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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0 편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1934년
100:0.1 역동적인 종교적 삶의 체험은 평범한 개인을 이상주의의 힘을 가진 성격자(personality)로 변화시킨다. 종교는 개개인의 진보를 발전시킴으로 모든 사람의 진보를 도우며, 모두의 성취를 통해 각자의 진보를 증가시킨다.
100:0.2 영적 성장은 다른 종교인들과의 친밀한 관계에 의해 상호 자극된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을 위한 토양―주관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객관적 매력―을 제공하지만, 그래도 최고의 주관적인 만족감을 낳는다. 그리고 종교는 일상적 삶의 고된 일을 귀하게 여긴다.
1. 종교적 성장
100:1.1 종교는 의미의 성장과 가치의 향상을 낳지만, 악은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가 절대적인 수준으로 높아질 때 항상 발생한다. 어린아이는 즐거움의 내용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한다; 성숙함은 개인적인 즐거움을 더 높은 의미로 대체하는 것과 비례하며, 심지어 다양한 삶의 상황과 우주적 관계라는 가장 높은 개념에 충성하는 것도 포함한다.
100:1.2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영적 고착의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서로 다른 시대, 연속되는 문화, 그리고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의미의 성장을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성장의 주된 저해 요인은 편견과 무지이다.
100:1.3 모든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종교적 체험을 성장시킬 기회를 주라; 기성 어른들의 체험을 강요하지 말라. 기억하라, 확립된 교육체제를 통해 해마다 진보하는 것은 반드시 지적 진보, 더군다나 영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휘의 확대가 성품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장은 단순히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진보를 통해 나타난다. 진정한 교육적 성장은 이상을 높이고, 가치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며, 가치의 새로운 의미를 이해하고, 최고 가치에 대한 충성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100:1.4 아이들은 오직 어른 동료들의 충성에 의해서만 영구적으로 감명을 받는다; 교훈이나 심지어 본보기가 지속해서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고,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실체이다. 충실히 오늘을 살아라―성장하라―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올챙이로서 매 순간을 충실히 사는 것이다.
100:1.5 종교적 성장에 필수적인 토양은 자아 실현의 진보적 삶, 타고난 성향의 조율, 호기심을 실행하는 분별있는 모험의 기쁨, 만족하는 느낌을 체험하는 것, 집중과 관심을 자극하는 두려움의 작용, 경이로운-자극, 그리고 빈약함, 겸손함의 평범한 의식이다. 성장은 또한 자아의 발견과 그에 따른 자기 비평―양심―에 근거해야 하며, 이는 양심이 정말로 사람이 자신의 가치 기준과 습관, 개인의 이상에 따라서 스스로를 비평하기 때문이다.
100:1.6 종교적 체험은 몸의 건강, 물려받은 기질, 사회적 환경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현세의 조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하는 내면의 영적 진보를 막지 못한다. 성장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어떤 타고난 욕구가 모든 정상 필사자에게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억제되지 않으면 작용한다. 영적 성장 잠재력의 구성 자질을 기르는 확실한 기법은 최상의 가치들에 대하여 전심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100:1.7 사람은 종교를 주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종교는 최종의 가치를 더욱 추구하는 데 비례하여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따라서 우주적 견지에서 성장은 의미가 쌓이고 가치가 늘 높아지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사람의 고귀함 그 자체는 언제나 의식하지 않고 성장한다.
100:1.8 종교적인 사고와 행동 습관은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 사람은 영적 자극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개발할 수 있는데, 이는 일종의 조건화된 영적 반사이다. 종교적 성장을 장려하는 습관은, 신성한 가치에 대한 감성을 기르는 것, 타인의 종교적 삶을 인식하는 것, 우주적 의미에 대해 숙고하는 것, 경건한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영적 삶을 동료들과 공유하는 것, 이기적 행동을 피하는 것, 신성한 자비를 주제넘게 거부하는 것, 하나님이 계신 가운데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을 포함한다. 종교적 성장의 여러 요인은 의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장 그 자체는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100:1.9 그러나 종교적 성장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는 본질은 그 성장이 인간 지성의 하의식 영역이라 추정된 곳에서 작용하는 활동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사자 mind의 초의식 수준에 있는 창조적 활동을 의미한다. 무의식적인 종교적 성장의 실체 체험은 초의식 활동이 있음을 가리키는 하나의 분명한 증거이다.
