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룡산 석굴 大佛> |
사진설명: 천룡산 석굴 제9굴에 봉안돼 있는 대불(大佛). 높이 8m나 되는 당당한 모습의 불상이다. |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선(禪)’이 태어난 곳 소림사. ‘수행지’보다는 ‘관광지’로 돌변한 소림사의 모습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하남성 성도(省都) 정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림사에서 달려 정주에 도착한 일시(日時)가 2002년 10월9일 12시30분. 소림사를 떠난 시간이 오전 11시. 1시간 30분 만에 정주에 도착한 셈이다. 점심을 먹고 정주 시내를 구경했다.
중국 8대고도 중 하나인 정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다. 정주의 오랜 역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상대(商代. 은나라) 고성유지(古城遺址). 정주 시내 자형산공원 남쪽에 고성의 북벽.동벽이 남아있는데, 흙으로 쌓은 성은 3500년 전의 도성지(都城址).고성유적으로 인해 정주는 중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도시로 평가된다. 상대 고성유지 동쪽 35km 지점에 있는 신정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정(鄭)나라의 수도였던 곳. 게다가 한나라.당나라 시대 고분도 적지 않아 정주는 이래저래 중국 역사를 간직한 격조 높은 도시로 유명하다.
정주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들은 정주 시내에 있는 하남성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도 점심을 먹고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웅장한 박물관에 들어가니, 앙소(仰韶)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먼저 보였다. 중국 황하강 중류에서 발생한, 채도(彩陶)를 동반한 신석기문화가 바로 앙소유적. 앙소유적은 스웨덴 출신의 고고학자.지리학자인 J.G 안데르손(1874~1960)이 1921년 하남성 영지현(潁池縣) ‘앙소 부근’에서 신선기시대의 큰 취락지를 발견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 화북(華北)지방에서 일어난 최초의 농경문화를 ‘앙소문화’로 부르는 것도 이 유적 때문이다.
‘채색된 토기’가 동반되는 것이 특색이어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주로 조를 재배하였으며 돼지.개 등을 사육했다. 앙소문화 유적은 하남성 서부.산서성 남부.섬서성 중부에 널리 분포하지만, 섬서성 서안의 반파(半坡)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파 유형 문화’와 하남성 섬현(陝縣)의 묘저구(廟底溝)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묘저구 유형 문화’로 대별(大別)된다.
앙소문화 유적과 함께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시절의 청동기 유물, 한나라.당나라 시절의 토기, 수나라.당나라 시기의 불교유물 등 국보급 유물들이 전시관에 빼곡히 차 있었다. 모든 전시관을 차례로 돌아본 다음 정주시박물관으로 갔다. 정주시박물관엔 불교유적이 특히 많았는데, 불상과 사리용기 등 다른 박물관에서 보기 힘든 유물들이 가득했다. 박물관을 일별하고 나와 저녁을 먹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낙양에서 정주까지 우리를 안내한 방호(方虎)씨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저녁 9시59분발 기차를 타고 태원(太原)으로 출발했다.
정주 하남성박물관에서 ‘신석기 유물’ 견학
사진설명: 천룡산 석굴 전경. 훼손이 매우 심하다. |
다음날(2002년 10월10일) 아침 8시 차 안에서 일어나니 태원이었다. 기차역의 다소 쌀쌀한 아침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태원에서 북경까지 우리를 안내할 오승화(吳承華).임복금(林福錦) 두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를 빠져나와 한적한 들판을 달리니 저 멀리 석굴이 있음직한 산이 나타났다. “저 산에 석굴이 있겠네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안내인은 적잖이 놀라는 눈치다. 인도, 아프가니스탄, 중국 신강성과 하서주랑 등지에서 수많은 석굴을 보아온 터라, 산(山) 모습만 보아도 석굴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느 정도 알게 됐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해발 1700m 천룡산 정상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정상에서 다시 산을 내려 성수사 앞에 내렸다. 성수사에 서면 석굴이 잘보이기 때문이다. 거목은 없고 작은 나무만 있어, 석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수사와 천룡산 석굴을 일별한 뒤 다시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 바로 밑, 백색 사암의 암벽이 600m나 띠를 이루고 있는 곳에 34(석굴 27. 감실 7)개의 석굴이 개착돼 있었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의 〈서역 실크로드 탐사기 - 중국.서역남로.초원로 편〉(한.언출판사)에 의하면 천룡산 석굴은 동위(東魏. 530~550) 때 처음 개착되기 시작했다. 폐사된 이곳에 다시 석굴을 개착한 이들은 당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고구려 유민. 이들은 부처님 힘으로 망국의 한을 이겨내고자 불상 조성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천룡산 석굴의 불상들은 당나라 시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품”으로 현재 평가되고 있다. 백제 유장(遺將) 흑치상지 장군의 둘째딸 낙랑군 부인과 남편인 순장군(고구려 유민으로 추정) 부부가 고구려.백제의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이곳에 올라와 석굴을 개착했다고 한다. 천룡산 석굴의 역사를 기록한 비문에 따르면 “신룡 2년(706) 음력 3월 낙랑군 부인 흑치씨와 더불어 순장군은 고원을 넘고 대협곡을 지나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며, 나뭇가지와 덩굴을 끌어 잡으면서 간신히 정역(淨域. 천룡산 석굴)에 도착했다.”
