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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 요셉
―원제 「어느 날의 목공 요셉과 그의 가족들」
김 동 리
요셉은 아침부터, 뜰 앞의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대패질을 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톱질을 하기 위한 나무틀도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툼은 그냥 틀 위에 놓인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 곁에 요셉만이 혼자서 대패질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그의 이마에서는 쉴 사이 없이 땀방울이 맺혀서는 눈 아래로 흘러내리기도 하고, 대패질을 하고 있는 판때기 위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는 잠깐 대패질을 쉬고, 꽁무니에 차고 있던 수건을 빼어 얼굴의 땀을 씻으며 뜨락 안을 돌아다보았다. 거기서는 마리아가 햇볕에 눈을 찌푸린 채 어린애의 똥 기저귀를 들쳐내고 있다. 빨래를 보내려는 모양이다. 봄에서 가을까지 육칠 개월 동안은 통 비가 없는 데다; 우물물도 흔치 않은 이 고장에서는, 비철이 아니면, 똥 기저귀 같은 것도 제때마다 빨지를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똥을 대강 털어버리고는 그대로 말려서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냇물로 가져가야 하였다. 그러나, 냇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나사렛 마을에서 가까운 냇물이이라고 해야 기시온강 상류인데 비철이 아니고는 상류가 말라버리기 때문에 보통은 삼십 리(한국 이수) 길이나 실히 걸어가야 물 구경을 하였다. 이것을 갔다 왔다 하노라면 완전히 하루 품이 되었다. 그것이 또한 마리아의 경우와 같이 두 살 터울로 아기를 자꾸 낳아야 하는 여인에게 있어서는 여간한 부담과 고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올해 서른한 살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요셉에게 시집 온 지도 어느덧 열다섯 해나 지나 있었다. 그 열다섯 해 동안에, 아들 넷, 딸 둘 해서 모두 여섯 남매를 낳은 것이다. 아니.
야곱과 스산나 사이에 하나 잃어버린 아이까지 합치면 일곱 남매를 낳은 셈이다. 게다가 장남 격으로 있는 예수까지 보태면 모두 여덟 남매를 낳은 셈인 것이다. 이렇게 아이를 여럿 낳긴 했어도, 그중 여섯은 다행히 비철에 났으므로 기저귀 빠는 고생을 면할 수 있었는데, 다섯째 아이 시몬과 요번의 유다만은 비철이 아니어서 골몰에다 골몰을 더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기저귀의
골몰 때문인지, 그보다도 이번의 아이가 워낙 만산(晩産)이 되어서 그런지 본래 그렇게 희고 깨끗하던 마리아의 얼굴도 이제는 잗다란 주름살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여보.”
요셉은 마리아를 불렀다.
큰딸 스산나와 함께 똥 기저귀를 보퉁이로 싸고 있던 마리아는 그냥 고개를 들어서 요셉을 내다본다. ‘왜 그러우?’ 하는 표정이다.
“큰애는 어디로 갔소?”
요셉은 예수를 찾는 것이다.
“곧 올 거예요.”
“글쎄 어딜 갔느냐고 묻는데…….”
“야곱을 찾으러 갔나 봐요.”
“왜?”
“야곱을 저 대신 불러다 놓고 저는 스산나를 데리고 냇물로 가려나 봅디다.”
마리아의 대답에 요셉은 더 묻지 않고 혀를 쩍쩍 찼다. 그는 예수의 그러한 태도가 여간 못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왜 집 안에서 이 아비를 도와 목공 일이나 탐탁하게 배우려 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만 배돌려고 하는가.
