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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서원의 성지 남산을 사랑하는 이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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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경전이고 화두"
“새긴 게 아니라, 찾아낸 거죠.”
경주남산연구소 소장 김구석(57). 그는 오늘도 남산에 다녀왔다. ‘경주 남산’을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연구소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백발이 섞인 머리와 주름이 지나간 얼굴, 살아온 만큼의 목소리와 살아야 할 만큼의 눈빛을 가진 초로의 남자였다. 하지만 ‘남산’을 시작하자 그의 표정과 말 모습은 달라졌다. 그는 남산과 남산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산에 처음 올라간 건 고등하교 1학년 때였어요. 그 때는 그냥 친구들이랑 동네 뒷산에 놀러간 거였어요. 놀이터 같은 거였죠.” 그는 학창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중학교 때 지역불교학생회인 ‘경주학생불교회’ 활동을 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낸 그는 남산을 오르내리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근데 머릿속에는 온통 남산인 거예요. 부서진 불상과 떨어져 나간 석탑들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그는 경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머릿속엔 남산이 가득했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남산. 그 남산이 그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 18년의 공직생활을 그는 미련 없이 접었다. 접어야 했다.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궁을 나선 부처님처럼, 그는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남산을 받아들여야 했다.
경주 남산은 지금까지 150여 절터와 130여 구의 불상, 100여 기의 탑 등 700여 점의 성보가 발견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와 신앙의 산이다. 그러기에 남산은 그냥 솟아 있는 흙의 높이가 아니며, 그저 산과 산을 잇는 숲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아직도 역사가 흐르고, 신앙이 숨 쉬는, 살아있는 산인 것이다. 산에 발을 디디면 산은 역사를 읽어주기 시작하고, 한 발 한 발 산과 가까워질수록 신앙이 되어가는, 남산은 그런 산이다.
“남산 보러 온 사람들하고 함께 산을 오르면서 남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공무원시절 학창시절 보았던 남산의 풍경을 떠올리며 남산에 다시 올랐다. 남산 곳곳에 널린 불상과 탑, 사라져간 절터를 다시 찾아다니며 남산을 공부했다. 부서진 불상과 깨진 석탑을 카메라에 담았고 길을 기억하고 그 길에 깃긴 전설들을 들었다. 그리고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남산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담았던 마애불의 이름, 석탑의 이름, 절터의 이름, 절터와 절터를 잇는 길, 그 길에 전해오는 전설들. 그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천년을 드나들었다. 남산을 찾은 사람들이 ‘김구석’을 찾기 시작했다. 직장보다 남산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진 그는 1984년 ‘남산사랑모임’을 만들게 된다.
“마흔 넘어 시작한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죠.” 그는 1997년 경주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작고하신 스승 윤경렬(사학자) 선생을 보고 마음을 먹었죠. 50년 동안 신라 연구만 하시다 돌아가셨죠.” 그는 학부를 졸업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공부에 목이 말랐다.
이때 18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동국대 대학원(미술사)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경주와 서울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남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경주남산연구소’를 열었다. 그리고 하나의 결실을 맺게 된다. 남산을 알리는 책 두 권이 나오는데 대원사가 출간한 <빛깔 있는 책들-남산(하나), 남산(둘)>이다.
“결국 남산을 이야기 하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부처님! 부처님 얘기해야 안 합니까? 남산을 알리는 일이 결국은 부처님 알리는 일입니다. 남산에 있는 불상과 탑들은 문화재가 아니라 ‘성보’입니다.”
그랬다. 그는 ‘불자’다. 단순히 남산에 미쳐 사는 것이 아니라 불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남산은 신행의 도량이다. 또한 그의 부인 임희숙 씨도 그에 못지않은 남산 전문가다. 2005년 그녀는 열암곡에서 불두 한 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경북유형문화재 제113호인 열암곡 석조여래좌상의 불두로 밝혀진다. 그리고 2007년 남산은 불자들을 놀라게 한다. 높이 6M의 대형 마애불인 열암곡 삼릉계석불좌상이 발견되는데, 임희숙 씨가 발견했던 열암곡 석조여래좌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불자들과 불교계가 관심을 많이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남산은 산 자체가 성보예요. 그 산에 묻혀있는 불상과 석탑은 당연히 성보입니다. 그런 유래 없는 산을 보존하고 그 속에 묻혀있는 성보들을 찾아내서 복원하는 일에 불자들과 주요 종단, 불교계 단체들이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요.”
남산의 불상과 석탑, 사라진 절터의 흔적이 단순히 문화재로만 인식되는 것이 그는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불자와 불교계가 관심을 가지고 남산을 보살필 때 비로소 남산은 불자들의 성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불교계 언론사 기자들과 불교계 단체에 종사하는 담당자들을 위한 펨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순례코스와 참배코스가 있죠.” 남산엔 여러 개 코스가 있지만 그가 추천하는 코스는 두 가지였다. 순례코스는 삼릉에서 용장리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삼릉사, 용장사지 삼층석탑 등 많은 성보를 만날 수 있는 코스다. 6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참배코스라고 말하는 코스는 불자들을 위한 코스로 월정사, 옥릉암, 보리사를 보는 코스인데 2~3시간이 소요되며 안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남산사 석탑 앞에 섰다. 30년 넘게 오르고 내린 산, 남산. 그에게 남산은 읽어야 할 경전이고, 넘어야 할 화두다. 쉬지 않고, 놓지 않았던 남산. 지난 30년이 이제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그는 서원했다. 어제 걸었던 길을 다시 걷겠다고. 어제 보았던 석탑을 다시 보겠다고. 앞으로도 남산을 열심히 알리겠다고. 부처님을 열심히 알리겠다고.