2. 영적(靈的) 성장
100:2.1 영적 발달은 첫째, 참된 영적 세력과 살아 있는 영적 연결을 유지하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는 것: 영적 은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것에 달려 있다. 영적 진보는 완전-갈망에 대한 자의식과 연결되어 영적인 빈곤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구, 전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에 근거한다.
100:2.2 영적 성장은 먼저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 의미 있는 것을 헤아리며, 그 다음에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발달의 증거는 사랑으로 동기를 얻고, 사심 없는 봉사로 활성화되고, 그리고 신성의 완전한 이상에 대한 온전한 예배로 지배 되는 인간 personality를 나타내는 것에 있다. 이 체험 전부가 단순한 신학적 신념과는 대조가 되는 것으로서 종교의 실체를 구성한다.
100:2.3 종교는 우주에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하는, 깨우침을 받은 지혜로운 기법이 되는 체험 수준까지 진보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롭게 된 종교는 인간 personality의 세 수준에서 기능할 수 있다 : 지적, 모론시아적, 영적 수준에서; mind의 토대 위에, 진화하는 혼 속에서, 깃드는 영과 함께 한다.
100:2.4 영성(Spirituality)은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이며 동료 존재들에게 유용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영성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의미에서 진리를 인식하며, 가치에서 선함을 발견하는 능력을 높인다. 영적 발달은 이러한 능력에 따라 결정되며, 이기적인 사랑의 성질이 제거되는 정도와 정비례한다.
100:2.5 실제 영적 상태는 신에 대한 도달과, 조절자와의 조율된 정도를 측정한다. 영성의 궁극적 성취는 현실의 최대치, 신의 최대치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영생은 무한한 가치를 향한 끊임없는 추구이다.
100:2.6 인간 자아실현의 목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노력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실체는 신성한, 영적인, 영원함이다. 필사 인간은 육체의 즐거움과 인간적 애정에서 만족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는 인간관계와 현세의 제도에 충실함으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넘어서고, 신성한 완전함과 최후자 봉사의 영원한 운명을 성취하는, 불멸의 성격을 기르기 위한 영원한 토대가 되지 않는다.
100:2.7 예수는 “하나님을 알고 하늘나라를 믿는 자에게 땅에 있는 만물이 무너진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깊은 확신을 묘사했다. 현세의 안전은 취약하지만, 영적 보장은 확실하다. 인간의 역경, 이기심, 잔인함, 미움, 악의, 질투의 큰 물결이 필사자의 혼에 휘몰아칠 때, 너는 내면의 요새,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영의 보루가 있다는 확신 속에서 쉴 수 있다; 그것은 적어도 깃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에게 자기의 혼을 보존하려고 헌신한 모든 인간에게 진실이다.
100:2.8 점진적인 성장이든 특정한 위기로 도달하든 상관없이, 그러한 영적 달성 후에는, 새로운 가치관의 발달과 더불어 personality의 새로운 적응이 일어난다. 그러한 영적으로 탄생한 개인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야망이 사라지고 가장 간절히 바라는 희망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을 정도로 삶에서 다시 새롭게 동기 부여를 받는다; 그들은 이러한 재앙이 단지 일시적 창조를 파괴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더 고귀하고 지속적인 우주적 성취를 위한 준비를 하는 방향 전환의 격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3. 최상의 가치에 대한 개념들
100:3.1 종교는 정적이고 행복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기법이 아니다. 종교는 역동적인 봉사를 위해 혼을 조직하는 충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섬기는 충실한 봉사에 자아 전체가 동참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고의 목표인 영원한 상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어떤 값이라도 치른다. 대단히 숭고한 종교적 충성에는 헌신하는 완성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충성은 사회적으로 효과 있고 영적으로는 진보한다.
