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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사대부의 삶과 기개가 살아있는 내앞마을 의성김씨종택(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
내앞마을 의성김씨종택과 그곳에 살았던 사대부 유교문화와 사대부 삶 관련 임하지역 건축문화유산은 천전리 내앞마을에 집중되어 있으며, 내앞마을 중심에 의성김씨종택이 있다. 이 대종가는 내앞마을 의성김씨 천전파 종가며, 의성김씨 관련 조선시대 고택 및 기타 문화유산들은 임하면 천전리와 임하리 등에 산재하고 있다. 근거리에는 안동의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또한 마을에는 건축문화유산 외에 자연경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가 여러 곳에 있다. 더 나아가 이곳은 정신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다. 따라서 임하면 천전리 일대는 안동의 문화유산 보고 중 하나로서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내앞마을의 의성김씨는 안동 밤적골(율세동)에 살던 김만근이 해주 오씨 오계동(吳季曈)의 딸과 결혼한 후 처가살이를 하면서 천전리에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종택은 김만근의 아들 김예범이 현재 종택 자리에 70여간 살림집을 조영하면서 종가로서 위용을 갖추었다. 김예범 이전 의성김씨종택의 규모는 작았으리라 판단된다. 김예범의 뒤를 청계공 김진(金璡)이 이으면서 내앞마을 의성김씨는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본다. 청계공은 슬하에 아들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귀봉 김수일 (龜峯 金守一), 운암 김명일(雲巖 金明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남악 김복일(南岳 金復一) 오형제를 두었으며, 이들 형제 모두 퇴계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아 그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이들 형제 중 세 형제는 대과인 문과에 오르고, 두 형제는 소과인 생원시(生員試)에 모두 급제하였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가의 택호를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렀다. 사빈서원(泗濱書院)에는 청계 김진과 다섯 아드님을 제향 하였다. 이 서원을 세상에 보기 드문 육부자분의 서원이라고 한다. 따라서 내앞마을에서 의성김씨의 시작은 김만근 때부터지만 종가로서 본격적인 시작은 김예범 때부터다. 사람들은 흔히 김예범 계열의 의성김씨들을 청계공파라고 한다. 이후 안동지역의 의성김씨는 학봉 김성일이 검제로 분가해 의성김씨의 세거지를 일궈 내앞과 검제의 양축을 형성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지은 청계공 김진의 <행장>에 의하면 청계공은 조상을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했으며 무속을 극히 혐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청계공 김진은 가문을 번성케 한 인물로 살림살이 경제를 중시하였고 자식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관심이 지금의 내앞 의성김씨를 만들었다고 한다. |
의성김씨종택은 가문을 번성케 한 청계공이 16세기 중기에 일부를 개축하였으며, 이후 1587년 11월 23일 애석하게 화재로 소실되었다. 1587년 화재로 소실될 때, 김성일은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 내앞종가의 중창을 주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앞종택은 화재가 난 이듬해 1588년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때 내앞종가의 중창은 원래 모습대로 중창했다는 설과 명나라 재상가의 건축수법을 적용했다는 설로 나뉜다. 특히 명나라 건축수법의 영향설은 중창 전 김성일이 명나라에 갔다 온 이후 중창을 했고, 공간 구성이 기존의 안동지역 사대부 주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가 아니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다르고 독특하다하여 명나라 건축수법을 적용했다고 하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명나라 재상의 집과 같은지를 검토한 후, 이를 받아드려 어떻게 재해석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1730년에는 김민행이 바깥채(대청채, 문간채)를 철거하였고, 1757년에는 학봉태실인 산방을 개조하여 대청의 일부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종택은 사당의 증축, 학봉태실과 연못의 복구, 장판각과 경모각의 신축, 화장실 등의 증개축을 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의성김씨종택 주변 경관요소와 종택 배치 의성김씨종택은 남쪽으로 흐르는 야산을 벗 삼아 등을 기대고 남쪽의 들녘과 들녘 너머 동서로 흐르는 반변천 물, 반변천 너머 백운정이 있는 야산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는 임하보조댐 물이 옛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내앞마을과 의성김씨종택의 배경이 되고 있는 야산은 경북 영양 일원산 지맥이 남동쪽으로 내려오다가 집터에 이르러 멈췄다. 