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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1:10-20
찬송가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한계(10-12)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 쏟아내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소발의 표현 역시 흠잡을 때가 없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욥기의 전체 맥락에서 욥의 친구들의 말을 보면, 친구들의 표현은 상황에 맞지 않는 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삶 속 고난의 복잡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단순히 윤리적 원인과 그 결과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상태와 하나님의 징계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입니다.
(10-12)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의10-12절은 소발이 욥에게 하는 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소발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벌하거나 심판하실 때 아무도 그분을 막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11절에서 소발은 "하나님이 사람의 허망함을 아신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모두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은밀한 죄를 보시기 때문에 욥도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발은 욥의 고난이 단순한 죄의 결과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강조하지만, 소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틀에 욥을 가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단순화하는 오류입니다.
소발은 12절에서도 ‘들나귀 새끼’를 예로 들어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소발은 욥이 자신의 문제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욥이 허망한 사람, 즉,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발의 문제점은 소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허망한 사람, 즉 들나귀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인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3)는 소발의 태도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자신이 더 큰 지혜를 가진 것처럼 욥을 향해 행동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죄를 지적하기 전에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틀 안에서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 역시 이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난이나 문제를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혜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타인의 상황을 판단할 때는 항상 겸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판단하는 자세가 아니라, 사랑과 공감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구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욥을 향한 일방적인 회개 강요(13-20)
(13-14)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3-14절에서 소발은 욥에게 마음을 바로 정하고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며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바로 정하다"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소발은 욥의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확신하고 있기에, 그가 회개해야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욥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발의 이러한 충고는 우리가 알다시피 욥의 실제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종종 욥의 친구들, 특히 소발처럼 타인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너무 쉽게 "기도하지 않아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 문제나 경제적 어려움, 가정의 갈등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상대방의 영적 부족함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신자에게 절대적인 말씀 읽기와 기도와 예배 생활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모든 고난을 단순히 신앙적 태만이나, 기도 부족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접근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다른 이들의 고난의 이유 역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발의 말은 옳은 진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소발이 본래 의도한 것은 욥이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으나, 그의 잘못된 판단은 욥의 고통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타인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판단하게 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내 이웃의 신앙에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또 어떠한 일의 동기가 선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 모든 일이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권면의 말을 할 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접근해야 합니다.
(15-17)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여기서 소발은 욥이 회개하면 다시 당당해질 것이고,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욥이 회개하면 회복의 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이 구절에서 소발은 고난의 해결책을 죄에서의 회개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고난이 꼭 죄의 결과만이 아니라, 신비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이는 인간의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임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 3절에서 맹인의 고난이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이유는 도덕적 범주를 넘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묘막측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무거운 짐처럼 보이지만,하나님께서는 그 뜻 안에서 우리의 고난도, 아름다운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치유하심으로써 드러낸 것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맹인의 치유 사건은 고난이 단순히 징벌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속에서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고난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며, 그분의 선하심과 영광이 드러나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신비한 섭리는 우리가 당장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요구합니다.
(18-20)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여기서 소발은 욥에게 회개하고 돌아서면 희망과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짓습니다. 그는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8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19절)며 욥이 회개하면 삶의 안정과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따른 약속을 내세웁니다. 이는 소발이 인간의 희망과 평안이 도덕적 행동의 결과로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희망과 평안은 인간의 노력이나, 어떠한 업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욥의 고난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아온 것이며, 그렇기에 욥이 앞으로 찾게 되는 희망과 평안 역시 하나님께 주시는 것이지, 다른 이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성실하심에서 나옴을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그 무엇을 이룬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진정한 희망과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진정한 개혁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나 진리이고, 이 진리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자, 위로, 또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면, 개혁이라는 말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아도, 그 무엇보다, 개혁적인 삶. 그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우리는 소발이 욥에게 말한 내용을 중심으로 소발의 생각과 그 오류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소발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고난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원인과 결과로 해석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소발은 인간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만 생각하며, 기도를 통해 모든 문제가 일차원적으로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마법과 같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내 주변에 누군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일어나며, 나에게 찾아온 고난을 나 스스로 해석할 때도 찾아옵니다. 누군가가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 원인을 쉽게 단정하고, 그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비판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신뢰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의미와 또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가족과 영적 동역자의 의미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뜻 안에서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피어날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나의 생각 나의 판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의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 우리 주님과 함께 각자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가시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인간의 한계를 다시금 깨닫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소발처럼 우리의 지혜와 판단으로 타인의 고난을
또 나의 문제를 쉽게 단정 짓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난의 이유와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공감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내 이웃의 아픔에 함께 우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다니엘이 고난 속에서도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다니엘 6:11),
우리도 눈앞의 어려움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창문을 열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그 뜻이 우리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소발은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그의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단순히 내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더 큰 섭리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11-12절)?
2. 소발은 욥에게 회개를 강요하며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타인의 고난이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하며 판단한 적이 있습니까?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간과한 경험이 있다면 무엇입니까(13-14절)?
3. 소발은 욥에게 고난을 끝내기 위한 방법으로 회개를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내가 오해받고 있거나 억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의 억울함을 맡기고 신뢰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15-17절)?
4. 소발은 회개 후에 희망과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며 고난을 단순한 도덕적 문제로 해석했습니다. 나에게 희망과 평안을 주시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과 평안이 찾아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18-20절)?
(작성: 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