100:3.2 종교 주의자들에게 하나님(God)이란 단어는 사람이 최고의 실체에 대한 접근과 신성한 가치를 인정하는 상징이 된다. 인간의 호불호가 선과 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는 소망의 성취나 정서적 좌절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100:3.3 가치들을 숙고하면서 가치 자체와 가치를 지닌 것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즐거운 활동과 그 활동의 의미 있는 통합, 그리고 점점 더 높은 인간 체험의 수준에서 그 활동이 어떻게 향상되어 실현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100:3.4 의미는 가치에 체험을 더하는 것이다; 의미는 가치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고립되고 순전히 이기적인 즐거움은 실질적으로 목적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상대적 악에 가까워지는 의미 없는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실체들이 의미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될 때, 그러한 관계가 mind에 의해 이해되고 인식될 때, 가치들은 체험이 된다.
100:3.5 가치는 결코 정적일 수 없다; 실체는 변화와 성장을 의미한다. 의미의 확장, 가치의 고양이 없으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잠재적인 악이 될 수 있다. 우주 적응의 질(質)이 커질수록, 체험이 지니는 의미도 커진다. 가치들은 개념적 환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제 존재하지만, 항상 관계의 사실에 의존한다. 가치는 항상 실제이고 잠재력이다-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것이다.
100:3.6 실제와 잠재력의 연관성은,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성장과 같다. 그러나 성장은 단순한 진보가 아니다. 진보는 언제나 의미가 있지만, 성장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다. 인간 삶의 최고 가치는 가치의 성장, 의미 있는 것들의 진보, 그리고 이 두 체험의 우주 관련성을 깨닫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필사자는 초자연적이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초월적 인간이 되고 있다; 불멸의 혼이 진화하고 있다.
100:3.7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지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성장은 신체적, 지적, 영적에서 항상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사랑은 성장한다; 창조되거나, 제조되거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해야 한다. 진화는 우주의 성장 기법이다. 사회적 성장은 법을 세운다고 보장할 수 없고, 도덕적 성장은 행정을 개선한다고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은 기계를 만들 수 있지만, 기계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문화와 개인의 평가로부터 얻어야 한다. 인간이 성장에 기여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personality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는 것-바로 살아있는 믿음이다.
4. 성장의 문제들
100:4.1 종교 생활은 헌신하는 삶이고, 헌신하는 삶은 창의적인 삶이며, 자발적인 삶이다. 새로운 종교적 통찰력은 예전의 열등한 반응의 형식 대신에 새롭고 더 나은 반응 습관들을 선택하여 시작하려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의미가 있는 것들은 오직 갈등 속에서만 솟아난다; 갈등은 단지 우월한 의미를 내포한 높은 가치를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만 지속된다.
100:4.2 종교적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정신적 갈등과 영적 동요가 없이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생활 기준을 세우는 것은 지성의 철학적 영역에서 상당한 동요를 수반한다. 투쟁이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것들을 위한 충성이 우러나지 않는다. 노력은 영적 시력이 맑아지고 우주 통찰력이 향상될 때 수반된다. 그리고 인간의 지능은 현세에 존재하는 비영적 에너지의 존속에서 젖떼듯 떨어져 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게으른 동물 mind는 우주적 문제 해결과 씨름하기 위한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100:4.3 그러나 종교적 삶의 큰 문제는 사랑이 지배함으로 성격자의 혼의 능력을 통일하는 과제에 있다. 건강, 정신적 효율성, 육체적 체계의 통일로부터 생기는 행복, mind 체계, 영 체계의 통합이다. 사람은 건강과 건전한 정신에 대해 많이 이해하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거의 없다. 최고의 행복은 영적 진보와 떼어낼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영적 성장은 모든 이해를 뛰어넘은 영원한 기쁨, 평화를 낳는다.