사진설명: 천룡산에 있는 여러 석굴들. 아래 사진은 제9굴 외관. |
천룡산 석굴의 역사를 생각하며 계단을 타고 계곡을 내려갔다. 용문석굴, 돈황석굴 등엔 수십 명의 보호자가 있었는데, 천룡산 석굴엔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먼저 대불이 안치돼 있는 9굴로 나아갔다. 웅장한 3층 목조전실로 보호되고 있는데, 전실은 원래 명나라 때인 1506년 재건됐다. 청나라 때 중건됐다 1948년 실화(失火)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다 최근 3층4중 건물로 복원한 것이라 한다. 1층에 들어가 먼저 삼배를 올렸다. 부처님이야 민족을 구별하고 따지지 않겠지만, 우매한 중생인지라 “우리 선조들이 조성한 석굴”이라 생각하며 더욱 정성스럽게 예를 드렸다. 2층을 지나 3층에 올라가 대불을 찬찬히 보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椅子像)’인 대불의 높이는 8m. 거구의 불상이 여러 차례 화재에도 완전하게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비록 두 손은 훼손됐지만, 다른 곳에는 거의 이상이 없었다. “당당하면서 풍만한 가슴, 턱 지게 둥근 얼굴, 큼직한 육계, 나발을 한 머리카락 등 모든 것이 당나라 불상의 특징”(문명대 교수)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의자에 내린 두 다리는 당당한 형태였으며, 두 발 또한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조각돼 있었다.
9굴을 나와 10굴 쪽으로 갔다. 지상에서 4~5m 되는 절벽에 석굴들이 연이어 개착돼 있다. 석굴 주변에 작은 불상들이 새겨진 감실들이 먼저 나왔고, 감실 다음에 나오는 굴이 제10굴. 굴 내에 들어가니 참혹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10굴에 있었던 불상들을 대부분 일본에 가 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이곳을 점령했을 당시 대부분의 불상을 뜯어갔다고 한다. 입구엔 왼쪽 인왕상만 남아있고, 굴 내엔 온전한 불상이 하나도 없다. 머리가 없거나, 몸체가 완전히 뜯겨지고 흔적만 남아있는 조상(彫像)들이 보는 이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동봉(東峰)의 석굴엔 그나마 온전한 불상들이 남아있었지만, 서봉(西峰)의 석굴엔 온전한 불상이 거의 없었다. 11.12.13.14.15.16.17.18.19.20굴을 차례로 보고 마지막 굴인 21굴에 도착했다.
흑치상지 딸 낙랑군부인 등이 조성한 21굴 참배
21굴 역시 완전히 파괴된 상태. 21굴은 미국의 미술사가 ‘마릴린 리’의 설에 따르면 우리 선조들이 개착한 굴이라 한다. 706년에 개착되기 시작해 707년 완성된 21굴은 고구려의 유장 순장군과 낙랑군부인이 뚫은 것이다. “선조와 생존하는 인척을 위하여 삼세불(三世佛)과 현성(賢聖)을 경조(敬彫)했다”고 한다. 후벽에 결가부좌한 불좌상과 좌우에 보살 등 2존상을 새겼는데, 현재 본존은 대좌만 남아있는 상태. 좌협시불은 완전히 없어졌으며, 우협시불도 파손이 심했다. 본존의 머리는 포그미술관, 우협시불의 머리는 메트로폴리탄, 신체는 일본 출광(出光)미술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반면 좌협시불의 머리는 일본 근진미술관에 가 있다. 21굴 3존불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각각 다른 곳에 있는 셈. 우리 선조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개착한 21굴의 3존불이 미국과 일본에 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일제(日帝)의 부당한 한반도 강점(强占), 해방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국의 문화적 지배 등과 관련해 생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이런 저런 상념을 머리에 담은 채 21굴 후벽의 좌협시보살상을 보았다. 머리는 뜯겨지고, 두 팔은 파손됐지만, 통통하고 탄력감 있는 조상(彫像)이었다. 상이 온전하다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연화대좌가 남아있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21굴을 끝으로 천룡산 석굴을 나와 정상에 올라갔다. 석굴을 다 보고 나니 “왜 보호자가 없는지” 이해가 됐다. “규모도 작고, 그나마 훼손이 심해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 했다. 아니면 “고구려 유민들 개착한 굴이라, 중국인들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씁쓸한 기분으로 산을 내려와 간단한 요리로 점심을 떼우고,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중국불교 제일의 성지’ 오대산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