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에서는 호구산 산자락 임도를 걸어서 미국마을과 서포김만중 문학공원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남파랑길 42코스 2부는
미국마을에서 ㅡ 서포김만중 문학공원ㅡ 산자락 임도 ㅡ 두곡해수욕장까지
산자락 임도에서 지나왔던 41코스와 42코스에 위치한 길현미술관을 앵글에 담아봅니다
지나왔던 길현미술관을 임도에서 줌업하여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남파랑길 41코스 종점이 원천항이였지요. 지금은 2km 연장된 신전숲(앵강다숲)이지요
임도에서 망원렌즈로 줌업~
41코스 해변을 걷다보면 산뜻하게 깨끗한 카라반캠핑장을 만나게 되지요
이곳에서 한참 동안 뷰(view)를 즐깁니다
미국마을
남파랑길 42코스에서 왕복 400m 정도 떨어져 있는 서포김만중 문학공원을 들렀다 올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편도 200m 정도 벗어나 있는 서포김만중 문학공원을 다녀올려고 합니다
서포김만중의 동상 앞에서 바라보는 남해 노도
남해 노도 자신의 유배지가 바라보이는 곳에 서포김만중의 동상이 세워저 있습니다
남해 노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유배되었던 곳입니다
김만중은 1689년(숙종 15) 노도로 유배 와서 1692년(숙종 18년) 56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유배기간 3년 동안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하였습니다
노도선착장엔 문학의 섬을 알리는 서포의 책 조형물이 있습니다.
서포의 책은 왼쪽에 구운몽 본문을 발췌한 내용이,
오른쪽에 서포 김만중 조형물과 앵무새의 부조가 조각되어있습니다.
(부조(浮彫) :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일)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같다>고
조형물 아래쪽에 <서포만필>에 나오는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앞에 있는 섬 노도는 예부터 배젖는 노(櫓)를 만드는데 쓰이던
목재를 많이 생산해서 노도(櫓島)라 유래되어서 노도(櫓島)라 부르고 있으며
또는 삿갓이 바다에 떠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섬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김만중(金萬重, 1637년 3월 6일(음력 2월 10일 ~ 1692년 6월 14일(음력4월 30일)의 허묘는
1692년 4월(음력)부터 그해 9월까지 시신이 묻혀있었다 합니다
사씨남정기원에는 사씨남정기 소설에 등장하는 성진(양소유)와 팔선여 동상으로 꾸며진 공원 입니다
사씨남정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서포(西浦)는 누구인가
김만중(金萬重)의 아버지 김익겸은 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그는 강화도로 가서 강화산성을 사수하다가 강화산성이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함락되기 직전에
남문으로 올라가 홀로 분신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23세였으며 충정공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 호는 서포.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서포 김만중은 조선 19대왕 숙종(肅宗)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만기의 친동생이다.
숙종이 장희빈을 끔직히 총애할 때 숙종의 면전에다
조사석(소론계열)의 베갯머리 송사냐고 물었다가 바로 파직당한 김만중(서인 노론계열)은
의금부에 하옥 후, 평안북도 선천(군)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숙종은 어느 날 지경연사 김만중에게 조사석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묻는다.
지경연사는 정2품 이상으로 학식이 풍부한 관리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김만중은 “후궁 장씨(張氏, 장희빈)의 어머니와 조사석은 친밀했습니다.
조사석이 우의정이 된 것은 여기에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 나라 사람들은 다 아는데,
전하만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숙종은 임금이 신하에게 이러한 말을 들으니 면목이 없다.
그 말의 근거를 대라. 가만 두지 않겠다”라고 펄펄 뛴다.
김만중도“전하의 질문에 답을 했는데 그 말의 근거를 물으신다면 죽음으로 달게 받겠습니다.
의금부로 가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조사석의 권좌에서 승승장구한 내용을 살펴보니~
장희빈은 각종 인사권에도 개입한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주변에는 많은 무리가 모인다.
장희재는 낮은 직급이었으나 그에게 숙의 장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조사석은 이조판서에서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이 된다.
영의정(정1품), 좌의정(정1품), 우의정(정1품)은 의정부의 삼정승이라 한다
숙종은 조사석을 책망하기도 하며 평소에 그렇게 신임이 두텁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숙종은 조사석을 국가를 위해서 정성을 다한다고 느닷없이 칭찬을 하고
정2품에서 정1품으로 2단계를 승격시켜서 정승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장희빈의 어머니가 있었다. 장희빈의 어머니는 조사석 처갓집의 종이었다.
조사석은 젊었을 때 그 어머니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장 씨에게 시집을 간 후에도 어머니는 조사석의 집을 자주 왕래했다.
인망이 없는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궁중 깊숙이 후궁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는 김익겸의 첫째 아들 김만기(金萬基) 입니다
김만기(金萬基)는 서포 김만중의 친형이죠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현종의 비),
인경왕후(숙종의 정비),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김만기(金萬基) 모두 서인 가문이며,
장희빈(남인 계열)과 인현왕후(서인)의 당파 싸움은
경신환국(庚申換局) : 1680년(숙종 6년) 3월 ~ 4월 조정에서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당한 일이다.
당시 재상 허적이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기념식 할 때, 궁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유악(천막)을 빌린 일에서 숙종의 노여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은 사건.
기사환국 : 1689년(숙종 15) 2월 2일 소의 장씨(장희빈) 소생의 아들 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갑술환국 :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 발생한 숙종 시대의 3차 환국으로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씨(인현 왕후)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으로
죽이고 죽는 세력 싸움이~
김만중은 1685년 홍문관,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역임하고, 1686년 좌참찬, 지경연사로 있을 때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사건으로 인해
의금부 추국을 받고 평안북도 선천(군)에 유배되었다가,
1688년(숙종 14년) 숙원(淑媛, 후궁에게 내리던 종4품) 장희빈의 왕자(후에 경종)를 낳자
11월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3개월 뒤인 1689년(숙종 15) 2월 기사환국(1689년)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남해의 노도에 유배를 받게 된다
(장숙의( 張淑儀)의 뜻은 : 장은 장희빈을 뜻하고, 숙의(淑儀)는 내명부 품계로서 후궁에게 내리는 종2품 )
평안북도 선천( 유배지 이곳에서 홀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소설로 여덟 명의 선녀와 함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것은 결국은 덧없는 하룻밤 꿈임을 깨닫고 수도하여 마침내
극락으로 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구운몽을 지었다
노도
서포 김만중 동상
서포문학공원에서 조망을 마치고 남파랑길 42코스로 되돌아 갑니다
서포문학공원에서 미국마을 윗쪽 남파랑길로 되돌아 왔습니다
미국마을 넘어 저멀리 금산 봉우리는 구름속에 가리워저 있습니다
미국마을 바로곁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87-3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87-3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 87-3번지 이곳에서
두곡월포해수욕장까지 2.8km 거리라고 표시된 이정표
앵강만 조망을 즐기면서 산자락 오솔길을 걷습니다
이정표 이곳에서 200m 이동하면~
조금 전 이정표에서 200m 이동해 왔습니다
화계 2.6km 이정표에서 200m 이동해온 이정표
남파랑길 42코스 출발점인 신전숲(앵강다숲)을 답아 보고~
남파랑길 42코스 3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