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문장》, 2014년 《창작에세이》 신인상 등단
•에세이집 『신명난 탈출』
•달구벌수필, 문장작가회 회원
•물빛 동인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1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부산 딸네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한껏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들러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팔다리를 흔들어 몸을 풀고 허리를 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후 다시 차에 올랐다. 감히 동일 소천同日召天을 어찌 바라랴. 우리 부부는 누군가 핸들을 잡으면 다른 한쪽은 뒷자리에 앉게 되어있었다. 그날은 내가 운전을 했으니, 아내는 의당 뒷자리에 앉았다. 차는 서서히 휴게소를 떠나 고속도로 본선에 들기 위해 진입로를 막 오르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당신 어디야?”
아내였다. 직접 말하면 될 일을 무슨 분위기까지 잡아가며 나눠야 할 정겨운 대화가 있다고 전화를 거나 싶었다. 순간, 뒤가 서늘
한 느낌에 돌아보니 뒷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이게 어찌된 건가?’ 나 혼자 차를 몰고 떠나온 것이었다. 하늘같은 마눌님을 고속도로 휴게소에 남겨두고 내달렸으니, 당황스럽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평생, 뒤를 못 돌아보던 사내가 또 크게 한 건 저지르고 말았다. 매사 마무리가 약해서 낭패를 당하면서도 그놈의 고약한 버르장머리는 꼭 중요한 때를 기다렸다가 골탕을 먹이곤 한다. 아내는 쓰레기를 버리려 잠시 내렸단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고은, 「그 꽃」)을 난 내려올 때도 보지 못했다. 마음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도 아닌데, 어찌하면 좋으랴.
지남철 같은 내 사랑! 오늘도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경계를 넘나들기 바쁘다.
#2
봄날 아지랑이 아롱거리듯 기억들이 가물거린다. 한참을 더듬거려야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고, 시간도 오락가락한다. 회합은 의당 일곱 시려니 생각하고 나가면 벌써 종반을 치닫고, 행사가 오늘인가 싶어 나갔더니 내일이란다. 생각은 폭탄을 맞은 듯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
신경과 전문의가 쓴 『앞쪽형 인간』에서는 기억상실이나 치매는 전두엽의 성능 저하일 수 있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앞머리가 지끈거렸다. 치매 검사실에선 이리 가리고 저리 숨긴 허울들이 저절로 벗겨졌다. 오늘이 며칠이냐, 무슨 요일이냐, 여기가 어디냐는 물음
에 어찌 감히 거짓말을 둘러대랴. 너무 쉬운 질문들이라 하품이 나고 눈꺼풀이 절로 내려앉았다. 멍청하게 눈을 껌뻑이다가, 별 치사한 걸 자꾸 묻는다 싶어 버럭 화를 낼 참이면 그 또한 치매 증상이라니 성질을 부릴 수도 없었다. 마음은 한낮인데 몸은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나이 먹는 것인 걸 마치 훈장처럼 달고 다녔더니, 꼰대란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다반사다. 장은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는데 나는 왜 맛이 가는 걸까. 외출할 땐 툭하면 핸드폰이나 지갑을 빠뜨리고 나갔다가 곤란을 겪곤 한다. 친구들은 이왕이면 자기들 앞에다 지갑을 좀 흘리고 다니라고 농을 치지만 웬걸, 지갑을 놓고 나가서 공밥 얻어먹은 날이 내겐 복 터진 날인 걸 그들은 아직도 모를 거다.
장자는 부디 잊고 살라 했는데 신경과 의사는 잘 챙기며 살라 하니, 헛갈린다.
요즘,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 밤 잠결에 데려가 주세요’라는 기도로 잠이 들지만, 다음날 아침엔 언제 그랬냐는 듯 발딱 일어나 고장난 오토바이처럼 털털거리며 산다. 어찌하면 좋으랴, 하룻밤도 못 건너는 내 기억을.
오늘도 건망증과 치매의 경계를 넘나드느라 숨이 가쁘다.
#3
새침데기 아내가 요즈음은 종일토록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더러는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기도 한다. 정성들인 선물의 효과도 열흘이요, 특별 보너스의 단맛도 한 달 넘기기 어려웠는데 지금 우리 집은 일 년 내내 감동이 물결친다. 광풍처럼 밀려온 미스터 트롯 열풍 때문이다. 그들의 열창은 곡진하다. 세상사 얄궂게도 경쟁이 치열할수록 감동은 깊어지고, 코로나로 기진맥진한 국민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을까 싶다. 젖 먹었던 힘까지 다 쏟아내는 그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도 연미복 차려입은 매미처럼 목이 터져라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젖혔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은 매미의 껍질 같은 허물만 남았다. 아내는 젊은 트롯 가수들에게 흠뻑 빠졌고 난 어느새 투명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레를 살기 위해 칠 년을 기다린 매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도 나를 찾을 수가 없다.
모임에서 사람들이 어쩌다 나를 치켜세울 낌새라도 비치면 아내는 가을무 자르듯 서둘러 말을 싹둑 자르고선 ‘사흘만 데리고 살아보라’고 툭 내던져 버린다. 작은 꽃 한 송이에 감탄하고 장엄한 자연 앞에선 전율하면서 지남철 같은 아내에게는 왜 데면데면하게 대했을까?
지난가을 아내 유기 사건의 형벌은 참으로 가혹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빈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보인다고 한 장자의 말씀을 따라 보고자 했을 뿐인데, 웬 날벼락인가 싶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위로까지 받아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오늘도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느라 허둥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