100:4.4 물리적 삶에서 감각은 사물의 존재를 알려준다; mind는 의미의 실체를 발견한다; 그러나 영적 체험은 개인 삶의 참된 가치를 드러낸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인간적 삶은 하나님에 대한 최고 사랑과 인간에 대한 이타적 사랑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이 동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인간에게 높은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사람을 매우 사랑하였다. 당신의 동료들에서 가치를 가장 잘 발견하려면 그들의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자극하고 불쾌감을 유발한다면, 그 사람의 관점과 그러한 반감적인 행동에 대한 이유를 공감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이웃을 이해하게 되면 관용을 가지게 되고, 이 관용은 우정으로 성장하며 사랑으로 성숙할 것이다.
100:4.5 Mind의 눈을 뜨고서, 동굴에서 살았던 너의 원시적 조상 중에 한 사람의 그림을 상상해 보라―키가 작고, 보기 흉하고, 더럽고, 으르렁거리며 서 있는 헐크 같은 한 남자가, 바로 앞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 몽둥이를 치켜올리고, 미움과 적개심으로 격렬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그림은 도저히 인간의 신성한 위엄을 묘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그림을 확대해 보자. 이 활기찬 인간 앞에 칼 이빨을 가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다.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러한 그림이 인류 중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네가 즉시 깨닫지만, 두 그림에서 그 남자는 동일하다. 오직 두 번째 스케치에서 너는 넓어진 시야의 덕을 보고 있다. 거기서 너는 이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파악한다. 너희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할 가치가 있게 된다. 만약 네가 오직 동료들의 동기를 가늠할 수만 있다면, 너는 그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동료를 알 수만 있다면, 너는 결국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00:4.6 너는 단순히 의지의 행위로 동료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이웃의 동기와 감정을 철저히 이해함으로써만 태어난다.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매일 한 사람씩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또는 매주 한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것이 당신의 능력의 한계라면, 당신은 확실히 사회화되고 진정으로 영적 성숙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전염성이 있으며, 인간의 헌신이 지성적이고 지혜로울 때 사랑은 증오보다 더 전염성이 강하니다. 하지만 진실하고 이타적인 사랑만이 진정으로 전염된다. 만약 각 필사자가 힘찬 애정의 중심이 될 수 있다면, 이 사랑의 유익한 바이러스는 인류의 감정 흐름에 빠르게 퍼져나가서 모든 문명이 사랑으로 감싸일 것이며, 이것이 인류의 형제애를 실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5. 감화와 신비주의
100:5.1 세상에는 길 잃은 혼이 가득하다. 신학적 의미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향 면에서 길을 잃었고, 좌절된 철학 시대의 주의들(isms)과 종교단체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종교적 권위에 복종하는 대신 어떻게 삶의 철학을 세우는지 배운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은 비록 강의 바닥이 강이 아니더라도, 성장의 통로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100:5.2 종교적 성장의 진행은 정체에서 갈등을 거쳐서 조정된 길로, 불안한 상태로부터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혼란스러운 우주 의식으로부터 통일된 성격으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처지로부터 신성한 아들 신분을 갖는 자유로 이어진다.
100:5.3 최상의 이상에 충성을 고백하는 것―하나님 의식을 마음, 감정, 영으로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점진적 성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기의 경우처럼 때때로 어떤 길목에서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중대한 날에 다마스커스 길에서 바로 그러한, 갑작스럽고 극적인 전향을 체험했다. 고타마 싯달타는 혼자 앉아서 궁극적인 진리의 신비를 파고들려고 애를 쓴 그날 밤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많은 다른 사람은 비슷한 체험을 했고, 많은 참된 신자들이 갑작스런 전향이 없음에도 영적으로 진보했다.
100:5.4 일반적으로 종교적 전환과 관련된 대부분의 대단한 현상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가끔씩 영적인 기원을 지닌 체험도 일어난다. 정신적 동원이 영적 성취를 향한 심리적 상승의 어느 수준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고, 신성한 개념에 대한 인간의 충성 동기가 완벽하게 형성될 때, 믿는 필사자의 초의식 mind에서 집중된 목적과 일치하기 위해 내재하는 영이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이러한 통합된 지적 및 영적 현상의 체험은 순수히 심리적인 참여 이상의 요소로 구성된 전환을 의미한다.
