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막이 섶창과 삽교천 삽다리
심의섭(명지대 명예교수)
섭창공법? 섶창공법?
장항선을 타면 홍성역과 예산역 사이에 삽교역이 있다. 삽교는 한자로 揷橋라고 쓴다. 여기서 揷은 ‘꽂을 삽’자이다. 삽입 揷入, 삽화 揷畵, 삽입곡 揷入曲 들은 모두 揷자로 쓰고 있다. 나는 그동안 글을 쓰면서 정주영 회장의 토목 공법 중에 하나를 ‘섭창공법’ 이라고 자주 썼는데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섭창'보다는 '섶창', '삽다리'보다는 '섶다리'가 우리말 어원에 더 맞는다고 한다. 다만 '삽다리'는 이미 오랫동안 관용적으로 쓰여 온 이름이라고 한다. 차분히 설명하자면, '섶'이란 나뭇가지나 풀, 푸장, 솔가지, 잡목 등을 한데 엮어 놓은 다발라는 순 우리말이다. 누에방인 잠실의 ‘누에 섶’을 연상하면 된다. 논둑이 터지거나 끊어진 다리를 고칠 때, 시냇물의 물길을 막아 둑을 쌓을 때에는 버드나무, 싸리나무, 솔가지 등을 묶어 물 속에 넣고 그 위에 흙과 돌을 덮고 누르고 다져서 물길을 돌리거나 막거나 물을 가두었다. 이것이 바로 섶을 이용한 전통 물막이 공법이다. 그리고 '섶창'에서 '창'은 울타리처럼 막아 놓은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섶창은 ‘섶으로 만든 물막이’, ‘섶으로 만든 임시 둑’ 이라는 뜻이다.
정주영 회장의 서산방조제 공사의 일화를 생각해보자. 1984년 서산방조제 공사에서 정주영 회장은 거센 조류 때문에 막받이 물막이가 어려워지자 고철인 유조선을 가라 앉히여 물살을 약화시키고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 공법은 현대 토목기술이지만 발상은 바로 섶창을 떠올린 것이다. 큰 구조물을 먼저 넣어 유속을 줄이고 공사를 한다는 원리는 섭창의 현대적 공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판 섶창공법", 또는 "현대판 섶다리식 물막이"라고 하여도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기술을 한동안 '섭창공법', ‘짚토매 공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말 어원을 살펴보니 정확한 표현은 ‘섭창공법’이 아니라 '섶창공법'인데 이미 관행으로 굳어진 것 같다.
삽다리? 섶다리?
'섶다리'와 '삽다리'를 비교하자면, 섶다리는 오래된 우리 말이다. 나뭇가지와 섶을 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임시다리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강원도 영월이나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섶다리' 축제를 열고 있는데 전통적인 토목, 치수기술을 보여주는 것이다. ‘삽다리’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섶다리'의 발음이 변하여 '섶다리'→‘섭다리’→'삽다리'로 된 사투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삽교', '삽다리역'이란 이름은 역사적으로 굳어진 이름인 고유명사로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揷橋(삽교)라는 한자가 원래 의미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차자(借字)일 가능성이다. 예산문화원과 지역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원래 이 지역에는 삽내(삽천, 揷川)라는 하천이 있었는데 그 하천에 다리를 놓으면서 삽천교(揷川橋)라고 불렀다. 이것이 줄어들어 삽교(揷橋)가 되었고, 우리말로는 삽다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다리는 백성들의 왕래와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삽교'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예산의 '삽교(揷橋)'와 '삽다리'는 '섶다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삽내(삽천)에 놓인 다리'에서 유래했다는 것으로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이다
삽교천, 북으로 흐르는 고향의 강
충청남도 예산군과 당진시를 흐르는 삽교천(揷橋川)은 한반도에서 드물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하천이 동서 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과 달리, 삽교천은 예산·홍성 일대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흐름은 차령산맥과 주변 지형의 영향으로 형성된 독특한 지형적 특징이다. 삽교천은 예부터 예산과 당진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하천을 건너기 위해 놓은 다리가 삽교(揷橋)이었다.
