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 이후, 조선인 무장부대들은 중국내에서 더 이상 무장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투쟁 공간을 찾게 됩니다. 이들은 일단 밀산에 모여 무장부대의 통합을 추진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당시 한인들은 소련의 약소민족 지원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많았고,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대개 아시겠지만, 무장부대들은 연해주의 알렉세호스크(자유시)로 이동했어요. 홍범도나 김좌진, 안무, 최진동 등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이 거의 모두 자유시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인사회주의자들간의 분쟁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자유시참변으로 기억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920년대 초반기에 있었던 독립무장투쟁은 여기서 상당히 약화되고 맙니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 추격을 명분으로 간도내 한인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조선인 무장부대의 탄생은 간도 한인사회의 존재 자체라는 판단이 있었겠죠.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의 보고에 의하면, 약 3천여명의 한인이 살해되고, 민가 3천여동, 학교 59개소, 교회당 19개소, 곡물 6만여섬이 소실되었답니다. <아리랑>에서 김산도 그 참혹함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어요. 이것이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한인 무장 독립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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