100:5.5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거짓된 전향이다; 사람은 감정뿐 아니라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정신적 동원이 부분적이고, 그 같은 인간-충성 동기가 불완전하다면, 전향하는 체험의 정도는 지적, 감정적, 영적 실체의 혼합된 체험이 될 것이다.
100:5.6 만약 어떤 사람이 이론적인 잠재의식을 실제 움직이는 가설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상승적 지적 활동의 영역인 초의식 수준, 즉 깃드는 영적 존재인 생각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는 영역을 가정해야 한다. 이러한 심리적 추측에서 큰 위험은 환상이나 이른바 신비적 체험, 그리고 특별한 꿈들이 신성한 의사소통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현상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신적 존재들이 신비적 황홀경나 병적인 환상이 아닌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왔다.
100:5.7 전향을 추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생각 조절자와 접촉할 수 있는 모론시아 영역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은, 살아있는 믿음과 진정한 예배, 전심을 다하는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해서일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솟아오르는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신성한 계시와 영적인 인도들로 오인되었다.
100:5.8 종교적인 공상의 습관적인 수행에 관련된 큰 위험이 있다; 신비주의는 때때로 진정한 영적 소통의 수단이었지만, 현실 도피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바쁜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는 짧은 시간은 크게 위험하지 않을 수 있지만, personality가 오랫동안 고립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환상을 의식하는 무아지경 같은 상태가 종교적 체험으로 양성되어서는 안 된다.
100:5.9 신비주의 상태의 특징은 비교적 수동적인 지능에 작용하면서 주의가 집중되는 선명한 점들과 함께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초의식적인 영적 접촉 지대로 이끌기보다는, 하의식으로 끌어당긴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신 분리를 대단한 정신 현상으로 발전시켰다.
100:5.10 더 나은 영적 명상의 건강한 태도는, 깊이 사색하는 예배와 감사하는 기도에서 발견된다. 육체를 입은 예수 삶의 후반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생각 조절자와 직접 소통하는 것을 이른바 이 신비의 체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비적 소통의 시작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러한 정신 상태의 위험을 나타낸다. 육체의 피로, 금식, 정신의 분리, 심오한 미적 체험, 선명한 성욕 충동, 두려움, 걱정, 분노, 그리고 미치듯이 춤추는 것들에 의해 신비스러운 상태를 촉진한다. 그러한 예비적 준비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많은 것들은 하의식 mind에 기원을 두고 있다.
100:5.11 비록 신비 현상이 일어날 조건이 유리했더라도, 나사렛 예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의 소통을 위해 그러한 방법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는 하의식적 망상이나 초의식적 환상을 겪지 않았다.
6. 종교적 삶의 표시
100:6.1 진화적 종교와 계시적 종교는 방법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동기에서는 대단히 비슷하다. 종교는 삶의 특정 기능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자신에게 인류 전체를 위해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어떤 실체에 대해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의심할 여지 없는 충성과 최상 가치에 대한 전심어린 헌신이다. 이러한 종교적 헌신은 마치 무종교적인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이는 관계에서, 비종교인이 옹호하는 운동에 열렬히 충성하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100:6.2 종교인이 인정하는 최상 가치는 저속하거나 심지어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종교적이다. 종교가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최상으로 여겨지는 가치가 진정한 영적 가치를 지닌 우주적 실체라는 그 한도 까지이다.
100:6.3 인간이 종교적 충동에 반응하는 특징은 고귀함과 숭엄함을 포함한다. 진정한 종교인은 우주 시민 의식을 느끼며 초인적인 힘의 원천과 연결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우수하고 고결한 단체에 속한다는 확신에 너무 좋아하고 힘을 얻는다. 자아-가치에 대한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의 목표―최상의 목표―를 향한 추구를 고무시킴으로 강화된다.