삽교천은 차령산맥 북서면의 오서산과 봉수산, 가야산 일대에서 발원한 여러 계곡물이 모여 예당저수지를 만들고, 다시 무한천을 비롯한 크고 작은 지천과 지류를 품으면서 충남 서북부의 넓은 들녘을 적신다. 예산과 홍성, 당진을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삽교천은 예부터 농업과 생활을 떠받쳐 온 생명의 젖줄이자,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역사와 문화의 강이다.
삽교천 유역에는 풍수의 성지라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의 도굴 사건과 같은 한국 근대사의 아픈 흔적도 남아 있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Oppert)는 조선에 통상 개방을 요구할 목적으로 남연군 묘를 도굴해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서양 세력과 조선이 처음 충돌하던 격동의 역사가 이 강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오늘날에는 삽교호방조제가 건설되어 서해를 막고 새로운 농토를 일구는 산업화의 상징이 되었다. 더구나 삽교천 유역을 내포라 하는데 내포 신도시는 이제 충남도청의 소재지이고 서해 생활권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삽교천의 회상
삽교천을 생각하면 내가 죽을뻔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홍성 중학교 다닐 때에는 홍동의 효학리에서 홍성까지 신작로를 따라 매일 이십 리길을 왕복해야했고, 홍성이 가까워 지면 빼뽀가 있는 홍동면 구룡리에 이르러 오목내를 건너야 했다(선바위 큰 냇갈, 지금은 다리를 놓았고 입암교라 한다). 당시 오목내는 다리가 없었고, 큰 냇갈이라 하더라도 평소에는 바지를 걷고 건너는 얕은 물이라 대수롭지 않게 건너 다녔지만, 장마철이면 순식간에 거센 큰 물로 변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발길을 가로막곤 했다.
어느 장마철의 여름날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물을 건너던 나는 갑자기 불어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고, 몸은 소용돌이치는 흙탕물 속으로 잠기면서 떠내려갔다. 물에 잠기었다 세번 솟구치면 대개 죽는다고 하였다. 어린 마음에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떠내려가던 내 몸이 강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섶에 걸렸다. 그 섶을 있는 힘껏 붙잡고 간신히 기어올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버드나무 가지 하나하나가 생명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삽교천의 물길에는 예당저수지라는 관광명소에는 출렁다리도 놓아졌고, 삽교호에는 긴 방조제가 놓였어도 삽교천은 여전히 묵묵히 북쪽을 향해 흐른다. 그러나 내 마음속 삽교천은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고향의 따뜻한 품을 함께 간직한 강이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지만, 내 기억은 언제나 그 버드나무 섶이 있던 오목내를 거슬러 올라간다. 삽교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나를 키워 주고, 한 번은 내 생명까지 지켜 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강이다.
출처 : 정경시사 FOCUS(http://www.yjb0802.com)
[기고] 물막이 섶창과 삽교천 삽다리, 정경시사 Focous, 2026.07.22
https://www.yjb0802.com/news/articleView.html?idxno=60224
첫댓글 교수님의 예리한 통찰력과 글솜씨에 탄복하며 읽었습니다.
당연히 '삽다리'가 단순히 '섶다리'의 사투리나 변형일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지명 어원(삽천/삽내)을 짚어내며 고유명사로서의 '삽다리'를 정립해 주시는 논리 전개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전통의 버드나무·솔가지를 이용한 '섶창공법'의 원리를 1984년 정주영 회장의 서산방조제 유조선 공법(현대판 섶창공법)으로 확장해 해석해 주신 대목에서는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민속 토목기술과 현대 기술의 맥을 짚어내는 안목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거기에 장마철 불어난 오목내에서 버드나무 섶을 잡고 생사를 넘나들었던 어린 시절의 자전적 추억까지 얹어지니, 단순한 칼럼을 넘어 생동감 넘치는 역사이자 한 편의 문학으로 다가옵니다. 삶의 경험과 학문적 깊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아들다니, 참으로 대단한 공력입니다. 덕분에 유익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