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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진의 숲 카페》
## 제44화 ― 「빈 도시락을 들고 온 할머니」
### 1. 빈 도시락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였다.
숲에는 가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직 나뭇잎이 완전히 물들지는 않았지만, 카페 앞 느티나무 끝에는 노란빛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소진은 창가에서 원고를 쓰고 있었다.
지영은 주방에서 점심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벽에는 아이들이 만든 메뉴가 붙어 있었다.
**〈말벗 차〉**
가격은 0원.
조건은 차를 받은 사람과 십 분 동안 이야기하기.
민호와 친구들이 만든 메뉴였다.
소진은 그 메뉴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그때였다.
딸랑.
카페 문이 열렸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일흔 중반쯤 되어 보였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고, 짙은 자주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낡은 천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소진이 인사했다.
할머니는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기가 밥도 해준다는 집이오?”
지영이 주방에서 나왔다.
“네. 예약하시면 한 끼를 준비해드립니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하나 부탁합시다.”
“드시고 가시려고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천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오래된 스테인리스 도시락통 하나를 꺼냈다.
뚜껑에는 작은 흠집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손잡이에는 붉은 천이 감겨 있었다.
할머니가 도시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에 좀 담아줘.”
지영이 물었다.
“누구 드리려고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시락통의 뚜껑을 열었다.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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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꼭 같은 반찬
할머니의 이름은 **이정순**.
일흔여섯 살이었다.
정순은 도시락에 담을 음식을 하나씩 말했다.
“밥은 흰쌀밥으로.”
“네.”
“국은 소고기뭇국.”
지영이 수첩에 적었다.
“반찬은요?”
“계란말이.”
“또요?”
“멸치볶음하고 시금치나물.”
“김치는요?”
“잘 익은 배추김치.”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못 드시는 음식이 있나요?”
정순은 잠시 생각했다.
“없어.”
“간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싱겁지 않게.”
“네.”
정순이 덧붙였다.
“계란말이는 조금 두껍게 해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치는 너무 잘게 썰지 말고.”
지영은 다시 적었다.
소진이 물었다.
“어르신, 누구 드시게요?”
정순은 도시락통을 바라보았다.
“우리 영감.”
“남편분이요?”
“응.”
“좋아하시는 음식인가 봐요.”
정순이 아주 조금 웃었다.
“맨날 이것만 먹겠다고 했어.”
소진도 웃었다.
“입맛이 한결같으시네요.”
정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물었다.
“언제 찾으러 오면 돼?”
지영이 말했다.
“이번 주는 예약이 있어서요. 다음 주 수요일 오전에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열한 시?”
“네.”
정순은 도시락통을 다시 천가방에 넣었다.
“그때 올게.”
그리고 카페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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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이 돌아간 뒤 소진이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남편 도시락이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지영은 수첩을 덮었다.
“말하기 싫으신가 보죠.”
“그런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소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순은 카페 앞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오래된 도시락통이 든 천가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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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첫 번째 도시락
다음 주 수요일.
지영은 아침부터 주방에 있었다.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계란말이는 평소보다 두껍게 만들었다.
멸치는 너무 딱딱하지 않도록 볶았다.
시금치도 데쳤다.
소진이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도시락?”
“네.”
“할머니 것?”
“네.”
소진은 계란말이를 바라보았다.
“많이도 만들었네.”
“두껍게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남편분이 잘 드시나 봐.”
지영은 웃었다.
“그러게요.”
열한 시가 되기 십 분 전이었다.
딸랑.
정순이 들어왔다.
지난번과 똑같은 자주색 카디건이었다.
손에는 도시락통이 들려 있었다.
“벌써 왔어요?”
소진이 물었다.
“일찍 나왔어.”
“차 한잔 드릴까요?”
“아니. 오래 있으면 안 돼.”
지영이 도시락을 받았다.
따뜻한 밥을 담았다.
소고기뭇국은 국물이 새지 않는 별도 통에 넣었다.
반찬도 가지런히 담았다.
정순은 옆에서 지켜보았다.
“계란말이 좀 더.”
지영이 하나를 더 넣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응.”
도시락 뚜껑을 닫으려는데 정순이 말했다.
“잠깐.”
할머니는 계란말이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지영이 웃었다.
“맛있으세요?”
“우리 영감이 좋아하겠네.”