100:6.4 자아는 포괄적인 동기의 매혹적인 충동에 굴복하여, 강화된 자제를 부과하고, 감정적 갈등을 줄이며, 필사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만든다. 인간의 한계를 병적으로 인식하던 것이 도덕적 결단과 영적 열망을 동반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부족에 대한 의식으로 바뀌면서, 최고의 우주와 초우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연관된다. 이러한 초인적 이상을 추구하는 강렬한 노력은 항상 증가하는 인내, 관용, 용기, 그리고 관용으로 특징지어진다.
100:6.5 그러나 참된 종교는 실천하는 사랑이며, 봉사의 삶이다. 순저히 세속적이고 하찮은 것들에서 종교인이 멀어진다고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그리고 유머 감각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의 존재에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지만, 모든 삶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한다; 새로운 유형의 열정, 열의, 그리고 용기를 생성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충성하는 평범한 사회적 의무에 대한 충성과 영적 통찰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그 이상의 위험한 십자군 정신까지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100:6.6 종교적인 삶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역동적이고 숭고한 평화, 어떤 인간도 이해하기 힘든 평안, 모든 의심과 혼란이 없음을 예고하는 우주적인 평화이다. 그러한 수준의 영적 안정은 실망에 면역이 된다. 그러한 신자들은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군주나 능력이나, 현재 일이나 앞으로 다가올 일이나, 높이나 깊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할 것을 내가 확신한다.”
100:6.7 최상위의 실체를 파악하고, 궁극위에 이르는 목표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의식 속에 거하는, 승리하는 영광의 실현과 함께 연합되어진, 안정된 감각이 있다.
100:6.8 심지어 진화하는 종교도 충성과 장엄함에서 이 모든 것이 진정한 체험이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진실할 뿐 아니라 훌륭하다. 확대된 영적 비전의 새로운 충성심은 새로운 차원의 사랑과 헌신, 봉사와 동료애를 창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향상된 사회적 관점은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인 확장된 의식을 낳는다.
100:6.9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특별한 차이점은 순전히 체험적 인간 지혜에 추가된 새로운 품질의 신성한 지혜이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에서의 체험이야말로 이후에 증가된 신성한 지혜와 우주적 통찰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7. 종교 생활의 절정
100:7.1 비록 유란시아의 보통 필사자는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르면서 얻은 그 높은 성품의 완성을 바랄 수는 없지만, 모든 필사 신앙인은 예수의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튼튼하고 통일된 personality를 발달시킬 수 있다. 주(主)의 personality의 독특한 모습은 완전하기보다 균형잡힌 것, 매우 정교하고 균형 잡힌 통일이다. 예수를 가장 효과 있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어떤 사람의 예이니,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 빌라도가 한 말
100:7.2 예수의 한결같은 인자함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지만, 그의 강인한 성품의 힘은 추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참으로 성실했다; 그에게는 위선자의 티가 전혀 없었다. 그는 전혀 꾸밈이 없었다; 그는 항상 매우 참신하면서 진실했다. 그는 결코 가식적으로 굴지 않았고, 속임수에 의지하지도 않았다. 진리를 가르친 그대로 그는 진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바로 그 진리였다. 그의 세대에게 구원의 진리를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는 그런 진리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성했다.
100:7.3 주는 너무 이성적이고 접근하기 쉬웠다. 그는 모든 사역에서 매우 실용적이었으며, 그의 계획은 모두 신성한 상식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기이하고 변덕스럽고, 혹은 엉뚱한 성향이 전혀 없었다. 변덕스럽거나 히스테리적이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에는 언제나 정교한 차별화와 비범한 감각의 적절함이 동반되었다.
100:7.4 사람의 아들은 언제나 균형 잡힌 personality를 지녔다. 적들조차 그에게 진지한 존경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신성한 열정이 가득했지만, 결코 광신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 살아 있어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상력이 있었으나 언제나 실용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삶의 실체에 직면했지만, 그는 결코 무디거나 따분하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결코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동정심이 있어도 감정에 빠지지 않았고, 독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건해도 거룩한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균형이 잡혀 있었다.
