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용 감독의 걸작 <최후의 증인>이 DVD 출시는 물론 보다 너른 공간에서 관객들과 소통할 기회는 없을까? 지난 달 열린 한국영상자료원 이두용 회고전을 통해 <최후의 증인>을 접한 오승욱 감독이 가슴 절절한 사연으로 뒤늦게 발견한 이 걸작의 복권을 요구하며 특별 기고문을 보내왔다.
1.
먼저 고백을 하자면, 내가 존경하는 60,70년대 한국영화들로 김기영의 <화녀> <이어도>나 유현목의 <오발탄>을 말하기는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종류의 영화들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만들고 싶고, 사랑하는 영화들은 임권택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이거나, 이만희의 <원점> <암살자> <쇠사슬을 끊어라>, 김효천의 <오사까의 외로운 별>같은 액션영화들이다. 하지만 이런 액션영화들은 영화적인 만듦새가 너무나 엉성하고, 이야기 구조가 검열과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훼손되어 존경하는 영화들이라고 말하기에는 꺼려진다. 존경을 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한국영화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이 지금까지 한국 액션영화에 대한 나의 마음이었다. 그런 아쉬움이 제일 컸던 감독이 이두용이다.
이소룡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70년대 중반, 챠리 셸이라는 태권도 유단자에게 나팔바지를 입히고 발 차기를 하게 해 펄럭이는 나팔바지에서 이소룡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한국 남성들의 야만적이고 비열한 어두운 정서를 잘 그리는 감독이면서 그 자신이 액션영화를 사랑하는 감독인데, 왜 그는 80년대 이후 액션영화로 세상을 성찰하지 않고 상업적 성공을 한 청춘 액션물 <돌아이> 시리즈로 자신의 액션영화 세계를 마감하고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일까? 인간에 대한 성찰과 슬픔이 절절하게 녹아 있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갱들>까지 갈 수 있었던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그만둔 것일까?
트럭에 배우를 싣고 다니면서 영화를 찍어야 했고, 연탄 찍듯이 영화 찍는다는 욕을 얻어먹고, 무슨 폭력 사건만 터지면 폭력영화 때문이라는 누명을 쓰고, 군사 독재 정권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억압 조치를 취할 때마다 항상 맨 처음 퇴폐, 폭력문화의 근절이라는 철퇴를 내리쳤으니, 이런 무시와 냉대가 액션영화의 세계를 떠난 이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액션영화 감독으로 좋은 소릴 못 듣고 무시와 냉대를 받을 바에야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했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았고, 그래서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꿈을 꿨지만, 그것도 이래저래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 숨 좀 돌리자고 만들었던 사극영화들이 해외영화제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그는 이후 사극영화들로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길로 가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이두용 감독의 행보를 추측하면서 나는 그의 액션영화가 지닌 활력의 정점이 보여지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고, 그런 나에게 혹시 이두용 영화의 정점이 아닐까라고 기대할 만한 영화가 두 편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해결사>와 <최후의 증인>이다. <해결사>는 황정리를 주연으로 한 액션 영화였는데, 폭력을 통해 한국사회의 어두움을 드러낸 영화지만 지금까지 해외에서 출시된 양쪽 화면이 잘리고 영어 더빙된 DVD로 그 명성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꼭 필름으로 보고 싶은 영화이고, 나머지 한 편이 바로 <최후의 증인>이다. 1979년 한 해 동안 촬영을 했고, 그 이듬해, 가장 암울했던 1980년, 영화의 절반이 잘려 나간 채로 개봉을 하고 소리 없이 잊혀졌던 이 영화가 혹시 이두용 액션영화의 정점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항상 사랑은 하지만 존경하기는 좀 꺼려지는 한국 액션영화에 대한 나의 아쉬움을 이 영화가 좀 풀어 주지는 않을까?
2.
부모님에게서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난 전쟁에 대해서는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던 그 지옥에 대해서 책이나 영화를 통해 본 것 이 외에는 아무런 경험이 없다. 그런 혹독한 선택과 경험을 통과해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까? 특히 전후의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공기의 냄새(그것들을 전혀 모르기에, 전쟁을 경험하고 가족들을 책임졌던 할아버지 세대들의 이상한 완고함이 생존을 위해 신념을 만들어내고, 그 신념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공감을 할 수는 없었던)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이상한 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인들의 경우, 40년대 말과 50년대 초에 대단히 이상한 영화들과 소설, 그리고 음악들을 통해 그 혹독한 지옥을 통과해낸 사람들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 흑인 블루스 음악을 듣다보면 유난히도 코리안 블루스라는 제목의 노래들이 많다. 따로 코리안 블루스만을 모아서 낸 '코리안 블루스'란 앨범이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에 참가해 죽음을 대가로 자신들의 신분상승 기회를 얻었던 흑인들은 블루스를 통해 그 혹독함을 표현했다. 러스 맥도널드, 레이몬드 챈들러, 제임스 엘로이의 하드보일드 범죄소설들을 보면, 주인공은 살해당하거나 유괴된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이제 그만 캐내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끝까지 가고, 범죄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암흑의 핵심이 나오고, 그곳에는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의 어두운 그늘이 뱀처럼 똬리 틀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문학에서는 전후의 암담한 분위기가 절망적으로 표현된 <요한 시집>에서부터 한국전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광장>이 있지만, 영화 쪽으로 눈을 돌리면 오로지 반공영화 일색이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쓰는, 어쩌면 서로 다 알거나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증오에 차서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을 죄의식 없이 그릴 수는 없었기에, 그렇다고 그 죄의식을 보이면 안 되었기에 한국전쟁에 대한 영화들은 너무나 탈색된 한가지 색이었고 일방적이었다. 죄가 죄의식을 부르건 죄의식이 죄를 부르건, 단색이 아닌, 일방적 선전이 아닌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영화는 없을까?