정순은 도시락값을 치렀다.
그리고 도시락통을 천가방에 넣었다.
“다음 주에도 부탁해.”
“같은 음식으로요?”
“응.”
“알겠습니다.”
정순은 카페를 나갔다.
소진은 문밖까지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정순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숲길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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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세 번의 수요일
다음 주 수요일에도 정순이 왔다.
똑같은 시간이었다.
똑같은 도시락통이었다.
메뉴도 같았다.
흰쌀밥.
소고기뭇국.
두꺼운 계란말이.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배추김치.
지영이 물었다.
“다른 반찬도 해드릴까요?”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똑같이 해줘.”
“매번 같은 음식이면 질리실 텐데요.”
정순이 말했다.
“우리 영감은 안 질려.”
지영은 더 묻지 않았다.
세 번째 수요일.
정순은 도시락을 받아 들고도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카페 앞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소진이 따뜻한 보리차를 가져다주었다.
“조금 쉬었다 가세요.”
“고마워.”
정순은 차를 마셨다.
그리고 숲을 바라보았다.
“여기 참 좋네.”
“자주 오세요.”
“그러고 싶지.”
“왜요?”
정순은 웃었다.
“오면 자꾸 생각나거든.”
“누가요?”
“우리 영감.”
소진은 정순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도시락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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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연히 알게 된 비밀
네 번째 수요일이었다.
정순이 도시락을 찾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영은 시장에 갈 일이 생겼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된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영은 소진에게 말했다.
“시장 좀 다녀올게요.”
“차 가지고 가.”
“가까운데요.”
“그럼 내 것도 좀 사 와.”
“뭘요?”
“군밤.”
지영이 웃었다.
“시장에 군밤 파는 데가 있어요?”
“찾아봐.”
“없으면요?”
“그럼 당신이 구워.”
지영은 웃으며 카페를 나섰다.
시장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큰길로 내려가는 길과 숲 뒤편을 돌아가는 길.
지영은 그날 숲 뒤편 길을 택했다.
그런데 작은 갈림길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정순이었다.
천가방을 들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지영은 반가운 마음에 부르려다가 멈췄다.
정순이 들어간 곳은—
작은 공동묘지였다.
마을 뒤편 언덕에 오래전부터 있던 묘역이었다.
지영은 걸음을 멈췄다.
정순은 묘역 가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작은 비석 앞에 앉았다.
천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뚜껑을 열었다.
흰쌀밥.
소고기뭇국.
계란말이.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배추김치.
정순은 도시락을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영감.”
바람이 불었다.
“오늘도 가져왔어.”
지영은 움직이지 못했다.
정순은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당신 좋아하는 거.”
그리고 잠시 웃었다.
“오늘은 좀 두껍게 해달라고 했어.”
지영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알았다.
**정순이 매주 가져가는 도시락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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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남편이 기다리는 자리
그날 저녁.
지영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소진이 물었다.
“시장 다녀오더니 왜 그래?”
“아니에요.”
“무슨 일 있었어?”
지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정순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소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구나.”
“네.”
“그래서 매번 같은 반찬이었네.”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분이 좋아하시던 음식인가 봐요.”
소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혼자 가시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매주?”
“네.”
소진은 한동안 생각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모른 척하자.”
지영이 소진을 바라보았다.
“네?”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그렇죠.”
소진이 덧붙였다.
“누구한테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 있잖아.”
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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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할머니의 고백
다음 수요일.
정순이 다시 왔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도시락통을 내려놓은 뒤 창가에 앉았다.
“오늘은 차 한잔 마시고 갈게.”
소진이 웃었다.
“그러세요.”
지영이 따뜻한 대추차를 내왔다.
정순은 차를 마시다가 물었다.
“내가 매번 같은 도시락 부탁하니까 이상하지?”
소진은 웃었다.
“좋아하시는 음식이 있나 보다 했죠.”
정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 영감이 죽었어.”
소진은 조용히 정순을 바라보았다.
“오 년 됐지.”
정순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 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밥때가 되면 생각나.”
남편은 평생 버스 정비공으로 일했다.
새벽에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정순은 도시락을 쌌다.
흰쌀밥.
소고기뭇국.
계란말이.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그리고 잘 익은 김치.
“그 사람은 별난 사람이었어.”
정순이 웃었다.