오늘 일만 하더라도 이 병약(病弱)한 아비는 남의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데 저는 또 딴전을 치고 있지 않은가. 그까짓 빨랫길이야 저 대신 야곱이 스산나를 데리고 간들 어떠하며, 요셉(아들)이 또한 제 누나(스산나)와 함께 간들 어떻단 말인가. 그래도 제가 야곱보다는 두어 살 위니까 소견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좀더 아비의 도움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쯤은 저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나이만 해도 열다섯이나 되니까 이제 장가를 들고 살림을 맡아도 충분할 때다. 그다지 넉넉지 못한 살림에 저도 동생을 여섯이나 거느렸으면 살림 걱정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저로 인하여――저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一병이 든 이 아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작정 이란 말인가.
요셉은 이렇게 혼자 속으로만 넋두리인 것이다. 그러나 본래 마움이 용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그는 바로 그때, 삼촌네 나귀까지 빌려서 몰고 들어오는 예수에다 대고는 말 한마디도 따끔히 건네지 못했다.
예수는 이러한 요셉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귀 위에 기저귀 보퉁이를 싣고 스산나를 태워서,
“그럼 저 다녀오겠어요.”
하고 분명히 요셉에게보다도 마리아를 향해 하는 듯한 인사말 한 마디를 남기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산이나 냇물 가에 나가자빠져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온단 말인가 임을 것이 나온단 말인가. 왜 저렇게 곧장 밖으로만 배돌려고 하는가. 오늘은 스산나를 데리고 간다는 구실이라도 있지만 어떤 때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냥 집을 빠져나가서는 산이나 수풀 속에 혼자 우두커니 자빠져 누워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요셉은, 까닭 모를 불길이 가슴에 치받는 것이다.
‘역시 그런가? 그래서 그런가?’
요셉은 그만 걷잡을 길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침이 쿨룩쿨룩 터져나는 것이다.
“야곱아 게 톱 있다. 저거 마저 켜라. 쿨룩쿨룩…… 아버진 잠깐 쉬어야겠다. 쿨룩클룩·…….”
요셉은 가슴앓이였다. 조금만 마음이 상하면 이내 걷잡을 길 없이 가슴이 후들거리며 뛰노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 와서는 천식까지 곁드는지 가슴이 후들거리고 뛰기 시작하다가는 그만 기침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병세가 시작된 것은 삼 년 전 일이다. 그해 예수는 열두 살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월절(逾越節)¹을 지키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동행은 나사렛과 가나 마을 사람들만 해도 수백 명이나 되었으므로 처음엔 예수가 눈에 띄지 않아도 일행 중에 어디 섞여 있거니 하고, 두 양주는 그냥 길만 재촉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날이 저물어 길을 쉬고 저녁을 함께하려는데도 나타나지 않기에 그때 비로소 그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사렛 마을 사람 전부와 가나 마을 사람 전부를 다 찾아다니며 물어보아도 그를 보았다는 이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열두 살이면 결코 길을 잃어버린다거나 동행을 놓쳐버리도록 어리거나 소견이 모자랄 그러한 나이는 도저히 아닌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무슨 사고임이 틀림
이 없다고 요셉은 생각했다. 평소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혼자 배돌기를 잘하는 버릇이긴 하지만 이렇게 먼 길에 나와서까지 의식적으로 따로 떨어져 배돌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의 경우라도 생겼다면, 하고 생각할 때 요셉은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그러한 요셉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리아는
“걔가 그래도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다른 잘못은 없을 거예요.”
하고 먼저 남편을 위로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도로 찾아가봅시다. 혹시 어느 친척 집에라도 혼자 떨어져 있는지?……”
“그렇기로서니 글쎄 그런 법이 어딨담?”
요셉은 볼멘소리로 이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더 말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그들은 도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길에는 아직도 얼마든지 갈릴리 사람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몇 차례든지 그의 행방을 묻곤 하였다. 그러느라고 길은 전날에 비하여 통 진척이 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가서도 친척의 집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느라고 반날이 걸렸다. 그러나 예수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불안과 초조에 싸인 요셉은 음식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사흘 만에 문득 마리아는 무슨 예감이나 지피는지,
“성전으로 한번 찾아가봅시다.”