마을의 경관 및 배치계획은 한국전통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뒤쪽에 의식영역의 산, 주거영역의 고택 및 기타 가옥, 생산활동영역 농경지, 멀리 의식영역의 하천 및 기타 자연경관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이런 주변 경관 속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김만근이 정착한 이후 500여년을 대대로 살아 온 세지다. 택리지를 쓴 조선 말기 이중환이 말하는 가거지(可居地) 요건에 따라 내앞마을을 보면, 내앞마을과 종택 터는 지리적으로 온화하고 방정한 산세를 배경으로 양명하며, 생리적으로 농사짓고 살기에 적당한 들녘이 정면에 펼쳐져 있다. 인심측면의 내앞마을은 기존의 처가와 이후 의성김씨의 세거지를 형성하면서 이웃 간 살기 좋은 주거지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산수는 멀리 반변천, 내앞쑤와 개호송 등이 안온한 마을의 자연경관을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주변의 자연경관으로 종택은 다섯 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오과등과댁’ 또는 ‘오룡지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앞마을은 영남 사대길지 중 하나로 조선 중기 이래 유교문화와 사대부의 삶과 기개를 꽃피울 수 있었던 적지였다. |
현재 내앞마을은 동서측과 남측을 감싸고 있는 지방도로의 동북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의 진입은 이 도로에서 동측으로 난 마을 안길을 따르며, 종택의 진입은 마을 안길에 있는 천전슈퍼 모퉁이에서 북으로 난 샛길을 이용한다. 이 샛길 동측에는 가옥들이 있고 서측에는 자연석으로 축조한 방형의 연못과 넓은 공터가 있다. 이 연못은 최근에 옛 모습을 찾아 중건한 것으로 중건 전에 기존 연못을 메워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연못은 가옥의 경관요소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리고 현재 바깥사랑채(대청채, 대문채)도 없어 종택 초입부가 휑하다. |
바깥사랑채는 1730년 전후 김민행이 철거하였다고 하는데,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동서로 자리하였고 일부분 누각형식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가 헐리기 전 솟을대문이 바깥담장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대문 좌우에는 대문채가 붙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토석담장만 남아 있으며, 담장 안쪽 텃밭이 바깥사랑채 안뜰이었을 것이다. 텃밭을 지나면 판축 구조에 기와를 올린 판축담장을 다시 만나는데, 판축담장 북측에 의성김씨종택이 있다. 따라서 과거 종택의 정면은 담장 두 켜를 쌓아 본채부분과 바깥사랑채, 바깥사랑채와 외부를 구획하고 있었다. 서측 담장 너머에는 신축한 장판각과 경모각이 있으며 주변에 담장을 쌓아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 놓았다. 동측 담장 너머에는 귀봉종택이 있고, 북측은 담장으로 구획하지 않고 산자락에 직접 면하고 있다. 현재 종택은 크게 본채영역과 부속채영역으로 나뉘며, 본채 영역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중문간채로 구성되어 있고 부속채영역은 사당, 장판각, 경모각, 측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건물에 딸린 마당과 식재, 이를 감싸고 있는 담장 등이 외부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
종가집 안주인의 삶 속에 있는 안채 ‘ㅁ’자형 안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측에 대청이, 동측에 동방이, 남측에 안방이, 북측에 상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안마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5칸인데, 처마서까래가 안마당으로 돌출하였기 때문에 안마당보다 작은 천정의 하늘이 열려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때문에 안채의 대청에 들어오는 하늘의 기운과 햇살은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안채로의 출입은 사랑채의 출입 동선과 달리 안채와 중문간채가 연결된 동측간의 판문을 이용하며, 이 판문을 들어서 안채의 남동측 모서리 부엌간을 이용하여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이때 우리는 산방쪽 대청마루를 대각으로 보게 되어 ‘ㅁ’자형 안마당이 좀 더 넓어 보이는 느낌을 갖는다. |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5칸으로 북측에 산방과 상방 마루간이 있고, 남측에 안방과 주방이 있다. 대청은 측면 2.5칸으로 다른 종갓집에 비해 주칸이 넓고 기둥이 높아 천정이 매우 높다. 그리고 대청의 마루널과 마루귀틀에는 종가와 함께 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마룻바닥은 마루귀틀 춤만큼 높이 차이를 둔 3단 구조로 되어 있다. 정간과 안방쪽 툇마루가 제일 낮고, 정간과 안방쪽 대청마루가 다음으로 높으며, 마지막으로 산방쪽 중앙간과 툇간, 상방 마룻바닥이 제일 높다. 이런 모습은 마루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상하위계질서를 보여주는 흔적으로 다른 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의성김씨종택의 독특한 모습이다. |