“다른 반찬 해주면 싫다고 했거든.”
“왜요?”
소진이 물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안 질린대.”
정순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삼십 년 넘게 도시락을 쌌어.”
아침마다 밥을 했다.
반찬을 만들었다.
도시락통을 닫았다.
남편은 그것을 들고 출근했다.
퇴근하면 빈 도시락통을 가져왔다.
정순은 그것을 씻었다.
다음 날 다시 채웠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편하더라고.”
정순이 말했다.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밥 안 해도 되니까.”
정순은 웃었다.
“아침에 일찍 안 일어나도 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상해졌다.
밥을 해도 남았다.
국을 끓여도 남았다.
반찬을 만들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먹다 남은 음식이 쌓였다.
“제일 이상한 게 뭔지 알아?”
정순이 물었다.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도시락통이 안 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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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다시 채워진 도시락
정순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도시락통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찬장에 넣어두었다.
그러다가 꺼냈다.
다시 씻었다.
또 넣어두었다.
어느 날은 혼자 도시락을 싸기도 했다.
남편이 좋아하던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식탁 맞은편에 놓았다.
하지만 먹는 사람이 없었다.
정순은 그날 한참 울었다.
“내가 좀 우습지?”
정순이 물었다.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순은 말을 이었다.
“이 나이에 아직도 죽은 영감 도시락을 싸고 싶으니.”
지영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저희 카페에 부탁하셨어요?”
정순은 잠시 웃었다.
“이제 손이 아파.”
관절염 때문에 오래 서서 요리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칼질도 예전 같지 않았다.
냄비를 오래 들고 있으면 손목이 아팠다.
“그래도 영감 도시락은 가져가고 싶더라고.”
정순은 도시락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부탁한 거야.”
소진이 물었다.
“묘소에 가져가시는 거예요?”
정순은 놀란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어?”
소진은 잠시 망설였다.
지영이 말했다.
“지난번에 우연히 뵀습니다.”
정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웃었다.
“그랬구먼.”
“죄송합니다.”
지영이 말했다.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미안해.”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알았으니 다음부터는 계란말이 하나 더 넣어줘.”
지영이 웃었다.
“남편분이 많이 드셨나 봅니다.”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말했다.
“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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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함께 먹는 밥
다음 수요일.
지영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주방에 들어갔다.
도시락은 똑같이 준비했다.
흰쌀밥.
소고기뭇국.
계란말이.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배추김치.
그런데 이번에는 작은 반찬통 하나를 더 준비했다.
계란말이를 넉넉하게 담았다.
정순이 찾아왔다.
“오늘은 많네.”
“어르신 것도 넣었습니다.”
정순은 반찬통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지영이 물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도시락 가져가시면 어떻게 하세요?”
정순이 웃었다.
“영감이랑 밥 먹지.”
“같이요?”
“응.”
정순은 천천히 말했다.
묘소 앞에 도시락을 펼친다.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건다.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시장에 다녀온 이야기.
옆집 할머니가 손자를 봤다는 이야기.
텔레비전 드라마 이야기.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던 반찬을 하나씩 먹는다.
“영감은 안 먹지만.”
정순이 웃었다.
“내가 대신 먹어.”
소진은 그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정순이 덧붙였다.
“처음에는 울기만 했는데 요즘은 밥도 잘 먹어.”
“다행이네요.”
“영감이 좋아하겠지.”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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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할머니가 놓고 간 도시락
몇 주가 더 흘렀다.
정순은 매주 수요일 같은 시간에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순이 빈 도시락통을 들고 왔다.
평소와 달리 도시락을 부탁하지 않았다.
“오늘은 안 해도 돼.”
지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도시락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좀 맡아줘.”
소진이 물었다.
“도시락통을요?”
“응.”
정순은 웃었다.
“이제 내가 조금씩 해보려고.”
손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간단한 반찬 정도는 다시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매주 남편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영감한테 이야기했어.”
정순이 말했다.
“뭐라고요?”
소진이 물었다.
정순은 웃었다.
“나도 이제 집에서 밥 좀 먹겠다고.”
소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잘하셨어요.”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한 건지 모르지.”
그리고 말했다.
“다음 주에는 나 혼자 밥 먹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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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정순은 도시락통을 카페에 맡기고 돌아갔다.
소진은 도시락통을 깨끗이 씻어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지영이 물었다.
