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전날, 농사일 마치고 마실 다녀오자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1박2일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평생을 부처님 밥 먹고 산 터라, 떠나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다. 목적지가 30년 불교기자로 일하면서도 한 번도 참배하지 못했던 절, 경북 청송의 천년고찰 주왕산 대전사(大典寺)인 것이다. 대전사는 평소 존경하는 스님이 주석하는 절이기에 더 가고 싶었던 절이기도 하다.
동지 대전사 전경
충남 당진과 경북 영덕을 연결하는 당진영덕고속도로를 이용해 4시간 남짓 걸리는 꽤 긴 거리였지만, 모처럼의 여행인지라 마음은 가벼웠고, 설레기도 했다. 때가 때인지라 동지 기도를 겸한 마실로 계획을 세웠다. 아내는 이틀 전부터 대전사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릴 서리태를 고르고 또 골랐다. 정성껏 가꾸고 수확한 것이기에 공양물 준비하는 손길도 마음도 기쁜 듯했다.
주왕산 입구 숙소에 짐을 풀기 무섭게 절로 향했다. 절에 다가갈수록 웅장한 비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왕산이 왜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는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강한 기운이 뻗치는 거대한 암벽군(群)과 암벽 위아래와 바위 틈 사이사이에서 호쾌하게 위용을 뽐내는 소나무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병풍처럼 위풍당당하게 솟은 주봉을 배경으로 자리한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대전사 전각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주로 석회암 성분의 암석이 만드는 풍광은 차라리 이국적이다.
한눈에 봐도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지닌 보광전 약사여래삼존불 전에 서리태를 올리고 향을 사른 후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수백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을 대전사 부처님의 미소는 더 없이 자애롭고 온화하다. 일광, 월광보살을 양 협시로 둔 약사부처님은 필시 수백 년 동안 청송 고을 민초들의 애환을 들어주었을 둘도 없는 의지처였을 것이다.
밤이 가장 긴 동지 전날이어서 그런지, 차 몇 잔 마시다보니 일찌감치 해가 이울고 있다. 저녁공양을 위해 후원에 들어서니, 신심 깊은 보살님들이 내일 치를 동지불공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한 스님이 찹쌀반죽을 하고, 보살님들은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어 손바닥으로 궁굴리며 세알을 만드는데, 그 솜씨가 노련하다. 옹종망종 늘어놓은 세알이 입맛을 돋운다. 동지팥죽의 백미는 세알에 있다는 주지스님의 참견(?)을 정겹게 받아넘기며 하하호호 즐겁게 팥죽을 준비하는 표정들은 이미 행복으로 충만해있다.
팥죽은 동짓날에 먹기로 하고, 저녁공양은 세알을 넣어 끓인 미역국이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저녁공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모처럼의 휴식을 취했다. 이른 봄부터 초겨울까지 농사를 짓느라 적잖이 고단했던 심신의 피로가 하루저녁 휴식으로 말끔히 가시기야 하겠냐마는 여운처럼 밀려오는 편안함이 행복을 느끼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동짓날 긴긴밤을 보내고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동지불공에 동참하고자 숙소를 나섰다. 절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0여분 남짓 걸어서 절에 도착하니, 일찌감치 불공드리러 온 불자들이 도량 볕바른 곳에서 속살거리고 있다. 보광전은 이미 불자들로 빼곡하다. 노(老)보살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젊은 불자들도 적잖이 눈에 띤다.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기도스님의 집전에 맞춰 천수경을 암송하다가 점점 자리가 비좁아져 부득이 법당에서 나와 마당에서 기도에 동참했다. 절집에서 동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역시나 대단하다.
사실 동지는 불교고유의 명절은 아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고 모든 생명력들도 동지를 기점으로 다시 부활했다고 여겨져 예로부터 민속명절로 자리매김한 것이 동지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동지’를 아세(亞歲) 라고 해서 ‘작은 설’로 여겼다. 이날 조상신들과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렸고, 임금은 신하들에게 첫 인사를 받았다. 임금은 인사 온 신하들에게 새해 달력을 나누어 주었다.