3.
이런저런 기대를 가지고 <최후의 증인>을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초등학교 때 동시상영관에서 보았던 <불꽃>이란 영화에서 시꺼먼 가슴 털을 내보이고 여자와 정사를 해서,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꺼먼 가슴 털이 잊혀지지 않고 흉악하게 기억됐던 배우 하명중이 오병호로 나온다. 형사 오병호는 추운 겨울 날씨에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살인 사건의 용의자와 피해자들을 찾기 위해 내가 연출부로 일할 때 헌팅을 가면서 지나쳤던, 내가 감독이 된다면 저기서 촬영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전라도 영산 강가의 시골 장터를 걸어가고, 이리시의 방석집 골목을 걸어간다. 오병호가 걷는 저 풍경들을 모두 내 머릿속에 새겨놓고 싶을 정도로, 지금은 사라져서 볼 수 없는 비루하고 지저분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그가 찾아가는 곳에서는 항상 살을 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험한 고생을 많이 해서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아줌마나 등이 굽고 삐쩍 마른 할머니가 마당에서, 또는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고 있거나 나무를 해서 등짐을 지고 있다.
형사 오병호가 뭔가를 물으면 여자들이 우물쭈물 잘 대답을 못하고, 그러면 사랑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들이 사나운 말투로 대답을 한다.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채로. 그렇구나, 추운 날씨에 여자들은 찬바람을 맞으며 일하고 남자들은 이불 속에 눕거나 엎드려 있는 것이 일을 안하고 시골 건달로 지내는 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어머니가 술 팔아서, 아내가 나무를 해서 번 돈으로 밤새 ‘계집질’을 하거나, 노름을 하고 남들 일하는 낮 시간에는 이불을 덮어쓰고 아랫목에 누워서 하루를 보낸다. 형사 오병호는 그런 풍경들 속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탐문을 해나간다. 노인들이 우글거리는 시골 마을회관에서 막걸리를 받아주며, 퉁명스럽게 텃세를 부리는 마을청년들과 시골경찰들을 상대해가며 그는 항상 담배를 물고, 눈길을 걸어서, 하루에 두 번밖에 안 오는 산골 버스를 타고 산 넘어 살을 에이는 정월 추위와 고산 지대의 흙바람이 부는 살 풍경한 마을까지 찾아간다. 세상에 죄를 짓고 숨어사는 자가 살 만한, 단테의 <신곡>에서 배신의 죄를 지은 자들이 사는 얼음 구덩이의 마을에서 그는 사건의 진상과 첫 대면을 한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고 그 과거의 원점은 한국전쟁이었고, 지리산의 빨치산이 등장한다.
그곳에는 당시 여고생이었던 빨치산 대장의 딸 손지혜로 정윤희가 등장하고, 머슴 황바우로 최불암, 우익청년 대장 이대근이 나온다. 이대근은 영화에서 맨 처음 살해된 피해자이면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해자이다. 빨치산 대장의 보물과 그의 딸을 빼앗기 위해 온갖 음모를 만들어 자신이 호위호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피 눈물이 나게 한 인물이다. 하긴 그 당시 우익들은 빨갱이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투항한 빨치산 대위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려 하자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너는 안 돼. 네가 죽으면 난 누굴 잡아서 보상금을 받아!"라고 외치는 탐욕스런 몸부림을 치고, 자신의 음모를 위해 정윤희를 검사의 방에 넣어주고, 그러고 난 다음에 정윤희를 자신의 후처로 삼는 인간말종의 탐욕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혼한 후 정윤희가 그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자, "또 그런다. 쌀쌀맞게" 하고 멋쩍은 듯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생존을 위해 탐욕스러웠던 그 시대의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어두움을 생각하게 한다. 천인공노할 빨갱이의 딸 정윤희는 아버지가 숙청을 당하자 빨치산 대원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포악한 남자들이 강간을 하면서 그녀가 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행실이 불량하다며 자신들의 윤간을 합리화하는 장면에서는 너무 소름이 끼친다. 저런 것이 폭력적인 한국의 남자들이 아닐까?