“왜 맡기고 가셨을까요?”
소진은 잠시 생각했다.
“매주 도시락을 채워야 한다는 마음도 조금 쉬고 싶은가 보지.”
지영은 선반 위의 도시락통을 바라보았다.
“다시 찾으러 오시겠죠?”
“그럼.”
소진이 말했다.
“그때까지 잘 보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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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두 사람의 저녁
그날 저녁.
소진과 지영은 카페 문을 닫았다.
지영은 간단한 저녁을 준비했다.
된장국.
계란말이.
김치.
소진이 밥상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계란말이네.”
“많이 만들었거든요.”
소진이 웃었다.
“정순 할머니 덕분에 당신 계란말이 실력이 늘겠다.”
“그러게요.”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한동안 조용했다.
그러다가 소진이 물었다.
“지영 씨.”
“네.”
“사람이 떠나고 나면 제일 그리운 게 뭘까?”
지영은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알 것 같아.”
“뭔데요?”
소진은 밥상을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거.”
“별것 아닌 거요?”
“응.”
아침에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식탁에 마주 앉아 반찬을 건네는 일.
누가 설거지할 것인지 투덜거리는 일.
마트에서 뭘 사 올지 전화하는 일.
그런 것들.
“살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은 웃었다.
“그런데 없어지면 제일 크게 느껴지는 게 그런 거더라.”
지영은 말없이 소진의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란말이 한 조각을 소진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많이 드세요.”
소진이 웃었다.
“갑자기 왜?”
“별것 아닌 거 하려고요.”
두 사람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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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빈 도시락의 의미
며칠 뒤.
정순이 다시 카페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도시락통이 없었다.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소진이 반갑게 맞았다.
정순은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작은 감자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우리 집 텃밭에서 캔 거야.”
지영이 받았다.
“감사합니다.”
정순은 창가에 앉았다.
“오늘은 밥 먹고 갈까?”
지영이 웃었다.
“그럼요.”
“뭐 해줄 건데?”
“어르신 좋아하시는 거요.”
“뭔데?”
지영이 말했다.
“계란말이요.”
정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놈의 계란말이.”
소진도 웃었다.
정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숲길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영감한테 안 갔어.”
소진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정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내가 밥 먹고 싶어서 왔어.”
소진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잘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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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지영은 정순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렸다.
소고기뭇국.
계란말이.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잘 익은 김치.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죽은 남편을 위한 도시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정순을 위한 밥상이었다.**
정순은 천천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 말했다.
“맛있네.”
지영이 웃었다.
“남편분이 좋아하실 만하죠?”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웃었다.
“오늘은 내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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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소진은 수첩을 펼쳤다.
한동안 생각하다가 적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사람의 몫까지 살아간다.**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적었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도
자기 몫의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
소진은 선반 위에 놓인 낡은 도시락통을 바라보았다.
스무 해 넘게 사용했을 도시락.
수없이 채워지고 비워졌을 도시락.
이제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도시락은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정순이 다시 찾아와 가져갈 것이다.
남편에게 가져갈 수도 있고,
자신의 소풍 도시락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찬장에 넣어둘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이든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정순이 이제 자기 밥을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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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지영이 소진을 불렀다.
“소진 씨.”
“왜?”
“내일 아침 뭐 먹을래요?”
소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계란말이 빼고.”
지영이 웃었다.
“그럼 된장찌개?”
“좋아.”
“반찬은?”
“당신 마음대로.”
소진은 수첩을 덮었다.
창밖에서는 숲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저녁을 준비하는 작은 소리들이 이어졌다.
냄비 뚜껑이 닫히는 소리.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지영이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
소진은 그 소리들을 오래 들었다.
언젠가는 그리워질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의 평범한 소리들이었다.
**― 제44화 끝 ―**
### 다음 편 예고 ― 제45화 「한 장 남은 가족사진」
비가 그친 다음 날.
한 남자가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을 들고 카페를 찾아온다.
사진 속에는 네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남자는 사진 속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이 사람을 사진에서 지우고 싶습니다.”
소진이 묻는다.
“왜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진을 뒤집는다.
사진 뒷면에는 오래전에 적힌 짧은 문장 하나가 남아 있다.
**“우리가 다시 함께 웃는 날.”**
하지만—
그날은 끝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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