동양뿐만 아니고 서양에서도 동지는 중요한 명절이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동지를 ‘태양 부활절’이라고 해서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일로 기렸다. 로마시대를 이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가톨릭과 그 뒤에 분파한 개신교에서도 ‘태양 부활절’, 즉 동지 즈음을 예수 탄생일(크리스마스)로 정했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먹는데, 밤이 가장 길어 음의 기운이 강하다 보니 삿된 기운이 들끓게 되므로, 붉은 색 양의 기운을 띠는 팥으로 죽을 쑤어서 음의 기운, 즉 삿된 기운들을 누르는 액 막음을 한다는 뜻이다. 동지불공 축원에는 그래서 한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새로운 서원을 세우는 축액영복(逐厄迎福)을 내용으로 하는 축원을 하게 된다.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동지에는 특히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고 기렸다고 한다. 조선 시기만하더라도 ‘사친가(思親歌)’라는 부모를 생각한다는 시조, 노래가 동짓날 널리 불렸다.
“십일월 동짓날에 만물이 미생(微生)하니
일양(一陽)이 초동(初動)이라.
왕상(王祥)의 한빙이어(寒氷鯉魚) 지성이 감천이요,
맹종(孟宗)의 설상죽순(雪上竹筍) 신명의 도움이라.
언념급사(言念及事) 생각하니 통극망극 새로워라.
슬프도다! 우리 부모 동짓날을 모르시나.
그 달을 허송하고…”
‘한빙이어’란 중국 삼국시대에 살았던 왕상이란 효심 지극한 정치가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그는 어렸을 때 계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왕상은 학대를 묵묵히 견디고 효를 다했다. 계모가 한 겨울에 뜬금없이 잉어가 먹고 싶다며 잉어를 구해오라고 시키자, 왕상은 ‘어떻게 하면 잉어를 구할까’ 고민하다가 강가에 나가 윗옷을 벗었다. 체온으로 강바닥을 녹여 잉어를 잡기 위해서였다. 왕상이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 순간 강 얼음이 저절로 갈라지면서 그 틈새로 잉어가 튀어 올랐다는 것이다.
‘설상죽순’도 비슷한 이야기다. 중국 오나라 사람이었던 맹종은 어머니를 잘 모셨던 효자였는데 어머니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 서둘러 고향으로 가는 길에, 마침 대나무 밭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문득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죽순이 떠올라 그 자리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그러자 한겨울인데도 대나무 밭에서 죽순이 솟았다. 맹종은 죽순을 캐어 어머니의 제사상에 올렸다는 고사다.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진 동지는 오늘날엔 초라한 풍속이 되고 말았다. 연말연시, 크리스마스와 맞물리다 보니 더 뒷전으로 밀렸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아예 잊혔을 정도다. ‘동지’라고 하면 왠지 고루한 날처럼 치부되는 경향도 보인다. 절집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정도다.
대전사 동지불공
불공을 마친 후 신도님들과 함께 팥죽을 한 그릇 비웠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은 것이다. 오랜 만에 팥 시루떡을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주지 스님을 비롯해 대중스님들은 팥죽공양 자원봉사에 나선 보살님들에게 팥죽이 충분하니, 원하는 관람객들에게도 다 나눠주라며 동지불공의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데 여념이 없으시다. 절집의 후덕한 인심이 아닐 수 없다.
불공과 팥죽공양을 마친 후 주왕산 산책에 나섰다. 30여분 이어지는 비교적 편안한 거님길을 따라 산중으로 들어가니 웅장한 주상절리 등 석회암석과 황금송, 겨울인데도 풍부한 수량의 계곡이 만들어내는 멋들어진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학봉선생을 비롯해 많은 풍류객들이 주왕산을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시문을 지은 이유를 와보니 알겠다.
주왕(周王)의 피
수달래[水丹花]뿐만 아니라
단풍잎 기암괴석 황금소나무,
초목산천 두두물물에 깃들어 있네.
화산이 만들고 세월이 다듬어
그 유장(悠長) 견줄 곳이 없으니,
도 닦는 선사와 시인묵객들
다투어 이름 짓고 찬탄하였으리.
주살된 아비의 한 달래려
아들은 대전(大典)으로
딸은 백련(白蓮)으로 나투었으니,
큰절 팥죽 유난히 붉은 까닭 예 있었네.
-졸시 ‘주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