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원동우의 「이사」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게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인생은 영원한 과정"이라는 말도 있고, "희망에 살다가 그 희망에 속아 산다"는 말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그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인생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이라고 한다. 마치 무지개를 잡으려고 달려갔으나 무지개는 그 자리에 없고 다시 저 멀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느껴지는 허무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알게 되었다면 무지개를 잡으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무지개를 잡으려고 달려갔을 것이고, 무지개는 잡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만큼 거기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석정의 처녀 시집 「촛불」(1939년)에 실려 있는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일제의 질곡에 묶인 암흑기에 쓰여진 작품이다.
이 시는 이상향을 그리는 전원시지만, 그가 그린 전원은 이상향으로서의 특별한 나라가 아니다. 고요한 호수에 물새가 날고, 들에는 장미꽃이 피며, 노루 새끼가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곳을 말한다. 염소가 풀을 뜯고, 은행잎이 날리며, 과수원에 꿀벌이 윙윙거리는 곳은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의 일상적인 삶 그 자체다.
신석정은 왜 이처럼 그 당시 한국인이면 누구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일상적인 평범한 소재를 특별한 이상향처럼 그렸을까? 그 평범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 일제의 침탈로 인해서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형태는 변한 게 없으나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뼈아픈 소외의식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평범 속의 비범함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 하겠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풀베개(草枕)」라는 소설에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이사를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인간들의 세상 말고는 이사를 가서 살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그런 어떤 귀신들의 나라가 있다 할지라도 인간들의 나라만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느 정도 고쳐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허술하게 보이는 이웃들에 의해서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고 시가 나온다고 했다.
'그 먼 나라'는 '저만치의 세계'
나쓰메 소세키는 「풒베게」라는 소설 서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사를 할 수 없는 세상이 살기 어려워지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고쳐서 잠시 동안의 생명을 잠시 동안이라도 살기 좋게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시인이라고 하는 천직(天職)이 생기고, 여기에서 화가라고 하는 사명이 주어진다. 모든 예술인들은 이 세상을 너그럽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부하게 하기 때문에 귀중하다."
그도 이상향을 꿈꾸었지만 인간의 한계상황을 절실히 깨닫고 '잠시 동안의 생명'을 잠시 동안이라도 살기 좋게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그 먼 나라'는 영원히 '저만치의 세계'로 남겨둔 채 유보되고 있다. 김소월도 그의 시 「산유화」에서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저만치'를 역설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영원한 과정의 연속이라고들 말한다.
원동우의 시 「이사」는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다. 빈궁한 살림을 꾸려가는 가장이 가솔을 이끌고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생활의 한 단면을 포착하여 시화한 작품이다.
남편의 성냥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는 얘기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갸륵한 내조를 의미한다. "손바닥만큼의 환한 불빛"은 소박한 행복의 바람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눈치 챘을 줄 안다.
시는 설명이 아니고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폐되어 있는 모호성 속에서 창작 의도나 주제의 의미를 캐내어야 한다.
'이사'는 소박한 행복의 추구
아버지와 아이와 부부와 동생들, 이 여러 식구가 한 방에서 비좁게 살아야 하는 극빈 현실이 너무도 힘들기 때문에 행여나 하고 복권 두 장을 사둔 가장의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하는 상상에서 지순한 시인의 소박한 행복 추구를 감지하게 된다.
신석정 시인이 희구한 '그 먼 나라'나 원동우 시인의 '소박한 행복'은 누구나 갖게 되는 희망의 세계요, 이상향이다.
우리들의 꿈, 우리들의 이상은 시대에 따라서 변개되어 왔다. 21세기에 당면한 우리들의 바람은 선진국이요, 통일된 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신석정 시인이 '그 먼 나라'라 명명했듯이 우리로서는 '선진국'이나 '통일조국'은 아직도 '먼 나라'일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벌어서 흥청망청 쓴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국민 개개인이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여 기본 질서가 잡혀 있는 나라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 같다.
투명성을 외면하는 기업이 세무조사를 두려워한다거나 폭력과 파괴를 다반사로 여기는 노동자들이 도로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진적인 모습에서는 선진국 진입이나 통일된 나라는 여전히 '먼 나라'일 수밖에 없다.
이는 스스로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생활 태도에서 기인된다 하겠다.
따라서 나라 살림을 하는 공직자나 세금을 내는 국민들 모두 자기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는 성숙된 생활태도가 요구된다. 세속적인 출세보다는 양심을 속이지 않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숙된 삶의 가치를 추구하게 될 때 '그 먼 나라'는 '선진국'이나 '통일된 나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나는 요즈음 길을 걷다가 누군가 피우던 담배꽁초를 길가에 '홱' 던지고 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꺼지지 않은 담뱃불을 발로 밟아서 비벼 끄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그 담뱃불을 버린 사람을 불러 세워서 담뱃불을 끄고 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 미안한 표정을 보이면서 자기가 버린 담뱃불을 끄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네가 뭔데 간섭하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아니꼽게 째려보는 이도 더러 있다.
우리는 지금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서거 100주년이 되도록 그 분의 유해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조국광복을 위해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搏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무덤조차 잃은 채 뼈마저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니, 그 많은 세월 동안 무관심의 늪에서 방기(放棄)해 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랜 세월 버려둔 채 돌보지 않은 것은 선지선열의 유해뿐이 아니다.
우리들이 망각한 숨은 그림 속에는 고층빌딩 밑에 버려져 있는 숭례문도 있다. 고층빌딩처럼 솟아 있는 고관대작들이 땅투기 등으로 사유재산을 불리는 동안에 사글셋방을 전전하다가 불타죽은 애국지사의 후예도 있다.
그 애국지사의 후손처럼 무관심 속에서 버려진 채 돌보지 않아 불타죽은 숭례문이 있다. 그러니 숭례문은 역사적인 타살인 동시에 자살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먼 나라'를 가까운 새 희망의 나라로 붙들어 챙기지 못한 채 영원한 '그 먼 나라'로 떠내려 보내는데 대한 꾸짖음, 뼈마저 돌아오지 못한 채 객지를 떠도는 애국지사들의 뼈 울음인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들이 내려 보는 가운데 숭례문이 불타면서 무너지는 소리는 고대광실에 고량진미로 호의호식하는 이들의 무관심 속에 깔려죽은 원혼들의 뼈다귀 삭아 내리는 소리, 무너져 내리는 탄식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이사
원동우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의 네 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 눈금을 만질 때 풀썩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지는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는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아 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들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사람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발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 참
장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너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의 환한 불빛
ㆍ출처 : 『삶의 향기』 6호
ㆍ날짜 : 2008-09-25
|
첫댓글 '그 먼 나라'는 어찌 보면 아주 가까운 나라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군요.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40년간 광야를 헤매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 마음 속에 도사린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지요. 응당 농부의 손에 쥐어져야 할 직불금이 농사도 짓지 않는 고위 관리나 도시에 거주하는 부자들 손아귀에 들어가는 현실이니 말이지요.
이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곳은 없다고 봅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이 세상이니까요. 다만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 위해서, 스승님께서 자주 인용하시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처럼, 시와 예술이 있는 거겠지요. 도덕과 법도 그런 맥락에서 필요한 거구요. 선진국일수록 법치가 잘 되는 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교묘히 이용하고 빠져나가는 권력자와 부자들이 많은 우리 나라는 확실히 아직 먼 나라인 것 같습니다.