하였다. 이미 축제가 끝났는데 성전에라고 혼자 남아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답답한 판이니까 어디든지 생각나는 대로 찾아가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성전으로 헐레벌떡이며 찾아갔을 때, 뜻밖에도 예수는 거기서 다른 학자들과 더불어 율법을 논의하고 있지 않은가. 요셉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상상할 수도 없는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정말 요셉이 더욱 놀란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마리아가 예수를 보고,
“네가 어째서 이러느냐? 우리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놀라고 근심한 줄 아느냐?”
하고 나무라며 물었을 때, 예수는 조금도 놀라거나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왜 그렇게 찾으셨어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을 몰랐습니까?”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아버지 집에’란 말이 나왔을 때, 요셉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같이 정신이 횡했던 것이다. 동시에 가슴은 메어지는 듯 시리고 아파왔던 것이다. 그는 물론 예수가 누구를 가리켜서 ‘아버지’라고 하는지 그것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자기 이외의 그 누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평소에 남과 어울리기
를 싫어하고 혼자 배돌기만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가 그의 친아버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그리하여 이제 정말 아버지를 알게 되었단 말인가.
요셉의 얼굴이 잿빛으로 질리는 것을 눈치 챈 마리아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가십시다.”
하였다. 예수는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요셉은 그뒤에도 이때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그리고 예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하기만 하면, 언제나 그때 거기서 겪은 거와 같은 증세가 되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어느덧 그의 고질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동안 요셉은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마리아가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우물물을 길어왔으니 마시라고 한다. 여느 때 같으면 우물물을 긷는 것은 스산나의 일이다. 오늘은 스산나가 빨래를 갔으니까 마리아가 직접 가서 길어온 모양이다. 우물은 나사렛 마을과 가나 마을의 사이에 있어서, 그까지 물을 길어오려면 왕복 십 리가 너머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물물을 길어오면 귀중한 음식처럼 이렇게 요셉에게 먼저 한 그릇 권하는 것이다.
요셉은 물그릇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거기 좀 앉으오.”
하고 마리아에게 말했다.
마리아는 요셉의 손에서 물그릇을 받아 치우고 나서 그 곁에 다가와 앉는다.
“어저께 그거 걔한테 의논해 봤소?”
“예, 대강은·…‥”
하고, 마리아는 무언지 명확지 못한 대답을 한다. 그거란 것은 예수의 혼담이다. 가나 마을의 제(예수) 외삼촌댁 (마리아의 친정 오라버니댁)이 자기 이웃에 올해 열세 살 난 좋은 규수가 있으니 며느리를 삼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더러 중신이 들어오는 눈치니까 생각이 있으면 곧 기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나 마을이라고 하면 마리아의 친정 곳이요, 요셉의 처가 곳일 뿐 아니라 거리도 불과 십 리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오라버니댁이 말하는 그 처녀에 대해서도 대강 짐작이 없는 바도 아니다. 그때 마리아가 요셉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므로, 요셉은 즉석에서 곧
“그 처녀 같으면 나도 기억이 있는데 그렇게 했음 좋겠구려.”
하고 쾌히 승낙을 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처녀야 좋겠지만, 글쎄 우리 애가……”
하고 무언지 자신 없는 태도였다.
“부모가 좋다면 그만이지 혼인까지 아이들의 영(令)을 받들어 정할까?”
하고 올케가 우기자, 마리아는
“그렇지만…….”
하고, 역시 무언지 석연치 못한 꼬리를 달았다.
“아무튼 의논해서 통지해주구려 그만한 며느릿감은 어려울 터니까.”
하고 올케는 돌아갔다.
“그래 걔는 뭐랬소?”
요셉이 이렇게 다시 물으니 마리아는 더 머뭇거리지 못하고,
“글쎄 어저께부터 나는 걔 성미가 다른 애들과 다르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주저했는데 말을 걸어보니까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군요.”
한다.
