔는데, 형님이 “느 어디 글짓기 대회에 참석해난다?”고 묻는 것이다. “무사 마씸?” “동아일보 김광협이란 사람에게서 글짓기 1등 당선됐젠 전화와서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마 글짓기 1등은 ‘신춘문예’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형님에게 알기 쉽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 ‘희망의 비상구’를 보는 순간이었다. 당선작은 「겨울귤밭」으로 세상을 뜬 첫사랑에 대한 노래였다. 상금 30만원. 덕분에 우리는 며칠간 술독에 빠지는 행운도 덤으로 누리게 된 것이다.
귀한 것일수록
버리는 마음가짐
눈 내린 날은 장끼도
터를 잡고 우는데
외면코 등을 돌리면
하늘 끝에 머무는 노을
머물지 못하는 세월
나뭇잎 흔들고 갔다
바다 가까운 담밖에
지치도록 쳐든 가지
오늘밤 뉘 무덤가에
별빛 한창 푸르겠다
<5>
요즘 거의 매일 오름을 찾아가는 일을 낙으로, 혹은 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30여년의 공직생활 중에 ‘오늘만큼은 무단결근을 하더라도 오름을 휘갈아 다니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제 그 꿈이 이뤄진 것이다.
계절과 날씨, 그리고 기분에 따라서 그날 오를 오름을 선택하게 되지만, 매번 오늘 선택한 오름이 최고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때 ‘이 땅은 나의 시를 필요로 하고 있기는 한가?’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설령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난 나의 시를 사랑한다. 나는 늘 나의 작품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 전에 내 자신부터 감동시켜야 한다는 자세로 임해왔다.
등단 35년이 흘렀지만, 나의 작품은 158편에 밖에 되지 않는다.
연간 네다섯 편 꼴이다. 그나마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내공이 모자란 탓이겠다.
신춘문예 당선이 공직으로 나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지만, 바쁜 업무 중에도 난 결코 시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퇴임을 결심하면서 고향 위미로 내려갈 것인가, 제주시에 눌러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1년여가 지났지만, 그 고민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내가 고향을 뜬지 사반세기가 지나는 사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세상을 뜨셨다. 자꾸 고향이, 정방동인들이 그리워진다. 지난 3월 우리는 기어코 정방동인지 제8집을 냈다. 7집을 낸지 무려 22년만의 일이다. 서귀포 어느 식당에서 한기팔 선생님을 모시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순남이 누나, 현철이 형, 명호, 원욱이, 영매, 미희, 연미, 천민이 그리고 내가 모처럼 만나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물론 이번에 합류하지 못한 동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도 시심은 뜨겁게 살아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요즘 종종 위미엘 간다. 그때마다 선배나 친구들은 ‘지금까지 위미는 감귤로 부를 일궜지만, 앞으로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이라고 한다. 광활한 마을공동목장을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죽마고우 김창부는 산마장 입구에 감귤나무를 베어내고 수천 그루의 폿감낭(땡감나무)을 재배하고 있다. 올해 14년생 성목이 된 나무들이 게워내는 연둣빛은 실로 풋풋하고 싱그럽다. 이렇듯 수십만 평의 목장에 유실수를 심는 것도 위미의 미래 설계와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성 싶다. 어머니가 계신 곳이 고향이라 했다. 며칠 전, 어머니 아버지 산소를 다녀와서 「꽃타작」이란 시를 썼다.
봄바람이 났는지 어머니 안계시다
도둑 고양이처럼 이집 저집 기웃대다
경로당 꽃타작 소리에
응수하듯 터진 벚꽃
점당 십 원짜리 그 판도 판이라서
무슨 영문인지
비닐봉지 쓰셨다
선이 또 헷갈릴까봐
두건 쓰듯 쓰셨단다
봄바람이 났는지 어머니 안계시다
피박 한 번 썼다 치고
봉분 한 번 쓰셨나
연둣빛 타는 꿩소리, 이승이야 화투 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