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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의 일곱동네
(모셔온글입니다. 1991년의 글이니 참고 해서 읽으시와요.)
◎ 외곡리(外谷里:기촌, 중기)
피아골 입구에 있다. 골 안쪽으로 내서리와 내동리가 있으며 동쪽으로 화개면 탑리와 접해있다.
행정리는 기촌과 중기 두 마을이나, 자연마을은 추동, 하리, 조동이 보태져서 모두 다섯동네이다.
연곡골의 첫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865번 지방도 연변에 집들이 분포하며 추동(가락)과 허리(머리)마을이 부속되어 있다.
추동은 마을 서쪽의 연곡천 건너로 700미터 지점의 산자락에 있다.
하리는 마을에서 외곡다리를 건너, 한수내쪽으로 국도를 따라 1.5킬로 지점에 있다.
세 마을의 개촌내력을 보면,
기촌은 1736년께 행주기씨가 개척하였고,
하리는 진양강씨,
추동은 김해허씨가 각각 개촌하였다.
마을 이름은 처음에 기씨들이 터를 닦았다 하여 기촌(奇氏村)이라 칭하다가,
기씨들이 인근의 조동으로 옮겨가고 타성씨족이 입주하면서 기촌(基村)으로 바꿔부렀다.
달리 연곡(○谷)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앞의 소나무숲(섬등)이 제비모양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로부터 골안 전체를 '연곡골'로 칭하게 되었다.
마을의 성씨는 광산김씨가 대종을 이루고('88년 기준 65세대 가운데 21세대) 있으며,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 18개성씨가 산다.
1986년에 보건진료소가 개설되었고, 44명이 재학하고 있는 토지초등학교 외곡분교가 있다.
1991년 1월 현재 65세대 237명이 살고 있다.
도로입구에서 북쪽으로 1.88킬로 지점에 있다.
마을 서쪽의 연곡천 건너편에 부속마을인 조동이 있다.
이 동네는 1780년께 연곡사로 수도하러 들어가던 스님들이 처자식을 숨겨둔 곳이 마을로 되었다는 설과,
승려 김해김씨가 절터로 삼고자 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마을 이름의 유래도 승려가 터를 잡았으므로 중터 또는 승리(僧基)라 불렀다고 한다.
1950년께 이상수라는 사람이 외곡과 피아골의 중간지점이라 하여 중기로 개칭하였다.
1991년 1월 현재의 주민은 49세대 181명이다.
◎ 내서리(內西里:원기, 신촌, 남산)
외곡에서 북쪽으로 5∼7킬로사이의 연곡천 서쪽 산기슭에 있다.
두 개의 행정리(신촌, 남산)와 세 개의 자연마을(신촌, 남산, 원기)이 있다.
내서리의 제일 아랫쪽에 있으며 외곡리 중기와는 약 3킬로의 거리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남평문씨 부자가 피란 들어 온 데서 비롯했다.
1700년께 나주임씨 등 다른 성씨들이 들어와 큰 동네가 되었다.
처음에는 신촌마을에 속하였으나 1974년도에 분동되었다.
이 마을은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칠불암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
왕이 아들을 만나러 오가면서, 휴식할 큰 집을 지었다.
이 집을 '원'(院)이라 부른데서, 원터(원기)란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본디 원집은 절에서 절을 찾는 관리나 신도들을 숙박시키기 위해 운영하던 숙박시설로
이 동네에 연곡사 원집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 마을의 성씨는 토지면의 다른 마을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으리만치, 높은 시족촌성향을 보이고 있다.
1988년 기준으로 모두 31세대 가운데 21세대가 남평문씨였으며 나주임씨 44가구, 기타 6가구였다.
한 마을에 수십종의 성씨가 몰려사는 토지면의 보편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매우 특이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원기
북쪽으로 500미터쯤에 있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1700년께 광산김씨와 경주이씨가 개동기에 처음 정착한데서 비롯되었다.
개동기는 남산 서북쪽에 있던 마을로 아침에 가장 먼저 해가 비쳤다고 한다.
그후 전답이 가까운 곳으로 새터를 잡은 곳이 지금의 신촌이다.
마을이름의 유래도 개동기를 떠나 새로 터를 잡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88년 기준으로 총 29세대 가운데,
남평문씨가 17가구, 경주이씨가 5가구, 광산김씨가 6가구이며 기타 성씨는 1가구에 불과하다.
이 마을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때 53세대 256명의 주민이 소개된 적이 있다.