정윤희는 수많은 사내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토벌대의 우익청년 대장 이대근에게 아버지의 보물과 자신을 아껴주는 황바우와의 삶이 깨뜨려지고, 그의 후처가 되어야 하는, 전쟁통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사는 것이 아닌 비참한 여인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녀가 가진 소중한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을 때 최후의 선택으로 설득이 된다. 미스 롯데 출신으로 브라보콘을 광고했던 그녀는 너무나 예쁘지만 스크린에서 예뻐 보이려 하지 않기에 설득력 있는 슬프고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예쁘기만 하지 연기는 못한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할 수 있을 만큼만 연기를 하는 그녀의 연기가 오히려 미덕이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대근과 검사 한지일의 농간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황바우는 이 영화에서 감독이 가장 애정을 기울인 인물로 보이는데, 나이 40이 되어서도 장가를 못간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고, 나머지 인생 또한 옥살이를 한, 일생을 머슴으로 살아온 자의 비굴한 성실함을 보여준다. 그가 오병호와 첫 대면을 하는 순간, 하얀 도포를 깨끗하게 차려 입은 그가 자기보다 한참 아래인 형사 오병호에게 부들부들 떨리는 거친 머슴의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큰절을 올리는 장면은 머슴 황바우의 지난 삶과 그의 두려움, 절망까지 읽게 만들어서 눈물이 나왔다. 황바우가 자기 씨도 아닌 아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고 그의 처 정윤희에게 남긴 편지는 그의 육성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기에 여성의 창으로 대신 노래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과거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그 죄로 인해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은 자살로 모두 이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사건을 캐기 위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형사 오병호조차 단호하게 자살을 선택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자살하거나 살해를 당하는 몰사의 영화다. 이런 참담한 비극이 1979년에 만들어지고 1980년에 개봉되어 사장되고 말았다는 것은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주인공 오병호와 황바우, 손지혜의 자살이 숭고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살이 무의미한 퇴행이거나 깨뜨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타협이거나 도피라고 폄하하고 싶지도 않다. 70년대라는 숨통 막히는 상황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오병호는 왜 자살을 한 것일까?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지금, 그들의 무죄를 증명해봐야 소용이 없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세상에 대해 그는 너무나 무기력하며 얼마만큼의 책임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세상에 대해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지고, 또 항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책임지기와 항의가 얼마만큼 설득력을 가질 것인가? 이 영화가 개봉되고 사라져버린 1980년의 광주와 80년대를 보면서 현실에서의 수많은 죽음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맨 첫 장면. 검은색 무지 위에 쓴 감독의 저 처절한 '인간 보호'라는 말이 너무나 무색했던 그 가혹하고 잔악한 1980년의 광주가 생각난다. 현실 앞에서 감독의 말은 얼마나 순진하고 무기력한가? 그렇지만, 그 시대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당시에는 무기력하게 사장되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의 자살은 도피이거나 타협이 아니라 무기력하지만 의미 있는 항의로 느껴지고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찾아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까지 갔었던 한국영화가 지금도 어디 흔하기라도 한가?
4.
<최후의 증인>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 조마조마 했다. 영화의 이야기에 몰입되어 조마조마 했던 것이 아니고, 이 영화가 내가 존경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것이 깨질까봐, 60,70년대의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항상 진저리쳤듯 주인공이 개과천선하거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복하게 막을 내리지는 않을까, 제발 이 영화가 날 설득시키는 그런 라스트까지는 아니어도, 그렇게 끝나서 날 참담하게 만들지 말기를 기도하며 봤다. 라스트에서 총소리와 함께 새들이 날아오르는 한강변을 보면서 주인공의 자살이 단순한 멋 부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저 라스트는 과연 나에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70년대 얼어붙은 한국 땅에서 만들어진 동토의(동토의 제국이라는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속극이 1970년에 있었다) 하드보일드라는 생각을 했다. 존경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60,70년대 한국영화를 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아버지 영화들에 대해 결핍했기 때문에 억지로 아버지를 만들고, 무리를 만들어 추태를 부리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니다. 앞으로 내가 만드는 영화들이 모국어로 소통될 수 있는 누군가의 자기장 안에 있고, 나 혼자, 고아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기를 너무나 소망하기 때문이다.
5.
나는 이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구는 1980년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이 영화의 완전판을 보았다는 전설이 횡횡하거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 세 명만 이 영화를 봤다거나, 영상자료원에서 자주 오시는 할아버지들하고 같이 보았다거나 하는 그런 전설의 영화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두용 감독의 70년대 액션영화들의 프린트가 만들어져 이 영화가 이두용 감독 회고전에서 상영돼 많은 관객들이 보기를 원한다. 물론 그의 70년대 영화들이 하프 네가여서 프린트로 만드는 일이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영상자료원의 창고에서 잠들어 있는 하프 네가들은 프린트로 만들어야 한다. 언제까지 잠재우고 있을 셈인가. 그리고 또 하나. <최후의 증인>이 DVD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