100:7.5 그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고 좁은 관습에 구속되지 않았다.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자신감 있게 말했으며 절대적인 권위로 가르쳤다. 그의 뛰어난 독창성은 그의 선행자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서 진리의 보배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가장 독창적인 가르침은 두려움과 희생 대신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었다.
100:7.6 예수는 대단히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권했다. 그는 전혀 편협하지 않았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온 인류, 아니 한 우주조차도 포함했다. 언제나 그의 초대는, “누구든지 그를 오게 하라.” 였다.
100:7.7 예수에 관해 사람들은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고 진실되게 말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숭고한 존재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했다. 땅에서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이 아버지를 의지했다. 그의 믿음은 완전했지만, 결코 주제 넘지 않았다. 자연이 아무리 잔인하게 보일지언정, 이 땅에서 인간의 복지에 대해 아무리 무관심해 보일지언정, 예수는 믿음 안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실망에 면역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실패로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100:7.8 그는 형제로서 인간들을 사랑했고, 동시에 사람들의 타고난 자질과 후천적인 자질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식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좋은 일을 하였다.”
100:7.9 예수는 유난히 명랑한 분이었지만, 맹목적이고 무리한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늘 이렇게 격려의 말씀을 주었다, “힘내라.” 였다. 그가 이처럼 자신감 있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에 항상 감동적으로 배려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고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헌신하는 데 있어 매우 확고했다.
100:7.10 주는 항상 관대했다.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에 지치지 않았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다. 그는 무한한 관대함 속에서도 결코 낭비하거나 사치하지 않았다. 그는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누구든지 구하는 자는 받을 것이다.”
100:7.11 그는 솔직했으나 언제나 친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놀랍게 솔직하면서 내내 그는 어김없이 공평했다.
100:7.12 예수는 때때로 인간적 슬픔의 잔을 깊숙이 마셨음에도, 한결같이 쾌활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실존적인 실체들에 직면했지만, 하늘나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열정을 통제했다; 결코 열심이 그를 지배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이 신성한 열정은 비영적인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바라보는 우주는 그를 온전한 본보기로서, 높은 수준의 영적 삶에 대한 최상 필사자의 헌신에 대한 원형으로서 평가했다. 그의 절제된 열정은 전염성이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신성한 낙관주의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100:7.13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즐거운 사람이었다.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하고 늘 말했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될 때, 그는 기꺼이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용감하게 걸었다. 그는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겸손했다.
100:7.14 그의 용기는 그의 인내심에 못지않았다. 때 이르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그는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자세는 뛰어났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자주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이따금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해가 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 강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죄에 대한 그의 분노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7.15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결코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하지 말라”였다. 그는 대단히 용기가 있었고, 때때로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신중함이 있었고 이성으로 통제되었다. 그 용기는 믿음에서 생겨난 용기였고, 맹목적인 추정의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용감했지만, 결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100:7.16 주(主)는 경외심의 본보기였다. 젊을때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로 시작하였다. 그는 심지어 동료들의 잘못된 숭배를 존중했다. 그럴지라도 그가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거나 인간의 믿음에 대한 오류를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참된 거룩함을 경외하면서도 동료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정죄하느냐?”라고 정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
100:7.17 예수의 위대함은 그가 선했기 때문이었고, 여전히 그는 어린아이들과 친교했다. 그는 개인적 삶에서 온화하고 겸손했지만, 우주에서는 완전해진 사람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를 주(Master)라고 불렀다.
100:7.18 예수는 완전하게 통일된 인간 personality를 지녔다. 오늘날에도 갈릴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필사자의 체험을 통합하고 인간의 노력을 조율한다. 그는 삶을 통합하고, 성품을 고귀하게, 체험을 단순화한다. 그는 인간 mind 안에 들어가 mind를 높이고 변형시키며, 변화시킨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보라,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100:7.19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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