일반적으로 종가는 대청의 분합문 너머에는 화계나 담장 등과 같은 자연경관 요소를 꾸미는데, 의성김씨종택은 사랑채가 자리하여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안채와 사랑채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또한 상방에 면한 쪽 분합문은 다른 분합문보다 작게 만들어 안채와 큰사랑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
대청 맞은편에는 온돌의 동방이 있는데, 온돌방 북측에 마루방이 있고, 남측에 안방의 출입간인 부엌간이 있다. 동방의 상부는 다락을 꾸며 찬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안방열의 부엌간 상부도 다락을 꾸며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안마당에 면한 동ㆍ서ㆍ남ㆍ북측 열 용마루는 대청이 제일 높고, 다음 동측열, 마지막으로 북측과 남측열이 낮아 대청과 북측의 각 실은 안마당의 천정(天井)을 통하여 하늘의 양명한 기운과 햇살을 받는다. 툇마루에 드려지는 양명한 햇살은 변함없이 종가집의 밑반찬 재료인 가지, 호박 등을 꼬들꼬들하게 말리고 있다. 안방은 안채 남측에 있는 중문간채 용마루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처마 밑 평난간을 두른 쪽마루와 안방 내부를 따뜻하게 한다. |
삶 속에 있는 사랑채 및 중문간채, 그리고 사당 사랑채와 중문간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ㄴ’자형으로 안채의 서측과 남측을 감싸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남북으로 긴 마당이 있고, 안채와 중문간채 사이에는 동서로 긴 마당이 있는데, 이들 마당은 중문간채 대문 앞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사당 아래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가 누다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큰사랑채는 정면 4.5칸 측면 2칸인데, 서측 6칸 사랑대청과 동측 3칸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의성김씨종택을 찾은 내객은 중문간채의 중문을 통하지 않고 서측 작은사랑채 모서리를 돌아 서측의 넓은 마당과 사랑대청 서측의 판문을 통하여 사랑채로 오른다. 외부에 면한 사랑대청의 삼면은 판벽을 꾸미고 판문과 띠살문을 달아 놓았다. 집주인은 대청쪽보다 중문과 사랑방 앞마당을 통해 방문 앞 쪽마루를 이용해 출입한다. 쪽마루는 전면에 평난간을 꾸며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담장을 쌓은 후 협문을 꾸며 북측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잇는 2층 누다락의 위층은 사랑대청과 연결되어 있다. 위층 마루는 과거 서고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고 있다. 작은사랑은 서측의 마루간과 온돌방 2간, 중문간 옆에 아궁이 1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과 마루 남측에는 쪽마루를 꾸미고 평난간을 달아 놓았으며, 출입은 평난간 앞의 장대석 계단을 이용한다. 그리고 평난간의 동측 끝에는 나무계단을 꾸며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
종택의 중문간채는 작은사랑의 동측에 있으며, 사랑부엌간 동측부터 중문간, 외양간, 마루방, 부엌간, 온돌방, 마루방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외양간 2간 상부는 다락을 꾸며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중문이 있는 중문간채는 전면에 대청채와 대문채가 있었을 때 중문채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대청채와 대문채가 없기 때문에 중문간채가 대문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사라진 대청채와 대문채가 지금의 작은사랑과 중문간채 정면에 있을 경우, 종택의 입면과 이미지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 종택의 배치구성은 현재보다 전후로 더 깊은 공간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대청채와 문간채의 규모에 따라 의성김씨종택의 이미지는 다른데, 현재도 지붕의 형태와 용마루와 처마선의 높이 차이로 오묘하면서 깊이가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전면에 대청채와 문간채가 있었을 경우 종가의 위용은 한층 더 높았을 것이다. |
사당은 큰사랑대청 뒤편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 툇마루를 꾸민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에는 청계공 김진의 불천위 위판과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에 담장을 쌓지 않고 동측과 서측에만 담장을 쌓아 사당 아래에 살고 있는 후손들과 종택을 굽어보도록 하였다. 사당의 출입은 동측에 협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고, 서측에는 서측 협문을 꾸며 경모각으로 통한다. |