요셉은 마리아가 예수의 그 ‘다른 애들과 다른,’ 그(요셉)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그 괴팍스럽고 괘씸하기만 한 고아적 기질에 대하여, 무언지 그녀만은 대강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듯한, 두둔하려 하는 듯한, 그러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불길이 확확 치오르곤 하지만, 그와 반면에 그녀를 몹시 믿고 사랑하고 있는 그는 그러한 불길을 자기의 가슴속에서만 지그시 태워서 삭혀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됐단 말인지 좀 알아듣도록 이야기해주구려.”
요셉의 볼멘목소리다. 그로서는 그녀에게 아무리 짜증을 낸대야 그저 이 정도가 고작이다. 마리아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녀도 처음부터 요셉을 속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좀더 그를 위로하는 길인지를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과 같이 이렇게쯤 되면 있는 그대로 털어바치는 수밖에 길이 없다고 결심한다. 마리아는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걔도 알아듣도록 이야길 했어요. 그랬더니 그애 대답이, 저는 혼인할 몸이 아니라나요. 그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니까, 저는 이 세상 사람과 함께 살려고 오지 않았다고 그래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서 제가 또 물었어요. 그건 또 무슨 뜻이냐고. 그랬더니, 걔도 어느덧 흥분을 해서 저를 누군 줄 아느냐고, 저를 누가 세상에 보낸 줄 아느냐고, 저의 아버지가 누군 줄 아느냐고, 이렇게 마구 반문을 하잖겠어요. 그래 나도 어쩔 줄을 몰라서 마음을 진정하느라고 눈을 내리감고, 여호와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나니까, 걔는 아직도 지극히 흥분한 채로, 저의 몸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아버지의 일을 위하여 바칠 것이라고, 누구도 저의 길을 막거나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는군요.”
마리아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미 요셉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만치 그는 벌써 걷잡을 길 없이 가슴이 후들거리며 뛰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클룩쿨룩하고 기침이 터져 나오자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리아가 냉수를 떠다 주자 그것을 받아 마시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요셉은 예수의 입에서 ‘아버지’란 말이 쓰일 때마다 질색을 했다. 그것을 태연히 전하는 마리아까지 얄밉고 무서울 정도였다. 대관절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자기 (요셉)가 설령 그의 생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자기는 그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그를 위하여 아버지의 임무를 다하여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슨 불만이나 원한이 있어서 나 아닌 다른 ‘아버지’를 찾고 있단 말인가. 그럴 때마다 그(요셉)는 절망에 가까운 얼굴로 마리아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곤 하지만 그녀에게 설령 그로서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열다섯 해 동안이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자기의 시중을 들고 자기의 아이들을 일곱이나 (그중 하나는 잃었지만) 낳아서 기르느라고 노상 똥 기저귀 속에 파묻혀 살아오는 그녀를 다른 뜻에서 추호라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날 저녁 때 요셉은 마리아에게 또 한번 다시 의논하였다.
“걔가 맏이만 아니라도 나는 이렇게 애타하지 않겠소. 그러나 제가 명색 맏아들로 있으면서 그렇게 엇나가기만 하면 집안 꼴이 어찌 되겠소. 어린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바로잡도록 당신이 한번 다시 잘 타일러보구려.”
이튿날 요셉은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시작하였다. 어저께 저녁, 그는 큰 아이 둘(예수와 야곱)에게 내일은 다른 일 다 덮어두고 자기를 도와 문을 짜야 한다고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때 두 아이는 다 잠자코 있었다. 그러면 그것은 으레 승낙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침밥을 먹고 난 예수가 갑자기,
“저는 오늘 디베랴로 좀 떠나가야 되겠어요.”
한다. 그러자 여느 때와 달리, 요셉의 바짝 마른 목소리가
“갑자기 디베랴엔 왜?”
하고 받는다. 이것은 좀 드문 일이었다. 보통이면 으레 마리아가 상대를 하고 요셉은 곁에서 듣기만 했던 것이다.