독가촌 소개 때도 마을의 외딴집들이 동네로 합쳐졌다.
동네 어귀의 진입로 아래쪽에 모인집들이, 그 무렵 몽땅거려 지어진 외딴집이다.
1991년 1월 현재 인구는 56세대 169명이다.
신촌
북쪽으로 1.3킬로 지점에 있다. 마을 서쪽 4킬로쯤의 산허리에 '느진목재'가 있다.
임진왜란때 밀양박씨가 피란와 마을터를 잡았고,
그후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오면서 촌락이 이뤄졌다.
마을이름을 남산으로 한 것은 마을의 지형이 서울의 남산과 흡사했기 때문이라 한다.
마을의 성씨를 보면, 88년 기준으로 총 40세대 가운데
전주이씨가 15세대로 가장 많고, 밀양박씨 9세대, 김해김씨 7세대, 기타 9세대 등이다.
남산의 역대 거주인구를 보면 1959년에 32세대 197명, 1981년에 45세대 232명이 각각 거주하였고
1991년 1월 현재인구는 37세대 142명이다.
◎ 내동리(內東里:평도, 당치)
연곡골의 깊은골 동네이다.
두 개의 행정리(평도, 당치)가 있으나 자연마을은 5개에 이른다.
당치에 농평이 속해 있으며, 평도와 죽리와 피아골(직전)이 속한 까닭이다.
외곡리 입구에서 북쪽으로 20리거리에 있다.
이 마을에서 농평?당치 진입로와 연곡사?피아골 진입로가 갈라진다.
신라때 연곡사가 건립된 후 이곳을 찾던 사람들 중에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두 가구가 정착했다고 전한다.
88년 성씨통계에서 보면, 총 73세대 가운데
밀양박씨가 18세대, 김해김씨가 11세대, 광산김씨가 16세대이며 기타 성씨가 28세대였다.
김씨와 박씨가 상대적 다수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간벽지임에도 마을 주변이 평탄한데서 평지라 부르다가 다시 평도로 바꿨다.
이 마을에 속한 죽리(죽몰)는 평도 남쪽 1.2킬로 지점의 도로변에 있다.
마을 북쪽 700미터 지점에 연곡사가 있으며,
피아골(직전)은 마을 서북쪽 2.5킬로 지점에 있다.
피아골은 해발 400∼450m에 있으며 본디 '피밭골'이고
서북쪽 7.5킬로지점의 질매재를 통해 문수리와 연결된다.
평도에는 1986년에 보건진료소가 개설되었으며, 토지동 초등학교(재학생 67명)가 있다.
1991년 1월 77세대 278명이 살고 있다.
평도는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때도 이미 소개된 적이 있으나
(죽리 22세대 88명, 평도 29세대 171명, 피아골 28세대 127명)
독가촌 소개때도 평도와 피아골의 외딴집들이 모조리 산아래로 피산하는 홍역을 치렀다.
평도 동북쪽 1.3킬로지점의 산허리에 있으며, 마을 고도가 450∼550m에 이른다.
농평은 당치보다 북쪽으로 1.5킬로를 올라간 산꼭대기에 있는 국내 최고의 하늘아래 동네이다.
농평은 토지면에서 마을고도가 가장 높은 마을로 그 높이가 650∼700m에 이른다.
농평의 동쪽은 서낭당이 있던 '당치고개'이며 연곡사쪽 사람들이 화개면 범왕리 칠불암으로 넘어다녔다.
문척면 반내에서 엄씨 세 가구가 입촌한 뒤로 전주이씨 네 가구가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름의 내력을 보면, 고개에 당산나무집이 있어서 '당재'로 부르다가 한자표기로 당치가 되었다고 한다.
농평은 마을형세가 풍수설의 노호롱골(老虎弄骨)의 형국인 평탄한 땅이라는 데서 비롯한 고원분지이다.
마을의 성씨를 보면, 1988년 기준으로 총 39세대 가운데 전주이씨 7, 김해김씨 8, 봉성장씨 6세대 등이 거주했으며
기타 성씨가 18세대였다. 역대 거주인구를 보면, 1959년에 46세대 270명, 1981년에 37세대 169명이 거주했으며
1991년 1월 현재 32세대 109명이 살고 있다.
한국전쟁때 한 번 소개됐고(농평 51세대 281명, 당치 57세대 301명) 독가촌소개때도 동네를 비운 마을이다.
농평마을에는 5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 토지초등학교 농평분교가 있다.
첫댓글 피아골 역사를 집대성 하여주셨네요.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