그는 주 2회 강좌와 주말과 공휴일에 진행되는 120여 회의 무료 안내, 매월 보름에 하는 ‘달빛기행’ 등을 진행하며 연간 150~200회 남산을 찾는다. 그는 요즘 엽서 만드는 재미에 빠져있다며 지금까지 나온 엽서를 기자에게 건넸다. 그 엽서 속엔 그의 가슴을 흔들었던 ‘남산’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남산을 알리며 사는 남자 김구석. 그는 내일도 남산 구석구석을 누빌 것이다.
남산은 불모…그 혼을 '성철 수묵화'에
“남산은 신라의 불모(佛母)입니다. 그곳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노천박물관이죠. 용장사곡 삼층석탑, 마애보살반가상, 칠불암, 부처바위도 있고 세계 유일무이 신성산입니다.”
세계적인 수묵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66)은 경주 남산자락에 한옥을 지어놓고 신라를 그린다. 서울을 떠나 경주에 안착한지 10년이 넘은 박대성 화백은 온전히 신라사람이다. 운문사가 있는 경북 청도가 그의 고향이니 신라시대 행적구역으로 보면 날 때부터 신라인이다. 그래서 박 화백은 자연스레 1960년대 중반부터 40년 넘게 경주를 그려왔다.
박대성 화백은 제도권 정규교육을 받거나 특별히 사사 받은 스승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1970년대 국전에 8번 수상하고,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동양화단에서 이변을 일으켰던 작가다.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6ㆍ25 발발로 부모님과 왼쪽 손마저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림이 좋았던 작가는 10살에 붓을 들어 묵화부터 고서(古書)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살아있는 교본들을 몸으로 느끼고 내 것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리는 고된 독학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겸재와 변관식, 이상범에 이어 실경산수의 맥을 잇는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미국과 대만 등 세계 미술계의 호평을 받아온 박 화백은 모두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외국으로 나갈 때 경주로 돌아왔다. 서구적인 것이 곧 현대적인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뒤로하고, 한국화의 기본을 꾸준히 탐구하는 가운데 변화의 원천을 찾기 위해서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박대성 화백은 경주의 자연과 문화역사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낸다. “경주박물관과 분황사가 있는 곳에서 보면 남산을 바라보면 모란꽃을 피운 모양 같습니다. 꽃잎이 있는 자리에는 신라 유물들이 있지요.” 그래서인지 박대성 화백이 그린 남산은 모란꽃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림 속에서 경주와 남산은 왜곡, 과장되거나 비현실적 구도로 구성되는 등 자유롭게 표현된다.
현재 박대성 화백은 2012년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수묵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2월 12일~3월 4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도를 듣다(聞道)-김생과 권창륜ㆍ박대성 1300년의 대화’ 특별전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정신과 혼을 담고 있는 경주의 자연과 문화 사랑이 남산의 소나무 처럼 자리 잡고 있다. 박대성 화가는 “나의 그림은 내 마음속에 갖고 있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며 “신라 천 년의 잠을 깨우는 뇌관(雷管)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불국토 지향한 신라인 염원 카메라에
인류학자 토인비는 터키 이스탄불을 두고 ‘인류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야외박물관’이라고 말했다. 김세원 울산대 디자인대학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경주가 오랜 세월을 두고 장황한 역사의 흔적을 남긴 대표적인 도시”라고 밝혔다.
특히 경주 남산은 신라 천 년의 흥망성쇠를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불상·불탑 등을 비롯한 불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김세원 교수는 경주 남산을 사진으로 기록해 지난 2010년 5월 ‘천년의 시간ㆍ신라의 숨결 경주남산전’을 개최했다.
김 교수는 1995년 산악회를 통해 경주 남산과 첫 인연을 맺게 됐다. 김 교수는 “처음에는 야간 산행을 하느라 돌탑과 돌부처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지만, 매월 음력보름에 도반들과 남산을 찾으면서 점차 남산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회고했다. 김세원 교수는 “한 때 故 윤경력 선생의 저서 <겨레의 산 부처님 산>을 옆에 끼고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책의 내용을 현장과 대조하는 작업도 진행했었지만, 마무리 짓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김세원 교수는 2009년부터 1년 남짓 동안 미술사를 전공한 아내와 의기투합해 경주 남산의 유물·유적을 본격적으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불교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불교에 관한 지식은 더욱 초라하다. 심지어 불자도 아니지만 조상들의 신앙과 예술이 녹아든 남산의 문화와 대화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경주 남산은 불국토를 지향한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신앙의 산이며, 우리나라 불교유적의 보고요,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야외박물관이다”고 설명했다.
김세원 교수는 “상선암 마애대좌불과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남산은 정말 아름답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남산에 오르고 있지만 가면 갈수록 매력적인 산”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아직도 남산에 발길이 닿지 않은 골짜기가 많다. 지속적으로 남산을 찾아 더 많은 남산의 모습들을 발굴하고 싶다”라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산재해 있는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보호·보존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첫댓글 오는 4월 7일(토), 8일(일)은 경주 남산을 찾기로 했으니 미리 일정을 조정해 보세요. 향불교 남산순례가 있습니다.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합니다. _()_
경주 남산은 그 자체가 불보(佛寶)이며, 범 불교계차원의 관심과 지원으로 '불보성지'를 지키고 가꾸는데 힘써야겠습니다. _()_
매월 보름 "부처님 산 겨레의 산" 엔 "빛기행" 이 수행 되다니, 신라인이 남긴 불교 유산을 발굴하고, 지키고, 가꾸는 분들 정말 감사 합니다. 인간이 만든 불법, 인간이 만든 부처, 인간이 전하는 "설법" 모두가 "" 자비로운 세상""을 열어 가는 마음이 겠지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