문화유산 가치를 고려한 종택의 유지관리 계획 많은 건축문화유산은 이용자의 욕구와 사회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특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의 경우는 더 많은 변화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 요구에 의성김씨종택 또한 예외가 아니다. 과거 종택의 진입방식은 서측에서 진입하다가 북측의 종택을 향해 꺾어 진입을 했다고 한다. 현재 종택의 진입은 남측의 천전슈퍼에서 북측 중문을 향한다. 진입로의 바닥은 현재 콘크리트로 포장하고 중앙에 배수관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포장길 위에는 배수구 뚜껑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았다. 이는 관리자 중심의 표현이다. 다른 방법과 표현은 없었을까? 이런 모습은 전통고택의 이미지와 경관을 고려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판단된다. 즉 배수시설은 오늘날의 요구에 의하여 생길 수밖에 없는 시설이다. 그러나 경관디자인 측면에서 배수시설물에 대한 디자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본다. 배수 시설은 관리자 중심보다는 문화유산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은 범위에서 계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정녕 새로운 시설물은 건물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 꾸며 놓을 수 없는 것인가? 의성김씨종택은 현재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라 난방방법과 위생설비방법을 현대식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어떻게 만들고 꾸미는가에 따라 문제가 될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의성김씨종택은 안채의 산방과 상방 북측에 콘크리트와 샌드위치 패널로 보일러실과 욕실을 꾸며 오늘날 주생활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지만 이를 제대로 계획해서 고택에 맞게 꾸미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
고택의 설비시설 변화는 의성김씨종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고택이 갖고 숙제 중 하나다. 만약에 집주인에게 고택을 창건하던 당시의 모습으로 살라고 하는 것은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횡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그 모습 즉 그 집이 갖고 있는 품격을 유지하면서 변화의 요구를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이에 대한 해결을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해결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문화유산으로 유지 관리하는 사람들도 이런 점을 알고 많은 개선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과거 ‘하지 말라’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라’라는 방법을 제시해야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해답은 중심에 문화유산을 놓고 그 속 거주자의 관점에서 찾아야 하며, 더 나아가 관람자와 관리자 입장을 고려한 접근도 이루어져야 한다. 안내판은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으면서 관람자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한다. 의성김씨종택 또한 안내판이 중문 앞 담장 밖 우측에 있다. 그리고 안내판 옆에는 빨간색의 소화전함이 있다. 종택은 문화유산 관련 제도 및 규정에 의하여 크기와 색채를 결정하여 안내판 및 소화전함을 세워 놓았다. 지금의 소화전함과 안내판의 색체와 크기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소화전은 너무 붉은색으로 채색하여 문화유산보다 심하게 부각되어 미관상으로 문화유산의 경관을 훼손하고 있다. 따라서 순례자는 제안하고자 한다. 종택의 안내판과 소화전함은 담장 안쪽에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안내판은 작게 하던지 면을 동측을 향하도록 돌려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아, 낮보다 밤에 화재가 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지 않을까? 밤에 화재가 났을 때 붉은 색의 효과는 있을까? 그런데, 소화전함과 소화전의 붉은 색은 밤에도 보일까? 이들 시설물은 밤에도 보이는 야광물질로 페인트칠을 해놓았는가? 아니면 화재가 나면 신호등이 있어 위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해놓았을 까? 우리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떤지……. 오늘날 삶의 요구에 따라 생길 수밖에 없는 현대적 시설은 기존 건물의 골격 및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더 나아가 문화유산의 성격을 고려한 경관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종택은 당대의 최고의 디자인과 기술력과 재력으로 지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그에 걸맞아야 한다. 그래야 문화유산의 진정한 가치는 한층 높아지며, 오늘날 우리의 곁에 오래 남을 수 있다고 본다. 의성김씨종택도 예외가 아니다. <안동> |
통권131호 - 사람 따라 옛집 따라 6 |
첫댓글 좋은구상으로 상세히 소개해주어감사합니다 특히 평면도는 오래도록보관.보완되여졌으면 좋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