“디베랴에 바사바 님을 찾아봬야 되겠어요.”
예수의 목소리에도 어딘지 빳빳한 데가 있는 듯하다. 디베랴의 바사바라고 하면 예수가 가끔 찾아가곧 하는 숨은 학자다. 그에게 오경 (五經: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 기」) 중의 「창세기」 「출애굽기」 두 권과, 선지서 (先知書) 열일곱 권 가운데 다섯 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전에도 여러 차례 가서 그것을 빌려 보곤,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 바사바를 찾아간다는 젓도 물론 이것 때문인 것이다.
“바사바 님을 찾아가는 일 같으면 하필 오늘 가지 않아도 되잖니? 너도 알다시피 내일까지는 아블로 아저씨네 문을 다 만들어 주어야 하도록 되어 있잖니?”
“……”
예수는 대 답이 없다.
요셉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너도 보다시피 어린 동생들은 여럿이고, 내가 신병이 있어 앞으로 얼마나 살는지도 모르는데 네가 집안일을 보살피지 않으면 우리가 장차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냐? 저 아블로 아저씨네만 하더라도 이번에 우리가 신용을 잃고 보면 다음엔 두번 다시 우리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 할 것이 아닌가?”
“……”
예수는 그저도 대답이 없다. 가만히 듣고 있을 터이니 얼마든지 다 이야기하라는 듯한 그러한 태도다.
“그러니까 오늘은 네 동생과 함께 저 문을 마저 짜놓고 모레쯤 떠나도록 해라.”
“……”
예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요셉도 오늘만은 기어이 져서는 안 되겠다는 듯이 그의 앞을 막다시피 하여 버티고 서 있다.
마리아가 곁에서 이 광경을 보다 못하여,
“얘, 빨리 아버지 시키는 대로 나가서 문을 짜려무나.”
하고 애원하듯이 타이르자, 예수는 그 호수같이 맑고 푸른 두 눈을 멀리 하늘로 향해 굴리며,
“저를 떠나가게 해주세요.”
하였다.
“오늘만은 안 된다. 기어이 문을 짜놓고 떠나거라.”
요셉도 오늘만은 단단히 화가 치민 모양이다. 그의 두 눈에는 날카로운 광채가 서려 있다.
그러자 마리아가 또 입을 열어,
“그래, 오늘만은 아버지 시키는 대로 문을 짜놓고 떠나려무나.”
했을 때였다.
예수는 그 투명하고도 냉연한 목소리로, :
“저는 아버지께서 시키는 대로 떠나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요셉의 두 눈에 불길이 번쩍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바닥은 어느덧 예수의 왼쪽 따귀를 철썩 소리가 나게 훌쳐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심한 기침은 그로 하여금 더 입질이나 손질을 계속할 수는 없게 하였다. 쿨룩쿨룩 쿨룩쿨룩 사뭇 기침에 꼬꾸라져가는 요셉을 남겨두고,
“저 다녀오겠어요.”
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요셉의 가슴앓이는 그날 이후로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서른네 살 나던 해, 그러니까 그날에서 두 해 뒤다―—그는 결국 그 병으로 인하여 죽고 말았다.
마리아는 그뒤, 예수의 신도들에게, 예수가 열두 살 때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이라고 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집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요셉 이외의 그 누구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른 일이 있다고는 먈하치 않았다. 그것은 죽은 남편에 대하여 무언지 미안하며 박정 한 일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1 이 소설의 제재는 「마태복음」 제14장* 제54절에서 제56절까지와 「누가복 음」 제2장 제49절에 의거한 것이다.
2 본 편은 졸작 「마리아의 회태(懷胎)」와 자매적(姉妹的)인 작품이나 그 역사 적 기준을 별개로 했음을 일러둔다.
* 여기서 김동리가 말한 「마태복음」 제14장은 제13장의 착오이다
-끝-
2016년 5월 1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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